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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이스라엘의 멸망
[박태순의 교양으로 읽는 성서] 왕조시대⑱ 나라를 패망의 길로 이끈 왕들과 지배층
  • 박태순 (newsnjoy@newsnjoy.or.kr)
  • 승인 2019.12.26 14:16

멸망의 전조

디글랏 빌레셀이 공격해 사마리아의 목을 죄어 오는 상황에도 북이스라엘은 내분으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브가히야는 르말랴 아들 베가의 반역으로 죽게 됩니다

"그 장관 르말랴의 아들 베가가 반역하여 사마리아 왕궁 호위소에서 왕과 아르곱과 아리에를 죽이되 길르앗 사람 오십 명과 더불어 죽이고 대신하여 왕이 되었더라(왕하 15:25)."

베가는 엘라의 아들 호세아가 베가를 살해하고 왕이 됩니다.

"웃시야의 아들 요담 제이십 년에 엘라의 아들 호세아가 반역하여 르말랴의 아들 베가를 쳐서 죽이고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왕하 15:30)."

베가 때에 디글랏 빌레셀이 와서 이스라엘 백성을 아시리아로 잡아갑니다.

"이스라엘 왕 베가 때에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이 와서 이욘과 아벨벳마아가와 야노아와 게데스와 하솔과 길르앗과 갈릴리와 납달리 온 땅을 취하고 그 백성을 사로잡아 앗수르로 옮겼더라(왕하 15:29)."

이 사건 또한 디글랏 빌레셀의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이스라엘 그 모든 거주민들과 그들의 재산을 앗수르로 끌고 갔다. 그들은 자기들의 왕 베가를 폐위시켰고 내가 그들 위에 호세아를 왕으로 임명했다. 그들로부터 금 1달란트, 은 1000달란트를 조공으로 받았고, 앗수르로 가져왔다."

북이스라엘 마지막 통치자 호세아왕(기원전 732~기원전 724년) 때는 잠시 안정을 찾았지만, 디글랏 빌레셀의 충성스러운 봉신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호세아는 디글랏 빌레셀이 죽고 살만에셀 5세(기원전 727~기원전 722년)가 왕위에 있을 때 제국 서부에서 발생한 반란에 휘말리게 됩니다.

북이스라엘은 배반과 반역을 되풀이하면서 제대로 통치하지 못하는 극도로 혼란한 시기를 맞이합니다. 내부 정치가 흔들리는 상황에서 아시리아 같은 거대 제국의 침입을 방어하기란 불가능했습니다.

아시리아의 포로 되다

화가 난 살만에셀은 호세아를 포로로 잡아가는 것으로 보복하는데(왕하 17:5), 그는 두로와 사마리아를 포위 공격합니다(왕하 17:5-6, 18:9-10). 이 포위 공격이 3년 동안 이어지다가, 사마리아는 함락되고 북이스라엘 역사는 종결됩니다.

"호세아 구 년에 앗수르 왕이 사마리아를 취하고 이스라엘 사람을 사로잡아 앗수르로 끌어다가 할라와 고산 하볼 하숫가와 메대 사람의 여러 고을에 두었더라(왕하 17:6)."

열왕기하 17장 1-4절은 살만에셀의 공격으로 호세아왕이 조공을 바치다가, 이집트 파라오 소(So)에게 사자들을 보내고 아시리아를 배반하자 살만에셀이 호세아를 감옥에 가두고 3년 포위 공격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살만에셀 5세는 포위 공격이 끝나고 두어 달 뒤인 기원전 722년 겨울에 죽었으며, 그의 후계자 사르곤 2세(Sargon 2, 기원전 722~기원전 705년)이 사마리아 공격을 기원전 722년 마무리합니다. 사르곤의 명문에 2만 7290명이 유배되었다고 하는데, 아마 기원전 720년 원정의 초기 단계였을 것입니다.

"내 지배 초기에 내가 사마리아 사람들의 도시를 포위하여 점령했다. 내게 승리를 주신 신을 위해 내가 포로로 2만 7290명을 잡아 왔고, 그들 중에 군사들을 무장시켜 나의 군대에 전차 50승을 (…그 도시를 내가) 이전보다 낫게 재(건했)고, 그곳에 (내가) 직접 (점)령했던 다른 나라 주민들을 (정착시켰다). 내 관리를 그들 위에 총독으로 임명했고, 앗수르 사람이라면 (납부해야 할) 공물을 부과했다."

이러한 관행은 기원전 9세기 시작되었지만, 관행을 더 악명 높게 만든 것은 사르곤 전임자였던 디글랏 빌레셀 3세였습니다. 그는 훨씬 큰 규모의 유배와 양방향 인구 재배치 정책을 실시합니다. 제국 서부에서 데려온 피정복민들은 아시리아와 동부 속주에 정착하게 하고 동부와 남부 지역 포로는 서부에 정착하게 합니다. 열왕기하 17장 6절을 보면, 사르곤이 이스라엘 포로들을 아시리아로 이송했다고 하며 17장 24절을 보면 그가 바벨론과 엘람(이란 서부)에서 데려온 사람들을 사마리아에 강제 정착시킵니다.

