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의한 정의
정의로운 부정의

정의(justice)는 질퍽거리고, 끈끈하고, 애매모호하다. 정의란 언제나 관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관계는 얽혀 있고, 관계의 네트워크에서 '정의'를 세운다는 것은 결코 매끈하고 선이 분명한 일일 수 없다. 정의를 추구하던 시절의 우리가 자주 망각하는 사실이다. 정의와 공의를 언제나 매끈하고 선이 분명한 어떤 것, 즉 옳고 그름이 분명한 것으로 생각하는 습벽은 우리의 '환상'의 구조를 반영할 따름이다.

실재는 '정의'라는 이상으로만 구성되지 않는다. 오히려 정의는 많은 경우 '부정의'를 통해 꿈꾸어지고 열망된다. 지금 벌어지는 부정의한 현실의 정반대로 막연히 상상되는 것이다. 따라서 선이 분명하고 매끈한 정의는 그저 우리의 환상 혹은 환상의 투사일 뿐이다. 부정의한 현실은 생생하고 구체적이지만, 정의라는 이상은 막연하고 애매하고 내용이 없다. 정작 문제는 부정의한 현실을 극복하고, 정의로운 사회와 공동체를 만들어 나갈 시기에 두드러진다.

부정의한 억압의 현실에서는 모두가 부정의한 현실과 투쟁하느라 연대하고 협력하지만, 부정의한 억압의 주체가 극복된 다음 날 혹은 극복했다고 생각하는 때, 어제까지 연대하고 협력하던 동지들 간 연대가 이제 각자의 정의에 따라 이합집산을 반복하게 된다. 그래서 지젝은 '진정한 혁명은 혁명 다음 날부터'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정의 개념보다 부정의하게 남용되는 개념도 사실 없다. 정의를 분명하게 외치는 정권은 주로 독재 정권이고, 이들이 외치는 정의는 바로 기존 사법 질서 준수다. 독재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법적 장치들을 준수하는 것, 사실 그것은 부정의한 현실과의 타협을 의미한다. 외형적인 법적 질서 준수가 옳다고 절대적으로 고집하면서, 타인의 형편·사정·상황을 무시하는 정의는 결국 폭력적 부정의만 양산할 뿐이다. 이러한 상황의 정의는 그래서 부정의하다. 정의를 외치는 부정의한 사회질서와 구조에서 진정한 정의를 향한 외침은 언제나 불법적일 수밖에 없다. 부정의한 정의를 향해 정의를 외쳐야 하는 현실은 매우 역설적이고 서글프다. 지난 정권 때 세월호 유족들 마음이 이랬으리라.

나에게 '정의'라는 말이 처음 각인된 시기는 청소년기였다. 당시 '정의 사회 구현' 구호를 내세우면서, 광주의 혼란을 제압하고, 거리 문화를 정화하기 위해 불량배들을 삼청교육대에 보내 새롭게 정신교육을 시킨 전두환 대통령 각하를 통해서였다. 나는 정의란 그렇게 세워지는 걸로 알았다. 깔끔하게 옳고 그름의 선을 분명히 가지고, 소란스러운 여론의 들썩거림을 정리해 나아가는 정의 담론. 그렇게 확실한 정의가 결국 가장 부정의하다는 사실을 대학에 들어가서 알게 되었다. 광주가 어떻게 진압되었는지, 삼청교육대가 무엇이었는지를 말이다. 이와 같은 시절에 정의가 무엇이고, 부정의가 무엇인지는 불분명하고 애매하다.

매우 역설적으로 진정한 정의는 언제나 법 밖에 있다. 정의는 역설적으로 불법이다. 이 불법적 정의는 '불법' 자체가 정의롭다는 말이 결코 아니다. 정당한 몫의 분배 체계로 규정된 사법적 정의 시스템 안에는 정당한 몫이나 자기 목소리 들릴 기회가 억압된 이들을 위한 '정의로운' 자리가 마련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가리킬 따름이다. 다시 말해, 이때 우리가 말하는 '정의'는 정당한 몫의 분배 정의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몫을 인정받지 못하는 이들 혹은 처음부터 자기 몫이 배정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한 정의 개념을 말한다.

