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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 신앙과 진보 신앙을 구분할 때 발생하는 문제점들
[길 위의 신학] 이분법의 시대, 제삼의 길 모색하다
  • 박일준 (newsnjoy@newsnjoy.or.kr)
  • 승인 2019.04.22 15:32

신학은 인간의 작업이다

신학은 진공상태로 포장되어, 영원한 하늘로부터 이곳으로 내려와 계시되는 말씀이 아니다. 때로 많은 사람이 말씀과 신학을 혼동한다. 만일 신학이 말씀이라면, 신학적으로 더 이상 할 말은 없을 것이다. 말씀이 스스로 우리에게 말씀을 전달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신학은 인간의 작업이다. 그렇기에 인간적 능력에 대한 검증과 비판이 필요하다.

말씀은 인간의 작업이 아니다. 영원한 계시의 말씀을 인간의 유한한 지각과 이성이 받았기 때문에, 즉 무한의 계시를 유한한 인간이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말씀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우리의 유한한 생각의 한계 내에서 해석한다. 그렇기에 신학은 늘 불완전하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신학은 계속적으로 자신의 오류들을—그 오류들이 부족한 자신의 이성 때문에 생기든, 달라진 삶의 환경 때문에 생기든, 너무나 빨리 발전하는 기술들 때문에 생기든—수정하고 바꿀 용기를 가져야 한다. 자신의 담론과 논리를 계속적으로 수정해 나갈 용기가 신학을 가능하게 한다.

신학적 오류들의 한 종류는 신학자가 자신이 처한 시대 상황을 잘못 판단하고, 문제의식을 잘못 갖는 데서 발생한다. 문제의식이 잘못됐으니, 대안이나 해답도 잘못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오늘 우리 신학이 처한 문제는 무엇인가. 캐서린 켈러는 환승 공항에서 보수 신학자와의 만남을 상징적으로 묘사한다. 차라리 '같은'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그보다는 나은 만남이었을 것이다.

역설적으로 같은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기에 절대로 말을 섞거나 눈을 마주칠 수 없는 상황은 우리 시대 신학과 신학자들의 문제를 고스란히 노출한다. 차라리 비신앙인이나 다른 신앙인들과는 아무런 사심 없이 대화를 나누고 교환할 수 있어도, 오히려 같은 기독교 신앙을 공유하지만 신학 노선이 다른 이들과는 말을 나누기는커녕 인사조차 나누기 애매하고 어려운 상황 말이다.

'종교적 다원화의 사회'에서 소위 '종교다원주의적 태도'는 이단시하면서, 오히려 그에 대한 생각이 다른 같은 기독교인들은 다른 종교인들보다 더 먼 거리감을 갖는 이 상황은 우리 신학이 현실의 삶에서 처한 매우 역설적인 적나라한 상황이다. 이 '적과 아군의 이분법'은 신앙인이건 신학자건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고스란히 남아 있는 심각한 문제다. 단지 적과 아군을 나누는 이분법의 문제는 아니다. 오히려 그 적과 아군을 나누는 방법이 모순되거나 공정하지 않기 때문에 문제다.

적과 아군을 구별하려는 인지적 습벽은 단지 옹졸하거나 편협한 태도에서만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 유기체는 언제나 환경이라는 상황 속에 살아간다. 유기체가 외부 환경으로부터 도래하는 모든 신호를 그때마다 확인해서 인지적으로 처리하는 것은 에너지 낭비일 뿐만 아니라, 생존이라는 궁극적 목적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대상이나 물체를 만날 때마다 한 번도 마주친 적 없는 것처럼 신중하게 조사하고 검토하려는 태도가 생존의 위험을 줄여 줄 것 같지만, 사실은 오히려 위험도를 가중한다. 포식자들이 우글거리는 환경에서는 정보의 신속한 처리가 생명을 좌우할 만큼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고등 유기체는 일단 식별된 정보를 저장해 신속하게 처리할 수 있는 인지적 알고리즘을 만들어 저장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고, 적과 아군의 이분법은 바로 그러한 생물학적 목적으로 인간 유기체의 인지능력을 구성하는 알고리즘의 일부가 되었다. 그래서 '적'으로 식별된 사람과 '아군'으로 식별된 사람에 대해 우리의 감정이 다르게 반응한다. 그 감정들은 인간 유기체의 행위를 촉발하고 신속하게 처리하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이는 생물 유기체로서의 인간에게 내장된 한계이면서, 또한 장점일 수도 있다. 적과 아군의 식별 알고리즘은 많은 경우 후천적 학습을 통해 형성되며, 이는 곧 우리가 '적과 아군의 경계'를 새롭게 구성할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 '적과 아군의 이분법'과 같은 알고리즘 작동이 매우 심각한 오류를 야기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할 때, 우리는 혹은 유기체들은 심각한 문제에 직면한다. 사실 '이분법'(dichotomy) 문제는 전혀 새로운 문제가 아니다. 이미 20세기 초엽에 철학자 화이트헤드는 이 이분법 문제를 '잘못 놓여진 구체성의 오류'(the fallacy of misplaced concreteness)를 통해 밝혀 주고 있었다. 우리가 살아가는 구체적 삶은 추상적 명제로 환원되지 않지만,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은 추상적 개념과 명제를 통하지 않고는 세계와 삶을 파악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한다. 모든 것을 추상적 언어를 통해 파악하다 보니, 이제 추상이 구체적인 것으로 혼동되는 것이다.

