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중심주의의 전회

이제 '신학적 아고니즘'의 투쟁 주체를 새롭게 생각해야 하는 시대에 이르렀다. 인권 개념은 중세 이후 모든 종류의 해방운동을 이끈 혁명적 개념이지만, 이제 인권이 21세기 포스트휴먼 시대의 해방 개념이 되기에는 불충분한 시대가 되었다. '인권' 개념 아래 포함되지 못하는 많은 존재와 도식들이 출현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중세에서 근대로의 전환을 "인간 주체의 등장"으로 읽는다. 근대 이전의 인간에게 주체가 없었다는 말이 아니다. 중세에는 인간의 주체적인 의미 부여 행위가 신으로부터 주어졌고, 인간의 주체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에 복종하는 주체였다는 말이다. 이 '신'은 비록 하나님 이름으로 회람되었더라도, 사실은 신앙의 하나님이 아니라, 관습과 제도의 신이었다. 중세 가톨릭교회의 제도와 관습이 하나님을 대신한 것이다. 인간 주체는 바로 이 관습과 제도의 관성에 매몰된 인간의 주체성을 불러일으킨 것이지, 결코 인간 주체의 완결성을 주장한 것이 아니다.

핵심은 바로 '주체'가 기존의 정체성과 자아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붕괴해 들어오는 '자각' 난입 사건을 가리킨다는 데 있다. 결코 인간 이성의 견고함을 옹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근대적 인간 주체의 등장은 관습과 제도의 위계화한 서열 질서 아래서 모든 존재가 각각 다른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통념에 반한, 모든 인간은 동등하다는 자각의 표현이었다는 말이다. 즉 주체의 등장은 기존의 관습적 가치를 허무는 존재의 동등성(ontological parity)의 자각인 것이다. 주체의 등장을 촉발한 게 바로 종교개혁 표어 '오직 은혜로만'(sola gratia)이었다.

데카르트적 정신과 몸/물질의 이분법에 기초한 인간 (의식의) 주체성 개념은 기후변화 시대에 더 이상 무비판적으로 유통될 수 없다. 우리는 의식으로만 혹은 정신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몸과 연결된 물질성의 네트워크와 더불어 행위 가운데 존재하기 때문이다. 데카르트의 이분법을 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몸의 철학' 혹은 '몸의 신학'이 주창됐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하지만 우리 의식이 언제나 몸에 기반한 체현(embodiment)을 통해 작동한다는 '체현된 인지'(embodied cognition) 개념은 여전히 정신과 물질 간 위계적 질서를 전제한다. 최근 철학계에서 주목받는 앤디 클라크의 '연장된 정신'(the extended mind) 이론이 대표적 예다.

국내 철학계에서는 한술 더 떠 이를 '확장된 정신'이라고 오역하는 사례도 빈번한데, 이는 곧 앤디 클라크의 체현된 인지 개념이 얼마나 데카르트의 정신과 물질의 이분법에 무의식적으로 종속되어 있는지를 보여 주는 한 사례이다. 그럼에도, 클라크의 연장된 정신 개념은 데카르트의 '사유(thought)와 연장(extension)'이라는 이분법을 전복하는 개념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데카르트는 존재하는 것이 '사유'와 '연장'이라는 이분화한 실재로 구성되어 있고, 이 두 가지는 전혀 다르고 독립적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앤디 클라크는 사유와 연장이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사유가 곧 연장이라고 본 것이다. 연장된 정신이라는 개념을 제시한 것이다.

그러한 노력에도 여전히 행위 주체의 핵심에는 '정신'이 놓여 있다는 점에서 앤디 클라크는 자신이 극복하고자 하는 데카르트의 이분법에 '이중 구속'(double bind)되어 있다. 여기에 '인지적 불화'가 존재한다. 우리는 우리의 삶과 행위와 인지 속에서 얼마나 의식 혹은 정신적인 것의 제어를 온전히 따르고 있을까.

