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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능하신 하나님?
[길 위의 신학] 혐오와 폭력의 시대, 성육신으로 함께하시는 임마누엘
  • 박일준 (newsnjoy@newsnjoy.or.kr)
  • 승인 2019.06.10 12:03

언젠가 미국 공영방송 NPR의 프레시에어 프로그램 진행자 테리 그로스는 당시 대통령기도팀(the Presidential Prayer Team) 리더 존 린드를 인터뷰했다. 2001년 9·11 사태 이후 만들어진 인터넷 활동 조직 대통령기도팀은 대통령을 위해 기도하는 일을 한다. 좋은 일이다. 나라의 지도자를 위해 기도하는 일이 특별히 나쁠 건 없다.

그로스는 린드에게 질문한다. 하나님이 부시 대통령을 선택했다고 믿느냐고. "그렇다"고 대답한다. 그러자 그로스는 추궁한다. 기도팀은 이 대통령의 재선을 위해서도 기도하지 않느냐고. 머뭇거리며 "그렇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다시 그로스는 "만일 다음 대선에서 다른 후보가 선거에서 이기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의지일까요?"라고 묻는다. 린드는 "네, 하나님의 의지는 하나님의 의지입니다"라고 답한다.

한국 기독교계 과격 우파들도 선거철만 되면, '기독교 대통령' 혹은 '기독 정치인' 구호를 외치며 정치에 적극 참여한다. 만일 그들이 지지하지 않는 대통령이나 정치인이 당선된다면, 그것을 정말 하나님 뜻으로 받아들이고, 그를 위해 기도할까. 아니면?

한국 기독교인들은 참 열성이다. 수많은 사람이 언급한 대로, 예배도 열심이고 모이기도 열심이다. 교회 활동도 참 열성적이다. 새벽 기도회, 수요 예배, 금요 기도회에 주일예배를 더하여, 오후 예배 혹은 저녁 예배까지. 헌금도 무척이나 열심히 하려 한다. 이런 한국 기독교인의 '신실함'은 다른 기독교인들에게 귀감으로 소개되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의 신실한 신앙은 정말 '신실'(faithful)한 것일까.

기독교 신앙에서 '신실함'은 교회 활동에 열심인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우리 신앙이 하나님께 신실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우리 신앙은 하나님께 신실하다기보다는, 오히려 열심인 신앙생활을 통해 전능한 하나님께 기도로 무엇을 성취해 내기 위해 신실한 게 아닐까. 우리 기도가 하나님을 만나는 데 목적이 있지 않고, 기도 시간에 하나님께 간구한 내용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데 더 큰 목적이 있는 것 아니냐는 말이다.

자녀 진학 문제, 남편 승진 문제, 가족 건강 문제, 인간관계 문제, 사업 투자 문제 등을 해결하거나 확신을 얻기 위한 기도가 아니었느냐는 말이다. 정말 하나님만을 만나기 위해 그렇게 열심히 기도하고, 헌금하고, 교회에 출석했느냐는 말이다.

다른 한편으로, 유명한 책 제목이기도 한 '왜 선한 사람들에게 악한 일이 생기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불신앙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무능력'을 비판하면서,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역설하기도 한다. 아무 죄 없는 이들에게 이렇게 무자비한 고통이 임하는 세상 한복판에서 도대체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계신단 말인가.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면 이런 일은 불가능하지 않은가. 라이프니츠가 만들어 낸 '신정론'(theodicy)은 바로 이 상황을 묻고 있었다. 그러면서 기적적으로 개입하는 하나님과 같은 행위 주체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설명하고자 하였다. 모든 일은 마치 정교한 시계태엽처럼 맞물려 돌아가고, 그래서 모든 조건을 사전에 알 수 있다면, 자신이 앞으로 벌어질 모든 일을 예측할 수 있다고까지 공언했다.

이상의 모든 이야기에는 공통적인 '신-논리'(theo-logic)가 있다. 전능한 하나님. 하나님에게 열심히 기도하는 이들은 전능한 하나님이 마음만 먹으신다면, 우리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라는 생각을 전제로 한다. 반대로 그런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역설적으로 '전능한 하나님' 논리에 근거하여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만일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면, 어떻게 이렇게 무자비하고 참혹한 일을 그냥 내버려 둘 수 있느냐고 말하면서. 이 세상에 악한 일이 일어나고 실재한다는 사실이 바로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으신다는 결론을 뒷받침하는 증거라는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을 믿든 안 믿든,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라는 전제를 양자 모두 공유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래서 전능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성공적인 삶을 영위하거나, 혹은 전능하신 하나님처럼 엄청난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이 되거나. 우리가 기도해 준 사람이 선거에서 이기면 야훼 하나님이 승리하신 것으로 간주된다.

