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당선된 이후 시위 현장에는 '사랑이 혐오를 이긴다'(Love Trump Hate)라는 재치 있는 구호가 회람됐다. 이 말에는 교회와 신학이 혐오의 시대를 어떻게 이겨 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근원적 통찰이 담겨 있다. 우리는 혐오에 혐오로 맞서지 않는다. 그런데 이것은 이상일 뿐이고, 혐오와 폭력이 난무하는 실제 삶에서는 결국 사랑이 이긴다는 진실이 그저 하나의 이상이나 수사학적 표현으로 간주된다. 그러면서 우리는 어리석은 혐오에 어리석은 댓글로 우리의 분노를 표현하며, 내 안에 또 다른 형식의 혐오를 키워 나가고는 한다.

하지만 혐오에 대한 혐오도 역시 혐오일 뿐이다. 혐오에 대한 혐오로는 결코 혐오를 이기지 못한다. 또 하나의 폭력일 뿐이다. 요즘 뉴스에서는 그런 일이 너무 많이 일어난다. 뉴스를 통해 누군가가 악마와 같은 존재로 알려지면, 사람들은 그를 악마화하는 일에 동참하면서 자신들의 분노를 쏟아붓는 경향이 있다. 그렇게 발산된 분노는 전염성이 있어서 더 확대되고 증폭된다. 혹시 이 일이 혐오 폭력을 발산하는 이들에게서 반복되는 것은 아닐까. '가짜 뉴스'를 믿고 정의감으로 혐오 폭력에 가담했다기보다는 '가짜 뉴스'를 핑계 삼아 분출되지 못한 자신들의 좌절과 불만을 토해 낼 분출구를 찾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이들에게 혐오는 나쁘고 도덕적으로 용납되지 않는다는 설교나 혐오에 맞서 혐오에 대한 혐오를 표출하는 행위는 진화적 알고리즘의 작동에 불과하지 않을까.

투쟁-도피 반응(fight-or-flight response)은 진화가 우리에게 장착한 가장 기본적인 알고리즘 반응이다. 상대가 누구인지 판단하고, 맞붙어 싸울 것이냐 도망할 것이냐에 대한 작동 기제는 우리의 가치판단 혹은 도덕적 의식이나 의지에 달려 있지 않다는 것이다. 진화적으로 거의 자동화한 인식과 판단이라는 말이다. 자신이 안전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상대방을 향해 무제약적으로 공격이 가능한 상황이라고 생각되면, 사람들은 정치적 입장과 상관없이 참 잔인해진다. 혐오 폭력은 극우 극단주의자들에게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인터넷 댓글의 폭력성은 결코 이 현상이 소수 극단적 우익들에게 한정된 문제가 아니라고 증명한다. 따라서 '사랑이 혐오를 이긴다'는 표현은 그저 말뿐인 것에 그치지 않느냐는 생각이 시대를 지배한다. 그래 봤자 말뿐이잖아? 이상은 이상일 뿐이고 현실에서 아무런 효력을 갖지 못한다는 생각이 팽배한 시대에 뻔한 '공자님 말씀'을 덧붙이는 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은 생각.