우리가 본능이라 규정했던 생물학적 유기체 알고리즘은 몸의 화학적 과정을 제어한다. 화학적 알고리즘이 우리 사유와 의지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는 이미 생물학 연구들을 통해 널리 알려져 있다. 이는 클라크와 같은 이들이 주목한 '체현된 인지' 혹은 '세계와 정신 사이 인터페이스로서 몸' 혹은 '연장된 정신' 같은 개념만으로 21세기 포스트휴먼 시대의 정치적 주체를 구현해 내는 것은 부족하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근대 이후 모든 변혁과 혁명의 근본을 구성하는 '인권'(human rights) 개념은, 인간을 '개인'(individual)이라는 더 나뉘지 않는 기초 단위로만 구성하고 있다. 관계로 존재하는 인간의 측면을 전혀 포착하지 못하고, 개인의 이기적 탐욕 추구를 정당화했던 오류가 있었다. 생태 환경 위기와 지구촌 기호자본주의 체제는 더 이상 '존재'가 '개별자'로 간주될 수 없으며, 모든 만물과 사건을 서로 연결되어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한다.

'개인'은 원자론적 세계관에 기초한다. 개인이라는 말 자체가 '더 이상 나뉘지 않는다'는 in-divided에 기초한 말이다. 지금처럼 물리학이 발전하기 전에 사람들은 만물의 존재 근원에는 기초 단위, 그보다 작은 단위로 분해할 수 없는 근원적 기초 단위가 존재한다고 믿었으며, 이를 원자(atom)이라고 명명했다. 초끈 이론과 양자역학 발전은 모든 만물이 근원적으로 에너지 차원에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이러한 개별 발견들이 모여 이제 많은 사람은 존재가 어떤 개별적 기초 단위들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관계성 자체가 네트워크처럼 이어져 모든 존재는 서로에게 얽혀 있다는 인식이 공유되고 있다.

이제 존재를 '인간 개인'으로부터 추상해서 사유할 수 없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함께 헤엄쳐 나아가든지 함께 가라앉든지 할 것이다"는 철학자 화이트헤드 말처럼. 이는 존재를 바라보는 신학적 사유의 급진적 전회를 요청한다. 인간 구원을 핵심으로 모든 만물과 세계를 질서정연하게 배치했던 신학적 인간중심주의의 전회 말이다.

지렁이들이 인간 역사를 발족시켰다?
유기체 중심 사고에서 벗어나야

찰스 다윈은 <지렁이들의 행위들을 통한 식물성 곰팡이의 형성과 지렁이의 습성들에 대한 관찰>(1881)에서 지렁이들이 세계사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해 왔는지를 지적한다. 그는 특별히 영국의 지렁이들을 살폈다. 지렁이들이 표토나 식물성 곰팡이를 만드는 방식을 집중적으로 관찰했다. 지렁이들은 흙 물질을 소화해서 자신들이 서식하는 굴 입구에 배설물들을 쌓아놓았다. 이 과정에서 정제된 식물성 곰팡이를 끊임없이 지표면으로 가져오는 역할을 했다. 이는 광대한 지역에서 몇 년에 한 번 전체 곰팡이들이 지렁이들의 몸을 통해 교체되는 효과를 낳았다.

중요한 것은 여기서 다윈이 이 현상을 생물학이나 농업학적 사실로 인식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역사에 관한' 사실로 받아들였다. 어떻게? "식물성 곰팡이류를 만들어 냄으로써, 온갖 종류의 모종을 가능케 하고, 그래서 지구를 인간에 적합한 공간으로 만들어 주고, (이를 통해) 인간 역사의 문화적 인공물들과 의례들과 계획들과 노력들을 가능케 함으로써" 지렁이들은 (인간의) 역사를 만들어 나가는 중이다.1) 다시 말해, 지렁이들은 "인간 문화를 발족"시킨다.2) 여기서 신학적으로 더 중요한 사실은 지렁이들은 이 효과가 인간에게 이익이 될 것을 의도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또한 다윈은 이 효과가 어떤 신적 의도 개입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고 봤다. 지렁이들이 인간 역사에 기여하는 것은 "다른 (생물학적, 박테리아적, 화학적, 인간) 행위 작인들과 연합하고 경쟁하는 활동 가운데 일어나는 계획 밖의 [즉, 뜻밖의] 결과"3)이다.

