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 1. 2000년대 초, 신학교 학부 시절로 기억한다. 한 세미나에 감신대 장왕식 교수님이 오셔서 과정신학(Process theology)을 개론적으로 소개해 주셨다. 과정철학자 화이트 헤드(Alfred N. Whitehead)에게 영향을 받은 존 캅(John B. Cobb)의 과정신학에 대한 소개였는데, 강의실 안 학생들 사이에 긴장이 고조됐다. 이 흥분에는 긍정과 부정이 모두 포함돼 있었다. 새로운 존재론에 기초한 신론과 창조론의 재해석으로 현시대에 어울리는 새로운 신학의 가능성을 발견했다고 느낀 신학생들의 환호와, 전통적인 유일신론과 창조론이 무너지면서 혼란스러워하는 신학생들의 공격적인 질문이 오고 갔다. 외부 강사를 모셔 왔던 교수님은 강사를 보호하고자 난감한 질문들에 대신 답하면서 서둘러 세미나를 종료시켰다. 당시만큼 난상 토론을 펼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사건 2. 군대를 제대하고 바로 복학한 첫 학기, 현대철학 시간이었다. 니체 이후 포스트모던 철학자들을 간략하게 다루는 수업으로 당시 철학을 가르치셨던 한숭홍 교수님께서 담당하셨다. 총 4명의 학생이 참가했다. 좌파로 잘 알려진 권 아무개 후배와 공부를 열심히 했던 김 아무개 선배, 수업에 잘 참석하지 않고 방황했던 이 아무개 후배, 그리고 군기가 덜 빠진 필자가 돌아가면서 발제를 맡아 수업을 진행했다. 필자는 발제 때마다 무수한 질문을 받아 당혹스러워하며 수업 포기를 고민했지만, 마지막 발제로 큰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존재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상황의 변화 속에 반응하며 연속되는 과정으로서의 실체"라고 언급하자 교수님께서 어떤 책을 참고했냐며 칭찬하셨다. 바로 존 캅의 <과정신학>이었다.

사건 3. 기숙사 동기였던 친구가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해외 교포였던 친구는 영어와 라틴어에 익숙했다. 여간 부러웠던 게 아니다. 몇 해 전 드류대학교에서 공부를 마치고 자신의 책이 출판됐다며 보내왔다. <The Decolonial Abyss: Mysticism and Cosmopoliticis from the Ruins>. 서구 철학의 신비 사상이 자아와 타자를 어떻게 이해시키는지, 식민지 상황에서 어떻게 윤리-정치적인 힘을 발휘하는지를 연구한 결과물이었다. 지금은 캘리포니아에서 철학 교수로 있는데, 그의 스승이 캐서린 켈러였다.

<길 위의 신학 - 하나님의 지혜를 신비 가운데 분별하기> / 캐서린 켈러 지음 / 박일준 옮김 / 동연 펴냄 / 407쪽 / 1만 8000원
<길 위의 신학 - 하나님의 지혜를 신비 가운데 분별하기> / 캐서린 켈러 지음 / 박일준 옮김 / 동연 펴냄 / 407쪽 / 1만 8000원
책을 관통하는 3가지 키워드
△신비 △함께 △되어 감

오랜 시간 돌고 돌아 지금 필자 앞에 과정신학자 캐서린 켈러 책이 놓여 있다. 삶에서 잠깐잠깐 마주친 기억들이 파편처럼 흩어져 있다가 하나의 실타래처럼 꿰어졌다. 모든 존재는 과정의 연속이라는 과정신학자들 주장처럼 이후에 또 다른 사건들이 어떻게 연결될지 궁금하다.

<길 위의 신학 On the Mystery>은 저자가 드류에서 오랫동안 구성신학을 가르치면서 체계화한 사상의 총화이다. 신론·기독론·성령론·교회론 등으로 구분되는 조직신학 하위 주제들을 전통적 방식에 의존하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설명한다. 저자는 이 주제들을 관계와 과정, 아가페적 개방과 존재의 흐름으로 엮어 독특한 사유 체계를 정립했다.

진리에 대한 끊임없는 추구는 완성을 향하기보다 질문하는 여정 자체에 의미가 있다. <길 위의 신학>은 저마다의 길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이 세계에 거대한 우주적 연대가 형성되어 있음을 깨닫게 한다.