'사랑이 혐오를 이기는' 그런 세상은 결국 실현 가능성이 없는 텅 빈 공상에 불과한 것일까. 더 나은 세상을 향한 우리의 함성과 열정은 그냥 말장난에 불과한 것일까. 가치와 의미를 향한 우리의 끈기는 신기루를 보고 실재인 양 착각하는 망상적 인식 기제의 작동에 불과한 것일까. 사실 모든 혁명은 실패하지 않았던가. 세상을 변혁하고자 했던 혁명은 유혈이 낭자한 폭력과 독재의 등장을 낳고 역사 속에서 퇴장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캐서린 켈러(Catherine Keller)는 1950년대 후반 흑인 인권 운동에 적극적으로 헌신한 문학가 제임스 볼드윈을 인용한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된다는 것 혹은 미국에서 흑인이 된다는 것은, 아주 조금 과장하자면, 아무런 존중이나 변호를 받을 수 없는 문명…(중략)…의 일부가 되어 있는 자신을 절감해야 하는 상황에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가장 열정적으로 사랑을 큰 소리로 외치며, 이 나라가 새롭게 되기를 소망하며, 그렇게 소망하는 삶을 존경할 만하고 가치 있는 삶으로 만들어 나가려는 사람들의 상황에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종차별 상황에서 사랑을 외치며 이 나라가 새롭게 되기를 소망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존경할 만하고 가치 있는 삶으로 구현해 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믿으며 살아가는 것. 인종차별주의자들이 활개 치는 나라를 '사랑'하는 것, 그것은 타협이나 순응 혹은 복종이 아니라, 그들의 삶과는 다른 가치를 선포하는 일이다. 원수에 대한 사랑은 분노가 아니라 용기를 필요로 한다. 2012년 트레이본 마틴이라는 흑인 소년이 백인 경찰의 공권력 남용으로 사망한 이후 전개되는 '흑인들의 생명(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운동은 역으로 1960~1970년대 흑인 인권 운동 시기가 한참 지난 요즘도 미국에서 인종차별로 고통받는 흑인들이 많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2012년 시위 당시 군중이 외쳤던 구호는 미국 인구에서 6% 정도를 차지하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경찰의 공권력 사용 과정에서 비무장 상태로 죽임당하는 희생자의 40%를 차지한다는 사실을 꼬집는다. 이는 여전히 억압받고 차별받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현실을 말해 준다. 제임스 볼드윈은 지금의 현실보다 훨씬 더 척박한 1950년대 후반의 현실에서 "가장 열정적으로 사랑을 큰 소리로 외칠" 것을 주장하며, "이 나라가 새롭게 되기를 소망"하며, "그렇게 소망하는 삶을 존경할 만하고 가치 있는 삶으로 만들어" 나가는 데 연대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을 외친다고? 어떻게 그런 인간들에게 사랑을 말할 수 있지? 2007년 개봉한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은 이러한 지점을 포착한다. 아들을 유괴해서 살해한 범인을 기독교적 사랑으로 용서하러 교도소를 찾아간 신애는 희생자의 유족인 자신에게 예수를 믿고 용서받았다고 태연하게 말하는 유괴범 모습을 보고 절규한다. 어떻게 그런 인간을 '용서'하지? 어떻게 그런 용서가 가능하지? 그게 기독교가 말하는 사랑이라고? 영화는 이 같은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다. 희생자에게 한마디의 용서도 구하지 않고, 그저 예수를 믿고 용서받고 구원받았다는 유괴범 모습을 통해 이창동 감독은 이 시대 기독교의 용서와 사랑의 논리가 어떻게 남용될 수 있는지 정확히 보여 주고 있다. 희생자의 아픔과 상처와 좌절과 희생을 고려하지 않은 채 무조건적 용서를 베푸는 것은 사랑도 정의도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 세상은 희생자와 가해자의 이분법적 구조로만 구성이 되어 있을까. 상처받은 사람들 마음에는 '한'이 쌓여 간다(미국 신학자 켈러는 한국적 개념 '한'을 인용한다. 이 사실에 의아해할 수 있는 독자를 위해 부연하자면, 한국인 제자가 많았던 켈러는 한을 신학적 개념으로 구성한 미국의 한국계 신학자 작업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한’ 개념을 서술한 내용보다 더 깊이 있게 이해하고 있다). 켈러는 한을 완고함이 아니라 오히려 부서지기 쉬운 연약함, 즉 혼신의 힘을 다해 어떤 모험도 차단하려는 마음, 그래서 더 상처받지 않으려는 마음으로 규정한다. 이제 피해자는 그 한을 다른 사람들에게 떠넘기며 폭력의 가해자가 되어 간다. 상처로 생긴 한이 폭력의 순환적 구조에 빠져 들어가는 과정을 미국의 한국계 신학자 앤드류 박(Andrew Sung Park)은 신학적으로 죄 개념으로 규정한다. 희생자가 자기가 받은 상처를 다른 사람에게 전가해 행사하는 것으로 폭력이 가해자가 되어 버리는 죄의 구조 말이다. 이 한과 죄의 폐쇄적 순환 구조에 빠질 때, 우리는 정말 폭력의 희생자가 되어 버리고 만다.