지렁이들은 "이종적 아상블라주(heterogenuous assemblages)에 참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아상블라주들 안에 어떤 단일한 행위 작인의 자리나 지휘자(mastermind)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다종한 진동하는 물질성들의 군집(swarm)을 가로질러 행위 작인이 분산"되어 있다.4) 다윈이 관찰하는 지렁이들 사례에 직접 대입하면, 지렁이들이 영국 문화에 기여하는 것은 지렁이들 의도나 신적 창조주의 섭리 때문이 아니다. 그들에게 내장된 유전적 본능이나 충동 때문도 아니다. 지렁이들의 행위는 "지능적 즉흥성들"(intelligent improvisations)이다. 기본적으로 환경의 자극에 반응하는 기본적인 '유전적 알고리즘'이 내장되어 있지만, 지렁이들의 모든 행동에 대한 상세한 동작과 반응들까지 획일적으로 내장되어 고정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지렁이들이 참여하는 "이종적 아상블라주"는 신이나 의식이 아니라, 자연 혹은 역사이며, 곧 "생태계"(ecology)5)인 것이다. 주의할 점은 다윈이 지렁이를 예로 들었다고 해서, 유기체적 생명 형태들만이 아상블라주의 행위 작인에 기여한다고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땅 위에 떨어진 물질들과 식물성 곰팡이류, 배설물과 주변 환경이 총체적으로 함께 연결되어 작용하면서 아상블라주 효과가 나오는 것이다. 어떤 특정의 행위 작인이 주체적으로 의도하고 설계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염된 땅과 바다는 인간 문명에 큰 영향력을 이미 그리고 언제나 행사하고 있다. 2013년 발생한 쓰나미는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사고를 유발했고, 이 사고로 오염 지역의 주민들과 생물들만 피해를 입은 것이 아니라, 전 세계 바다 오염이 초래됐다. 인간의 식생활에 방사능 물질이 증가하는 효과를 일으켰으며, 그것이 지금 전체 지구 경제와 정치에 미치는 효과가 있다. 근대적 학문 체계는 이 연관된 사건들 전체를 조망하고 설명할 체계를 갖추지 못한 채, 지엽적 설명과 분석에 그치고 만다.

"지렁이들이 인간 역사를 발족시켰다"는 찰스 다윈의 관찰은 기후변화와 생태 위기 시대에 정치적 주체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지에 대한 매우 심각한 고민을 던져 준다. 신학이 언제나 '소수자'를 바라보고 하나님 마음으로 대변하려는 노력이라면, 이 소수자의 개념적 경계가 이제 인간과 생물을 넘어 전체 사물로 확대 연장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신학적 구원 개념에는 인간 이외의 존재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생태 위기의 도래 이후, 우리는 피조 세계를 구원 대상으로 포함시키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유기체 중심 사고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이미 오래전 진화론자로 알려진 찰스 다윈은 생물과 무생물의 세계가 이분법적으로 나뉘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통찰하고 있었다.

지구 정치신학,
비유기체적 물질도 '공생'의 일원

그런데 앞서 언급한 지렁이들의 기여 행위를 우리는 "정치적 행위"로 볼 수 있는가. 지렁이들이 인간 문화 발족에 기여하고, 그 문화가 우리의 정치적 행위들을 만들어 낸다고 한다면, 지렁이들도 분명히 정치적 행위 작인의 일부로 고려해야겠지만, 우리 정치 이론은 인간 이외의 행위 작인들을 정치적 주체의 범위에 포괄할 범주나 이론이 결여되어 있다.