캐서린 켈러(Catherine Keller)는 우리 기독교 신앙이 기호자본주의 시대에 도착된 형태를 띠는 주된 이유가 바로 '하나님의 전능성'이라는 신-논리에 근거하여 하나님이 존재하신다 혹은 존재하지 않으신다고 보는 이분법적 사유에 있다고 본다. 이런 사고-논리에 구속되어 신앙생활을 하는 한, 우리는 세상을 변혁하는 주체가 되기보다는 도리어 적자생존과 승자 독식의 무한 경쟁 체제를 정당화하고 옹호하는 수단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을 소환하게 되는 우를 범한다.

욥기서는 바로 이러한 전능하신 하나님 이해에 대한 일종의 저항이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나중은 창대하리라"는 욥기서의 널리 인용되는 유명한 구절은 하나님이나 욥의 말씀이 아니라, 욥을 위로하겠다고 찾아온 친구 수아 사람 빌닷의 말이다. 빌닷의 말은 신명기서가 전하는 신앙의 규칙을 압축하고 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따르면, 전능한 하나님이 큰 축복으로 갚아 주시리라는 믿음 말이다.

얼핏 신앙적으로 당연할 것 같은 이 논리는 그 이면에 엄청난 반대 논리를 담고 있다. 만일 당신이 지금 창대하지 못하다면, 당신이 지금 성공적인 삶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곧 당신이 과거에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한 죄를 범한 것에 대한 증거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이 도착적으로 더해져, 가진 자는 더욱더 많이 갖게 되고, 갖지 못한 자는 있는 것마저 빼앗겨 이를 갈며 후회하리라는 아전인수격 해석이 하나님 신앙으로 포장되어 버린다. 욥기서는 바로 이러한 신앙의 태도에 반기를 드는 문헌인 것이다.

욥기서는 시작 장면부터 심상치 않다. 사실 욥기서 저자는 그 장면의 현장을 직접 목격하지 못했다. 누가 하나님과 사탄의 거래 현장에 직접 참여할 수 있었겠는가. 욥기서 1장 하나님과 사탄의 대화 장면은 말하자면 욥의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한 설정이면서, 바로 이 설정을 통해 욥기서는 우리가 신실한 신앙의 태도라 간주해 왔던 신명기적 신앙의 태도를 의문시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욥의 신실한 신앙을 자랑하거나 입증하기 위해 사탄의 시험을 허락하신다? 아무런 잘못도 죄도 없는 욥에게?

더구나 욥의 신앙을 시험하기 위해 희생된 자녀 10명의 죽음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런데 욥의 친구들은 고난을 당하고 있는 친구 욥을 찾아와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4:7)라고 물으며, 욥에게 지난 죄를 고백하고,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빌라고 권면한다. 이런 친구들이 선의로 권면한 내용을 욥은 전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전혀.' 바로 이것이 욥기서 저자가 신명기 전통의 신앙을 주장하는 이들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우리 삶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고난과 고통이 '엄연한 사실'(stubborn fact)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자신에게 임한 고난의 의미를 전통적인 신명기적 신앙 관점에서 받아들이기를 거절하며 하나님께 반문하던 욥에게 하나님이 주신 대답은 놀랍게도 바다 괴물 '레비이탄' 즉 '리워야단'이다. 창세기 1장의 혼돈의 심연 모습으로 표현된 바다의 여신 티아마트라는 상징이 여기서 바다 괴물의 상징으로 변용되어 소환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바다 괴물을 욥에게 주는 대답 속에 소환한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것일까. 하나님은 그 앞 장에서 '폭풍우' 속에 등장하신다. 땅이 혼돈하고 공하할 때, 하나님의 신은 수면 위에 운행하고 계신다는 구절이 연상되지 않는가.

