사순절과 부활절에 교회는 성만찬을 거행한다. 성찬신학은 종교개혁 때부터 논쟁의 중심을 차지했다. '논쟁의 중심'이었다는 말은 그만큼 성찬이 얼마나 중요한지 말해 준다. 성찬에는 상징성과 심대한 의미가 있다. 하지만 교인들은 대체로 성찬을 매우 쉽게 생각하고 형식적으로 참여한다. 이는 신성모독이라고 할 수 있다.

미하일 벨커는 <성찬식에서 무엇이 일어나는가?>에서 오늘날 성찬식이 무미건조하고 빈곤하고 우울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마누엘 칸트 말을 빌려 성찬식이 "하나의 슬픈 행사"가 되었다고 말한다.

성찬은 과연 슬픈 행사인가?

베다니의 봄은 쌀쌀했다. 밤에 한데서 자고 낮에 시내로 들어오는 날이 며칠간 반복되었다. 예수님은 흥분한 군중을 가르치셨다. 유월절을 지키려고 예루살렘으로 온 순례자들이 늘어날수록 군중도 많아졌다. '해방의 날'을 기념하는 축제 때문이었다. 하나님이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을 해방시켜 주신 일을 기억하는 유월절이 그날이었다. 이제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켜 주실 때다. 예수님이 왕이 되어 새로운 시대를 열 것이다. 이것이 당시 유대인의 분위기였다.

유월절이 코앞에서 다가왔지만,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유월절 하루 전에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제자들은 가뜩 긴장하고 있었다. 이때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이 떡을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 너희를 위해 주는 것이다." 이어서 말씀하셨다. "너희는 이것을 마시라. 이 잔은 새 언약의 피다. 너희와 많은 사람의 용서하기 위해 흘린 피다." 제자들은 다시 한번 어리벙벙해졌다. 예수님이 유대인들이 피를 먹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시는가? 게다가 새 언약이라니. 죄를 용서한다고? 그렇다. 유월절은 그날을 가리키고 있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가족이나 다름없다. 가족이라면 모름지기 밥을 같이 먹어야 한다. 예수님은 이제부터 자신을 기념하여 유월절 식사를 하라고 하신다. 이제 성전에 갈 필요가 없다. 빌레몬의 집에서 이 식사를 했다. 고린도 교인들도 함께 먹었다. 성찬은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 다락방에 모인 예수님, 제자들과 우리를 연결해 준다. 이것은 상징 행위다. 상징이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놀라운 것이다. 성찬이 바로 상징이다.

톰 라이트는 역사적으로 성찬에 다섯 가지 명칭을 사용했다고 말한다.

첫째는 '떡을 떼기'이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한자리에 모여 떡을 떼었다. 단순히 함께 식사했다는 말이 아니다. 떡을 떼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을 의미한다. 둘째는 '나눔'이다. 헬라어로는 '코이노니아'. 그분과 더불어 거룩한 친교를 나눈다는 말이다. 셋째는 '감사의 식사'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신 일에 항상 감사드린다. '감사'는 헬라어로 '유카리스트'라고 부른다. 현재 가장 많이 쓰이는 용어가 '유카리스트'이다.

넷째는 '주님의 식사' 혹은 '주의 만찬'이다. 다섯째는 '이테 미사 에스트'(ite missa est)라는 라틴어다. 성찬이 끝난 후 집례자가 마지막에 하는 말이다. "자, 이제 끝났으니 세상으로 가십시오." 이 말에서 오늘날 미사가 유래했다. 예수님의 식사는 세상으로 파송한다는 사명 수여로 끝을 맺는다. 성찬에 담긴 다섯 가지 의미는 기억해 둘 만하다.

나는 여기서 어떠한 마음으로 성찬에 참여할 것인가를 중심에 놓고 말하려 한다. 바울은 성찬 전에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 것이라"(고전 11:27-28)고 말한다. 성찬 전에 자신을 점검하라는 뜻이다. 자신을 점검하라!

아미시(Amish)에서 사순절과 성찬식을 어떻게 보내는지 잠시 살펴보자. 사순절 기간이 끝나면 성찬 주일의 성찬식에서 절정에 이른다. 아미시는 보통 주일에도 3시간 이상 예배한다. 성찬 주일에는 8시간 동안 예배한다. 교인들은 성찬식이 끝나면 남자는 남자끼리 여자는 여자끼리 세족식을 한다.