켈러는 오늘날 우리에게 다시 필요한 것은 정치신학이라고 주장한다.1) 이 '정치신학'은 지금까지 서구의 민주주의적 제도 장치에서 배제된 목소리들을 품는 정치신학이어야 하며, 이는 '인간 이외의 존재들'(the nonhumans)을 포괄하며, 특별히 지구 행성과 땅의 배제된 목소리들을 대변할 수 있는 정치신학이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것은 모든 존재의 얽힌 관계성을 정치의 자리로 복원하는 정치신학이어야 하며, 이는 곧 1인 1표 원칙에 근거해 모두에게 동등한 정치적 투표권을 배분하면 모든 사람의 의견이 동등하게 대변되리라는 서구적 민주주의 개념의 허구를 비판한다.

법과 선거는 결코 배제된 이들의 존재와 이들의 삶의 조건들을 괘념하지 않는다. 관계에서 구현되어야 하는 정의는 결코 정해진 질서와 규정들 속에서 말끔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도록 한 것은 '종교법'이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피 흘리며 쓰러진 강도 만난 사람을 제사장과 레위인이 외면해야 했던 것도 결국 '종교법' 때문이었다. 그래서 정의는 질퍽거린다. 분명한 선을 제시하고 따랐던 것은 제사장과 레위인이었다. 하지만 사마리아인은 그러한 법적인 선, 즉 법적으로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개념이 불분명했고, 그에게 최선의 판단 기준은 '사랑'(com/passion)이었다. 그의 사랑을 통해 드러나는 정의는 끈끈하고, 선 없이 애매하다.

도착된 정의

촛불 혁명을 통해 민주 정권을 회복했다는 요즘, 우리들의 정의는 참 시끄럽다. 각자가 다양하게 자신만의 정의를 주장하면서, 도무지 광화문 주변이 평온하지 못하다. 참 복잡하고 어지럽고 소란스러워 보이는 함성들과 야유와 비난들 속에서 정의는 어디에도 자리잡지 못하고 갈팡질팡 우왕좌왕하는 듯 보인다. 자신들의 정치적 권리 행사가 곧 정의라고 주장하는 이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때로 이 모습들에서 서구적 정의 개념의 도착을 보게 된다. 자기 몫의 주장은 정당한 것이지만, 정의로운 것은 아닐 수 있다. 정당성(justification)과 정의(justice) 간의 균열과 분열.

성서에서 정의란 자기 몫의 주장이 아니라, 자기 몫이나 권리가 부인당한 사람을 어떻게 '대변'하느냐 문제였다. 아내를 빼앗긴 우리야 목소리를 대변하기 위해 다윗 왕 앞으로 나아갔던 나단 예언자나, 포도원을 빼앗기고 죽임당한 나봇의 목소리를 대변하기 위해 아합 왕 앞에 나아갔던 엘리야의 모습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가 작동하는 방식을 이해하게 된다. 나단과 엘리야는 자기 몫을 주장하기 위해 왕 앞으로 나아간 것이 아니었다.