'적'과 '아군'은 생래적 기반을 갖고 있지만, 많은 경우 우리의 언어적 구조물로부터 구성된 것이다. 그 경계가 후천적 학습을 통해 형성된다는 것은 곧 그 경계를 우리가 학습을 통해 바꿀 수도 있다는 의미다. 그 학습의 주요 수단은 언제나 인간에게는 언어이다. 말하자면, '적'이라는 인식은 언어적 학습을 통해 구성된 추상이라는 말이다. 이런 말이 있다. 사람은 언어를 만들고, 언어는 사람을 형성한다. 그렇다. 언어는 근본적으로 실재로부터 추상된(abstract from) 가상의 구조물이다. 언어적 동물인 인간은 이 추상적 언어를 통해 다른 모든 고등 유기체보다 많은 정보의 교류와 학습이 가능했고, 부족한 육체적 능력들을 보완했으며, 생존경쟁에서 다른 모든 고등 유기체를 능가해 왔다.

따라서 우리가 가상의 구조물인 언어를 사용해 삶을 창출하고, 소통하며 살아가는 것 자체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이 추상을 구체적 삶으로 혼동할 때 일어난다. 매우 추상적인 철학적 진술인 듯한 이 진단은 우리의 구체적 삶의 현장에서 매순간 일어난다. 예를 들어, 기독교인은 소위 '보수'와 '진보'로 나뉜다. 이 나뉨은 타인들에 의한 구별이기도 하지만, 우리 스스로 자신의 입장과 관점을 어느 한쪽에 '동일시'하고, 그 추상적 입장과 논리에 맞춰 삶을 구성해 나아간 결과이기도 하다. 자기 입장대로 삶을 구성해 나아가는 것이 문제가 될 이유가 없지만, 문제는 그렇게 구성된 정치적 입장의 논리에 따라 나와 입장이 다른 사람들을 범주화해서 '꼴통'·'종북'·'수구'·'꼰대'로 만드는 데 있다.

'절대'와 '방탕'의 이분법

이러한 일들이 정치적 주제에서 벌어지는 일 같지만, 사실 신앙의 영역에서 이 문제는 더한층 심각하다. 옛날 1980년대에 정치적 의견이 다르면 상종하지 말라는 실천적 지혜가 회람되던 시절이 있었다. 아버지와 아들이 정치적 입장이 다르면 가족 모임에서 절대로 정치를 화젯거리로 삼으면 안 된다. 모처럼 화목해야 할 가족 간 모임을 정치적 갈등과 분열의 모임으로 변질시키기 때문이다. 이 정치적 입장의 이원화보다 훨씬 심각한 것은 신앙적 입장의 이분법이다. 보수 신앙과 진보 신앙의 이분법.

문제는 이 이분법이 '이분화한 신앙' 모습을 보여 주는 데 있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신앙의 차이보다는 우리 시대 정치 진영 분열을 그대로 반영해서, 다른 입장의 신앙들 간에 분열과 갈등을 조장하고 촉진한다는 데 있다. 말하자면, 정치적 입장 차이를 신앙의 이름으로 정당화하고 있는 것이다. 즉 신앙이 우리의 정치의식에 비판적 대화자가 되어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속적 정치의식이 신앙이라는 꼭두각시를 끌어들여, 하나님 이름으로 각자의 정치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는 모습이 오늘날 신앙 이분법의 적나라한 진실이다.

