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 명의 예일 기독교 역사학자의 명서가 한글로 번역되었다. 나는 3개월 전 2019년 10월에 번역 출간된 예일대 미국 종교사 학자 시드니 E. 알스트롬(Sydney E. Ahlstrom)의 명저 <미국 기독교사 A Religious History of the American People>(복있는사람) 번역 원고를 감수하고 해설을 썼다. 총 6부로 구성된 짧지 않은 감수자의 글을 쓰면서, 나는 1~3부에 걸쳐 예일대 신학부(혹은 역사학과)에서 역사신학과 기독교 역사학의 20세기 르네상스를 이끈 대학자들 이름을 독자들에게 소개했다. 그때 열거한 명단에 케네스 스코트 라투레트, 야로슬라프 펠리칸, 윌리스턴 워커, 롤랜드 베인턴, 시드니 알스트롬, 해리 스타우트, 라민 산네, 브루스 고든이 있었다. 당시 글에서 나는 선교 역사의 라투레트, 교과서의 워커, 루터와 종교개혁의 베인턴, 미국 종교사의 알스트롬과 스타우트, 선교 역사의 산네, 칼뱅과 스위스 종교개혁의 고든, 이런 식으로 각 학자들 이름을 그들이 전문적으로 천착하면서 명성을 쌓은 분야와 연결 지었다.

당시 나는 야로슬라프 펠리칸(Jaroslav Pelikan, 1923~2006)에게는 "고대사로 유명하다"는 수식어를 붙였다. 이는 1995년에 한글로 번역 출간된 <고대 교회 교리사>(크리스챤다이제스트)가 그간 한국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알려진 펠리칸의 저술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이 수식어가 오류였음을 고백해야겠다. 우선 박사 학위 주제로 루터를 다룬 펠리칸이 주로 활약한 분야는 루터 연구와 그가 쓴 독일어 원전의 영어판 선집 출간이었다. 실제로 그는 생전에 독일어 루터 전집의 미국 영어판 편집자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1955년에서 1986년 사이에 두 미국 루터교 출판사(Concordia/Fortress)가 독일어판의 1/3에 해당하는 55권으로 된 영어판 전집을 출판했는데, 31년이나 걸린 이 대업을 책임진 두 편집자가 펠리칸과 동료 헬무트 레만(Helmut T. Lehmann)이었다. 펠리칸은 이 중 1권부터 30권까지를 편집했다.1) 20세기 내내 펠리칸은 영어권 루터 및 루터파 종교개혁 연구 분야에서 가장 저명한 인물이었다.

"고대사로 유명한 펠리칸"이라는 표현이 오류라는 사실은 최근(2019년 12월)에 한글로 번역되어 출간된 <예수, 역사와 만나다: 인류가 역사 속에서 이해하고 표현한 예수의 모습들 Jesus Through the Centuries: His Place in the History of Culture>(비아)을 읽은 후 더 확실해졌다. '예수'라는 하나의 키워드로 유대교 역사부터 시작해서, 오늘날까지의 교회사, 정치사, 사회사, 문화사를 꿰뚫는 그의 역량을 확인하며, 나는 특정 시대, 특정 주제의 전문가라는 수식어로 그를 단순하게 평하는 것이 큰 실례이자 엄청난 과소평가임을 절감했다. 그만큼 <예수, 역사와 만나다>는 넓으면서도 깊었고, 촘촘하면서도 방대했다.

