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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로보암 2세의 황금시대
[박태순의 교양으로 읽는 성서] 왕조시대⑭ 경제적 풍요와 우상숭배
  • 박태순 (newsnjoy@newsnjoy.or.kr)
  • 승인 2019.10.29 14:23

황금시대, 여로보암 2세
(기원전 787~기원전 748)

경제적 풍요가 여호와 신앙에 도움이 될까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여로보암 2세는 확실히 그렇지 않았습니다. 대내외적으로 황금시대를 열었는데, 이스라엘은 속에서부터 곪아 가고 있었습니다.

"유다의 왕 요아스의 아들 아마샤 제십오년에 이스라엘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사마리아에서 왕이 되어 사십일 년간 다스렸"습니다(왕하 14:23). 열왕기하 14장 25절에 따르면, 요아스 뒤를 이어 왕이 된 여로보암 2세는 "이스라엘 지경을 회복하되 하맛 어귀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하였"습니다. '하맛 어귀'는 레바논과 안티레바논산맥 사이에 있는 베카 계곡입니다. 이 회랑 지대로 진입하는 남쪽 입구는 단(Dan) 성읍 근처에 있었을 것입니다. '아라바 바다'는 사해死海입니다. 여로보암 2세 기록을 간직하고 있는 아모스서도 여로보암이 팔레스타인 지역 상당 부분을 되찾았다고 증언합니다(암 6:13-14).

열왕기하 14장 23-29절에 따르면, 아밋대의 아들 요나(요나서 주인공)는 이스라엘이 잃었던 땅을 되찾을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종 가드헤벨 아밋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영토를 회복하되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하였으니(왕하 14:25)."

수십 년 동안 남부 레반트 지역을 호령했던 다메섹(아시리아에 의해 기원전 732년 멸망)의 힘이 약해졌고, 아시리아의 공백기였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아시리아는 기원전 8세기 초반에 해외 원정 능력을 상실했고, 내부에서는 왕이 행사할 권력이 지방 관료들에게 넘어갔습니다.

지방 총독들은 왕에게 형식적으로 충성을 서약했지만, 상당히 자율적으로 행동할 수 있었습니다. 더욱이 우라르투(Urartu, 우랄투)가 시리아 북부에서 영향력을 확대해, 아시리아 지중해 무역로가 위협받게 됩니다. 또한 기원전 762년~기원전 759년, 많은 도시가 왕의 권력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다 디글랏 빌레셋(Tiglath-pileser) 3세 때부터 다시 왕권이 강해졌습니다. 아시리아는 그의 1차 서부 원정(기원전 743~기원전 738)이 일어날 때까지는 이스라엘에 심각한 위협이 되지 않았습니다.

아시리아와 다메섹 상황은 북이스라엘 왕국에 매우 유리하게 작용했습니다. 블레셋 땅에서 북쪽으로 갈릴리에 이르는 서부 해안 도로 역시 하사엘이 빼앗아 갔지만, 여로보암 2세 때는 이스라엘 지배 아래 놓였습니다.

여로보암 2세가 어느 이스라엘 왕보다도 오래 통치했고 북왕국 역사상 가장 번영을 누렸습니다. 이 시기를 황금시대 또는 은빛 시대라고 부릅니다. 그는 증조부 예후 이후로 내려온 친-아시리아 정책을 이어 갔습니다. 아시리아의 공백을 틈타 영토를 확장하고 광범위한 국제 무역을 펼쳤습니다.

열왕기서가 언급하는 여로보암 이야기는 매우 짧고, 평가 또한 부정적입니다(왕하 14:23-29). 이는 신명기 사가가 여로보암 2세 업적에 대한 주요 기준을 북이스라엘 멸망에 두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로보암 2세는 여로보암 1세(느밧의 아들)의 모든 죄를 그대로 물려받은 왕으로 평가받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로보암이 행한 모든 죄를 따라 행하여 거기서 떠나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종 모든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대로 드디어 이스라엘을 그 앞에서 내쫓으신지라. 이스라엘이 고향에서 앗수르에 사로잡혀 가서 오늘까지 이르렀더라(왕하 17:22-23)."

이스라엘 영토 회복과 국경 확장에 대해서는 여호와의 허락이 있었다고 서술합니다. 여로보암 2세가 부족했지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겪는 어려움을 불쌍히 여기셨고, 그 일을 할 다른 사람이 없는 것을 보시고 그가 이런 일을 이루도록 허락하셨다는 말입니다(왕하 14:26).

영토 회복이 신앙 회복을 보장해 주지는 않았습니다. 여로보암 2세 당시 신앙은 뒤틀려진 사회상과 맞닿아 있었습니다. 여로보암 2세의 마지막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여로보암의 남은 사적과 모든 행한 일과 싸운 업적과 다메섹을 회복한 일과 이전에 유다에 속하였던 하맛을 이스라엘에 돌린 일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여로보암이 그의 조상 이스라엘 왕들과 함께 자고 그의 아들 스가랴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왕하 14:28-29)."

여로보암 2세에 대한
고고학 기록

이스라엘 유적을 보면 기원전 8세기 전반은 새로운 도시 건설이 아닌, 기존의 도시를 수리·정비·확장하는 특징을 지닙니다. 작은 비도회적 유적들에서 기존 도시의 확장을 암시하는 증거(성벽 확장, 주거지가 성벽 너머 주변 시골로 퍼지는 현상)에 근거해 국가 전반적으로 인구가 상당히 증가했다고 추정합니다.