캐서린 켈러는 이를 '절대'(the absolute)와 '방탕'(the dissolute)의 이분법으로 재치 있게 표현한다. 영어에서 이 두 단어는 서로 절묘하게 켈러가 표현하려는 이분법적 구조를 잘 포착하지만, 번역어 '절대'와 '방탕'은 그 이분법을 다소 엉성하게 포착하는 측면이 있다. 그럼에도 켈러의 문제의식을 드러내기에는 문제가 없어 보인다. 절대(the absolute)는 절대적인 것이 존재한다고 믿고, 자신들이 믿는 바가 그 절대를 그대로 재현한다고 믿는 이들을 말한다. 어원적으로 절대, 즉 absolute는 'ab'(~에서) + solute(풀다)에서 기원한다. 그 어떤 것에도 매이지 않는 무제약적인 것, 그래서 완전무결한 것 그렇기에 순수한 것을 의미한다. 즉 절대란 어떤 것에도 매임 없이 무조건적 절대성을 갖는다는 말이다.

이 입장의 장점은 어떤 사태에 직면했을 때, 확고한 판단 기준을 제시해 준다는 것이다. 우리 삶 속에 사실 애매모호한 문제가 너무 많고, 때로 어떤 일은 전혀 방향을 종잡을 수 없다. 이러한 고민은 사실 성서 안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예를 들어, 욥의 고난의 경우, 도대체 무엇을 가지고 아무 잘못도 없이 닥쳐오는 재난과 고통 앞에서 그 이유를 납득하게 만들 수 있겠는가.

우리는 정녕 우리가 알고 있는 절대가 확고부동하게 영원한 절대라는 것을 의심의 여지 없이 확신할 수 있는가. 그러한 확신이 없다면, 우리 기준을 가지고 타인들의 언행을 판단하기는 어려우리라. 우리 인간 내면에 잠재된 수많은 오해, 착각, 편견, 빈약한 지식, 빈곤한 실천 등을 고려할 때, 인간이 절대를 그대로 받아 재현할 수 있다는 발상은 위험해 보인다. 하지만 우리의 부족한 견해와 의견들이 어떤 절대적인 확고한 근거나 토대에 기초해 있지 않다면, 무엇을 의지해 나아갈 것인가. 바로 여기에 '보수'라는 입장의 미덕과 한계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오늘날 당면하는 많은 사안의 경우, 우리가 그 문제가 무엇을 의미하고 함축하는지를 파악하기도 전에 결정을 요구하는 일이 많다. 스마트폰이 한 예다. 우리 삶에 스마트폰을 도입했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측도 하기 전에 이미 우리는 스마트폰의 시대에 접어들었다. 모두가 스마트폰을 사용하게 된 이후에야 그 문제점들을 생각하고 고치고 대처할 방법들을 모색한다. 그렇게 우리는 사후에야 대책을 모색하는 경우가 많으며, 따라서 '뒷북'이라는 말은, 비판적이고 까칠한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도 많지만, 그럼에도 우리 대부분의 모습이다. 인공지능 시대에도 아마 우리의 뒷북 대처는 바뀌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모든 문제를 미리 예측하고 대비해서 완벽하게 오류 없는 미래를 꿈꾸는 발상 자체가 무척 위험하다. 그것은 곧 모든 상황을 특정 권력이 통제하는 사회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통제하는 사회에서는 문제가 인정되지 않는다. 중국 사회가 대체로 그렇다. 문제인 것을 느끼고 심각성에 공감하면서도, 절대로 문제를 인정하지 않는다. 문제를 인정한다는 것은 곧 자신들의 통제 방식에 결함이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기 때문이고, 이는 권력의 절대적 통제력의 토대를 뒤흔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민주주의 사회는 시끄럽고 문제로 가득 차 있고, 의견들과 대안들이 서로 비판하면서 때로 갈등하고 때로 야단법석을 부린다. 이것이 분열의 정치학으로 발전하지 않는 한, 소란스러움과 의견, 입장 차이는 민주 사회에서 당연한 것이다.