야로슬라프 펠리칸 지음 / 민경찬, 손승우 옮김 / 비아 펴냄 / 544쪽 / 2만 4000원

교회사 혹은 신학 문헌을 꾸준히 읽은 이들에게 펠리칸의 이름 자체는 낯설지 않겠지만, 아마 실제로 그의 글을 읽어 본 한국 독자가 아주 많지는 않을 것이다. 세계적 명성과는 달리, 한국에서는 펠리칸의 글이 많이 소개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펠리칸의 이름이 처음 실린 단행본은 1980년에 발간된 아우구스티누스의 <산상수훈 강해 설교>(전망사)였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산상수훈 설교문을 편집하며 간단한 서문을 쓴 것뿐이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그의 글이 소개된 것은 아니었다. 펠리칸이 쓴 단행본으로 한국에 첫 소개된 책은 1982년 발간된 <죽음의 형태 The Shape of Death>(일맥사)였다. 펠리칸이 38세이던 1961년에 쓴 책으로, 초대교회 교부들이 생명과 죽음, 불멸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설명한 책이다. 1962년에 예일로 옮긴 후 거기서 은퇴한 펠리칸은 이 책 출간 당시에는 박사 학위 모교인 시카고대학에서 가르치고 있었다. 한국에서 번역된 펠리칸의 처음이자 유일한 저술이 교부학 관련서였던 것이 일부 학자와 독자에게 펠리칸이 고대 교회사 전문가로 알려진 첫 계기였을 수 있다.

그러나 펠리칸은 확실히 종교개혁이나 고대 교회 등의 특정 시대, 루터나 아우구스티누스의 등 특정 인물에만 정평한 학자가 아니었다. 이는 그의 대표 저서로서, 학계의 극찬을 받은 <The Christian Tradition: A History of the Development of Doctrine>으로도 확인된다. 시카고대학출판부를 통해 1973년부터 1990년까지 17년에 걸쳐 다섯 권으로 나온 이 시리즈는 각각 서방 가톨릭 전통의 탄생, 동방 기독교 세계의 정신, 중세 신학의 성장, 교회와 교의의 개혁, 1700년 이래 기독교 교리와 현대 문화의 발전 과정을 다루었다. 시간적으로 초대/고대 교회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2000년 전체를 망라하고, 범위로도 서방 가톨릭, 동방정교회, 개신교 각 교파 전통, 그리고 기독교와 현대사상 및 문화와의 만남을 아우른다. 교리의 발전이 전권을 관통하는 핵심 맥이지만, 교리 형성을 둘러싼 문화적, 철학적, 정치사회적 맥락이 포괄적으로 분석되어 있다. 이 책이야말로 펠리칸의 전방위적인 지적 역량을 확인할 수 있는 압도적 대작, 즉 '바로 그 걸작'(the masterpiece)이다.

1982년에 한국에서 유일하게 출간된 단행본 이후 13년 만인 1995년에 이미 언급한 <고대 교회 교리사>가 출간되었다. 이 책은 펠리칸의 '바로 그 걸작' 제1권에 해당한다. 출판사 크리스챤다이제스트와 역자 박종숙은 고대 교회 교리사 분야의 이 책을 출간하면서, 추가로 중세 교회 교리사와 종교개혁 교리사에 해당하는 원서의 제3권과 제4권도 연속으로 출간할 계획을 세웠던 것 같다. 그러나 1권이 1995년에 나온 이후로 지금껏 추가 번역서는 나오지 않았다. 이렇게 펠리칸은 고대 교회, 특히 교리사 전문가로 한국 독자의 뇌에 확실히 각인되었다.

야로슬라프 펠리칸.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이미지

펠리칸 책이 다시 소개된 시점은 1999년이었다. 현재 일본 난잔종교문화연구소 소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김승철이 <예수의 역사 2000년: 문화사 속의 그리스도의 위치>(동연)라는 제목의 번역서를 낸 것이다. 이어서 18년 만인 2017년에 펠리칸 책이 네 번째로 한국에 소개되었다. <성서, 역사와 만나다 Whose Bible Is It?: A Short History of the Scriptures Through the Ages>(비아)는 2006년에 사망한 펠리칸의 거의 마지막 작품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2019년에 같은 비아 출판사에서 <예수, 역사와 만나다>가 번역되어 나왔다. 이 책의 원서는 1985년 초판에 이어, 1999년에 개정판으로 다시 나왔는데, 상기한 김승철의 번역서 원서도 바로 이 책이었다. 동연 출판사와 판권 계약이 종료됨에 따라, 비아는 원출판사인 예일대출판부와 1999년판 판권을 새로 계약했다. 이전 동연 번역판이 갖고 있던 번역상 오류를 수정하고 편집까지 시각적으로 탁월하게 해내어, 두 분야 모두에서 상당한 업그레이드를 이루어 냈다.

