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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가 말하는 용서

프랑스 해체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용서하다>에서 "용서란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것이다"고 말한다. 만일 용서가 있다는 사실은 용서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점을 말한다. 용서는 오직 불가능을 행하기 위해서만 가능할 수 있다. 그는 유대-기독교적 영감을 주장했다. "윤리 너머의 윤리, 바로 거기가 용서의 장소"라고 했다.

예수님은 용서를 논할 때 가해자의 회개 같은 전제 조건을 절대화하지는 않으셨다. 우리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일상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크고 작은 잘못을 저지르면서 산다. 누군가 저지른 잘못에 피해자가 되었다면 그가 가해자에게 보일 수 있는 태도는 두 가지뿐이다. 하나는 복수이며, 또 하나는 용서다.

동일한 상황에서 사람들이 보이는 이 두 가지 반응은 정반대 결과로 나타난다. 복수는 가해자 잘못에 즉각 반응하면서 동일한 피해를 주겠다는 것이다. 피해자는 자신이 입은 피해를 근거로 이번에는 가해적 행위를 정당화한다. 결국, 복수는 잘못된 상황을 종식하지 못하고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를 끝없는 '복수의 사슬'로 얽어맨다. 피해자는 가해자가 되고, 가해자는 피해자가 되면서 복수의 반복이 이어진다. 복수가 반복되면 결국에는 두 사람 모두 잘못된 상황에서 자유롭게 될 기회를 상실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복수의 연쇄 반응은 매우 파괴적인 결과를 낳게 된다. 당사자는 물론 주변 사람들, 그들이 속한 공동체, 나아가 사회에 복수의 감정을 확산하여 관계를 파괴한다. 인간은 수많은 잘못을 저지를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복수를 선택한다면 끊임없이 새로운 존재로 다시 시작해야 하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근원적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탕자 비유의 의미

예수님은 용서가 선택이 아니라 인간의 의무라는 사실을 분명히 말씀하신다. 용서는 인간이 스스로 파괴성에서 벗어날 가능성으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도록 한다. 용서의 가능성 속에서, 인간은 자신이 불완전한 존재로서 언제나 잘못을 저지를 수 있는 존재임을 인정하게 된다. 이를 인정한 인간은 불완전하고 잘못을 저지를 수 있는 부정적 존재로 자기를 규정하는 데서 벗어나, 언제나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새로운 존재'로 재탄생하게 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탕자의 비유에는 아버지의 용서를 통해 새로운 삶으로 들어가는 한 아들이 등장한다. 아버지께 물려받을 유산을 미리 받아 집을 떠난 아들은 결국 돈을 탕진하고 거지꼴로 돌아온다. 집에 돌아온 아들을 맞이하는 아버지는 아들을 질책하거나 추궁하지 않는다. 두 팔 벌려 탕자를 환영하고 따스하게 맞으면서, 새로운 삶의 시작을 축하하는 잔치를 벌인다. 예수님은 탕자 이야기를 통해 용서가 어떻게 새로운 가능성의 문을 열게 하는지 보여 주신다. 탕자의 비유는 하나님의 무조건적·무제한적 사랑을 보여 주는 용서의 비유이다.

용서의 무한성은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의 자유를 위한 것이다. 복수의 사슬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으며, 장기적으로 보면 가해자와 피해자는 물론 주변 사람과의 모든 관계를 파괴한다. 예수님은 무한하게 용서하라는 메시지를 던지셨으나, 인간에게는 그러한 무한성을 향한 윤리가 항상 불가능하게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용서가 언제나 가능한 것이라면 사실상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자크 데리다 말처럼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에서 용서이다. 용서는 아브라함 종교라 불리는 유대교와 기독교의 근간을 이루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회개는 필요 없는가

피해자에게 용서할 마음이 있어야 하지만, 가해자 또한 회개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게 용서에서 가장 바람직한 모습일 것이다. 용서받기 위해 무엇보다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해야 한다. 잘못을 인정하는 것은 자신이 용서가 필요한 사람, 용서받아야 할 사람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자신은 용서가 필요 없는 완전한 사람이라고 선언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죄의 고백을 거부하는 것은 용서받기를 거부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죄를 지었다고 고백하는 것은 벌거벗은 채로 서서, 비난의 손가락으로 자신과 자신이 지은 죄를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범한 죄를 거의 본능적으로 부인하고 변명하려 한다. 그러나 죄를 고백하고 나면 놀라우리만큼 자유로워진다. 죄를 고백하고 나면 감출 것도 없게 되고 도망칠 일도 없게 된다.

하나님의 용서는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 하나님의 용서는 값없이 주어진다. 하지만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할 줄 모른다면 하나님의 용서를 받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하게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영화 '데드 맨 워킹' 마지막 장면이 생각난다.

살인을 당한 피해자의 부모는 살인자가 처형을 당하면 어떻게든 자신의 고통과 아픔이 사라질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는 전혀 별개였으며, 정당한 보복인데도 그들에게 만족감을 주지 못했다. 아무리 정당한 복수라 할지라도 우리를 진정으로 만족시킬 수 없다. 이미 파괴된 것을 결코 대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 6:14-15)."