'운행'이라는 말['므프트'(mrhpht)]은 호흡의 진동, 혹은 대양의 출렁거림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같이 연상해 볼 수 있다면, 폭풍우 속에 등장하시는 하나님 모습은 정녕 창세기 1장의 장면을 연상케 한다. 그 푹풍우 가운데서 하나님은 욥에 반항적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레비아탄'을 소환한다. 하나님의 지혜는 바다 괴물마저 품으신다는 것이다. 창세기 메시지가 하나님이 빛을 만들어 어둠을 정복했다는 이분법적 이야기가 아니라고 이미 언급한 바 있다. 그 고난, 혼돈, 심연의 절망마저도 하나님은 품으신다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은 욥에게 네가 그것, 즉 레비아탄을 이해할 수 있느냐는 형식으로 말씀하고 계시지만, 앞에서 언급했듯이, 욥기서 저자는 이 이야기를 통해 꾸짖으시는 하나님을 전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와 전능성을 이해하고 있는 방식에 대해서, 즉 신명기서의 신앙 태도에 대해서 꾸짖고 있는 것이다. 빛을 만들어 어둠을 품으시면서 하루를 완성하신 하나님, 성서 기자는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하나님의 심경을 전하고 있다.

우리의 전능하신 하나님 신앙이 삶에 불현듯 도래한 위기와 고난과 고통의 시간들에서 벗어나기 위한 바람 혹은 원망願望에 기초할 때, 그 신앙은 프로이트가 지적하듯 우리의 바람과 기대의 투사(projection)에 다름 아니다. 여기서 켈러는 우리의 전능자 하나님 신앙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 하나를 소환한다. 장 칼뱅. 칼뱅은 욥기서를 해석하면서, 욥의 저자가 말하고 싶은 것을 강조하기보다는 욥의 친구들이 말하는 신학, 즉 신명기적 신학의 편을 들고 있기 때문이다.

칼뱅의 신학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철저한 해석에 관심을 둔다. 우리 눈에 보이는 행운들도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작용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삶에 도래한 고난과 좌절도 하나님의 의지와 섭리가 작용한 것이지, 그저 운이 없어서나 실수를 저질렀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기 때문이다. 여기서 위대한 신학자였던 칼뱅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예정하셨다는 단순한 예정설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하나님의 구원은 하나님의 전지전능한 섭리 안에서 예정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유한한 정신으로 무한하고 전지전능한 하나님의 계획을 알 방법은 어디에도 없다. 바로 이 지점에서 칼뱅의 유명한 교리 '이중 예정설'이 도입된다. 이중 예정설은 하나의 추론이다. 인간의 지성으로 무한한 하나님의 섭리를 다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이 전지전능하게 모든 것을 미리 계획하고 섭리하신다는 믿음을 절충하는 추론 말이다. 켈러에 따르면, 칼뱅은 이 이중 예정설을 "끔찍한 결정"(decretum horrible)이라고 고백했다.

칼뱅의 이중 예정설이 본래 순수한 신앙적 의도로 기획되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생각은 없다. 사실 칼뱅의 이중 예정설은 당시 지식인들에게 널리 퍼져 가던 '이신론'(deism)의 사고방식에 정면으로 반대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나님은 시계제작자처럼 완벽한 세상을 설계하시고 만드신 다음, 이 세상 운행에는 개입하지 않으시고 자연법칙에 맡겨 두신다는 당대 지식인들 사고방식에 경건한 신앙인이었던 칼뱅은 동의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무관심하고 무책임한 분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이신론에 반대하는 심정에 같은 신앙인으로서 공감 가는 면이 많지만, 그럼에도 칼뱅은 단지 심정적으로 반대하는 데 머무리지 않고, 이신론의 논리를 능가할 신학적 추론을 만들기 원했다.

그런데 칼뱅은 이 이중 예정설의 근대 이후 자본주의적 사회구조 속에서 신앙인들에게 미치는 심리적 영향력은 전혀 고려할 수 없었다. 하나님의 예정을 인간의 정신이 파악할 수 없지만, 그것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방법은 있다. 곧 열심히 벌고, 열심히 저축하며 성공적인 삶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듯,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만일 나의 구원을 예정해 놓은 것이라면, 이렇게 성실하고 열심히 살아가는 '나'에게 실패와 좌절만을 안겨 주시지는 않을 것이다.

이러한 신앙의 논리가 근대 자본주의 사회구조와 맞물려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면서 개신교가 자본주의 구조에 최적화한 종교가 되었다는 사실은 이미 사회학자 막스 베버가 유명한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논증한 바 있다. 다만 여기서 칼뱅의 이중 예정설을 소환하는 것은 자본주의사회에서 신앙인들에게 성공적인 삶과 구원의 상관관계를 암시하는 신학적 촉매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중 예정설이 다시 같은 동전의 반대 면으로 현세를 살아가면서 실패와 고난과 고통에 좌절하는 이들의 삶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서 배제된 이들로 범주화해 버리는 효과를 준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함이다.

