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작된 진리

요즘은 '진리'라는 말을 잘 쓰지 않는다. 그런 건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 시간이 오래 지나다 보니, 요즘은 '대안적 사실'(alternative fact)이라는 아주 엉뚱한 말을 만들어 쓰기도 한다.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그의 대변인들은 취임 초기에, 주류 언론에서 비판하는 내용을 반박하면서 '대안적 사실'에 기반하여 말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우리 시대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태도다.

결국 진리 혹은 사실은 '의견의 문제'로 좌천되고 말았고, 트럼프 정권이 말하는 '대안적 사실'은 '가짜 뉴스'(fake news)를 가리키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절대 진리에 대한 그 어떤 믿음이나 주장도 결국 인간의 이해의 한계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포스트모더니즘적 비평'이, 이제는 진리와 가짜 뉴스가 동등한 수준에서 다루어지는 행태로 진화한 것이다.

그들의 입을 통해 언급되는 '진리' 혹은 '사실'은 정녕 진리나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과 의견을 대변하는 조작된 자료들에 불과하다. 그러한 시대 풍조를 따라, 우리에게도 진리는 이제 조작된 사실 혹은 조작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이제 그 어느 누구의 진리도 '진리의 이름'으로 호명되지 않는다. 진리가 아니라 '진실'이 진리나 사실을 대치하는 이름이 되었다.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본시 '진리'란, 그 누구에게도 보편적으로 동일한 진리를 가리키는 말이다. 하지만 진실은 그를 밝히고 주장하는 사람 입장에서 '거짓 없이 진실하다'는 말이지, 그것이 공정하게 혹은 객관적으로 진리라는 말은 아니다. 따라서 진리의 이름으로부터 진실이라는 이름으로의 전환은 우리가 실재와 세계를 보는 관점의 급진적 전환을 의미한다. 근대의 객관적이고 사실주의적인 세계가 우리가 살아가는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혹은 '포스트-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는 더 이상 유통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주지해야 할 더 중요한 사실이 있다. 포스트-포스트모더니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포스트모더니즘이 남겨 준 주체적 진실의 세계는, 이제 모든 것을 자신의 이익에 따라 조작하는 시대, 그래서 조작된 진리의 시대를 맞이하게 됐다. 이는 소셜미디어 시대의 어두운 그늘이다. 도대체 무엇을 믿어야 할지 가늠하는 것이 불가능한 시대가 되었다. 그래서 맹목적인 절대적 진리를 무조건적으로 외쳐 대는 '극우'의 목소리가 전 세계 곳곳에서 호소력을 지닌 목소리로 유혹의 손길을 뻗칠 수 있는 것이다.

진리 앞에 선 우리의 태도

진리 앞에 선 우리의 태도는 요한복음에 나오는 빌라도 총독의 어깻짓에 가깝다. 그는 진리를 알고 있었다, 혹은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람들 앞에 나가서 "나는 너희가 최악의 범죄자라고 데려온 이 예수에게서 범죄의 혐의를 찾지 못하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광장에 모인 유대인 군중들은 피를 원했다. 만일 그 피가 무고하다면, 핏값을 우리 후손에게라도 치르게 하겠다고 호언했다.

(이 요한복음의 기록과 관련해 참 가슴 아픈 기억이 있다. 나치 독일은 바로 이 구절을 신학적으로 인용하면서 그토록 많은 유대인을 아우슈비츠로 보낸 만행을 정당화했다. 나치 독일에 신학적 정당성을 제공한 독일 최고의 지성인들을 보면서, 칼 바르트는 더 이상 '자유주의신학'에 희망이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고 전해진다.

그렇다, '자유주의신학'은 요즘 보수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우겨 대는 것처럼, 진보 신학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역사 비평에 근거해 인간의 이성적 탐구를 통해 진리를 구축할 수 있다고 믿었던 근대 후기부터 20세기 초엽까지의 유럽 신학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인간의 이성이 진리의 시금석이 될 수 있다고 믿었던 계몽기 철학과 인문학을 배경으로 신학은 이성적 작업을 시도하고 있었고, 사실 중세 신학 전통을 계몽기적으로 승계한 것에 더 가깝다.)