이러한 사회 상황하에 '보수'라는 입장은 섣불리 예전 세대의 지혜를 함부로 폐기 처분하지 않는 장점이 있다. 새로운 모든 것이 우리 모두에게 선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특별히 포스트휴먼과 인공지능 사회가 도래하는 미래적 현실에서 '보수적 입장'과 '신앙적 보수'는 중요한 미덕을 가질 수 있다. 단, 이 '보수의 입장과 관점'이 절대적으로 확고부동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시대와 상황을 보는 관점에 달려 있는 언어적 구조물이고, 그래서 언젠가는 수정되거나 변혁돼야 할 입장임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말이다.

'방탕'(the dissolute)은 절대의 입장에 대한 정반대를 잘 포착한다. '방종한', '타락한', 혹은 '방탕한'이라는 뜻으로 번역되는 dissolute는 dis(떨어져) + solvere(느슨하다, 풀어지다)로 구성되어 있다. 무언가로부터 느슨하게 풀어진다는 뜻이다. 즉 아무런 매임이 없다는 뜻이다. 이런 맥락에서 dissolute는 absolute와 유사하게 보인다. 하지만 'ab-'이라는 접두어는 확고한 순수성을 주장하는 반면, 접두어 'dis-'는 느슨히 풀어져 떨어져 나가는 것을 일컫는다는 점에서 정반대 측면을 가리킨다. 따라서 '방탕'은 아무런 기준 없이 다 풀어헤쳐진 상태, 즉 방종의 상태를 의미한다.

아울러 'dissolute'는 성적으로 타락하고 방종한 것을 가리키기도 한다. 대부분의 사회에서 성적 방종이 도덕적으로 매우 위험하고, 그래서 매우 통제돼야 했음을 기억하는 것도 중요하다. 가부장제 권력은 도덕적 성적 방종의 측면을 통제할 때, 매우 절묘한 전략을 선택해 왔다. 잘못을 저지르는 양쪽 당사자를 동등하게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가부장적 권력 구조에서 약자인 여성을 더욱 엄히 처벌하면서 경각심을 조장하고, 남성들의 방종에는 매우 관대한 경고만을 내려 왔다. 이를 통해 권력의 '은혜'(mercy)를 강조하고, 권력에 충성해야 할 이유를 생물학적 남성들에게 제공한 것이다. '방탕'이라는 말은 이러한 시대 배경을 잘 담지한다. 바로 그러한 가부장적 권력 구조의 위선을 폭로하고 까발리기 위해 일부러 방탕이라는 입장을 취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켈러의 '방종'(the dissolute)은 이상과 같은 맥락에서 우리 시대 '상대주의자들' 혹은 자칭 진보의 세속주의자들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리처드 도킨스나 크리스토퍼 히친스 같은 과학적 환원론자들을 가리키기도 한다. 이 환원론적 입장에 이르면, 사실 방종주의자들은 절대주의자들의 입장을 거꾸로 물구나무 세워 놓은 것에 불과하다. 절대주의자들이 인간의 모든 판단과 생각과 가치 기준을 물리치고, 초월적 절대의 자리를 가상적으로 전제하고, 스스로 그 입장의 대변자가 됐다면, 방종주의자들은 초월이 아니라 '다름 아닌 (자신이 믿는 인간적 혹은 과학적 인) 바로 그것'(nothing-but)에 상대주의적 입장의 근거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초월적 절대가 사실은 인간 욕망의 투사이거나 권력의 정당성을 위한 근거라는 폭로가 이어지고 난 후, 우리는 인간이란 '성적 욕망', '이익 추구', '사회적 계급 간의 권력투쟁', '유전자' 등 인간이란 다름 아닌 바로 이것에 불과하다는 식의 일방적 결론을 밀어붙이는 '상대주의적 세속적 절대주의자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 않은가. 이 세속적 상대주의의 절대주의적 입장을 가장 극명하게 표현하는 것이 과학적 환원론 혹은 '과학주의'(scienticism)의 입장이다.

우리의 추론과 판단이 과학적 근거를 통해 차근차근 진척돼 나가야 한다는 기본 입장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결국 모든 판단의 궁극적 근거가 과학이어야만 한다는 '과학주의'의 입장은, 곧 과학적 연구를 통해 밝혀진 결과로 모든 판단을 환원한다는 점에서 '과학적 환원론'에 불과하다. 바로 이것이 오늘날 소위 '진보주의자를 자처하는 이들의 입장 속에 은폐된 절대주의'다. 우리 시대의 얼마나 많은 지적 진보주의자가 그 안에 지적 맹신의 절대주의를 은폐하고 있는가. 결국 문제는 바로 '다름 아닌 바로 이것'이라는 결론을 가지고, 개인의 인생과 공동체의 협력과 국가의 통치에 자신의 외눈박이 관점을 적용해,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오히려 문제를 증폭하고 창출하는 원인이 되고 있는 일이 허다하지 않은가.