한편으로, 슬프게도 학대하는 사람 중 많은 이가 학대받은 피해자였던 반면, 희망적이게도 학대받은 모든 사람이 학대 행위를 반복하지는 않는다. 폭력 피해자가 폭력 가해자로 변하는 폭력의 굴레가 존재하지만, 이 굴레에 모든 사람이 갇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어떻게 폭력의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것은 바로 한/죄의 이분법 너머로 나아가는 것이다. 지금까지 익숙했던 가해자/피해자 이분법을 넘어서 나아가는 것, 이는 곧 다른 세상을 꿈꾸는 것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다른 세상을 꿈꿀 수 있을까? 여기서 이창동 영화 '밀양'이 제기하는 물음에 신학적으로 반문할 수 있다. '밀양'은 전통 기독교의 용서와 사랑의 논리가 빠진 도착적 순환 구조를 포착하는 데 예리하고 적확했지만, 정말 사랑은 순환적 구조 속에 함몰되는 이데올로기적 논리의 역할밖에 할 수 없는 것일까. 이창동 감독이 그리는 이분법적 죄/용서의 틀은 사랑을 가두어 두는 틀밖에 되지 못하는 것 아닐까. 다른 세상을 향한 꿈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어 버리는 틀이 되어 버리는 것은 아닐까.

도착된 사랑과 용서, 죄의 폐쇄적이고 순환적인 구조 자체가 이창동 감동이 묻는 물음의 '틀'(framework)이 되어 버려, 그것과는 다른 세상을 꿈꾸는 일은 아예 시도조차 불가능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 아닌가 하는 물음이다. 비판하는 대상과의 만남에서 그것을 극복하기보다 오히려 '비판의 논리'가 매개가 되어 비판 대상과 비판자가 하나의 틀 구조(framework)에 빠져 버리고, 그래서 거대한 순환 구조의 일부가 되어 버리는 것을 철학적으로 '이중 구속'(double bind)라고 한다. '밀양'은 이중 구속의 함정으로 빠져 버린 것 아닐까. 이것은 삶을 기계적 반복으로 끌고 가는 퇴락의 힘이다.

다른 세상을 꿈꾸는 일, 그래서 사랑할 수 있는 것은 탈자적 경험(ecstatic experience)이다. 엑스터시라는 경험을 우리는 무언가 하나 되는 신비하고 몽롱한 경험으로 추상화한다. 어원적으로 엑스타시는 자신의 바깥으로 나아가는 경험을 의미한다. 자기 자신 바깥으로 나아가서 서는 것, 자신이라는 존재의 경계가 더 큰 존재와 더불어 하나 되는 것, 그것을 탈자脫自라고 부른다. 사르트르는 이미 실존(existence)을 탈존(ex-sistence)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그렇다. 산다는 것은 내 삶의 경험을 무한 반복하면서, 나의 동일한 품성을 계속 유지하는 것이 아니다. 나 자신의 바깥으로 나아가 나와 다른 존재들과의 하나 됨으로 끊임없이 새롭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기존 논리의 굴레에 빠져 그 구조를 반복하는 것은 '실존'이 아니라는 뜻이다.