원서 제목만으로도 유추할 수 있듯이, 그리고 비아의 최근 두 한글 번역판이 보여 주는 친절한 일관성으로도 알 수 있듯이, 이 책들은 전 역사 속에서 각각 성경과 예수라는 특정 키워드가 종교, 문화, 사회, 학문 각 영역에서 어떻게 자리매김하고, 수용되고, 영향을 끼쳤는지를 통시적으로 추적하는 역사서다. 펠리칸은 이런 종류의 책 쓰기를 즐긴 것 같다. 역사 속에서 마리아가 인류에게 인식된 역사를 추적하는 1996년작 <Mary Through the Centuries: Her Place in the History of Culture>은, 그 스스로가 <예수, 역사와 만나다>의 개정판 서문(13쪽)에서 밝혔듯이, 이 책과 짝을 이룬다. 특정 단어, 인물, 용어, 주제, 개념이 전 인류 역사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대한 이런 책을 쓰려면, 다루는 특정 주제 하나뿐만 아니라, 그를 둘러싼 수많은 연관 주제와 분야를 망라하는 방대하고 세밀한 인문학적, 과학적 지식의 망(matrix)이 필요하다.

20세기 최고의 교회사학자 중 하나로 널리 칭송받는 펠리칸의 이런 역량이 길러진 배경에는 다양한 인종과 민족, 언어, 종교가 교차하는 무대인 미국에서도 유별나게 독특한 출생, 학문, 신앙의 혼종성(hybrid)이 있었던 것 같다. 펠리칸의 아버지는 슬로바키아계 루터파 목회자였는데, 몇 세대 전에 미국으로 이민한 집안 출신이었다. 종교개혁 이래 가톨릭이 주류인 슬로바키아에서 루터파는 소수였다. 이런 소수파 개신교도 펠리칸의 아버지가 결혼한 아내는 놀랍게도 세르비아인이었다. 세르비아는 발칸반도의 대표적인 동방정교회 국가였다. 루터파 슬로바키아인과 정교회 세르비아인의 결혼으로 태어난 아이 야로슬라프 펠리칸은 이렇게 부모의 각각 다른 루터교와 정교회 배경에서 자랐다. 바로 그런 이유로 부모의 두 모국어를 포함한 대여섯 슬라브계 언어를 읽고 쓸 수 있었다. 또한 모국어로서의 영어, 루터와 교부를 전공한 서양 학자 다수와 마찬가지로, 독일어, 라틴어, 프랑스어 등의 서유럽 언어, 신약성서와 동방교회의 모어인 그리스어, 심지어 서쪽 유럽이 아니라 동쪽 아시아로 확산된 초기 기독교의 학문 언어인 고대 시리아어도 능숙히 활용했다. 그의 이런 문화적, 언어적 혼종성은 특급 학자가 될 만한 지적 능력을 지닌 젊은 학자가 누린 최고의 유산이었다.