그래서 켈러는 절대와 방탕의 이분법이 작동하는 전체 구도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한다. 보수와 진보, 둘 다 우리의 대안이 아니다. 각자의 입장에 절대적으로 확고한 한에서 말이다. 이 보수와 진보의 이분법이 '종교적 절대주의'와 '세속적 상대주의'의 양극화한 입장으로 퍼져 가는 것도 매우 우려스러운 일이다. 하나님 이름으로 자신의 이기심과 권력 욕구를 남용하는 일부 종교 지도자들의 개탄스러운 행태가 마치 '보수' 혹은 '종교적 보수주의' 전체를 대변하는 것으로 잘못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명성교회 세습과 연관해서, 소위 보수주의자들은 세속주의자들처럼 자기 입장의 근거를 상황에 맞춰 견강부회식으로 억지로 짜 맞추어 낸다. 무슨 근거로 교회 담임목사직 세습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그게 교회 공동체의 뜻이란다. 그리고 이 입장은 보수주의가 아니라, 정확히 세속적 상대주의자들의 입장에 해당한다. 하나님의 절대 기준이 아니라, 인간 공동체의 상대적 입장에 자신의 논리의 근거를 두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시대 보수주의자들은 사이비 보수주의자들에 불과하다. 그 입장이 정말로 절대적인 절대에 근거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켜야 할 보수는 이런 식의 보수가 결코 아니다. 무엇을 지켜서 다음 세대에 물려주어야 하고, 지켜야 할 것을 판단하는 가치 기준은 무엇인가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을 안고 있는 것이 바로 진정한 보수이다. 이런 맥락에서 일제강점기 권력에 대항해 끝까지 투쟁한 의병장들이 거의 대부분 위정척사파로부터 사상적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 교회 세습에 반대해 끝까지 저항하고 있는 신앙인들 대부분이 보수적인 입장의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은 매우 상징적이다. 지켜야 할 가치가 있기 때문에 투쟁할 근거가 있는 것이다.

이런 교묘한 견강부회식 입장의 정당화는 세속적 상대주의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의 도덕과 가치를 절대적으로 확고하게 토대해 줄 근거가 없다면서, 그 상대주의적 입장의 근거는 결국 인간이란, 예를 들어, 성(sexuality)적 욕망에 불과하다는 주장들처럼, 특정한 과학 혹은 이론의 이름으로 포장된 환원론적 설명에 절대적 토대를 부여한다는 점에서 '세속적 상대주의'는 '사이비 과학 절대주의'에 가깝다. 조현병 환자가 사람들을 해치고 자해하는 난동이 나면, 우리는 과학적 전문가를 찾아가 인터뷰를 하며, 이 사태를 어떻게 볼 것이며, 어떻게 대책을 마련해야 하는지를 묻는다. 정신분석가나 심리학자가 과연 대답을 알고 있을까.

조현병 발병과 연관해 어떤 일말의 단서들을 합리적으로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전문가들이 그 조현병 환자가 처한 사회적 삶의 맥락, 국가의 정치 경제적 질서와의 연관성, 24시간 네트워크에 접속하며 일과 노동의 구별 없이 신경이 혹사당하고 있는 현실들에 대한 포괄적 이해를 토대로 해답이나 대안을 추구하겠느냐는 물음이다. 물론 그 어느 누구도 자기 말이 정답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모든 말의 근거가 과학적 이론의 어떤 틀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대책은 결국 환원론적 설명의 한계에 갇혀 버린다.