철학자 화이트헤드는 탈자의 힘을 '신적 에로스'(divine eros)라고 불렀다. 우리 시대 문화는 사랑을 아가페·에로스·필로스 등으로 구별해 부르면서, 부모와의 사랑, 자식과의 사랑, 연인과의 사랑, 친구와의 사랑 등을 구별한다. 하지만 모든 사랑은 대상을 향한 끌림을 기반으로 한다. 내가 나 자신의 바깥으로 나갈 수 있으려면, 나 자신 밖에서 나를 끌어내는 힘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을 에로스라고 부른 것이다. 사랑은 나 자신 안으로 난입해 들어오는 것을 품기도 한다. 나와 다른 것을 품고, 나 자신의 일부로 인정해 주는 것은 바로 신적 아가페다. 에로스와 아가페는 다른 사랑의 종류를 의미하지 않고, 사랑의 두 측면, 나와 다른 것을 향해 가는 모험적 측면과 나와 다른 것을 품고 인정해 줄 수 있는 호응적 측면이라고 철학자 화이트헤드는 말한다.

혐오를 극복하기 위해 혐오를 혐오한다면, 이는 곧 '혐오'라는 틀의 폐쇄적 순환 구조에 빠진 것이다. 진보나 보수를 막론하고 이 순환 구조의 유혹에서 자유롭지 않다. 이창동 감독은 '죄와 용서'라는 신앙 논리가 폐쇄적 순환 구조가 될 경우, 어떻게 남용될 수 있는지를 보여 주었다. 하지만 이창동의 시도에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그것이 기독교가 말하는 '사랑'의 전부인가 하는 것이다. 일부 도착된 사례를 근거로 전체가 '도착'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주 위험한 논리적 비약이다. 영화라는 매체는 문제를 설정하고 조명하는 데 더 강조점이 있다고 말하더라도, 영화는 전반적으로 기독교의 사랑이 마치 죄와 용서의 이분법 자체에 불과하다고 말하려는 논리가 더 강하다.

그런 맥락에서 우리는 제임스 볼드윈의 '사랑' 개념을 다시 한번 소환할 필요가 있다. 그의 서술은 '사랑이 혐오를 이긴다'는 신념을 반영한다. 인종차별의 견고하고 참혹한 구조가 자신들의 삶을 옥죄어 오는 시대의 한복판에서 "가장 열정적으로 사랑을 큰 소리로 외치며, 이 나라가 새롭게 되기를 소망하며, 그렇게 소망하는 삶을 존경할 만하고 가치 있는 삶으로 만들어 나가려는" 것은 다른 세상을 꿈꾸고 다른 가치를 창출하는 것이다. 기존의 폭력적 논리를 비판하면서 반대 논리를 펼치는 와중에 비판 대상과 오히려 역설적으로 동일한 논리 구조 속에 양극성으로 존재하게 되는 유혹과 위험에서 진정으로 극복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사랑이 혐오를 이긴다'는 말이 더 무게 있게 다가온다.

삶은 예배다. 예배(worship)는 아가페와 에로스의 가치-조리법(worthy-scipe)이다. 어원적으로 '가치'(worthy)라는 말과 '조리법'(recipe)이라는 말을 합쳐, 예배는 '가치-조리법'이라고 켈러는 증언한다. 그렇다. 삶은 그냥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재료들을 어떻게 만들어 내느냐 문제이다. 그래서 삶은 '가치-조리법'인 셈이다. 우리가 하나님 형상(the image of God)이라는 말이 함의하는 한 가지 뜻이 이것 아닐까.

