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 기독교사 이야기> / 다케모리 마사이치 지음 / 세리카와 데쓰요 옮김 /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펴냄 / 225쪽 / 1만 3000원

[뉴스앤조이-김은석 사역기획국장] 저자 다케모리 마사이치(1907~1990)는 1907년 중국 대련에서 태어나 1919년 만주 봉천으로 이주해 1931년까지 만주 교회를 생생하게 체험하며 성장했다. 이후 일본으로 돌아가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된 뒤 만주 체류 시절 도서관에서 접한 선교사들 자료와 당시 선교사와 목사들에게서 들은 내용을 <복음신보>라는 잡지에 연재했다. 이를 수정·보완해 1940년 단행본으로 펴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만주에서 활동하며 사랑과 섬김의 족적을 선명하게 남긴 스코틀랜드 선교사 4명, 아일랜드 선교사 3명, 만주인 전도사 3명, 캐나다 선교사 1명, 프랑스 선교사 1명의 이야기가 총 13장 중 12장에 기록돼 '선교사 열전' 느낌을 주기도 한다. 저자는 그들이 만주 사람을 그토록 사랑할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의 깊은 사랑을 받은 사람이 그 사랑의 부름을 받고 만주를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한국교회사가 이덕주 전 감신대 교수의 권유와 지원으로 일본인 학자 세리카와 데쓰요가 번역했다.

"눈을 북쪽으로 돌리면, 소하연小河沿 공원을 에워싼 작은 숲을 넘어 의학교가 석양에 빛나며 아름답게 우뚝 서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봉천 30년>의 저자 크리스티의 40년 동안의 수고의 성과이다. 그리고 사도 바울과 같은 대전도자며, 게다가 스데반과 같이 장렬하게 순교한 맹인 상삼常森이 마음의 눈을 뜬 곳은 이 병원의 어느 방이었을 것이다. 또한 대학의 정면에서 동쪽으로 약 2킬로미터쯤 가면, 만주에 체류한 지 겨우 두 달 만에, 봉천 거리를 페스트의 위협으로부터 구하기 위해 싸우다가 페스트로 인해 쓰러진 청년 교수 잭슨의 묘지가 있다. 그 밖에 로스 박사 등이 건설한 동관東關교회, 또 의화단의 박해로 엄청난 순교자를 낸 고딕식 가톨릭교회 등이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데에 산재하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이 만주 땅은 정말로 이들 성도들의 피로써 채워진 성지였다." (1장 머리말, 4쪽)

"'이 5년 동안을 회고하면 우리들은 신앙을 격려받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짧은 기간에 만주 교회가 이룬 진보는 우리로 하여금 만주 전도의 성스러운 희망에 타오르게 한 것이다'라고 그레이엄은 적었다. 그러나 급격한 진보는 폐해를 수반했다. 특히 그 진보가 순수한 신앙을 구하는 구도심에서가 아니고, 말하자면 근대적 요구의 변형이라고 할 경우네는 그 폐해가 두드러진다. 일본에서도 그러한 시기가 있었다. 그 무렵 교회는 서양 문화를 흡수하기 위한 도구와 같이 생각되고 있었다. 그러나 교회 밖의 세계가 교회 밖의 길에서 서양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이 쉽게 되면, 교회는 많은 사람에게서 시대에 뒤떨어진 것처럼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교회의 참된 사명은 이 사람들에게는 처음부터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중국과 같은 나라에서는 이러한 경향이 한층 현저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이 시대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그리 변하지 않았다. (중략) 중국에서 기독교가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그러한 점이 더없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이러한 것이 원래 교회 발전의 본줄기여서는 안 된다." (7장 '해일 범람', 1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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