학문 여정도 특별했다. 루터파 신자로서, 미국 루터교의 대표 신학교 중 하나인 컨콜디아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면서 루터파 전통에 깊이 천착한 그는 시카고대학에서 루터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루터를 연구했다는 사실만으로는 서로 차이가 없지만, 루터에 접근한 방식은 전혀 달랐다. 컨콜디아신학교는 루터교미주리시노드(LCMS)에서 운영하는 신학교였다. 이 교단은 미국 내에서 두 번째로 큰 루터교 교단으로, 세계교회협의회(WCC), 미국교회협의회(NCC), 루터교세계협의회(LWF)에도 가입되어 있지 않은 아주 보수적인 신앙을 유지했다. 미국 루터파 최대이자 상당히 진보적인 주류 교단(mainline churches)인 미국복음주의루터교회(ELCA)에 비해 한층 고백주의 성향이 강했다. 당연히 루터와 루터교 유산이 큰 의문 없이 신성화되는 학교였다. 그러나 그가 일급 학자로 길러진 토양이 된 시카고대학은 하버드와 함께 미국에서 가장 진보적이고 비평적으로 신학과 역사에 접근하는 학교였다. 여기서 루터를 대하는 방식은 의심과 비교, 비평과 냉담에 기초해야 했다. 한 걸음 비켜나서 학문의 칼날로 교회의 역사를 날카롭게 분석 비평한 외부자 시선과 물려받은 유산의 가치를 가슴으로 간직한 내부자 관점 사이에서 이상적인 균형을 유지한 것이 그를 기독교 울타리 안과 밖 모두에서 칭송받는 학자로 만든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신앙 전통 간 경계를 허문 월경越境 경험도 특별했다. 루터파 목사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그는 목회자가 되고자 컨콜디아신학교에 진학했다. 대학에서도 비록 비평적이기는 했지만, 루터교 전통의 뿌리이자 아이콘인 루터를 애정을 품고 연구했다. 학문 경력의 절반 이상은 루터의 작품을 영어로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일에 헌신했다. 그러나 루터를 거슬러 중세를 지나 고대 교부에게 이르면서, 그는 기독교 전통의 고대성과 사도성, 보편성, 정통성에 매료되었다. 오랜 신학과 역사 연구 후에, 고대 교회와 교부들에 지적 매력을 느끼고, 가톨릭과 정교회 예전에 오감을 사로잡히고, 수도사들의 순전한 헌신에 경외감을 느낀 후, 결국 교회의 고대 신앙으로 돌아가는 길을 택한 서양, 특히 미국 개신교 학자가 20세기에 적지 않았다. 펠리칸은 다른 이들보다 그 길이 한층 더 쉬웠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의 어머니의 유산이 동방정교회에 있었기 때문이다. 40년 이상 루터교 목사였던 펠리칸은 75세였던 1998년에 아내와 함께 정교회로 소속을 옮기고 평신도가 되었다. 그러나 그가 정교회 교인이 되었다고 해서, 원래의 루터파 유산과 가톨릭 전통을 모두 버린 것은 아니었다. 교회의 에큐메니컬 이상에 헌신한 그에게 다양한 교회 전통의 선한 유산은 모두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 역사와 만나다>는 이런 펠리칸의 꼼꼼한 학문적 역량, 따뜻한 인문학적 통찰, 엄격한 신학적 분석, 폭넓은 사유를 모두 만날 수 있는 책이다. 비록 한 단어에만 범위의 제한을 두었지만, 두 음절로 된 단어 하나가 이를 둘러싼 시공간과 얼마나 밀접하고도 다채로운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짧은 두 음절 단어가 길이자, 진리이자, 생명이라고 스스로 주장한 '예수'라면, 그리고 예수가 역사 속에서 진과 선과 미의 본체이자 거울로 인류에게 인식되었다면 그 파급력과 영향력, 다양성, 변형성, 상징성은 어떠했겠는가?

이재근 /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겸임교수, 광교산울교회 협동목사. 저서로는 <세계 복음주의 지형도>(복있는사람), <종교개혁과 정치>(SFC출판부), <종교개혁과 평신도의 재발견>(공저, IVP)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근현대 세계 기독교 부흥>·<복음주의 세계 확산>·<복음주의 확장>·<종교개혁은 끝났는가?>(CLC) 등이 있다.

1) 2009년에 추가로 스무 권을 번역하는 프로젝트가 시작되어, 2019년 현재 아홉 권이 출간되었다. https://communication.cph.org/hubfs/Luthers%20Works/Luther-Prospectus-2019.pdf?hsLang=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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