그런데 삶은 재료가 주어지고, 우리가 요리하는 단순한 공식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삶에는 우리 밖에서 우리를 유혹하는 힘이 현존한다. 지금 주어진 상황보다 더 낫게, 혹은 더 나쁘게 나아오도록 유혹하는 손짓들이 존재한다. 우리를 유혹하는 그 손길들 속에서 어떤 손짓을 받아들여야 하는지 결정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 의지와는 별개로 삶으로 난입해 들어오는 것들이 존재한다. 좋든 싫든 간에 말이다. 그중 어떤 것을 품고 어떤 것을 버려야 할지 결정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신이라는 존재와 인간이라는 유한한 존재의 결정적 차이일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으로 도래하는 모든 것을 품고 응답하신다. 유한한 우리는 모든 것을 품고 응답할 여력이 없다. 선택해야 한다.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버려야 할지. 그래서 우리의 사랑은 어렵다. 때로 가치 있다고 받아들인 선택이 무모한 결정이었음을 알게 되기도 하고,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인 선택이 내 삶을 극적으로 바꾸어 놓을 수도 있다. 극적인 결과는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다.

무엇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 결정하는 문제는 살면서 어떤 방향을 향해 나아가느냐의 문제이기도 하다. 화이트헤드는 신이 모든 현실적 사건 계기의 초기에 '시초적 목적'(initial aim)을 제공하고, 이 시초적 목적이 바로 우리를 향한 신의 에로스적 유혹이라고 말헀다. 화이트헤드의 철학적 언어를 신학적으로 정제해 표현한다면, 우리 삶의 매 순간에는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보내시는 손짓이 존재한다. 그 손길을 따라갈지 거절할지는 우리에게 달렸다. 수없이 많은 순간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손짓을 외면해 왔는지. 때로는 잘못된 손짓을 하나님의 손짓이라고 생각하고 달려갔을 것이다. 그래서 겪게 된 수많은 상처와 좌절과 트라우마들.

한 신학자는 하나님을 "세계의 시인"(the poet of the world)이라고 표현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들리는 시의 비전처럼, 우리에게 시초적 목적을 제시하지만, 시로 표현된 꿈이 늘 현실에서 실현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안다. 내 꿈과 의지가 실현되는 일이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는 '나'의 소관이 아니다.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려는 의지가 있는 이들은 지금 내린 나의 결정이 하나님 뜻에 부합한 것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칼뱅은 '이중 예정설'을 말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내가 성실히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노력해 원하는 결과를 나름대로 성취해 나아갈 때, 우리 인생은 하나님 뜻에 부합하는 삶이라고 추론하는 것이다. 이중 예정설의 믿음을 무조건으로 이기적 발상의 결과라고 비판만 할 수 없는 대목이 바로 여기 있다.

하지만 이중 예정설의 추론은 결론적으로 노력의 성과에 의존하고 있어서, 우리 신앙이 성과주의로 흘러갈 가능성을 강하게 담지하고 있다. 이게 바로 '신명기적 신앙'의 결정적 약점이다. 우리가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했다면, 우리의 '나중'은 심히 창대하게 될 것인데, 만일 지금 현실에서 우리 삶이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가 과거에 하나님을 온 마음과 정성으로 진실하게 섬기지 않았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이중 예정설의 추론과 신명기적 신앙의 추론 방식을 전복하는 것이 바로 욥기서 이야기다. 아무 죄가 없는 의인에게도 견딜 수 없는 삶의 고통과 좌절이 도래한다. 이는 과거에 하나님을 섬기는 데 불경건했거나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이 아니다. 삶의 흐름은 때로 무심하고 때로 잔혹하다. 아무리 성실하고 진실하게 살아도 고통과 고난은 도래한다. 그리고 실패한다. 거듭된 실패 가운데, 실패와 좌절을 자기 잘못으로 돌리며 자학하는 모습은 우리를 더욱 슬프게 한다.

하나님이 "세계의 시인"이라는 말은, 다시 말해 우리가 우리와 세계에 관해 ‘소설’을 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중 예정설과 신명기적 신앙이란, 곧 세계에 대한 경험을 통해 하나님의마음을 추론한 결과로 생긴다. 그것은 우리 추론이지 하나님 마음이 아니다. 하나님은 이 세계를 향해 자신의 꿈을 보내신다. '하나님나라'라는 매체를 통해. 그 꿈은 사랑의 꿈이다. 사랑은 타자를 향한 에로스적 욕망과 타자의 난입을 받아들이고 품는 아가페의 상호작용이다. 그래서 사랑은 정신적이면서 동시에 육체적이다.