신비, 깊고 넓으신 하나님의 풍성함

신학神/學(theos/logos)은 하나님에 관한 학문이다. 역사와 사건 속에서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며 형성돼 온 하나님 이해는 추론과 언어적 합리성으로만 접근할 수 없다. 무엇을 안다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앎의 대상을 박제화해 더 이상 앎을 추구할 수 없게 막아 버린다. 그 대상은 왜곡되고 파편화되어 상황과 관계성을 잃어버린 채 허공을 맴도는 무엇이 된다. 특정 교리는 진리라고 선포되는 순간, 절대적인 것이 되며 신앙은 전체주의화된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모든 것을 상대화하려는 시도는 하나님을 이것도 저것도 아닌 상황과 해석자에 예속시킨다. 이것일 수도 있고 저것일 수도 있다는 모호한 태도는 하나님을 해체하여 허무한 것이 되게 만든다.

진리를 향한 길은 절대주의도 상대주의도 아닌 제3의 방식, 진리-과정(truth-process)에 놓여 있다. 완성이 아닌 추구 그 자체의 과정이다.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하나님은 무엇이다'고 생각해 왔으나, 부정신학 전통에서는 '하나님은 무엇이 아니다'고 접근하면서 하나님의 무한한 신비로움을 경외해 왔다. 진리를 설명하기보다 오히려 침묵하면서 신비 안에서 하나님을 분별하는 길이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것임을 간파한 것이다. 신비는 하나님의 존재와 섭리의 방식이며, 인간이 하나님을 이해하며 경험하는 통로이기도 하다.

진리는 고정된 어떤 형태가 아니다. 체계화한 이론의 총합이 아니다. 진리는 신비의 흐름과 상호 과정에서 발견되고 깨달아 가는 추구이다. 신비의 앎은 더불어 아는 것(knowing-with)이고 함께 아는 것(knowing-together)이다. 켈러는 진리가 확실성과 관계되는 것이 아니며, 함께/앎(con/sciousness)과 관계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기독교는 절대적인 진리를 추구해 오면서 자신들의 정통적인 신조에 동조하지 않는 이들을 기독교적 쉽볼렛(Christian shibboleth)으로 구분하며 처형해 왔다. 그러나 진리는 신비의 과정이기에 타자를 향해 열려 있으며, 비폭력적이고 때로는 열정적으로 타자와 함께한다. 진리-과정은 신비 안에서 열린 상호 활동성으로 함께하는 관계에서 작동되기 때문이다.

함께-고난당하는-열정(com/passion)

켈러의 과정신학이 잘 드러나는 부분은 바로 창조론이다. 창세기 1장의 혼돈(chaos)이 무로 이해하기보다 '어떤-것으로-말할-수-없는-어떤 것들', 즉 '심연'(테홈, tehom)으로 설명한다. 그러면서 새롭게 창발되는 우주의 유동성을 '계속되는 창조', 되어 감/창생(becoming/genesis)으로 본다. 심연의 물질성은 흙에 생기를 불어넣으신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처럼, 육을 입은 영 만유-성령처럼, 모든 것 안에 발현하는 하나님과 상호적 창조성으로 연결된다. 이처럼 하나님의 존재 양식과 창조 섭리에서 신비의 상호성은 그대로 유지된다.

서구 전통에서 이해되어 온 전능하신 가부장적인 성부의 이미지는 벗겨지고, 피조 세계에 응답하며 특히 인간에 응답하시는 연약한 하나님을 마주하게 된다. 응답하시는 하나님은 인간을 통제하고 조정하는 분이 아니다. 인간에게 자신을 내어 주시며 그대로 두시는(letting-be) 사랑의 되어 감 공간 안에 머무신다. 하나님의 창조적 사랑은 그대로 되어 감의 과정으로, 우리와 함께 고난당하는 열정으로 표현된다. 아가페적 에로스는 생명을 향한 풍성함 속에서 육화되기를 추구하며, 모든 피조물을 그 방식대로 부르신다. 그들 안에서 함께 느끼고 흘러가는 관계 안에서 은혜의 새로운 신비로 서로를 초대한다.

아가페적 에로스는 자아와 타자들의 공동 작용을 요청하며, 사랑을 확장하여 모든 생명과 연대하게 한다. 아가페와 에로스는 상반되지 않으며 창조적 사랑으로 연결되어 타자와 함께하는 열정이 된다. 아가페는 쾌락을 포기하지 않고 쾌락을 확장하여 우리를 사랑이 되게 한다. 흥미롭게도 켈러는 이 아가페가 타자를 위한 것이기에 공동체의 정의로 나아가며, 정의로운 사랑은 우리의 공동-창조적 되어 감(co-creative becoming)의 아름다움이 된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우리의 희망이다. 정의를 향한 사랑의 정치는 공적이며 공동체적이고 하나의 운동으로 일관성을 유지하게 한다.