용서에는 횟수 제한이 없다. 우리가 용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몇 번이나 용서했는지 세어서도 안 된다. 상대방이 뉘우치지 않아도 우리는 용서해야 한다. 용서는 무조건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님 말씀대로 원수도 용서하고 사랑해야 한다. 상대방이 여전히 원수로 있다 할지라도 말이다.

왜 우리는 이같이 용서해야 할까? 사랑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그렇게 용서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이 주기도문에 나오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를 용서해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해 주옵시고"에 담긴 뜻이다.

두 가지 용서에 대하여 앞서 살펴본 바 있다. 두 가지 용서는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용서를 깊이 깨달았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죄를 지은 자에게 언제나 용서할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렇게 하지 못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여 주는 좋은 사례가 있다.

하나님께 용서받았다면

이청준 작가가 쓴 중편소설 <벌레 이야기>를 영화화한 '밀양'이 있다. 소설과 영화 내용이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영화를 중심으로 생각해 보자. 이창동 감독의 '밀양'은 2007년 칸영화제에서 주인공 신애 역을 맡은 전도연이 여우주연상을 받은 영화다. 당시 가장 많은 사람이 본 영화이지만 기독교인으로서 보기에 부끄러운 내용을 담고 있다.

신애의 아들을 죽여 사형을 기다리며 감옥 신세를 지는 살인범이 있다. 신애는 주위 권면과 좋은 그리스도인으로 인정받기 위해 그를 용서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살인범이 자기 아들을 죽였으니 그를 면회하고 용서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그런데 정작 감옥에 면회를 가 보니 살인자는 신애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기는커녕 평안한 마음으로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신애는 절규한다. 영화에도 잘 표현돼 있는 <벌레 이야기> 한 대목을 살펴보자.

"그래요. 내가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은 그것이 싫어서보다는 이미 내가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게 된 때문이었어요. 그 사람은 이미 용서를 받고 있었어요. 나는 새삼스레 그를 용서할 수도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지요. 하지만 나보다 누가 먼저 용서합니까. 내가 그를 아직 용서하지 않았는데 어느 누가 나 먼저 그를 용서하느냔 말이에요. 그의 죄가 나밖에 누구에게서 먼저 용서될 수가 있어요? 그럴 권리는 주님에게도 있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주님께선 내게서 그걸 빼앗아 가 버리신 거예요. 나는 주님에게 그를 용서할 기회마저 빼앗기고 만 거란 말이에요. 내가 어떻게 다시 그를 용서합니까."

피해자가 용서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멋대로 그 사람을 용서하느냐고 울부짖는다. 그럴 수는 없다는 것이다. 신애는 믿음을 포기하고 자살까지 시도한다. 신애 마음에 상처가 얼마나 컸기에 이 지경에 이르렀을까. 우리가 하나님께 용서받았다면 사람에게도 용서를 빌어야 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모습 아닌가.

한국교회에는 이런 모습이 만연하다. 하나님께 용서받았으니 사람에게 용서받을 필요 없다는 생각은 두 가지 용서를 몰랐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오늘 한국교회에 이런 일이 없는지 생각해 보자. 살인범에게 직접 임한 그 역설적 현실 앞에서 신애는 오히려 절망하고 독자와 관객은 충격을 받는다.

영화 '밀양'은 교회를 찾는 사람들의 다양한 고통을 보여 준다. 이 영화는 자기가 속한 공동체에 이렇게 아픈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알게 한다. 이 영화는 다양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지만, 폭력적 전체주의를 밑에 깔고 있는 종교적 근본주의의 폭력도 비판하고 있다.

평화를 향한 새로운 가능성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

이 말씀은 우리가 예배하러 가다가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생각하거든 먼저 용서와 화해를 한 후에 예물을 드리라는 말씀이다. 만약 모든 교인이 이렇게 한다면 주일예배를 정상적으로 드릴 수 없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거의 모든 교회당이 텅 비지 않을까.

우리는 하나님께 받은 용서만 생각했지 서로 간 용서에는 무관심하지 않았던가. 설교에서 서로 간의 용서를 가르치는 목회자들은 거의 없는 현실이다. 형제를 용서하는 것에 너무 무관심한 게 아닐까. 분명한 하나님의 용서와 형제 간에 용서가 있을 때 교회 공동체 안에 평화와 사랑이 꽃피우지 않겠나.

죄 용서는 단지 개인의 죄책감이나 사람들 사이에 불화를 경감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용서란 하나님나라 표지이자 교회 공동체, 나아가 남북 평화, 세계 평화를 위한 새로운 가능성의 선결 조건이다. 이를 위해 그리스도인들이 용서를 통해 '평화를 만드는 사람'(peace maker)들이 되어야 마땅하지 않는가!

박철수 / 분당두레교회 원로목사, 한국복음주의교회연합 지도위원, 성서한국 이사, <축복의 혁명>·<하나님나라>·<상처 입은 치유자 반 고흐>·<용서>(대장간) 등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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