그렇게 칼뱅의 이중 예정설은 욥기서 저자가 욥의 신앙을 통해 질문하고 있는 우리의 신명기적 신앙에 반대로 대답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레비아탄을 소환하며, 그런 끔찍하고 흉측한 괴물조차도 품고 세상의 날들을 일구어 가신다고 대답하고 있는 곳에서. 칼뱅의 이중 예정설은 도리어 두렵고 어둡고 좌절스럽고 실망스러운 날을 배겨 나가고 있는 고난당하는 영혼들에게 이중의 신앙적 소외를 강요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는 것이다.

캐서린 켈러는 하나님의 전지전능함을 욥기서 저자의 눈으로 다시 해석한다. 안다는 것, 혹은 의식한다는 것(conscious)은 곧 "함께-아는-것"(to know-with)이다. '긍휼'로 번역되는 'compassion'의 접두어 'com-'은 라틴어에서 '함께'(with 혹은 together)라는 의미라고 언급한 바 있다. 안다는 것도, 'con-scious'도, 앎(science)도 결국 '함께-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함께 안다는 것을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바로 '증언'(witness)이다. 하나님의 전지전능함을 '함께-알고' 증언한다는 것은 곧 "함께-함"(with-ness)이 아닐까?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성육신(incarnation)은 곧 말씀의 하나님이 육신 속으로(in-carnation = in the carnal = into-the-flesh) 임하셔서 육체를 지닌 인간의 한계와 아픔과 고통과 고난에 함께하신다는 것 아닌가. 하나님은 우리의 아픔과 좌절과 고통과 고난, 즉 우리의 어두운 심연까지도 모두 다 알고 계시며, 거기서 우리와 함께 임재하심으로 증언하시지 않는가. '사랑이 혐오를 이긴다고'(Love Trump Hate!).

켈러는 전능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통념적 이해를 새롭게 각성하기 위해 한 이야기를 도입한다. 유치원에서 한 아이가 물건을 집어던지고 화를 내면서, 자기보다 작은 아이를 다치게 만들었다. 두 아이가 그렇게 소동을 일으키자, 다른 아이들도 따라서 물건을 집어던지며 소동에 동참해 유치원이 난리가 났다. 자, 이제 당신이 유치원 선생님이라면, 가장 우선적으로 무엇에 관심을 두고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소동에 휩쓸려 다치더라도 아이들을 말리는 것? 나쁜 아이를 가려내서 벌주는 것? 본래 기독교의 원죄 교리는 인간을 심판하고 판단하기 위한 개념이 아니라, 인간의 근원적 조건을 신학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개념이다.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법적 판단 개념이 아니다. 인간은 심적으로 연약하여, 여러 조건에 흔들리고 유혹에 취약해서 언제든지 죄의 구렁텅이로 빠져들 수 있는 취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곧 사회·조직·관계 등 모든 존재의 차원에 도사리는 근원적인 위험성이다. 지구온난화 시대에, 이 행성적 위기에 기여하지 않는 인간 존재가 있는가? 없다. 이 맥락에서 우리 모두는 죄인이다. 중요한 것은 유치원에서 일어난 소동이 나쁘다는 판단이 아니다. 이런 소동이 일어났을 때 '유치원 선생님인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이다.

우선 아이들을 말리는 과정에서 상처가 생기더라도, 오히려 아이들이 상처를 입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말릴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이 진정하게 되었을 때, 왜 이런 소동이 야기되었는지를 천천히 살펴보고 나서 문제 원인이 된 아이를 찾아 이야기를 시도할 것이다. 이것은 그 아이가 벌인 나쁜 행동을 법적으로 판단하고, 상응하는 벌을 주려는 것 때문만이 아니다. 오늘은 그 아이가 문제를 일으켰지만, 내일은 다른 아이가 일을 벌일 수도 있다.