사르곤의 명문에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나의 주 앗수르 신을 의지하여 저 멀리 사막 가운데 살며 지도자도 관리도 없고 지금까지 그 어느 왕에게도 공물을 바쳐본 적이 없는 아랍 족속들, 곧 타무드, 이밧디, 마르시마누, 그리고 하야파 부족들을 괴멸시켰다. 그 남은 자들을 잡아다가 사마리아에 정착시켰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할라(Halah, 니느웨 북동쪽)와 하볼(Habor, 터키 남동부와 시리아 북동부의 고지대로부터 남쪽으로 흘러 유프라테스로 들어오는 지류인 카부르강) 강변 및 메대(Medes, 이란 북서부) 지역에 정착하게 됩니다.

북이스라엘 호세아의 옛 왕국은 아시리아의 속주인 사메리나(Samerina)로 재편되고 사마리아 성은 전초기지로 사용하기 위해 아시리아의 감독 아래에서 재건됩니다.

기원전 722년, 독립국가였던 이스라엘 곧 오므리 왕조와 예후 왕조의 마지막 왕들의 통치기에 무시 못 할 강대국 지위를 누렸던 북왕국 이스라엘은 아시리아에 멸망되고 돌(Dor), 므깃도, 길르앗, 사마리아만 아시리아의 네 속주로 남게 됩니다.

사마리아 멸망 원인

마지막 왕 호세아는 아시리아와 이집트 사이에서 외줄 타기 외교를 할 수밖에 없었는데, 시대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맙니다. 처음에는 신흥 강대국인 아시리아에게 조공을 바쳤지만, 곧 이집트와 결탁해 배반하게 됩니다. 이것이 결정적인 패착이 됩니다(왕하 17:1-6).

살만에셀이 호세아를 향해 진군해 와서 공물과 충성의 맹세를 받았다는 열왕기하 17장 3절 진술에 따르면, 살만에셀이 페니키아로 가는 길 또는 거기서 돌아오는 길에 이스라엘을 방문했을 때 호세아는 한 번 더 공물을 바칩니다. 그러나 열왕기하 17장 4절에 따르면, 이후 호세아는 아시리아에 대항하고자 이집트와 같이 모의를 도모해 아시리아의 미움을 사게 됩니다. 아시리아에 대항한 호세아의 모반은 시리아-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난 대규모의 반아시리아 반란에 동참한 것이거나(사 14:28-32 참조), 이집트의 선동과 지원에 의지해서 일어났을 것(호 7:11; 12:1)입니다.

사마리아 멸망의 다른 원인은 내부 적을 물리치기 위해 외부 세력을 끌어들인 데 있습니다. 기원전 732년, 다메섹 르신과 북이스라엘 베가는 남유다 왕 요담 통치기에 했던 것처럼 다시 합동 군사작전을 펼쳐 남유다를 공격합니다. 이번에는 예루살렘을 포위 공격합니다. 위협을 느낀 남유다 왕 아하스는 자원해서 아시리아에게 조공을 바칩니다.

이렇게 황당한 상황이 이사야 7장 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웃시야의 손자요 요담의 아들인 유다의 아하스 왕 때에 아람의 르신 왕과 르말리야의 아들 이스라엘의 베가 왕이 올라와서 예루살렘을 쳤으나 능히 이기지 못하니라(사 7:1)."

아하스와 그의 백성들 마음이 "숲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리는 상황에서(사 7:2), 이사야는 "이들은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하지 말며 낙심하지 말라"고 권면하지만(사 7:4), 아하스왕은 디글랏 빌레셀 3세에게 은금 선물과 더불어 사자를 보내어 도움을 구합니다. 결국 디글랏 빌레셀 3세의 두 번째 원정(기원전 734~기원전 732년)에서 시리아의 다메섹이 함락됩니다(왕하 16:5-9). 이 원정에 대한 성서 기록은 당시 유다 왕이었던 아하스(기원전 735~기원전 727년)가 디글랏 빌레셀에게 탄원한 데 대한 응답으로 시작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디글랏 빌레셀 3세는 다메섹을 점령하고 르신을 처형합니다(왕하 16:8-9).

"아하스가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에게 사자를 보내 이르되 나는 왕의 신복이요 왕의 아들이라 이제 아람 왕과 이스라엘 왕이 나를 치니 청하건대 올라와 그 손에서 나를 구원하소서 하고 아하스가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은금을 내어다가 앗수르 왕에게 예물로 보냈더니 앗수르 왕이 그 청을 듣고 곧 올라와서 다메섹을 쳐서 점령하여 그 백성을 사로잡아 기르로 옮기고 또 르신을 죽였더라(왕하 16:7-9)."

아하스왕이 아시리아에 도움을 요청해 유다 왕국은 위기를 넘겼으나, 북이스라엘은 패망의 길에 들어서게 됩니다.