대변되지 못하고 억눌린 목소리를 듣게 하는 일,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였고 성서적 정의 개념에 근접한 행위였던 것이다(이 '대변'의 역할이 또 하나의 억압기제가 될 수 있음을 스피박과 같은 탈식민주의자들은 날카롭게 예증하였으나, 그것은 글의 역량을 넘어서는 일이니 다음에 살펴보는 것으로 하자). 역설적으로 정의는 자기 몫의 주장이 아니라 타인의 몫을 대변한다. 정의가 질퍽거리고 끈끈하며 애매한 또 다른 이유이다. 남의 몫을 대변할 합법적 권한 없이 그저 끈끈한 사랑과 연민으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이는 자기 몫을 주장하는 행위가 부정의하고 부도덕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자신의 행위가 정당하고 의로울 수 있으나, 그것이 정의롭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지적할 따름이다. 오히려 자기-의에 충만하여, 자신만 정의롭고 의롭다는 주장은 오히려 정의의 도착(perversion)에 더 가깝다. 우리 각자는 다른 모든 존재와 직접적·간접적으로 얽혀 있다. '얽힘'은 관계의 복잡성을 표현하기 위한 '수사'이다. 나의 의로운 행위가 타인, 다른 존재(들)에게 부정의한 구조적 폭력으로 언제나 나타날 수 있다. 그래서 정의는 끈적거린다. 끈적거리는 관계의 복잡성이 정의 담론에서 고려되지 못한다면, 우리의 정의 담론은 언제나 '나'의 이기적인 몫에 대한 주장으로 도착되어 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의는 '사랑'을 필요로 한다. 사랑은 다른 존재와 관계를 맺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다른 존재와의 관계가 고려되지 않은 '자기 권리'와 '몫'에 대한 주장은 기존 구조에서 적어도 시민권, 즉 인권을 행사할 수 있는 이의 목소리에 힘을 실어 주기 마련이다. 모든 것이 모든 것과 더불어 관계하는 존재의 네트워크에서 우리 모든 관계는 다른 존재를 직간접적으로 포괄하고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관계하느냐 마느냐 문제가 아니라 어떤 관계를 맺느냐가 핵심적 물음이 된다.

여기서 켈러는 사랑의 관계를 이야기한다. 이때 사랑은 com/passion, 다시 말해 '함께/고난당하는/열정'이다. 관계에서 사랑이 추구하는 정의는 결코 깔끔할 수 없다. 서구 사회에서 '정의 담론'은 늘 '정당한 몫'의 문제였고, 지금까지도 우리는 '분배 정의'를 말하면서, 한 인간으로서 정당한 몫을 정의 문제에 핵심 토대로 삼는다. 그런데 '함께-고난당할-수-있는-열정'(com/passion) 관점으로 정의 문제를 응시하면, 정의는 '정당한 몫'의 문제가 아니라 '누구의 삶이 억압되고 있으며 또한 고통 속에 있는가' 문제가 된다.

정의, 그 사랑의 고집

캐서린 켈러(Catherine Keller)는 정의는 사랑의 고집(persistence of love)에 근거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 반대가 아니라. 정의 없는 사랑은 맹목적이다. 반대로 사랑 없는 정의는 냉혹하고 잔인하다. 다시 말해, '함께-고난당하는-열정'(com/passion)으로서 사랑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자칫하면 '패배주의', '비관주의'의 덫에 걸려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랑 없는 정의, 즉 자기 몫에 대한 정당한 권리만을 정의의 기준으로 제시하는 것 또한 결코 정의를 실현하지 못한다. 자기 몫을 주장할 권리는커녕 주장할 목소리조차 부인당하는 사람들과 존재들이 널려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의가 '실현'되려면, 사랑의 고집이 필요하다. 존재를 부인당하고 목소리가 억압당한 이들을 향한 끈덕진 사랑, 그 사랑이 없다면, 정의는 기존 체제에서 자기 몫을 주장할 수 있는, 능력 있는 중산층들의 공정성 게임으로 전락한다. 달리 표현하면, 사랑이 고집을 부릴 때 정의는 이 세계에서 실현될 기회를 갖는다. 정의는 '공정성' 문제가 아니다. 사랑 없는 정의가 기호자본주의 체제에서 공정성의 이름으로 치환되어, 정의가 도리어 역설적으로 적자생존과 무한 경쟁 시스템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남용되는 모습을 우리는 매번 경험한다.

그것은 우리가 추구하는 정의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추구할 정의는 사랑으로 연대하는 정의이다. 고난당하는 이들과 함께 사랑할 수 있는 열정이 정의로 실현되는 것. 그래서 기독교윤리학자 김은혜는 "신학이 학문적 정체성을 가지고 보편적 사랑을 실현할 수 있는 가장 구체적 방법"은 바로 "시대의 고통에 민감하여 작은 자들에 대한 특별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2) 그래서 신학은 "약자 배려의 인간 이해를 위한 연대적 학문"이어야 하고, 기독교윤리학은 "작은 자 혹은 소수자 관점적 가치를 지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3)