그 성난 군중 앞에서 빌라도는 어깨를 으쓱거린다. 로마제국이 보낸 총독이자 시민이었던 빌라도는 문화와 종교의 상대성을 존중하는 상대주의자였고, '이 사람은 무고한 것 같은데, 너희의 종교와 문화가 이 사람을 극악한 범죄자로 판단한다면, 내가 어쩌겠나'라고 생각하며, 그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 어깻짓은, 다른 한편으로 '진리든 진실이든, 그게 뭐 대수인가'라는 태도를 대변한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탈세속화(post-secularization) 시대의 기호 자본주의(semio-capitalism) 체제 아래에서, 디지털 네트워크로 연동된 존재로 살아가는 우리는 빌라도의 태도와는 다른 태도로 살아갈까. 우리 역시 빌라도의 어깻짓 말고는 다른 대응 방법을 찾지 못한다. "'진리'(truth)란 무엇일까?"라는 물음은 물어지지 않고, 그저 내가 믿고 경험한 것이 진리로 간주되는 세상에서, 누군가가 자기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침 튀겨 가며 함성을 지르면, 다른 방법이 없다. '어쩌라고?' 그렇게 우리는 '진리'가 개인의 진실을 대변하는 시대에, 타인들의 입장에 '상대주의자'가 되어 살아간다. 저마다의 진리로 말이다.

참다운 이치眞理,
그에 관한 이론神學

캐서린 켈러는 "모든 진리를 삐딱하게 말하라"는 에밀리 디킨슨의 말을 인용한다. 저마다의 진리로 가득 찬, 그래서 진리로 가득 찼지만 정작 무엇이 진리인지는 전혀 알 수 없게 되어 버린,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상대주의적 태도로 타인과 타인들의 말을 취할 수밖에 없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진리라는 게 있기나 해?" 아무도 '그렇다'고 대답하지 못한다.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진리가 이미 죽었음을. 하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말하지 않음이 더 무섭다. 이제는 '진리'라는 말조차 언급하지 않기 때문이다. 진리의 죽음조차 외면당하는 것이다.

그런데 "진리를 삐딱하게 말하라"고 켈러는 주장한다. '삐딱하게', 말하라고? 아무도 괘념하지 않는데, '삐딱하게 말한다고 뭐가 달라지는가', '말해야 하는 이유는 또 무엇인가' 하는 물음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사실 우리는 진리를 정면으로 응시할 수 없다. 진리는 시대의 구조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시대의 구조 속에서 기묘한 것, 그래서 무시되어야만 하는 어떤 것으로 그려진다. 이전 시대에 진리는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인식될 수 있는 것을 의미했지만, 구조주의 시대 이후 탈구조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진리란 (만일 그런 것이 존재한다면) 오히려 체제의 구조에 은폐되어, 똑바로는 인식할 수 없는 어떤 것이 되어 버렸다.

독일의 화가 한스 홀바인(Hans Holbein the Younger, 1497~1543)의 '대사들 The Ambassadors'. 1533년作.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이미지

진리에 대한 이러한 인식의 전환을 상징하는 그림이 홀바인의 '대사들 The Ambassadors'인데, 이 그림 하단에는 이상한 모양의 형체가 그려져 있다. 그림을 정면에서 보면 무엇인지 잘 알아볼 수 없지만, 이 그림을 옆으로 누이어 삐딱하게 보면 형상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 형상은 해골이다. 홀바인은 정면으로 그림을 바라보면 이 형상을 잘 알아볼 수 없도록 그렸다. 그림을 삐딱하게 봐야지만 이 형상의 실체를 볼 수 있다. 정신분석학자 라캉은 이를 실재계(the Real)의 진리라고 해석했다.

실재계는 우리에게 직접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 누구의 삶이라도, 사랑을 위해 가톨릭교회와 결별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영국 왕이나, 교황과 왕을 대신해서 만나고 있는 대사들이나 모두 '죽음'이라는 실재계의 난입을 저지할 수 없다는 의미일 것이다. 영국 왕 헨리 8세는 앤 불린과 결혼하기 위해 캐서린 왕비와의 이혼을 교황에게 청원했다. 이를 거절당하자 그는 가톨릭교회와 관계를 끊고 영국 성공회를 창립했다. 개신교회 교단 '성공회'가 영국 왕의 사랑을 위해 만들어지는 순간이다.