정치철학자 부뤼노 라투르(Bruno Latour)는 '정치적 주체'를 구성한 '주체'의 자리에 이제는 개별 인간을 정치적 단위로 규정하는 '인간 주체'와 '인권'이 아니라, "행위항"(actant)이라는 용어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제 살아 있는 유기체뿐만 아니라 비생물학적 물질 존재까지도 우리와 더불어 존재의 삶을 구성하는 동료-존재로 조망하는 정치를 주창한다. 이제 '공생'(co-life)이 21세기 문명의 핵심 화두가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더 이상 '우리만의 공생' 혹은 '인간만의 공생' 혹은 생물학적 유기체만의 공생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까지 '공생'이라는 주제에 포함시키지 않았던 비유기체적 물질 존재까지도 공생의 일원으로 품을 수 있는 사유의 전환이 긴급히 요구된다는 점을 역설한다.

자연 자원이나 지하자원이 인간에게 물질적 부를 창출할 수단으로만 간주되는 상황에서는 우리가 아무리 재활용과 생태계 회복을 실천한다 하더라도 소용이 없다. 이는 그저 기호자본주의 체제를 '녹색화'(greenization)하면서, 근원적 부정의 체제를 정당화하는 수준에 그칠 뿐이라는 사실을 지난 반세기 환경 운동의 투쟁으로 학습한 결과이다.

기후변화의 위기 시대에 우리는 '행위자-네트워크'를 어떻게 정치신학적으로 사유할 것인가. 캐서린 켈러는 가장 최근에 출판한 저서 <지구 정치신학: 우리의 행성적 비상 위기와 새로운 공중을 위한 투쟁 Political Theology of Earth: Our Planetary Emergency and the Struggle for a New Public>(2018)에서 우리의 종말론적 사유가 오해하는 것을 지적한다. 성서의 종말론이 '종말'을 선포하는 것은 바로 '이 세계를 구축하는 인간의 구성물'이지 결코 '이 세계 자체'가 아니라는 사실이다.6)

그래서 바울의 신학은 애초부터 '정치적'(political)이었다. 기존 세계 질서에 종말을 선포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정치'(politics)와 '정치적인'(political)이라는 말을 구별하는 게 중요하다. 정치신학은 '정치'를 하지 않는다. 하지만 신학은 정치적이다. 다시 말해, 정치신학의 정치는 정치적 행동과 투쟁을 의미하지, 결코 기존 제도 정치의 일원이 되어 기존 권력과 공생하고 공모하는 일을 도모하지 않는다.

켈러는 고린도전서 7장 29절을 인용한다: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그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하며." 여기서 켈러는, 조르조 아감벤의 해석을 인용하면서, "그때가 단축하여진 고로"의 '단축'(short)의 희랍어 sunestalemnos가 "함께 모인"(gathered together) 혹은 "응축된"(contracted)이라는 의미임을 주목한다. 아울러 그 "때"는 우리가 산술적으로 살아가는 연대기적 시간인 크로노스(chronos)가 아니라, 무언가가 일어나는 사건의 시간인 카이로스(kairos)임을 가리킨다.

따라서 "그때가 단축하여진 고로"라는 문장은 '카이로스의 사건의 시간이 모여 응축되어지고 있으므로'라는 뜻이 된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이제부터 '마치'(as if) 그 나라가 임한 것처럼 살아가라는 뜻이다. 현실의 나라에 순응하면서, 세상 법도를 따라 모범 시민으로 살아가라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세상의 질서와 관습과 법도를 넘어, 하늘나라 시민으로 살아가라는 뜻이다. 우리가 모여(gather together) 하늘나라 삶을 여기서 실현해 가기 시작할 때, 우리는 작지만, 이 작은 삶을 통해 거대한 세상이 뒤집어지기 시작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성서는 처음부터 본래적으로 '정치적'이다. 그것은 세상의 정치 질서와 야합하거나 결탁하거나 합의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세상의 정치 질서와는 전혀 다른 기준과 이상으로 삶을 재조직해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새로운 인간주의 운동