켈러는 이들을 "세속적 근본주의자들"이라고 재치 있게 표현한다. 근본주의자들의 이분법이 특별히 도킨스나 해리스의 '종교적 절대주의자들'를 향한 비판 속에 그대로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종교'라는 이름의 우산 아래 얼마나 다양하고 다른 입장들과 신학들이 담겨 있는지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저 자신의 환원론적 견해를 정당화하고 설명하는 데 종교를 박제해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

제삼의 길

그래서 켈러는 제삼의 길을 주장한다. 이도 저도 아닌 무색무취 온건주의로의 후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문제들은 전례 없는 길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문제의식으로부터 출발한다. 사실 매 시대 문명은 이전 시대가 당면한 적이 없는 새로운 문제들을 놓고 혼란스러워하다, 대안을 모색하며 앞으로 나아왔다. 이는 우리 시대도 마찬가지다. '우머니스트' 신학자 둘로레스 윌리암스는 흑인 여성들이 "전혀 길이 없는 곳"(no way)에서 하나님의 도움으로 길을 만들어 나왔다고 증언한다. 페미니즘의 여성 개념 속에 흑인 여성들이 처한 이중 삼중의 억압적 현실이 전혀 반영돼 있지 않았고, 여성을 위한 여성에 의한 여성의 운동 속에서 역설적으로 흑인 여성들은 또 다른, 더 서러운 소외를 경험하고 있었던 것이다.

켈러는 칼 바르트의 '길 위의 신학'(theologia viatorum, theology on the way)을 인용한다. 아브라함의 집에서 노예처럼 지내던 하갈과 이스마엘은 전혀 길이 없는 사막 한복판으로 내쫓긴다. 그 길이 없는 곳에서 하갈은 '하나님이 나를 지켜보신다'는 체험을 했고, 이후 하갈과 이스마엘은 전례 없는 길을, 즉 길 없는 곳에서 길을 만들어 나가면서 큰 민족의 어머니와 조상이 되었다. 하갈과 이스마엘 이야기는 결코 사라와 이삭의 축복 이야기를 빛내기 위한 종속된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제삼의 길, 즉 길 위의 신학은 내가 믿는 신학이 절대적으로 확고한 것이라는 생각에 의구심을 갖지만, 그렇다고 상대주의처럼 상황에 따라 자기 입장을 줏대 없이 아무렇게나 바꿀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영국이나 유럽 대륙의 철학과 미국의 철학이 가장 큰 차이점을 갖는 부분은 바로 '가류주의'(fallibilism)이다. 신학자이자 종교철학자인 보스턴대학교 신학부의 웨슬리 와일드만은 신학을 포함한 인문학적 탐구가 자기 입장이 틀릴 수도 있다는 '오류 가능성'을 탐구의 근본 전제로 삼아야 한다고 역설한 바 있다.

길 위의 신학은 우리의 신학적 주장이 절대 불변의 확고한 토대 위에 처할 수 없음을 인정한다. 오류 가능성이 있다고 해서, 우리 입장이 틀렸다는 것을 결코 말하지는 않는다. 오류가 발견되거나 현실에서 이론이 작동하지 않을 경우, 우리는 추론을 통해 이론적 오류를 수정해야 하고, 그러한 수정들을 통해 오류들을 근원적으로 수정하기가 불가능할 경우, 새로운 모델이나 생각을 만들어 내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길 위의 신학'이다.

켈러는 제삼의 길을 보여 줄 수 있는 신학적 모델로 '과정 중에 있는 신학'(theology in process)를 주장한다. 우리의 신학적 입장에 대해 수정하고 변혁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신학 말이다. 지금까지 신학은 유럽 대륙 신학의 영향을 받아, 마치 진리를 담지한 교리를 교회를 위해 해설하는 역할을 감당한다는 전통적 해석이 주류를 이룬다. 하지만 우리의 교리, 즉 도그마가 처한 도전은 바로 이 교리들이 형성되던 시절의 문제들이 더 이상 우리가 긴급히 대면하는 문제와 같지 않다는 것이다.

교리는 중요하다. 하지만 교리는 우리가 믿고 신뢰해야 할 절대적 진리가 아니다. 인간의 이해와 언어로 그 진리를 담아내려는 노력이었고, 이는 단지 한 개인의 노력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가 그 시대와 상황과 씨름하면서 현세대를 포함한 이후의 모든 세대가 참고해야 할 것이라 여겨지는 것들을 담아 (당시 이를 표현하기에 최적의 문학 형식인) 명제의 형식에 담아 표현한 것이다. 이는 곧 시대와 상황이 극적으로 달라지면, 교리의 표현 방식과 형식이 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을 함의한다. 그래서 요즘 신학은 교리적 주제들로부터 시작하지 않는다.