홀바인의 그림 '대사들'을 삐딱하게 봤을 때 드러나는 해골.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이미지

'대사들' 왼편에 있는 인물은 영국 주재 프랑스 대사 댕트빌인데, 프랑스 왕의 밀서를 들고 조르주 셀브 주교가 찾아온 순간을 그린 것이다. 두 사람 사이 2층 탁자에는 해시계, 나침반, 지구본 등이 놓여 있다. 그림 속 두 사람이 살아가던 항해와 탐험의 시대를 의미한다. 인간이 자신의 이성과 지능을 활용해 세계를 개척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이 시대의 조류를 형성하고 있으며, 헨리 8세가 결정한 가톨릭교회와의 단절은 바로 그 용기를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혼인은 더 이상 가문 간 만남과 결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의지와 결단에 의한 행위라는 사실을 헨리 8세는 가톨릭교회와의 단절을 통해 선포했다.

하지만 그림 속 인물들이 헨리 8세의 행위를 지지하기 위해 모인 것은 아니었다. 헨리 8세가 하는 일을 중단하고 신앙의 우산 안으로 다시 들어오게끔 설득하기 위한 과정을 상의하는 자리였다. 바로 이 순간에 홀바인은 해골을 삐딱하게 그려 넣었다. 그 모든 삶의 과정에 도사리고 있는 진정한 실재의 형상인 죽음을 상징하는 해골을, 그것도 가장 앞자리에 그려 넣은 것이다.

홀바인이 실재가 죽음의 형상으로만 찾아온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 그림에는 또 다른 메시지가 슬쩍 끼워져 있다. 잘 안 보이지만, 그림 왼편 상단에 그림의 배경이 되는 커튼 한쪽 끝에는 가톨릭교회를 상징하는 예수가 달린 십자가 형상이 슬며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 '십자가'가 개신교의 상징이 아니라 가톨릭교회의 상징이라는 점에서 홀바인이 그림을 통해 나타내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명확해진다. 아무리 과학기술이 발달하고 있으며 인간의 능력이 무한한 것처럼 보이는 시대라도, '해골'의 형상으로 다가오는 죽음의 실재를 우리는 이기지 못하며, 결국 궁극적 구원은 가톨릭교회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것이라는 메시지다.

홀바인의 메시지가 '진리'인지에 대해서 개신교 목사인 나는 그저 '어깻짓' 말고는 달리 할 말이 없다. 자신들이 믿는 종교가 자신들을 구원할 것이라는 믿음에 무슨 말을 더하겠는가. 이게 바로 포스트모더니즘이 '해체'(deconstruction)를 주장한 이유이다. 어떤 진리의 이름도 결국 그 진리가 속한 권력 구조의 이익에 맞게 재편성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의·진리·평화·선 등의 거대 담론이 아니라, 나만의 진실에 작게 집중하는 전략이 소위 들뢰즈식 '탈주 담론'으로 호소력을 있게 다가오기도 한다.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적 행위는 분명히 시대나 체제의 구조가 요구하는 거대 담론, 즉 대타자의 명령을 탈주하는 효과를 갖고 있다.

하지만 같은 동전의 반대 면인 '소확행'이나 '탈주'는 이 시대 구조나 체제를 변혁하거나 혁명을 일으킬 동력을 전혀 갖고 있지 않다. 이 시대와 구조가 주목하지 못하는 조용하고 은밀한 곳으로 탈주를 감행하는 행위는, 다른 각도에서 볼 때 회피나 도망으로 인식될 소지가 있다. 홀바인의 은폐된 진리 속 숨겨진 메시지는, 왜 우리가 탈주를 감행해야 하는지에 대한 정당성을 제공해 줄 뿐이다.

그럼에도, 홀바인의 그림은 '진리'다운 메시지가 담겨 있다. 실재는 결코 정면에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홀바인의 그림이 담고 있는 가톨릭교회의 명시적 메시지는 '진리'가 아니라, 진리에 관해 자신들이 믿고 있는 바를 의미한다. 진리에 대한 그들의 경험을 자신들의 메시지로 전달하고 있다. 정작 진리는 그들의 메시지를 통해서가 아니라 그림 전체를 삐딱하게 쳐다봐야만 드러난다는 홀바인의 이야기는, 우리가 시대에 설파되고 있는 수많은 진리 담론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다뤄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진리를 삐딱하게 말하라"는 디킨슨의 말을 홀바인은 먼저 실천한 셈이다.