사랑의 고집(persistence of love)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억압당하고 고난당하는 모든 이들은 언제나 정의로운가? 아니다. 이는 '사랑의 고집'을 오해한 것이다. 사랑은 고난과 억압을 미화하지 않는다. 고난과 억압은 우리가 극복하고 지양할 어떤 것들이지, 그 자체로 정의의 기준이나 토대가 되지 않고, 사랑의 동기를 구성하지도 않는다. 기독교적 용서와 사랑 개념이 '고난의 이상화'나 '희생의 이상화'로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경고는 이미 페미니스트들과 우머니스트들을 통해 널리 소개된 바 있다. 아프고 고난당하는 이들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받아들이고 함께하는 것이지, 결코 고난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이상이라는 말이 아니다.

다른 한편으로 소비자본주의 시대의 사랑에 대한 이미지 중에서, 특별히 열정적인 사랑 이미지는 누군가를 욕망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사랑이 단지 누군가를 좋아하거나 욕망하는 감정적 기제들에 불과한 것은 아니다. 진화심리학은 이성의 상대를 향한 매력과 끌림이 인간의 문화적 수준에서 '사랑'으로 작동하는 것이라며, 결국 사랑의 메커니즘은 진화적 알고리즘의 작동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식의 사랑 이해는 우리가 추구하는 사랑 이해가 아니다. 오히려 진화적 알고리즘의 작동을 넘어서는 그 무엇이 우리의 사랑 속에 작용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사마리아 사람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강도 만나 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이를 보고 느낀 감정, 그것은 고난과 억압에 대한 동정이 아니라, 그 아픔이 내 아픔으로 느낀 것에 있다.

정의가 실현되어야 할 세상은 모두가 모두와 더불어 얽혀 있다(entangle). 무질서하고 무작위적인 뒤얽힘이 아니라, 복잡하고 다중적인 관계의 관계들이 얽혀 있는 복잡성을 가리킨다. 누군가 나의 몫을 주장하면, 그의 정당한 정의의 주장 때문에 아픔을 감내해야 하는 누군가가 존재하는 현실. 한쪽에서의 정의 실현이 다른 쪽에서는 부정의한 현실로 돌아오는 체제의 구조에서 우리는 사랑 없는 정의를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사랑의 고집'은 바로 사랑을 고집하는 것이다. 정의를 넘어서.

정당한 자기 몫을 주장하는 정의는 언제나 매끄럽다. 나의 몫과 너의 몫의 선이 불분명하다면, 정의는 지저분해지고 불투명해지고 애매해진다. 우리는 정의란 언제나 공정하고 공평해야 한다고, 의혹의 여지가 전혀 없이 투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매끈하고 선이 분명한 정의가 우리가 추구하는 정의를 실현할 수 없는 근원적 한계라면 어쩔 것인가.

얽힌 관계의 네트워크에서 타자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타인과 공유하는 물질성 혹은 육체성의 네트워크가 있기 때문이다. 물질적 네트워크를 통해 '연대'의 감정들이 교차하며, 타자를 향한 사랑은 정의를 나의 문제(matter)로 만들어 주며, 그 문제(matter), 즉 그 물질성(materiality)을 내 삶 속에서 실현할 수 있는 욕망을 추동한다. 그래서 켈러는 마틴 루터 킹 주니어를 인용한다.

"우리는 운명이라는 한 벌의 옷 속에서 서로 연결된 네트워크 속에 사로잡혀 있다. 누군가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은 그 무엇이든지 모든 이들에게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사랑이 정의로우려면

타인의 육체적 아픔과 고난을 내 아픔으로 받아들이는 에로스적 사랑은 이 아픔이 '아가페적 고집'을 통해서 기억되어야 한다. 이를 켈러는 "에로스로부터 정의로의 지속 가능한 운동"이라고 표현하는데, 이는 사랑을 정의의 문제로 전환하는 문제가 아니라, 사랑이 정의 속에서 성장해 나아가는 문제라고 지적한다. 타인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곧 육체성의 사랑이고 그래서 '에로스'이다. 이를 'com/passion'(사랑, '고통에-함께하는-열정')이라 한다.

com/passion 관점에서 정의는 타자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자기-돌봄' 문제가 된다. 타자와 얽힌 관계성 속에서 느껴지는 고통과 고난은 그저 나와 무관한 타인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아픔과 고통의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욕망은 진화한다.' 타자들을 내 존재 일부로 품어 가면서 말이다. 이 사랑은 '공동체'로의 성장을 가리킨다. 지금까지 서구의 정의 담론과 민주주의 담론은 "공동체를 향한 에로스가 아니라 공동체로부터 해방된 에로스" 혹은 공동체로부터 분리된 에로스를 추동해 왔다고 켈러는 지적한다.