민주적 갈등 투쟁이란, 투쟁을 위한 투쟁을 의미하지 않는다. 기존 제도권 정치를 의미하지도 않는다. '아고니즘'을 생각해 볼 때, 그리스어 '아곤'은 '투쟁'이나 경합을 의미하지만, 영어 단어의 'agony' 즉 고뇌의 뉘앙스를 함의하기도 하다. 절망 혹은 고뇌 상황에서, 이 절망과 고뇌를 자아내는 조건들에 대항해 투쟁을 벌여 나갈 수 있는 정치적 힘을 의미하기도 한다. 즉 정치적인 것은 '민주적 갈등 투쟁'으로, 투쟁을 위한 투쟁이 아니라, 기존 정치와 전혀 다른, 상상력을 토대로 한, 절망과 고뇌에 빠진 존재들을 위한 투쟁과 경합을 의미한다. 곧 "공동선을 위한 투쟁"7)이다.

여기서 '절망과 고뇌에 빠진 존재들'은 결코 인간 존재나 고등 유기체 존재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근대의 정신과 물질의 이분법 이래 구축된 자본주의는 지질학적 존재, 생물학적 존재, 기후학적 존재 등을 인간이 지배하는 세계의 "부차적인 것"(externalities)으로 간주했지만, 우리 '정치'신학('political' theology)는 이 존재들의 절망과 고뇌를 듣고, 그들을 위한 정치적 투쟁에 나서는 신학이어야 한다. 따라서 '공동선'을 이야기할 때, 단지 이것은 인간 존재나 살아 있는 고등 유기체의 생명 수준에 국한하지 않는다. 흙과 물과 공기와 같은 비유기적 존재까지도 우리와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로 인식할 수 있는 새로운 존재론을 요구한다.

인간중심주의적 세계를 넘어, 사물 정치 시대에 적합한 공중의 정치 전략을 '군집하기'(swarming)8)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고전 7장 29절의 "그때가 단축하여진 고로"를 조르조 아감벤 해석에 따라 재구성하자면, '카이로스의 시간이 이제 응축되어 군집(ingathering)하므로, 때가 임박했으니'가 아닐까. 이 '군집하기'는 거대한 군집의 기계를 구축하는 것이 아니다. 다종다양한 소수자들 연대가 다양한 지역성을 기반으로 네트워크적 아상블라주(assemblage)를 구성하는 것을 포함한다. 촛불 집회처럼 공동의 부정의를 위해 결집하는 일 모두를 포함한다.

대한민국 정치는 이미 '군집하기'를 실현하는 중인지도 모른다. 군집성을 통해 소수자들을 능가하고 위계적으로 군림하는 기계가 구성되지 않도록 각별히 유의해야 할 것이다.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이 독재 타도를 위한 거대한 연합을 구성하면서, 우리 안의 다양한 소수자들 목소리를 억압했던 과오를 기억해야만 한다. 그래서 '군집하기'의 핵심적 특징을 '자기-조직화'(self-organization)에서 찾아야만 한다.

초거대 정신이 전체 집단을 통제하고 제어하는 시스템이 아니라, 각각의 다양한 지체가 자발적으로 연대하고 소통하면서 스스로를 조직화할 수 있는 '자기-조직화 시스템' 말이다. 그것이 바로 촛불 정치 아니었던가. 광주 민주화 항쟁 40주년을 목전에 두고, 이제 21세기 기호자본주의 상황에서 어떤 미래의 정치적 운동을 실현해 나갈 수 있을지 함께 생각해 본다.