그렇다면, '삐딱하게 말하기'는 소확행적 탈주와 무엇이 다른가. 가장 결정적 차이는 체제와 구조가 야기하는 모순과 왜곡에도, 구조 너머에 정녕 진리가 존재한다는 확신이며, 이 신앙에 가까운 확신이 있기에 우리는 여전히 변혁 혹은 혁명을 꿈꿀 수 있다. 우리의 선언과 행위가 시대 구조를 변혁하는 일과 아무 상관이 없다면, 우리의 운동은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만다. 이것이 바로 포스트모더니즘이 '상대주의'(relativism)의 덫으로 빠져 버린 지점이다. 우리 시대 우리가 말하는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는 한계를 갖고 있음을 인식하지만, 이 상대성(relativity)에 대한 인식이 반드시 필연적으로 상대주의로 나아가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모두가 빌라도의 어깻짓을 반복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잘못된 이분법적 물음에
삐딱하게 답할 수밖에 없는 이유

요즘 우리 시대 '진리' 개념과 연관해서 던지는 물음표는 바로 상대주의와 극우 극단주의의 결합이다. 가짜 뉴스를 만들어 '대안적 사실' 개념으로 탈바꿈해 버리는 트럼프식 창조적 조작이 '극우' 단체를 통해 만들어지고 있는 우리 시대 현실 말이다. 정말 우려스러운 것인 이 '조작'이 '진리' 개념을 매개로 만들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신을 제외한 모든 이의 이론과 주장은 '상대주의적 태도'로 평준화해 버린다. 귀담아들을 필요가 없는, 중요하지 않은 적의 논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주장하는 것은 영혼을 울리는 절대적 진리의 차원을 담지하고 있다. 이것을 주장하고 설득해 나가기 위해서는 그 어떤 수단도 용인이 된다. 이런 극단적 태도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 주는 것이 바로 '테러리즘의 논리'다.

실로 철학자 지젝은 우리 시대의 역설을 이렇게 표현한다. 도스토옙스키 시절에는 '만일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우려가 있었다. 하나님의 존재가 도덕의 절대적 토대였던 것이다. 그런데 라캉의 말을 빌려 지젝은 "만일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금기된다"고 선언한다. 정신분석학적으로 '금기'란, 곧 도덕법칙이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작동하는 방식을 의미한다. 따라서 모든 것이 금기된다는 말은 곧 도덕이 작동한다는 말이다. 역설적으로 이 테러리즘의 시대에는 신앙이 도덕의 해체를 촉진하고 있다. 오히려 신앙 없는 사람들이 도덕적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다. 2001년 발생한 9·11 테러는 바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하여지지 않았던가!

이 지젝의 역설적 묘사를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적 표현으로 받아들이는 착오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 시대 신앙은 우리 시대 도덕과 윤리의 토대가 아니라, 내가 주장하는 이기적 생각과 행동의 정당성으로 남용되는 일이 더 많다는 지적이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진리의 조작'이 '진리의 이름으로' 남용된다.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 부도덕과 비윤리적 행위를 회개하고 정화하는 힘으로 작용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의 불순한 이기심에 기반한 생각과 행위가 하나님 이름으로 정당화되는 시대다. 그러니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금기된다[도덕과 윤리가 정상적으로 작동한다]"는 말이 시대에 대한 적확한 묘사처럼 다가온다.

이 이면에는 적/아군의 이분법이 작동하고 있다. 요즘 기독교의 진리를 '동성애에 찬성하는가 반대하는가'라는 이분법으로 묻는 잘못된 풍조가 우려스럽게도 신앙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널리 퍼지고 있는 듯하다. 더 우려스러운 사실은 이러한 행위가 목회자와 평신도 사이에서 무비판적이고 맹목적으로 퍼져 가고 있다는 것이다. '진화인가 창조인가'의 이분법이 '동성애 찬성인가 반대인가'의 이분법으로 진화했다.

켈러는 이에 대해 사사기의 '쉽볼렛' 이야기(사사기 12장 5-6절)를 인용하면서 비판한다. 구원이나 진리가 사사기의 '쉽볼렛'처럼 '구원으로의 암호'로 변질됐다는 것이다. 이쪽인가 저쪽인가 정체를 밝히라 묻는 잘못된 풍조 말이다. 사사기의 이야기는 매우 처참하다. 길르앗 사람이 에브라임 사람을 판별하기 위해 '쉽볼렛'을 발음해 보라고 시켜서 '쉽볼렛'이 아니라 '십볼렛'이라고 발음하면, 에브라임 사람으로 판단해 요단강 나루턱으로 끌고 가서 죽였다는 이야기다. 그때 죽임을 당한 에브라임 사람의 숫자가 4만 2000명이었다고 성서는 기록하고 있다.