우리의 에로스는 언제나 사랑의 육적인 측면만을 강조하는 듯하다. 이 육적인 에로스는 단지 성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정신적 사랑과 육체적 사랑의 이분법으로 사랑을 구별하기 시작한 것은 데카르트의 정신과 물질의 이분법이 도입되고 나서다. 물론 고대와 중세의 기독교 신학은 육체성(corporeality)에 대해 부정적인 경우가 많았다. 기독교가 영지주의적 사고방식에 영향을 크게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는 매우 육적인 사람이어서, 그는 먹보와 술꾼으로 알려졌다고 복음서는 전하고 있다. 진짜 먹보와 술꾼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하다. 육체적인 행위들을 저급하거나 부정한 것으로 인식하지 않고, 가난한 이들 그리고 죄인들과 더불어 어울려 먹고 마시는 일에 전혀 거부감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런 일에 거부감을 느낀 사람들은 영지주의적 세계관에서 살아갔던 후대 사람들이었다.

'성육신'이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곧 하나님이 사람들을 사랑하셔서, 스스로 인간의 몸을 입고 인간이 되셨다는 말이 아닌가.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아가페와 에로스라는 추상적 이분법에 근거해 있지 않다. 그래서 켈러는 "신적 에로스는 성이라는 수단을 통해 피조물의 내재적 생명을 부른다"고 말한다. 인간의 에로스적 사랑 안에는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방법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정신과 몸의 혼종성으로 구성된다면, 사랑은 인간의 몸을 배제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그래서 우리의 '에로스'에는 사랑의 진실이 담겨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만을 사랑하시고 우리 몸은 악하다고 버리는 영지주의적 사고를 하지 않으신다. 그래서 아가서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밤에 침상에서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를 찾았노라. 찾아도 찾아내지 못하였노라(아가서 3:1)."

사랑하는 이를 찾는 연인의 마음에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연인이 부재하는 밤은 곧 하나님이 부재하는 세상과 같은 것으로 비견된다. 하나님은 우리를 욕망하시고, 우리도 또한 하나님을 욕망한다. 이 욕망이 적절한 대상을 찾지 못할 때 도착(perversion)의 위험이 상존한다. 그럼에도 욕망은 그 자체로 놓고 보면 사랑하는 혹은 소중한 연인인 타자를 갈망하는 그리움이며, 이는 곧 욕망하는 타자의 부재를 가리키는 기표이기도 하다. 그렇다. 하나님과 우리가 함께하는 하나님나라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나라는 쉬지 않고 우리를 향해 도래하는 중(coming)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에로스로 표현하는 것이 불경하다고? 육체가 야기하는 불안정성으로 악하다고 간주했던 그리스 영지주의와 기독교 성육신 개념이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바로 그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어떻게 하셨는지를생각해 보라. 그분은 전지전능하고 절대적인 신의 자리에서 내려왔다. 무기력한 인간의 모습을 입고 인간이 '되셨다.' 인간인 척하신 게 아니다. 요즘 할리우드 영화에 등장하는 '슈퍼 히어로'들처럼 인간 모습이지만 신적인 능력을 지니신 것이 아니었다. 기적을 행할 능력이 있지 않으셨냐고? 그렇다면 왜 그 억울한 십자가 처형을 감내하고 죽으셔야 했나.

