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이은혜 기자]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육순종 총회장)는 '생명·평화·정의'를 주요 가치로 삼는 교단이다. 한국교회 전체로 보면 규모가 작지만, 서슬 퍼런 시절 통일·민주화·노동운동에 앞장선 자랑스러운 역사가 있다. 대부분 교단이 우경화할 때도 진보적 목소리를 내 왔다.

교단 소속 목사 성폭력 사건이 터졌을 때, 그래도 기장은 다르게 대처할 것이라는 기대는 완전히 깨져 버렸다. 서울동노회는 사실상 피해자에게 여러 차례 2차 피해를 입혔다. 교단법으로도 절차를 밟고 싶다는 피해자 의사를 확인하고 재판국을 구성했지만, 노회 재판국은 사회 법으로 징역 3년을 받은 목사에게 정직 2년이라는 솜방망이 처벌을 내렸다. 피해자는 총회에 상소하길 원했으나, 노회 임원회는 이를 무시했다.

가장 큰 2차 피해는 가해자 목사를 선처해 달라는 탄원서에 서명한 것이다. 노회원들은 가해자 측 말만 듣고 탄원서에 서명해 줬다. 노회원 절반 정도가 서명한 탄원서는 재판부에 제출됐다. 피해자는 재판 기간 내내 이 탄원서 때문에 피가 말랐을 것이다. '목사'라는 타이틀을 가진 사람들이 무더기로 가해자의 선처를 요청했으니.

이들이 낸 탄원서도 가해자의 범죄를 없던 것으로 만들지는 못했다. 법원은 1심부터 3심까지 쭉 징역 3년을 고수했다. 다행히 기장 총회 재판국에서 노회 재판을 다시 하라고 판결해, 노회 재판국도 재구성하게 됐다.

10월 29일 기장 서울동노회 117회 정기회는, 가해자 목사 판결이 대법원에서 확정되고 기장 총회에서 노회 재판을 다시 하라는 판결을 받아들인 후 열리는 첫 회의였다. 자신들의 판단이 잘못된 것이 확인됐으니 누구 하나는 피해자에게 사과해야 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러나 노회원들은 기본적인 문제의식조차 없는 듯했다.

재판국 재구성과 후속 조치를 논하는 시간. 탄원서에 서명한 사람은 '제척 사유'에 해당하기 때문에 재판국원과 기소위원이 될 수 없었다. 노회원 절반이 탄원서에 서명했으니 위원 선정이 쉽지 않았다. 논의가 길어지자 노회장 윤성범 목사가 노회원들에게 서명했는지 안 했는지 직접 묻고 나섰다.

윤 목사는 서기 반승상 목사에게 서명 했느냐 안 했느냐고 물었다. 질문이 끝나기도 전 반 목사는 "했습니다"라고 답했다. 그러자 윤 목사는 웃으면서 "서기도 서명했답니다. 자백했습니다"며 위원 자격이 없다고 설명했다. 뒤편에서는 "서명하고 안 하고가 뭐가 그렇게 중요해. 어차피 피해자는 교회도 떠났다며"라는 소리가 들렸다. 옆에 있던 목사는 웃음을 터뜨렸다.

부끄러움을 느끼기는커녕 탄원서에 서명했다고 자신 있게 답하며 자기들끼리 시시덕대고 있었다. 피해자가 교회를 떠났다는 말에 웃음을 터뜨리는 이들을 보며, 목사이기 전에 사람이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자신들의 딸이 그런 일을 당했어도 농담하듯 이야기할 것인가.

여성주의 연구 활동가 권김현영은 신간 <다시는 그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휴머니스트)에서 수치심과 정의를 연결 지었다. 그는 아버지가 속해 있던 채팅방에서 누군가 성폭력 동영상을 공유한 것을 발견하고는, 아버지가 나서서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결국 그의 아버지는 왜 이런 동영상을 공유하면 안 되는지 지인들에게 설명했다.

"평소에 정의를 외치던 사람들조차 왜 이런 동영상을 공유하는 것에는 별다른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을까. 수치심을 잃었기 때문이다. 수치심을 잃은 인간은 모든 것을 잃은 것이다. (중략) 수치심은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지키게 해 주고, 정의감은 더 나은 인간이 되도록 해 준다. 둘 중 하나라도 없으면 잘못된 일을 바로잡을 수 있는 용기를 내기 어렵다." (34쪽)

독재에 항거하던 정신은 과거의 일일 뿐인가. 아니면 성폭력은 독재만큼 목숨 걸고 투쟁할 만한 거악이 아닌 개인의 일탈이라고 생각하는 것인가. 자신과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잘못에는 수치심조차 느끼지 못하는 목사·장로가 외치는 정의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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