고대 당시의 4만 2000명을 오늘날과 인구 비례로 비교해 보면, 오늘날에는 10만을 훌쩍 넘어 거의 50만 명에 가까운 숫자가 되지 않을까. 메소포타미아문명 시대의 4만 2000명은, 현대의 뉴욕이나 서울의 인구처럼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에 거주하는 사람들 숫자와 비슷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을 처참하게 죽이는 현장에서 목숨을 건지는 '패스워드'가 바로 '쉽볼렛'이었던 셈이다.

'진화인가 창조인가'라는 잘못된 이분법도 마찬가지다. 이 이분법적 물음을 진리 판단의 시금석인 양 남용하는 것은 애초 기독교 신앙을 잘못 배운 탓이다. 아우구스티누스조차도 이런 이분법적 물음으로 기독교 창조론을 해석하는 우를 범하지는 않았다. 문제는 이 질문이 너무나 맹목적으로, 그리고 무비판적으로 이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단순한 질문이 여러 복잡하고 교묘한 질문보다 최소한 순수해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순수해' 보일 뿐, 이 질문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타락시키는 정말 나쁜 질문이다. 이런 질문 형식이 결국 역사의 중요한 시기마다 등장해 기독교 신앙을 타락시켰다. 몽매한 많은 사람이 이 질문의 유혹을 따라 악의 행위에 동참했다. 사사기에 나오는 살육의 기록이 바로 그것 아닌가.

성서는 21세기의 우리에게 길르앗 사람처럼 에브라임을 죽이라고 명하던가. 길르앗 사람들이 에브라임을 잔혹하게 죽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곧 길르앗 사람을 지휘하는 입다의 불완전한 신분을 전쟁의 영웅적 승리로 은폐하려는 것이 아니었을까. 성서에는 길르앗 사람들의 잔혹한 행위를 권면하거나 권장하는 대목이 전혀 없다. 하나님 관점에서 그때의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 시대에 성서는 우리에게 '쉽볼렛'을 발음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이런 장면들을 정치적으로 남용하는 어설픈 신앙인들이 있을 뿐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화석, 멸종한 동물의 뼈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나님의 완전한 창조 세계에 '멸종'한 동물이 있었다는 사실은, 아우구스티누스가 '하나님 창조의 완전성' 개념에 대해 다른 생각을 시도하도록 만들었다. 동물의 멸종은 창조 세계가 우리가 생각하는 '완전'한 세계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할 테니 말이다. 적어도 이 고대 교부는 '진화인가 창조인가'식의 단순한 질문을 기독교 신앙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무책임하게 내던지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자신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완전한 창조 개념을, 화석이라는 증거 즉 '완전한 창조'라는 개념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신학적 위기 앞에서 다시금 성찰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가설적으로 '종자로부터의 창조론'을 대안으로 제시한 것이다. 하나님이 어떤 것은 처음부터 완벽하게 만드시고, 어떤 것은 종자 혹은 씨앗 형태로 만들어서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 출현하도록 하시고, 어떤 것은 시간이 지나면 그 역할을 다하도록 하셨다는 주장이다.

그렇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어설프고 맹목적인 질문 앞에서 삐딱하게 대답한 것이다. 질문 자체가 틀렸으니, 정답이 나올 리 없지 않은가. 그래서 진리는 삐딱하게 말해질 수밖에 없다. 진리에 대한 물음 자체가 틀린 질문이었으니 말이다. 철학자 들뢰즈는 해답보다 물음이 더 중요하다고 했다. 어떻게 묻느냐에 따라, 해답의 범위가 정해지기 때문이다. 잘못된 물음을 통해서는 정답 혹은 진리에 이르지 못한다. 진리에 이르려면, 물음을 올바로 설정해야 한다.

'올바른 물음'을 던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바로 그 방법들 중 하나를 홀바인의 그림이 보여 주고 있다. 그들이 말하는 바를 '삐딱하게' 보는 것이다. 그들은 똑바로 보라고 하지만, 그들의 전략에 말리지 않고, 나만의 방식으로 사태를 다시 보려면 그들과 다른 시각으로 사태를 들여다볼 수밖에 없다. 수많은 뉴스가 있지만 어떤 뉴스가 진실인지 판단하기 어려운 시대, 그래서 오늘날을 가짜 뉴스의 시대라고도 하는데, 이때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판단 방법은 '삐딱해지기'이다.