따라서 선생님으로서 당신의 개입은 이런 일이 절대 일어나지 않도록 확고한 시스템을 갖추고 철통 방호를 펼치는 것이 아니다. 문제가 생겼을 때 장본인을 찾아서 왜 그랬는지 살펴보고, 아이가 잘못 행동한 부분을 책망하고 질책하는 것보다 더 우선적으로 그런 행동을 하도록 만든 원인들이 무엇이었는지, 그런 원인들이 재발하지 않도록 하려면 어떤 조치들이 필요한지 살피는 것이다. 잘못 행동한 아이를 가려내 벌하는 게 우선적인 목적이 아니다. 결국 선생님으로서 당신은 잘못된 행동을 한 그 아이마저도 사랑하지 않는가.

그렇다. 사랑이 혐오와 폭력을 이긴다. 훌륭한 선생님은 잘못 행동한 아이 이야기에 함께-하여(with-ness), 함께-알고(con-scious), 그 아이가 겪었을 아픔에 '함께-고통받으며'(com-passion), 아이와 더불어 상황을 이겨 나갈 길을 찾을 것이다. 그것이 증언, 즉 함께-함(with-ness)이고, 성육신(in-carnation)의 진정한 의미가 아니겠는가. 가장 섬세하고 가장 연약할 것만 같은 사랑의 힘이 모든 폭력의 힘을 이겨 낼 수 있도록 하는 것, 그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 결국 일어나도록 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전능함이 주는 위대함 아니겠는가. 그래서 그리스도의 이름이 '임마누엘',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가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전능하신 하나님이 너무나도 불완전한 우리와 함께하시기 위해 우리를 양육하시는 방법은 무엇일까. 여기서 우리는 인간 역사 속에 자취를 남기신 하나님의 손길을 생각하면서 추론하는 수밖에 없다. 우리가 하나님 생각을 대신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켈러는 그것이 "그대로-두기"(letting-be)의 양육법이라고 말한다. 그대로 둔다는 말이 방임하거나 방치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예를 들어, 사춘기 아이들을 양육하는 것은 부모가 얼마나 체계적으로 통제하느냐의 문제가 전혀 아니다. 오히려 아이들이 자기 자신으로서 "존재할 수 있도록"(enabling to be), "존재할 힘을 북돋우어 주고"(empowering to be) 온전한 "존재감을 가질 수 있도록"(bringing to be) 하는 문제이다. 이는 훌륭한 목회자와 선생, 지도자의 자질이다. 내 의욕과 의지로 사춘기 자녀들을 통제하려 할 때, 우리는 자녀와의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오히려 더욱 악화시킬 뿐이다.

때때로 우리 세상에는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악한 일들이 벌어진다.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이 엄습해 온다. 우리는 왜 하나님이 저런 일을, 저런 사람을, 저런 집단을 묵인하시는지, 그 일과 그들 때문에 발생하는 악한 일들을 어찌 그리 무기력하게 내버려 두시는지 속으로 원망하게 된다. 그래서 해롤드 쿠쉬너의 유명한 책 제목처럼 하나님께 반문한다.

"왜 선한 사람들에게 악한 일이 생기도록 하십니까?"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아무리 보잘것없고 가망 없고 자질 없는 영혼일지라도 하나님은 포기하는 법이 없으시다. 하나님보다 훌륭한 선생님은 없기 때문이다. 그 어린 영혼들 하나도 포기하는 법이 없는 훌륭한 유치원 선생님처럼, 하나님은 잘못을 저지른 영혼조차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신다. 그 영혼과 함께하시기 위하여 그와의 관계 속으로 임재하신다.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그 관계가 불러올 위험을 감수한다는 뜻이다. 다른 존재와 관계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좋고 나쁘고, 선하고 악하고 문제가 아니다. 어떤 관계를 형성해 나가느냐에 따라 관계하는 영혼들에게 선할 수도 악할 수도,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다.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임마누엘)이 육신을 입고 인간이 되셨다면(성육신), 하나님이 그 관계의 불확실성과 불안정성을 감수하셨다는 의미일 것이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후 방치하거나 방임하시지 않으셨다. 그렇다고 칼뱅이 생각하듯 엄격한 구원의 규칙을 세워, 성공하는 영혼들만 구원을 얻도록 예정하시지 않으셨다. 하나님이 더 사랑하는 영혼들은 누구일까. 적자생존과 승자 독식의 무한 경쟁 체제에서 낙오자가 되거나 실패자가 되어 좌절하고 방황하는 영혼들에 더욱더 가슴 아파 하신다. 그들의 실패와 좌절에 하나님은 '책임'을 느끼신다.