아가페와 에로스를 구별하는 인간 문명의 습벽은 가부장적 성 문화와 관계가 있다. 사랑을 고상한 정신적 활동으로, 에로스적 욕망을 부도덕한 동물적 탐욕의 발현으로 이분화하면서, 힘 있고 능력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도착된 육체적 욕망의 충족을 동물적 욕망에 주저앉은 나약한 인간의 본성으로 정당화하고 계속 그 짓을 즐겼을 뿐이다. 아가페와 에로스 이분법은 또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밤 문화와도 관계가 있다. 남자들의 도착된 성욕(perverted sexual desire)을 동물적 본능 발산으로 정당화하고, 그저 즐기려는 도착된 욕망이 아가페와 에로스 이분법에 도사리고 있다. 욕망은 사랑과 분리된 것이 아니다. 삐뚤어진 욕망을 사랑으로 정당화하며, 마음을 받아 주지 않는 상대방에게 심지어 폭력까지 행사하는 남자(들)의 욕망은 결코 온전한 욕망이 아니다. 그냥 도착된(perverted) 욕망일 뿐이다. 최고 위치에 오른 알파메일이 되지 못해 심리적 좌절감과 나락을 체험하는 생물학적 남성이 그 실패와 상처에 대한 무의식적 심리 보상을 추구하는 것일 뿐이다.

사랑이 몸과 함께하는 에로스적 측면을 갖고 있는 것은 인간의 삶이 몸을 통해 활동하고 변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타인의 몸적 측면을 받아들인다는 일은 우리 스스로를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 스스로를 그 상대방과 더불어 변혁해야 하는 문제이다. 사랑한다면서 삐뚤어진 욕망으로 가득 찬 도착된 삶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물론 그 변혁은 상호적이다. 한쪽만 일방적으로 변화를 강요받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어렵다. '사랑은 상대방을 향해 내 삶의 변화를 도모하는 것'이라고 문자적으로 규정하고, 그에 따른 도덕적 규칙들을 부과하게 되면, 우리의 성도덕은 더 이상 '도'와 '덕'의 문제가 아니라 도착된 율법주의로 변질된다. 성 문제를 둘러싼 많은 도덕률이 가부장제 속에서 도착된 삐뚤어진 성욕을 정당화하는 법으로 타락하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그래서 이미 언급했듯이, 한/죄의 폐쇄적 순환 논리가 작동하고, 이것이 죄의 패턴으로 굳어진다.

아가페와 에로스의 사랑 이분법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사랑은 곧 'com/passion'이다. 사랑의 힘이 발휘되는 것은 욕망의 촉발을 통해서다. 상대방을 향한 욕망이 촉발되지 않는다면, 우리 사랑은 시작되지 못한다. "욕망은 욕망을 점화한다." 그렇게 서로 욕망이 욕망을 점화하면, 우리들의 사랑은 시작되고 깊어간다. 즉 사랑은 열정(passion)이다. 켈러는 'passion'이라는 말 속에 담긴 의미를 라틴어와 영어의 어원을 통해 이중화한다. 라틴어 어원은 '고난' 혹은 '고통'을 의미한다. 영어는 '열정'을 의미한다. 사랑은 사랑의 대상을 향한 열정의 촉발이며, 그것은 바로 욕망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래서 우리의 에로스 속에는 하나님의 사랑의 형상이 담겨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정신과 육체로 구성된 분열된 인간의 모습을 그대로 입으시고 인간이 되셔서, 그들과 함께 거하시는 것으로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셨다. 하나님이 아들을 낳아, 그 아들을 이 세상에 대신 보내신 것이 아니다. 복음서에서 예수가 그와 같은 비유를 사용하는 이유는 비유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문자 그대로 진실이라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을 그리고 우리를 욕망하신다. 그래서 우리와 함께(com-)하시기 위해 이 땅에 인간의 모습을 입고 내려오셨다. 자신을 비우시고(kenosis).