디글랏 빌레셀이 진행한 서부 원정의 경제적 동기와 결과는 상업적 이익에 있었습니다. 그는 주요 시리아 교역로들 및 이집트로 가는 육로인 해안 고속도로인 비아 마리스(Via Maris)의 직접적 통제권을 확보합니다. 또한 다메섹 및 페니키아와 블레셋의 항구도시들을 통치했고, 아라비아 여왕 자비베(Zabibe)를 지배했으며, 다메섹을 정복했습니다. 지중해 항구도시들의 무역로를 장악해 아시리아로 공물이 쏟아져 들어오게 됩니다.

당시 자비베를 이어 여왕이 된 아라비아의 여왕 '삼시'(Samsi)와 블레셋의 군주 미틴티(Mitinti)은 반란을 일으켜 향료와 향신료 무역의 독립성을 회복하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으나, 아시리아의 군사력을 이기지 못해 결국 실패로 끝납니다.

기원전 8세기~기원전 7세기에 걸쳐 아시리아가 서쪽으로 진출하면서 이웃 나라가 영향을 많이 받게 됩니다. 사마리아와 므깃도, 하솔 등지에서 '지붕 없는 뜰'이라 불리는 건물이 발견되었습니다. 하솔의 북동쪽(갈릴리 호수 북쪽), 아엘렛 하샤하르(Ayelet HaShahar)에는 아시리아 행정 중심지의 일부분으로서 큰 건물이 있었고, 므깃도에는 도시 구획을 응용한 아시리아 건축 양식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텔 제메(Tell Jemmeh)에는 전형적인 아시리아 형식으로 여러 방이 딸려 있는 건물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아시리아 건축 양식은 이스라엘보다 더 뛰어났으며, 그런 점들이 북이스라엘이 아시리아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이렇게 자신들보다 훨씬 발달한 문명에 마음을 빼앗겨 이를 받아들이는 데 급급했습니다. 이는 곧 혼탁한 종교 상황을 개선할 이유를 찾지 못해 북이스라엘 백성들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데 실패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사마리아 정복의 고고학

고고학 발굴 결과, 사마리아에 화재의 지층이나 성이 파괴된 흔적의 지층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고고학적 증거는 사마리아가 3년 동안 포위되었다가 점령당했다는 열왕기하 17장 5-6절 기록에 의문을 품게 합니다. 오므리가 세운 사마리아성이 아시리아에 의해 파괴되었다는 고고학적 증거는 없습니다. 함락되지도 않은 사마리아성이 함락되었다고 성서에 기록했을까요? 아마도 함락되었으되 대규모 파괴 없이 정복당했다고 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결론적으로 추정해 보면, 대규모 파괴는 없었으나 사마리아가 정복당하고 많은 사람이 포로로 끌려간 것은 분명합니다. 아시리아가 사마리아를 파괴하지 않고 사마리아 지방을 창설하기로 결정했을 때, 자신들의 지방 총독에게 알맞은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 남겨 두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오므리궁에서 삼나무에 상아와 뼈를 새겨 넣은 것과 같은 스타일로 장식된 건물을 발견했는데, 이런 건물 형식은 자신들에게도 익숙한 모양의 건물이었습니다.

그들의 본부로 여기를 정하는 것은 자신들 지배의 합법성과 지배력을 강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습니다. 이것이 사마리아성이 파괴되지 않은 가장 큰 이유입니다. 사마리아는 외적으로는 파괴되지 않았으나 내적으로는 지배 주체가 완전히 바뀐 것이기에 멸망한 것은 분명합니다.

오로지 왕권에만 눈이 멀었던 북이스라엘 왕들과 여호와 신앙을 저버렸던 지배층들의 어리석음은 나라를 패망의 길로 이끌었습니다.

북왕국 멸망을 예고했던 아모스의 처절한 외침이 이렇게 비극적으로 성취되고 맙니다(암 5:2).

"이스라엘이 엎드러졌음이여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로다!"

*팟빵 '에르고니아 라디오' 채널 바로 가기: http://www.podbbang.com/ch/12827
*유튜브 채널 '에르고니아' 바로 가기: https://www.youtube.com/channel/UCPw8sxRrpaJba1RXI97GwSA
박태순 / 새들녘교회를 섬기고 있으며, 신학 아카데미 에르고니아(http://ergonia.org)에서 신학의 대중화에 힘쓰고 있다.

참고 문헌

1) Lester L. Grabbe, 『고대 이스라엘 역사』, 류광현 외 1인 역 (서울: CLC, 2012)
2) Phillp J. King, Lawerence E. Stager, 『고대 이스라엘 문화』, 임미영 역 (서울: CLC, 2016)
3) 박종수, "상아 궁전의 성읍, 사마리아," 『성경과 고고학』, 69집 (2011): 80-116
4) 김태훈, "아시리아 역사 문서와 사마리아의 함락," 『성서학연구원심포지움』, 35집 (2002): 6-30
5) 이종근, "시리아-에브라임 전쟁과 디글랏 빌레셀 3세의 패권," 『신학논단』, 61집, (2010): 83-113
6) Rupert Chapman, "Samaria Capital of Israel," Biblical Archaeology Review 43:5, September/October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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