되어 감, 예수와 드러나는 진리

되어 감의 신학은 역사적 예수에 집중하지 않는다. 초점은 예수의 궁극적인 관심이다. 인간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 사이 간극에 관심을 두며, 예수를 그리스도 되게 하신 그사이 공간에 질문을 던진다. 그리스도 없는 예수는 평범한 한 인간의 실존적 삶을 통해 신앙의 본질을 추구하려 했고, 예수 없는 그리스도는 신앙의 과대포장으로 가공된 예수를 신봉하게 했다. 켈러는 예수의 누구 되심에 집중하기보다 그가 지향한 삶에 주목한다.

바실레이아, 예수가 사랑으로 살아 내려 했던 세상은 우리 모두에게 열려 있다. 우리가 그분의 대속과 새로운 창조에 참여할 때 진리는 드러나게 되어 있다. 드러남(revealing)과 감추임(concealing)은 예수의 비유 안에 있으며, 창세의 운동과 현재의 리듬 안에서도 작동한다. 하나님의 운동은 신성한 에로스 속에서 창조와 구원을 오고 가며 작동한다. 어떤 결론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열린 사이-작용으로 과정 중에 신비로 우리를 인도한다.

이러한 하나님나라의 가능성은 은혜의 신비에 놓여 있다. 예수의 시공간에서 로고스(logos)가 우리의 되어 감(our becoming)인 것처럼 과정신학은 새로운 기회와 참여를 모두에게 열어 놓고 초대한다. 켈러는 그런 상호 의존성이 행성적 종말에서 인간을 구원하는 수단이 되리라고 전망한다. 예수는 무한한 되어 감, 즉 과정 속에 있으며 우리는 무한한 되어 감의 비유들이 된다.

되어 감의 길은 우리 자신들뿐 아니라 타자들을 위해 함께 고난당하는 열정이라는 창조적 형식을 만들어 낸다. 성령은 함께 앎의 길로 우리를 인도하며, 쏟아-붓기의 모습으로 모든 이에게 찾아와 하나로 연결한다. 영의 공동체는 진리를 함께 발견하고 사랑하며 또 다른 타자들을 포용하는 함께하는 열정으로 살게 한다.

잘못된 질문들과 또 다른 여정

켈러의 글은 끝없는 미지의 세계로 우리를 초청한다. 답을 찾는 신앙생활의 허무함을 보게 하는 동시에 처음부터 우리가 던지는 질문이 잘못됐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하나님은 누구신가? 복음이 무엇인가? 교회는 어떤 곳인가? 구원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정통 교리 안에 갇혀 있는 답답한 시선의 방향을 또 다른 곳으로 인도한다. 무엇을 안다고 생각했던 인간의 오만을 꾸짖고, 알 수 없는 신비의 진리에 우리 가슴을 열어젖히고 그곳에 머물게 한다.

앎과 모름을 넘어서 함께함과 사랑함이 진리에 이르는 것이고, 종교라는 틀을 깨고 본래 방향을 향해 걸어가도록 용기를 더해 준다. 무기력한 인간의 존재를 계속되는 창조과 구원 사역에 참여시키며 우리의 연약함과 가능성을 동시에 보게 한다.

물론 과정신학을 향한 비판은 여전히 존재한다. 이는 어쩌면 과정신학이 한국 상황에서 2000년대 초에 잠깐 주목받고 금방 사라져 버린 이유이기도 하다. 새로운 신학의 가능성을 의심하는 비판적 토양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답답한 현실을 만들어 냈는지 모른다. 질문하기보다 정답을 적어 주고 암송하게 했고, 화해하고 포용하기보다 적과 아군으로 구분짓고 배제하는 게 우리 모습이 아니었는지.

함께하는 아가페적 열정은 일상 안에서 예수로 살아가도록 안내할 뿐 아니라 새로운 세상으로 함께 걷도록 우리를 이끌 것이다. 부디 새로운 신학적 상상력들이 사라지지 않기를.

김승환 / 장신대에서 신학을 전공하고 동 대학원에서 신학 석사와 박사를 마쳤다. 새물결아카데미에서 공공신학을 강의해 왔으며, 최근에는 인문학&신학연구소 에라스무스 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공공신학, 급진정통주의, 도시신학, 공동체주의 등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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