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시대의 '국인'

신라 정치·사회사를 기록한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국인國人이 여러 번 등장합니다. 국왕을 추대·폐위하는 것으로 10여 차례, 장례를 주관하는 것으로 3차례, 국왕을 평가하는 사례에서 2차례 나옵니다. 이밖에도 다양한 장면에서 몇 차례 더 보이기도 합니다.

많은 신라사 연구자가 국인에 대해 다양한 견해를 제시했습니다. 국인이 '일반민' 또는 '왕경인', '왕경에 거주하는 정치집단' 등이라는 것입니다. 시기를 초월해 보편적 개념을 제시한 사례부터 특정 사건에 등장하는 국인에 대한 견해까지 다양합니다.

곧 "국인은 국도國都를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국사國事에 참여하며, 민을 상대적으로 인식하는 상위 부류로서 위로는 왕족을 포함하며 아래로는 지방 소국의 간층까지도 아우를 수 있는 범지배층"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국인과 매우 비슷한 집단이 요시야 왕위를 둘러싼 상황에서도 등장합니다.

아몬왕의 죽음

히스기야 아들 므낫세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아몬(기원전 642~기원전 640년)이 22세에 왕이 됩니다. 그의 이름은 때때로 이집트의 태양신 아문(Amun)과 연결됩니다. 아마 앗수르바니팔과 그의 서방 속국의 왕들이 이집트를 격퇴했던 해(기원전 664년)에 태어났을 것입니다.

아몬은 신복들에게 암살당하고, 신복들은 다시 '그 국민'(히브리어 '암 하아레츠')에게 죽습니다. 그 국민들은 요시야를 왕으로 삼습니다.

"그의 신복들이 그에게 반역하여 왕을 궁중에서 죽이매 그 국민이 아몬왕을 반역한 사람들을 다 죽이고 그의 아들 요시야를 대신하게 하여 왕을 삼았더라(왕하 21:23-24)."

아몬 암살의 배후 세력은 누구였을까요? 아몬의 암살은 예루살렘 내 극단적 반아시리아파 소행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시리아 멍에를 떨쳐 버릴 절호의 기회를 기다렸던 혁명적 세력이 나라에 있었다고 추론해 볼 수 있습니다. 아시리아의 영향력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란이 있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아시리아가 정복한 백성들에게 아시리아 신들을 예배하도록 요구하지 않았기에 아몬의 아들 요시야의 종교 개혁이 반아시리아 성격을 띤다는 증거를 신명기 역사서에서 찾을 수 없다고 보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것과 달리 유다가 아시리아와 동맹 관계였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님루드(Nimrud)에서 발견된 쐐기 모양의 아카디안 본문들과 궁전 조각들과 님루드 여왕들의 무덤에서 찾은 새로운 증거를 근거로 하는 주장입니다. 국제무역에서 유다와 아시리아의 관계가 굴복당하는 신하와 무자비한 군주 관계보다는 피보호자(client)와 보호자(patron) 관계와 비슷했다는 말입니다.

과연 아시리아는 유다에 아무런 종교적인 압박도 가하지 않았을까요?

아시리아가 종교를 강요하지 않았더라도 고대 제국 시대 속국들의 종교는 독특한 종교 개념을 가졌으며, 신들의 전쟁이라는 개념이 있었습니다(왕상 20:28 참조). 이 사실에 비추어 보면, 아시리아가 자신들의 종교를 유다에 강요하지 않았을 리 없습니다. 유다 왕국은 협소한 중심 지역을 제외하면 대부분 땅이 거의 1세기 동안 아시리아 통치 아래 놓여 있었습니다. 유다는 75년 동안 아시리아의 퇴락한 봉신국으로서, 그 규모가 위축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요시야 당시 예언자 스바냐의 질책에서 공통된 점을 추정해 보면, 스바냐 예언의 직접적 대상은 요시야가 아직 어릴 때 왕궁에 있던 친아시리아 파당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요시야 당시 친아시리아의 영향력을 가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호와가 북쪽을 향하여 손을 펴서 앗수르를 멸하며 니느웨를 황폐하게 하여 사막 같이 메마르게 하리니(습 2:13)."

'암 하아레츠'는 누구인가

개역개정은 '그 국민', '온 백성', '백성들' 등으로 번역했지만, 히브리어로는 명확히 '암 하아레츠'입니다. 암 하아레츠는 구약에 73회(단수는 51회, 복수는 22회) 등장합니다. 몇몇 학자는 고정된 의미의 용어가 아니라며 별 의미 없는 일반 백성들이라고 주장하는데, 많은 학자가 이들을 신명기 역사서 범주 안에서 특별한 용어로 해석합니다. 정치적으로는 반아시리아 정책을 폈고, 아시리아 경제권에 기생한 지방 호족을 견제했으며, 이를 위해 지방 산당을 제거하고 유월절을 중앙에서만 지키게 하는 민족주의 세력이었다는 주장입니다.

이들이 포로기 이전이나 포로기 본문들에서 땅을 소유한 모든 시민이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이전의 엘리트들로부터 이양받은 몇백 명의 지주 귀족들로 구성된 소수 무리로서, 국가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긴 전통을 가진 가장 강력하고 잘 조직된 압력 단체였을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이들을 다윗 계열 유다 왕의 선출과 관계된 유력한 정치권력을 지닌 대중적 의용군 지도자들로 추정하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암 하아레츠에 의한 요시야 즉위는 반아시리아 정책(독립 정책)을 확고하게 하는 것이 동기가 되었습니다. 요시야 지지는 다양한 사회층으로 확산되었을 것입니다. 후기 유다 왕정이 처한 정치적·사회적 현실을 보면, 국가 지도자들이 파당이 되어 권력 증진을 위해 다투고 왕과 국가정책에 영향을 주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이들은 사회 지도자들, 곧 예언자·관료·제사장·귀족으로 구성된 특정한 세력입니다.