우리 사랑은 언제나 '실패'를 예감한다. 내가 품은 타자와 내 밖의 실재인 타자 사이에는 근원적인 심연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성공할 수 없다. 하지만 진정한 사랑이란, 그 실패를 부여잡고 나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에는 실패가 없다. 당신이 욕망하는 사랑하는 사람은 '고통' 속에 있다. 기독교의 사랑을 가장 가깝게 표현하는 말은 그리스어 '스플랑크조마이'로, 예수가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 예루살렘을 향해 가다 강도를 만나 피 흘리며 쓰려져 있는 이를 보고 사마리아 사람이 느낀 감정을 가리킨다. 일부 영어 성서에서는 그 말을 compassion으로 번역했다. 우리말로는 '긍휼'로 번역했다. 여기에는 이 compassion을 불쌍한 사람을 향한 동정이나 연민으로 오해하게 만드는 요인이 상존한다. 하지만 예수가 말하는 compassion은 그런 것이 아니다. '스플랑크조마이'는 '애간장이 끊어'지거나 혹은 '창자가 끊어'지는 상태를 가리킨다.

사마리아 사람이 피 흘리며 쓰러진 사람을 도운 것은 불쌍하거나 측은하다는 차원에서 더 나아가 피해자의 아픔을 자신의 창자가 끊어지듯이 아프게 느꼈기 때문이다. 그를 돕지 않는다면 자신이 아파서 못 견딜 것임을 알기 때문에 도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우리가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사람의 간절한 손길을 일부러 혹은 짐짓 못 본 체하며 지나가면서, '동전 몇 닢'을 던져 주는 것을 보고 '저 사람을 돕는 진정한 방식이 아니야'라고 속으로 자기-정당성을 추구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아픈 사람을 보고 외면하는 것은 외면하는 이의 마음속에 아픔을 야기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 아픔을 외면하거나 다른 논리로 정당화하려 한다.

그렇다. 사랑의 열정은 바로 그 아픔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 아픔을 내 아픔처럼 품고 돕지 않을 수 없는 열정, 그래서 켈러는 'compassion'을 '함께-고난당하는-열정'(com/passion)으로 표현한다. 이 아픔을 품을 수 있는 열정을 아가페라고 한다면, 아파하는 상대를 향한 사랑의 열정은 곧 에로스다. 그의 아픔을 사랑하기보다는 나의 생물학적 욕망을 도착적으로 충족하려는 욕망은 에로스가 아닌 것이다. 진정한 에로스는 상대방의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측면들, 그의 나약하고 불안하고 상처받은 측면들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아픔과 좌절을 향해 사랑으로 다가가는 열정을 의미한다. 그래서 켈러는 우리 시대 정치신학이 바로 이 사랑의 '실패와 더불어 머물기'(staying with failure) 혹은 '더 나은 실패'(better failure)를 추구해야 한다고 힘주어 역설한다.

성공보다 더 나은 실패. 사랑이 깊어갈수록 그(녀)의 아픔이 더 절절히 느껴져야 하건만, 우리의 사랑에서는 언제나 내 아픔이 상대로부터 외면당했다는 서운함만 깊어간다. 서운함이 생물학적으로 내장된 투쟁-도피 반응(fight-flight response)의 매개를 통해 집단 심리의 적/아군 이분법을 틀로 삼아 작동한다면, '혐오'와 폭력은 언제나 상존하는 어떤 것이 된다. 이 진화적 알고리즘의 한계와 오작동을 넘어, 우리는 사랑을 추구하는 것이다.

우리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그 아픔에 우리가 함께할 수 있을까. 아픔을 품고, 그들과 더불어 실패할 수 있을까. 실패를 성공보다 낫게 여기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중세 신비주의자 하데비치의 시 '다짐 the resolute'을 소개한다.

"내 자신을 사랑으로 섬기는 데 내주었기 때문에
내가 지든 아니면 내가 이기든,
나는 다짐했다:
나는 언제나 그녀에게 감사드릴 것이다.
내가 지든 이기든 간에 말이다;
나는 그녀의 능력 안에 존재할 것이다."

※필자 소개 이미지를 클릭하면 '길 위의 신학' 전체 기사 목록을 보실 수 있습니다.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