비유기체적 존재까지도 정치적 행위 주체를 형성할 '행위항'(actant)로 봐야 한다는 주장을 인간 존재 자체를 개념적으로 지우고 폐쇄해야 한다는 퇴행적 사고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궁극적으로 인간-됨(becoming-human)은 신학적 관점에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온전한 인간 됨의 자의식을 갖는 것이고, 의식적으로 자연계와 사회의 능동적인 행위자로 참여한다는 의미"9)라고 기독교윤리학자 김은혜는 설명하면서, "자연과 인간의 관계 속에서 인간을 조명할 때 개인의 책임성과 상호성 그리고 공동체성을 강조하는 인간주의"로서 "새로운 인간주의"(new humanism)을 소개한다.10)

그가 소개하는 '새로운 인간주의'는 "인간이 희망임을 포기하지 않는다."11) 말하자면, '새로운 인간주의' 운동을 통해 보고자 하는 것은 "인간에 대한 희망과 가능성에 대한 회의를 갖게 하는 기후 임계점 상황에서도 우리에게는 아직 뭔가 할 수 있는 일이 남아 있다는 희망을 발견하는 길"이며, 이를 "결의에 찬 행동"으로 시작하는 순간을 창출하려는 것이다.12) 인간 의식에는 다른 존재들보다 더 의식적이고 주체적인 "지능적 즉흥성들"을 의도적으로 추구해 나갈 힘이 있다. 여기에 인간의 고유성과 특이성이 여전히 존재하며, 부뤼노 라투르는 인간이 "자연의 정치" 속에서 (인간의) 말을 하지 못하는 존재들을 위한 대변인(spokesperson)이 되어야 한다고 선포한다. 그것을 우리는 신학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재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기독교 신앙이 희망의 씨앗이 되어야 한다고 김은혜는 주장한다: "신앙은 이념과 이데올로기를 넘어서 우리의 생명과 삶을 가능하도록 하는 희망을 발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리를 빼앗아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어떠한 힘과 오만한 권력의 형태로, 군사력 또는 과학기술과 때로는 물신의 형태로 생명 공동체의 나눔의 삶을 파괴하고 우리의 의식을 통제할지라도 신앙은 불가능한 가능성을 발견하도록 도울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신앙은 인간이 보장하는 희망을 발견하는 힘이라기보다는 작은 불씨처럼 남겨진 그러나 꺼지지 않는 희망의 불씨를 살리는 힘이다."13)

우리 실패는 신학적으로 '(성공)보다 나은 실패'(failing better)가 된다. 우리에게는 결코 성공이 없다. 성공이 우리 신학적 운동과 기획의 완성이나 완전한 실현을 의미한다면 말이다. 그것은 곧 우리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을 압도했다는 것, 그래서 '신학 숭배'(theolatory)가 실현되었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교개혁은 우리에게 선포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두는 동등한 죄인이라고.

1) Jane Bennett, Vibrant Matter: A Political Ecology of Things (Durham and London: Duke University Press, 2010), 95-96.
2) Jane Bennett, Vibrant Matter, 96.
3) Jane Bennett, Vibrant Matter, 96.
4) Jane Bennett, Vibrant Matter, 96.
5) Jane Bennett, Vibrant Matter, 97.
6) Catherine Keller, Political Theology of Earth: Our Planetary Emergence and the Struggle for a New Public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2018), 5.
7) Catherine Keller, Political Theology of Earth, 33.
8) Catherine Keller, Political Theology of Earth, 38.
9) 김은혜, 『포스트모던 시대의 기독교 윤리 문화』(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5), 163.
10) 김은혜, 『포스트모던 시대의 기독교 윤리 문화』, 164.
11) 김은혜, 『포스트모던 시대의 기독교 윤리 문화』, 169.
12) 김은혜, 『포스트모던 시대의 기독교 윤리 문화』, 171.
13) 김은혜, 『포스트모던 시대의 기독교 윤리 문화』, 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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