요시야왕이 내린 명령에 따라 성전을 수리할 때 대제사장 힐기야가 율법책을 발견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여기 등장하는 인물들을 주목해 보면, 암 하아레츠의 성격이 더 분명히 드러납니다.

"이에 제사장 힐기야와 또 아히감과 악볼과 사반과 아사야가 여선지 훌다에게로 나아가니 그는 할하스의 손자 디과의 아들로서 예복을 주관하는 살룸의 아내라 예루살렘 둘째 구역에 거주하였더라. 그들이 그와 더불어 말하매(왕하 22:14)."

겨우 여덟 살에 왕이 된 요시야는 암 하아레츠 영향 아래 유년 시절을 보냈을 것입니다. 요시야는 이들의 적극적 지지 아래 성전 수리를 하는 도중에 발견한 율법책을 근거로, 남유다뿐 아니라 북이스라엘 지역까지 아우르는 대대적인 종교·정치 개혁을 펼칩니다. 이를 볼 때 율법책 발견 장면에 나오는 이들은 암 하아레츠 핵심 인물이었을 것입니다. 대제사장, 선지자, 예복을 주관하는 이, 서기관, 왕의 시종 등 요시야왕과 가장 가까이 있는 인물들입니다.

'암 하아레츠' 집단의 특징

열왕기하 묘사에서 암 하아레츠의 정치·종교 성향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아달랴의 폐위와 요아스의 선출 이야기에서 이들의 첫 역할을 볼 수 있습니다(왕하 11장; 대하 23장). 이들은 분명히 혁명과 새 왕의 즉위와 관계가 있는 집단들(제사장들, 궁정 관리들, 군사 지도자들)을 가리키는 연합체로 나옵니다.

또한 바알 신당을 파괴한 군사 집단["온 백성이 바알의 신당으로 가서 그 신당을 허물고 그 제단들과 우상들을 철저히 깨뜨리고"(왕하 11:18)]과 요시야 즉위의 주도자들["그 국민이 아몬 왕을 반역한 사람들을 다 죽이고 그의 아들 요시야를 대신하게 하여 왕을 삼았더라"(왕하 21:24)]로 활동합니다. 요시야 아들 여호아하스의 즉위와도 연관이 있습니다.

"신복들이 그의 시체를 병거에 싣고 므깃도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그의 무덤에 장사하니 백성들이 요시야의 아들 여호아하스를 데려다가 그에게 기름을 붓고 그의 아버지를 대신하여 왕으로 삼았더라(왕하 23:30)."

더 많은 증거는 열왕기하 23장 35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 '백성들'은 일반 백성이 아닌 암 하아레츠입니다. 이들은 이집트의 파라오 느고에게 공물을 바치기 위한 세금을 내야 했습니다.

"여호야김이 은과 금을 바로에게 주니라. 그가 바로 느고의 명령대로 그에게 그 돈을 주기 위하여 나라에 부과하되 백성들 각 사람의 힘대로 액수를 정하고 은금을 징수하였더라(왕하 23:35)."

이들이 이집트에 저항하였기에 더 무거운 세금을 부과했던 것입니다.

요시야왕 당시 예언자인 예레미야의 기록(1:15; 34:19; 37:2; 44:21)에서 그들은 왕자들, 제사장들, 내시들, 왕의 종들, 왕 자신과 연합되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이 특정한 의도와 목적을 품은 잘 짜인 세력임을 암시합니다.

결론적으로 암 하아레츠는, 아래로는 자기 토지를 소유한 자유 농민에서부터 군사력을 지닌 군사 지도자들, 위로는 서기관과 제사장들까지 포함하는 포괄적 세력입니다. 이들은 친아시리아 정책을 지지하는 세력들과 대비되는 또 다른 세력입니다. 다윗의 왕조를 지지하고 외세를 배척하는 민족주의 색채가 강하며 여호와 신앙에 충실한 집단이었습니다.

이들은 아달랴 시대부터 요시야 시대까지 자신들의 성향에 따라 유다 역사에 커다란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특별히 겨우 여덟 살에 불과한 요시야를 왕위에 올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합니다. 요시야 개혁에 정치·경제적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집단이 되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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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순 / 새들녘교회를 섬기고 있으며, 신학 아카데미 에르고니아(http://ergonia.org)에서 신학의 대중화에 힘쓰고 있다.

참고 문헌

1) 한동구, "아몬왕의 불행과 요시야왕의 등장에 대한 역사적 고찰," 『구약신학저널』, 2권3호 (2001): 236-248.
2) 최의광, "신라 국인의 의미," 『한국동북아논총』, 제79호 (2016) : 171-195.
3) Ernest. W. Nicholson, 『신명기와 전승』, 장영일 역 (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 2003)
4) Joseph P. Healey, "AM HA'AREṢ," ABD, vol. 1.
5) Shigeyuki Nakanose, Josiah's Passover (New York: Orbis Book, 1993)
6) Patricia Dutcher-Walls, "The Social Location of the Deuteronomists: A Sociological Study of Factional politics in Late Pre-Exilic Judah," JSOT, 52 (1991): 77-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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