고든 카우프만의 <신학 방법론>에서처럼, 웨슬리 와이드만(Wesley J. Wildman)은 그의 책 <종교철학: 다중 학문적 비교 탐구 Religious Philosophy as Multidisciplinary Comparative Inquiry: Envisioning a Future for the Philosophy of Religion>(2010)에서 우리 시대 탐구의 방법은 직관적 귀추(intuitive abduction)와 상상력을 발휘하는 귀납(imaginative induction) 단계를 거쳐 연역적 추론(deduction)을 통해 가설을 구성하고, 마침내 그 가설 모델을 수정하고 교정하고 보완하는 단계를 거쳐야 한다고 주장한다(173쪽). 와일드만은 이를 단지 '종교철학'(philosophy of religion) 영역에 한정해 주장하지 않는다. 종교 연구들과 종교적 주제에 관심하는 철학적 방법들을 포함한 신학이 이제 '종교적 철학'의 방법론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탐구의 방법론을 제시해 주고 있다.

길 위의 신학은 결국 신학적 탐구 방법론을 중시하는 신학이다. 우리가 신학을 하는 방법론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채, 우리가 이 과정과 방법을 통해 얻어 낸 결론들이 마치 실재(reality) 자체이거나 '진리'인 듯 혼동하는 것은 바로 신학적 '잘못 놓여진 구체성의 오류'의 명백한 사례가 될 것이다. 하이데거는 <언어로 가는 길 Unterwebs zur Sprache>에서 '길'이란 숲속 길 같다는 아름다운 이미지의 이야기를 전한다. 우리가 아는 길은 이미 다른 사람들의 노력과 수고에 의해 잘 닦여진 길을 의미한다. 하지만 하이데거가 말하는 길은 오히려 숲속 길과 같다. 숲속의 길은 물론 다른 사람들이 이미 걸어서 지나간 길이다.

숲속에서는 때로 길이 없는 곳을 만날 수도 있다. 길이 없다고 숲속 한 가운데서 가는 발걸음을 멈출 수 없는 노릇이다. 바로 그곳에서 지금부터 걸어가는 것이 곧 길의 시작이 될 것이다. 내가 잘못된 길로 갈 가능성은 다분하다. 아무도 가 본 적 없는 길이기 때문이다. 나의 실수조차도, 뒤에 이 길을 따라올 사람들을 위한 귀중한 정보와 지혜가 될 것이다. 이런 실수를 다음 사람들이 반복하지 않도록 하는.

21세기 포스트휴먼과 인공지능 시대에 우리 신학이 나아가야 할 길은 바로 이와 같다. 교리적 신학은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이 모두 포장되거나 닦여진 길일 때 무척 유효했다. 하지만 앞으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은 전례가 없는 길이다. 특별히 신학에는. 그렇기에 와일드만은 '조직신학'이 아니라, '종교(적) 철학'(religious philosophy) 탐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우리의 사랑도 이와 같지 않을까. 지금까지 우리가 '사랑'이라고 배우고 알아 왔던 모든 것들이 딱 들어맞지 않는다. 그래서 이제는 사랑하는 법을 새롭게 배워야 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가부장적 사회구조에서 우리가 익숙해 왔던 사랑은 더 이상 모두 유효하지 않다. 이제는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것은 곧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지금까지 들어오지 못했던) 목소리를 듣는 법부터 시작해야 한다.

요즘 동성애 문제로 교회가 참 시끄럽다. 하지만 듣지도 않은 채, 이들을 악마시하는 사이비 보수의 태도는 정녕 '잘못 놓여진 구체성의 오류'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잘 보여 준다. 찬성이나 반대의 입장과 목소리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은 다음에 해야 하지 않을까. 그들의 상한 영혼을 치유한다면서, 그들의 목소리는 들어보지도 않은 채, 자기가 알고 있는 편협한 습벽에 갇혀 이것이 치료법이고, 이것이 진리의 길이라고 우겨 대는 일은 아무리 양보해도 우리 기독교인들의 미성숙한 정신의 극단에 지나지 않은 것 같다.

(이런 말을 한다고, 당신은 동성애에 찬성하는가 반대하는가를 묻는 미성숙한 질문과 비난을 반복하지 말라. 이 정도 제안을 이해하지 못하는 당신에게 더 상세한 설명이 작동할 것 같지는 않다. 지금은 그냥 이 정도 생각에서 멈추고, 길 없는 길을 어느 방향으로 만들어 가야 할지 한번 생각해 보자. 같이.)

※필자 소개 이미지를 클릭하면 '길 위의 신학' 전체 기사 목록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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