'책임'이라는 말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응답할 수 있는'(response-able = responsible) 자세와 태도를 가리키고 있음을 보게 된다. 하나님은 그 실패에, 좌절에, 눈물에 함께하셔서 응답하시는 분이시다. 그렇게 우리와 더불어 책임을 지시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슈퍼맨처럼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하여 우리의 실패를 무조건 보상해 주거나 대체해 주신다는 말이 절대로 아닌 것이다. 정말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가 우리 자신의 존재대로 회복되기를, 하나님 형상의 자리로 돌아오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라는 예수님 말씀을 기억하는가. 그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는 짠맛을 잃은 소금이 되면 저 밖에 버려질 테니, 그렇게 되지 않도록 더욱더 열심히 자신의 본분에 충실해야 한다는 의미로 본문을 읽지 않는가. 우리는 적자생존과 승자 독식, 무한 경쟁의 사회구조에서 창조적으로 적응하며 성공적인 삶을 성취해 나아가고자 기를 쓴다. 정말 본문이 우리에게 그렇게 우리 자신의 본래적 목적을 성취하여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라며 독려하고 있는 걸까. 혹시 짠맛을 잃은 소금을 맛본 경험이 있는가. 우리 대부분은 짠맛을 잃은 소금을 체험한 경우가 없을 것이다. 우리들이 소비하는 소금은 결코 짠맛을 잃는 소금이 아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소금은 '염화나트륨'이다. 장기간 보관하면 습기나 물기에 젖어 녹아서 없어질지언정 짠맛이 없어지는 일은 결코 없다. 왜 예수님은 '짠맛을 잃은 소금'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신 것일까. 본문이 언급하는 소금은 염화나트륨이 아니다. 가나안 지역에는 땅에서 캐는 소금이 존재한다. 염전에서 채취하는 소금이 아니라, 땅에서 캐는 소금은 성분이 염화나트륨이 아닌 질산나트륨이다. 그런데 이렇게 땅에서 캐는 소금은 장기간 보관할 경우 짠맛이 증발한다. '질산-나트륨'에서 짠맛을 내는 나트륨 성분이 증발하면? '질산' 성분이 남는다. 혹시 질산이 무엇에 쓰이는 성분인지 아는가. 바로 비료의 기초 성분이다. 즉 짠맛을 잃은 소금은 오래 보관하면 뭉쳐서 덩어리가 져 있을 테고, 그것은 무익한 것이 아니라 땅에 던져 발로 밟아 으깬 다음 밭에 던져 비료로 사용된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라는 예수님 말씀은 본연의 예정된 가치를 실현하여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성공하지 않는다면, 짠맛을 잃은 무익한 소금처럼 밖에 버려져 사람들 발에 밟히며 사라진다는 말이 아니다. 본문은 그 반대를 가리킨다. 어떤 존재라도 그 존재 가치를 상실하는 법은 없다. 우리를 보는 사람들은 이해관계에 따라 우리 가치를 평가하지만, 비록 그들에게 우리가 짠맛을 잃은 소금처럼 무익한 존재라고 평가받더라도, 하나님 형상을 간직한 존재는 그 누구도 가치를 상실하거나 무익한 존재로 전락하지 않는다. 짠맛을 잃은 소금은 밭에서 비료로 자신의 또 다른 가치를 실현할 뿐이다. 음식의 짠맛을 내는 양념으로 소금을 사용하려는 요리사에게 무익해졌을 뿐이다.

짠맛을 내는 데 실패했다고 소금의 질산 성분마저 무익해진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결코 누구도 포기하시지 않으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하시기 위하여 전지전능함을 발휘하여 구원받을 자들, 자질 있는 자들만을 하늘나라로 들어 올리시는 대신, 직접 육신을 입고 우리 곁으로 오셔서 우리의 상처와 좌절과 고통과 절망에 함께하시는 것이다.

혐오와 차별과 폭력이 마치 진리를 입증해 주는 수단처럼 남용되는 시대, 다시 한번 우리 곁으로 오시기 위해 자신의 엄청난 힘과 능력을 내려놓으시고, 무기력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해 본다. 헨리 나우웬은 왜 그리스도가 아기 예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는지를 생각해 보라고 재촉한다. 아기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보살핌을 필요로 한다. 하나님이 무기력하시거나 무능하시기 때문이 아니다. 힘없는 아기를 보살필 수 있는 사람 사는 공동체를 실현해야만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름다운 세상이 온전히 펼쳐질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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