목사는 사순절 기간에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고 원한을 버리라고 권고하는데, 용서하지 않은 사람들은 성찬식에 참여할 수 없다. 교인들 사이에 용서와 화해가 충분히 일어났다고 판단되지 않으면 교회 지도부는 몇 주에서 몇 달간 성찬식을 연기한다. 용서와 화해가 끝난 뒤 진행되는 성찬식은 주일 오전 8시부터 오후 4시까지다. 휴식 시간 없이 진행되고, 점심때는 교대로 몇 사람씩 옆방에서 식사한다. 그들은 장례식 때 부른 노래를 부른다.

"사람아 마지막을 생각하라

내 죽음을 생각하라 죽음은 항상 빨리 오는 법

오늘 힘이 넘쳐 건강한 사람도

아마도 내일이나 더 빨리 사라질 수 있다네"

본회퍼도 <신도의 공동생활>에서 죄의 고백은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그리스도 이름으로 행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인의 사귐에서 요청이 있을 때마다 아주 흔히 실천되는 일이라고 지적한다. 죄의 고백은 특히 거룩한 '만찬'에 함께 임하기 위한 준비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인의 사귐에 이바지한다.

하나님 그리고 사람들과 화해한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받기를 원한다. 아무도 형제와 화해하지 않고는 제단에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이 예수님의 명령이다. 이 명령은 예배할 때마다, 아니 기도할 때마다 언제나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성찬을 받으러 나아갈 때야말로 더욱 명령에 따라야 한다.

성찬 전날, 한 사귐을 속하는 형제들은 한자리에 모여 지난날의 잘못을 서로 고백해야 한다. 형제들끼리 마음을 여는 일을 꺼리고서는 주의 식탁에 나아갈 준비를 할 수 없다.

"형제들끼리 성찬에 참여함으로써 하나님의 은총을 받고 싶을진대 모든 노여움, 모든 분쟁, 모든 질투, 모든 악담, 할 수 없는 일을 형제들에게 한 일을 낱낱이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형제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을 죄의 고백이라고 할 수는 없다. 예수는 분명히 명령하신 것은 다만 고백하라는 것이다."

성찬을 준비하노라면, 자기를 불안하게 하고 괴롭히는 구체적인 죄, 하나님만 아시는 죄를 용서받았다고 든든하게 확신하고 싶은 소원이 사람들 마음에 일어난다. 이 같은 소원을 이루기 위해 형제들끼리 죄를 고백하고 서로 용서하라는 명령이 선포됐다. 자기 죄로 몹시 불안하고 괴롭게 될 때, 사죄를 확신하고 싶어질 때 예수님 이름으로 형제에게 죄를 고백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모독한다는 비난을 받은 일이 있는데, 그것은 곧 죄인을 용서해 주신 일 때문이었다. 바로 그런 일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에 힘입은 그리스도인 형제들 사이에 일어난다. 서로 다른 사람의 죄를 하나도 남김없이 삼위일체 가운데 예수님 이름으로 용서하는 것이다. 하늘에서는 천사들이 돌아온 죄인을 보고 기뻐한다. 이리하여 성찬을 받을 준비를 하는 시간에는 형제들 사이에 충고·격려·기도·두려움·기쁨으로 넘치게 된다.

"성찬을 받는 날은 그리스도인의 사귐에서 즐거움의 날이다. 마음으로 하나님과 그리고 형제와 화해함으로써 성도의 모임은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선물로 받는다. 그와 동시에 용서의 새 생명과 구원을 받는다. 하나님과 사람과의 새 사귐을 선물로 받는다. 거룩한 성찬의 사귐은 그리스도인의 사귐을 다 이루는 것이다. 성도의 모임에 속한 사람들은 주의 식탁에서 몸과 피로 하나가 되듯, 영원히 나누이지 않고 함께 있는 것이다. 이로써 사귐은 목적지에 다다르게 된다. 이로써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에서 누리는 기쁨은 절정에 다다르게 된다. 말씀 아래서 함께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성례전으로 완성된다."

결론적으로 성찬은 감사와 즐거움의 절정이 되어야 할 것이다. 성찬이 의미하는 하나님나라, 십자가와 부활을 진지하게 생각하면서, 기쁨으로 성찬에 참여하자.

박철수 / 목사, 한국복음주의연합 지도위원, 성서한국 이사, <축복의 혁명>·<하나님나라>·<두 개의 십자가>(대장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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