사마리아 여인이 던진
'올바른 물음'

켈러는 진리를 올바로 묻기 위한 방법의 예증으로, 요한복음에 나오는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 이야기를 제시한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에게 '삐딱하게' 묻는다. "유대인인 당신이 사마리아 여인인 나에게 물을 달라니, 무슨 가당치 않은 말이오?"라고 말이다. 너무도 당연한 물음이지만, 경멸받는 사마리아인이 유대인에게 던질 만한, 가부장적 위계질서하에 있는 당대의 여자가 남자에게 던질 질문은 아니었다. 그녀는 당대의 구조와 질서에 삐딱하게 반응했다. 예수는 내가 누군지 알았다면 오히려 사마리아 여인이 생명의 물을 달라고 부탁했을 것이라고 답했다.

다시 여인의 삐딱한 질문이 이어진다. 물 길을 그릇도 없어서 나에게 물을 달라 부탁하는데, 무슨 수로 생명의 물을 길어 주겠다고 말하느냐고. 예수가 생명의 물을 줄 힘이 자신에게 있다고 힘주어 말하자, 여인은 나도 그런 물을 받았으면 좋겠다고 청한다. 그러자 예수는 "남편을 데려오라"고 명한다. 여인은 "남편이 없다"고 대답한다. 이 대답 속에 여인이 겪는 삶의 고난과 상처가 있다. 가부장적 사회구조 속에서 '남편이 없다'는 것은 생존의 위협을 받는 일이며, 그 여인이 주변에서 받은 사회적 낙인과 그로 인한 주변화(marginalization)의 고통이 그대로 담겨 있다.

여인은 이 상처를 드러내는 데 수치심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삐딱하게 묻는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요한복음 4장 20절)." 그러자 예수는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4장 21절)고 말하면서, 그때 믿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4장 23절)라고 하고, "그때의 그리스도가 바로 나다"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여인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증거한다.

생명의 물인 진리가 예수로부터 여인에게로 흐른다. 생명의 물은 영과 진리 안에서 흐르는 물이다. 생명의 물이 흐르는 길로 나아가는 방법은, 바로 기존의 완고하고 부정의한 구조에 대해 삐딱하게 묻는 것이다. "왜 유대인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달라 하십니까"라는 물음을 통해,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는데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해야 한다고 하더이다"라는 반문을 통해 그녀는 그리스도를 만났다.

이 진리의 흐름 속에서 예수는 그 여인이 처한 삶의 상황을 타인들의 소문과 평가가 아닌 그 여인의 말을 통해 바라보았다. 유대인 예수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당대의 편견에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건네고 물을 달라고 부탁할 수 있었다. 유대인이 사마리아인에게, 남자가 여성에게 말이다. 진리는 바로 그 속에 존재하고 흐른다.

진리가 변하지 않고 영원하다는 말은 진리가 고정되어 박제돼 있다거나, 유리와 같이 변하지 않는 고체의 형상으로 영원하다는 말이 아니다. 진리는 우리가 만난 이들이 구체적 삶의 상황에서 겪는 아픔과 고난을 그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받아들일 때 열리는 것이다. 그 진리는 그저 받아들이고 따르는 게 아니다. 이는 사마리아 여인의 경우처럼, 진리의 생수가 그녀에게로 흘러가, 그녀가 다시 동네 사람들에게 전하는 장면에서 가장 적실하게 드러난다. 진리는 '사건'이다. 진리와의 만남을 통해 삶이 변혁되는 사건 말이다.

우리는 진리를 향해 '삐딱하게' 물어야 한다. 진리를 담지한 구조나 체제가 오히려 진리를 은폐하고 있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동성애를 찬성하는가 반대하는가'라는 이분법적 물음에 맞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어떻게 바라보시고 그들을 향해 어떤 몸짓을 하실까 먼저 묻고 생각해 봐야만 한다. 이분법적 질문에 고분고분 즉답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이단과 사이비로 몰아가는 행태는 기독교의 진리를 은폐할 뿐이다. 하나님의 완전한 창조라는 자신의 신학적 생각 앞에 모습을 드러낸 화석을 보고 신학적 사고를 새롭게 고칠 수 있었던 아우구스티누스의 용기는 그래서 의미가 있다.

결국 '진리'는 어떤 무엇이 아니다. 우리가 진리를 향해 묻고 탐문하는 과정이다. 삐딱한 질문을 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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