"다른 피조물들과 끝없이 엮인 사회적 관계망으로부터 자유로운 그리고 마침내 창조주로부터 자유로운 개인만의 가치들을 강조"해 왔던 서구 정의 담론과 민주주의 담론에 대한 따끔한 비판이다. 오히려 사랑은 공동체를 지향한다. 나와 너가 사랑으로 엮이면, 우리가 된다. 그것이 공동체의 기초이다.

공동체, 즉 한 몸을 지향하는 사랑과 정의는 곧 나를 관계성으로 물들이는 것이다. 그것은 곧 내가 타인과 다른 존재들의 냄새에 물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영화 '기생충'에서 박 사장(이선균)은 아내 연교(조여정)에게 운전기사 기택(송강호)에게서 냄새가 난다는 말을 한다. 그 냄새는 출신의 냄새이고 계급의 냄새이다. 반지하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냄새다. 그 찜찜한 냄새가 자기 차에 밸까 봐 짜증스러워하는 박 사장 모습 속에 오늘날 중산층 담론의 모순이 담겨 있다.

산업혁명 이후 도시는 '은행업, 회계, 관리, 법률, 언론, 광고' 등 새로운 형태의 전문화한 도시 활동을 창출하기 시작했다. 그 일들을 감당하는 '화이트칼라 도시 노동자들'은 "정기적이고 안정적인 수입원을 가졌으며 비교적 풍족한 생활을 누렸"고, 이 새로운 시민 계층은 부유한 자들과 가난한 자들의 수를 압도하면서 중산층이라는 계층을 형성했다. 이들은 "주거, 음식, 서비스, 의복, 오락 등"에 많은 욕구를 갖고 있었고, 소비를 이끌어 가는 계층이었다. 이들을 기반으로 "가치보다는 즉자적인 매력에 기반해 상품을 구입하는 거대 대중 시장이 탄생"했고, 이들의 소비 욕구를 발판으로 대량생산과 빠른 교체 주기의 상품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4)

바로 이 계층이 자본주의의 토대였다. 흔히 자본주의 모순을 부르주아/프롤레타리아 이분법에 근거해 구성하고는 하는데, 사실 자본주의 모순은 오히려 중산층 등장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선거 정치가 민주주의로 등가시되는 자유주의(liberalism) 시대에 이 사실은 줄곧 은폐되고, 자본주의 모순은 늘 '부르주아'라는 가상의 적에게 투사된다. 영화 '기생충'은 모든 계급과 인종과 성의 차별을 넘어 가장 평등한 구조를 창출했다는 자본주의사회의 모순을, 즉 계층화된 모습을 기택의 가족들이 집을 찾아 내려가는 끝없는 계단의 모습으로 그려 준다.

박 사장은 이들과 엮이는 게 싫었고, 이 냄새가 자신에게 배어드는 것이 싫었다.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자본주의사회에서 개인의 권리와 자유에 기반한 정의 담론은 모든 존재들의 관계성 네트워크로부터 탈-육체화(disemboided)하고, 탈-성화(desexualized)하도록 추동할 뿐이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 혹은 나와 다른 존재를 사랑하는 것은 결코 그의 몸과 육체성을 망각·무시·배제하지 않는다. 그의 냄새나고, 상처받고 찢겨진 더러운 몸조차도, 그의 아픔과 고통에 공감하며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랑은 '용기'를 요구한다. 냄새까지도 받아들이고, 함께 냄새나는 삶을 포용하고 보듬는 것이다. 그것이 정의의 첫 발걸음이다. 이 정의의 발걸음 속에 내 몫에 대한 주장은 아직 등장하지 않는다. 그 사랑과 정의를 통해 우리는 '되어 간다'(become).