여로보암 2세 당시 특징적 고고학 유물은 기원전 8세기 고고학층에서 발견한 사치품들입니다. 특히 사마리아에서 발견된 정교하게 조각한 상아 제품은 당시 교역이 활발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상아 상에 누우며 침상에서 기지개 켜며 양 떼에서 어린 양과 우리에서 송아지를 잡아서 먹고 비파 소리에 맞추어 노래를 지절거리며 다윗처럼 자기를 위하여 악기를 제조하며 대접으로 포도주를 마시며 귀한 기름을 몸에 바르면서 요셉의 환난에 대하여는 근심하지 아니하는 자로다(암 6:4-6)."

상아 공예품은 고대 이스라엘 역사 전체에 나타납니다. 므깃도에서 발견한 상아 세공품은 페니키아와 시리아 북부 영향을 받은 예술 형식입니다. 이스라엘이 페니키아와 활발하게 접촉했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왕궁 유적에서 사마리아 상아로 알려진 상아 공예품 파편 500여 점을 발견했습니다. 이는 극도의 사회적 계층화를 암시합니다. 사자, 소, 스핑크스, 호루스(Horus), 라(Ra), 이시스(Isis), 오시리스(Osiris)와 같은 이집트 신들 이미지를 포함하는 공예품입니다. 특별히 스핑크스는 가장 많았습니다. 페니키아미술로 흔히 볼 수 있는 발코니에서 밖을 내다보는 여인의 모습도 있습니다. 사마리아 귀족들이 외국 종교와 문화를 무차별적으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금석학적 기록을 보면, 사마리아의 생활을 잘 해석할 수 있습니다. 기원전 8세기 초기와 중기 것으로 추정되는 히브리어 인장 가운데 눈여겨볼 물건은 여로보암의 종 셰마(Shema)의 인장으로, 1904년 므깃도에서 발견됐습니다. 므깃도에는 돌기둥이 늘어선 복합건물 두 채가 있습니다. 이 복합건물은 마구간으로 볼 수 있는데, 아합이나 솔로몬 또는 여로보암 2세가 건설의 주체로 물망에 올랐습니다. 정확한 건설 시기는 여전히 논란 중에 있습니다. 여기서 발견된 인장 주인 셰마는 사마리아 정부 고위 관리인 듯합니다.

이 시기 혹은 다른 시기를 놓고 보더라도, 북이스라엘에서 나온 히브리어 명문 가운데 가장 방대한 자료는 사마리아 도기 조각들(Samaria ostraca)입니다. 1910년 사마리아 왕궁에서 질그릇 조각을 100개 이상 발견했습니다. 정확한 이름은 없지만, 적혀 있는 연대를 보면 도기 조각들이 요아스나 요아스 아들 여로보암 2세 때에 나온 물건임을 알 수 있습니다.

도기 조각들은 므낫세 산지에 있던 농장들에서 다양한 관리들에게 보내던 물품 선적을 알리는 행정 문서입니다. 이는 거대 농장이 사마리아 왕실의 활동을 후원했다는 사실을 알게 합니다. 이 도편 자료에는 아모스 2장 6-8절을 암시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어떤 한 사람이 한 곳 이상 지역, 한 개 이상 구역에서 선적된 물품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들은 어떻게 세습 재산을 넘어, 생산과 수입의 공급처를 갖게 되었을까요?

또 눈여겨볼 부분은 사마리아 도기 조각들에 여호와와 바알이라는 신명 요소를 포함하는 이름이 등장하는 비율입니다. 비율은 11:7로, 여호와뿐 아니라 바알 이름도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당시 사마리아는 바알을 많이 섬기고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지만, 이 통계가 이스라엘 종교를 얼마나 정확하게 알려 주는지 평가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바알'이라는 이름이, 사마리아 근교에 토지를 소유하던 페니키아인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주인'이나 '주님'을 뜻하는 '바알'(Baal)을 여호와의 별칭으로 허용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하지만 호세아 예언자를 통해 알 수 있듯, 당시 바알을 신으로 숭배했다고 볼 정황은 충분합니다. 당시 바알 숭배가 만연했다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선지자들이 그들을 부를수록 그들은 점점 멀리하고 바알들에게 제사하며 아로새긴 우상 앞에서 분향하였느니라(호세아 11:2)."

안타깝게도 여로보암 2세 때는 정치·경제적 풍요가 여호와 신앙에 도리어 방해되는 시기였습니다.

*팟빵 '에르고니아 라디오' 채널 바로 가기: http://www.podbbang.com/ch/12827
*유튜브 채널 '에르고니아' 바로 가기: https://www.youtube.com/channel/UCPw8sxRrpaJba1RXI97GwSA
박태순 / 새들녘교회를 섬기고 있으며, 신학 아카데미 에르고니아(http://ergonia.org)에서 신학의 대중화에 힘쓰고 있다.

참고 문헌

1) Hershel Shanks et. al., 『고대 이스라엘』, 김유기 역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2005)
2) Richard S. Hess, 『이스라엘의 종교』, 김구원 역 (서울: CLC, 2009)
3) Marc Van De Mieroop, 『고대 근동 역사』, 김구원 역 (서울: CLC, 2010)
4) 김태훈, "아다드니라리 III의 서방 원정, 샴시일루 그리고 여로보암 II의 군사-경제적 성공," 『구약논단』, 13(4), 129-146
5) William H. Shea, "Israelite Chronology and the Samaria Ostraca," Zeitschrift des Deutschen Palästina-Vereins (1985), pp. 9-20 (1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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