'기생충'에 등장하는 박 사장(위)과 그의 운전기사 기택(아래). 영화 '기생충' 스틸컷

희생을 감수할 용기

타인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받아들인다는 에로스적 측면만 사랑으로 강조한다면, 우리는 인간의 물질적·육체적 관계성을 '이기적' 관점으로 다시 환원하고 말 것이다. 대중매체와 미디어에서 우리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극우 정치인들 중 젊은 시절 '운동권'이었다는 사람을 얼마나 자주 보는지를 상기해 보면, 에로스적 사랑이 얼마나 타락에 취약한지 알 수 있다. 에로스적 욕망은 아가페적 선한 의지와 결합되어야 한다. 그래서 성서와 예수는 '원수 사랑'을 이야기한다.

우리가 기존 서구적 정의관으로 조망한다면, 원수를 사랑하는 일은 결코 정의의 실현이 될 수 없다. 정당한 몫의 분배와 아무런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정의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의를 무력화하는 일로 간주될 수도 있다. 옳음과 그름의 경계를 허무는 행위로 간주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수 사랑'은 정의로운 사회 실현에, 신학적으로 하나님나라를 실현하는 데 핵심이다.

인종차별 구조의 극복은 인종차별주의자들을 처벌하는 것만으로 결코 실현될 수 없다. 성차별 구조를 극복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성차별주의자들을 처벌하는 것만으로 결코 실현되지 않는다. 우리의 정의를 향한 함성과 해방의 운동은 '모두의 해방'을 위한 것이지, '우리들만의 해방'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

사랑의 관계로 진입한다는 것은 사랑을 통해 맺어진 관계로 유발될 상처와 좌절의 위험성 속으로 스스로를 던져 넣는 것이다. 이를 '끈적거리는 관계성'이라고 재미 신학자 앤 조(W. Anne Joh)는 표현한다.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관계의 끈적거림을 "덫"이라 표현했다.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그와 나 사이의 경계를 공격"하기 때문이다. 이 관계의 끈적거림을 앤 조는 한국적 감성인 '정'으로 표현한다. 관계를 통해 맺어진 한이 정으로 풀어져야 한다는 뜻일 터이다.

의 감정이 정으로 전환되는 계기는 바로 해방의 또 다른 측면에 주목하는 것이다. 해방은 억압의 구조로부터 해방하는 것을 의미하는 동시에 "두려움, 원한, 분노를 단념함(giving up)으로부터" 일어난다. 억압의 외적 구조에서 형식적 해방을 맞이하고서도, 여전히 과거의 감정들 즉 두려움과 원한과 분노에 사로잡혀 지금 현재(present)라는 선물을 만끽하지 못한 때가 얼마나 많던가. 진정한 해방은 바로 과거의 감정들을 단념해서 현재로부터 새로운 우리를 구성해 나아가는 운동이다.

사랑의 고집이란, 바로 사랑의 실현을 위해 위험을 감수할 수 있는 용기를 의미한다. 마틴 루터 킹이나 간디 혹은 로메로 주교는 자신들이 희생되기를, 그렇게 죽기를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위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거나 예감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 위험을 기꺼이 감내할 용기가 있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고집이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나갈 모험을 위해 자신이 감당해야 할 위험 요인이다. 이를 전통적인 표현으로 '흔들리지 않는 사랑'(steadfast love)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흔들리지 않는다. 그 사랑이 추구하는 정의는 질퍽거리고, 끈끈하고, 애매하다. '고통에-함께-하는-열정'(com/passion)을 통해 실현되기 때문이다.

1) Political Theology of Earth: Our Planetary Emergency and the Struggle for a New Public [New York: Columbia Univ. Press, 2018
2) 김은혜, 『포스트모던 시대의 기독교 윤리 문화』[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5], 8
3) 위의 책, 8
4) 존 리더, 『도시, 인류 최후의 고향』, 김명남 역 [서울: 지호, 2006], 3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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