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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옷 입은 수사가 되어
미국 성그레고리수도원 임시수사 체험기 1부
  • 김범수 (newsnjoy@newsnjoy.or.kr)
  • 승인 2019.07.18 11:03

1. 미시간주 남부 시골 성그레고리수도원(St. Gregory Abbey)은 영국성공회의 베네딕트파 수도원이다. 성공회는 개신교에 속한다. 그러나 베네딕트수도원은 500년경 베네딕트가 세운 전통을 따르므로 가톨릭과 일부 개신교에도 퍼져 있다. 

성그레고리수도원은 그 자체로 에큐메니컬한 성격을 띤다. 한 시간 남짓 가까운 그랜드래피즈(Grand Rapids)의 칼빈신학교와 칼빈대학교에서도 이곳을 아는 사람은 시간을 내어 찾아 방문하곤 한다. 나 역시 칼빈신학교에서 공부하던 2003년에도 몇 차례 방문했고, 그때 쓴 글을 내가 편집장으로 있던 <개혁의소리> 잡지에 '김범수의 수도원 기행'이란 거창한 제목으로 싣기도 했다. 시애틀에 와서도 가까운 곳에 있다면 방문하여 수도원 기행을 연재하고 싶었지만, 서부에는 마땅한 수도원을 찾기 힘들었다.

성그레고리수도원에서는 매년 7월이면 2주 이상 방문하는 50대 이하 남성들을 여름 임시수사로 받아, 수도원 생활을 경험하게 하는 여름 프로그램이 있다. 임시수사들은 정수사처럼 옷을 입고 먹으며, 예배당 성가대석에 앉아 수사들과 함께 시편을 낭송한다. 언제고 한번 해야지 생각만 하고 있다가 어느덧 49살이 되어 버린 나를 발견하고 더 늦으면 안되겠다 싶어 올여름에 용기를 내어 참여했다.

서부에 사는 이상 동부로 가려면 새벽에 공항에 가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 먼 길을 가는 동안 베네딕트 규칙서를 다운받아 읽었다. 500년경에 작성한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인간의 가능성과 죄성에 대한 이해가 깊이 깔려 있다. 수도원이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일어나는 제자 훈련과 공동 생활에 대한 정확한 지침을 주고 있었다. 이 지침은 효과적인 수도원 운영과 지속적인 수도 생활이 가능하도록 대강의 틀을 잡아 주고 있다. 가히 1500년간 내려올 만큼 우수한 실천신학 목회 지침서다.

공항에 마중 나온 알만드 수사와 먼저 픽업한 조니를 만나 저녁을 먹고 들어갔다. 알만드 수사는 수도원에 들어온 지 4년째 되는데 아직 3년간 임시 서원을 한 노비스(견습수사)에 해당한다. 5년 반쯤 지나야 종신서원을 하게 된다. 아무나 수사가 되지 않게 시험 기간을 거치게 한 베네딕트 지침에 따른 대기 과정이다.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하자 '토스트 오어 비스켓?' 이라고 물었을 때 못 알아들어서 당황했다. KFC도 아닌데 비스켓이 사이드 메뉴에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으니까 말이다. 서부와 동부의 차이가 시골 식당에서부터 보였다.

저녁 숙소에 도착하니 월요일의 마지막 예배가 이미 끝났다. 수도원에 있는 사람은 그곳에 사는 일곱 수사와 나처럼 여름에 두세 주간 방문하여 배우는 일고여덟 명의 여름 임시수사들이다. 다른 임시수사들은 전날이나 오전에 도착했다. 도착 순서대로 번호를 배정받는데 나는 6번, 제일 말째다. 예배당 자리도 선임순인데 좌우 양편으로 번갈아 가며 공정하게 배정한다. 역시 베네딕트의 규칙대로다.

2. 사제가 입는 옷을 한국 가톨릭에서는 '수단'이라 부르는데 영어로는 튜닉 혹은 캐석(cassock)이다. 수도회마다 두루마리 색이 다르다. 예를 들면 성 프란치스코나 칼멜회는 갈색, 시스테리안은 흰색, 베네딕트회는 검은색이다. 검은색 튜닉을 지급 받았다. 주면 주는 대로 받고 불평하지 않는다는 베네딕트 규칙을 잊지 않고 감사함으로 받았다. 다행히 맞는 사이즈가 있었다. 길이가 조금 길어 발에 걸렸다. 치렁치렁하여 급한 대로 허리띠로 묶으니 대강 맞았다. 

이 튜닉은 중세 즉 500년경 이탈리아인의 평상복이었단다. 베네딕트 파의 앞치마는 쉬운 세탁을 위해 덧대는 천이며 두건은 우산 대신이다. 임시수사에겐 두건 달린 앞치마와 긴 검은 가죽 허리띠는 주지 않았다. 그것을 얻기 위해 종신서원을 할 생각은 내게도 없다.

성공회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입던 수단을 가져왔다. 몸에 잘 맞는 수사복이 '검은 사제들' 드라마에 나오는 사제처럼 잘 어울린다. 그러나 나처럼 주는 대로 받은 사람은 옷에 몸을 맞췄다. 어떤 이는 큰 몸집에 허리띠가 없이 걸어 다니는 폼이 검은 파자마를 걸친 산타클로스 같고, 어떤 이는 수단을 허리춤까지 올려 접어 묶고 다니니 영락없는 중세 농노의 모습이었다.

한번쯤 튜닉을 입어 보고 싶었던 나는 로만 칼라의 앞트임 수단이 아닌, 두건도 없이 배불뚝이 신부가 입었던 둥근 칼라를 뒤집어쓰는 튜닉을 받았다. 애초부터 제다이 용사같은 그런 포스는 느낄 수 없는 세팅이다. 그러나 헐렁한 옷을 걸친 내 모습이야말로 외모에 치중하지 않고, 남의 이목을 신경 쓰지 않으며 기도와 수행에 정진하는 진정한 수도사 정신에 누구보다도 더 충실하다 하겠다. 즉, 내 모습은 동방정교회의 터기 수사나, 캔디에 나오는 마음씨 좋은 수녀원장을 상상하면 된다. 쉽게 말하자면 나에게도 농노의 분위기가 진하게 났다.

3. 도착한 날이 32℃를 넘더니 밤에도 열대야다. 피곤해서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다음날 화요일 새벽 네 시 첫 예배에 늦지 않았다. 시애틀의 새벽 한 시에 해당했다. 이뿐 아니라, 두 주 동안 백 번이 넘는 예배에 한 번도 빠지지 않아 스스로도 대견했다.

모이면 시편을 읽었다. 한 단락씩 돌아가며 그냥 읽기도 하고, 한 줄씩 음률을 넣어 노래처럼 주거니 받거니 하며 읽기도 했다. 일주일에 시편 전체를 일독하도록 성무 일과가 짜여 있다.    

여러 시편을 따라 읽으면 그 운율이 다시 생각나면서, 아주 오랜만에 옛날 집에 돌아온 느낌이 들었다. 아무 말 하지 않고 있어도 누구도 화났느냐고 묻지 않는 침묵이 정상인 곳, 설교하지 않아도 주고받는 시편 말씀만으로 충분히 마음을 적시는 곳, 고향이었다.

여기서 읽는 시편은 GIA 출판사에서 펴낸 <Psalms – Grail translation from the Hebrew>로 시편을 낭송하기에 적합하도록 번역한 책이다. 시편 낭송은 원래 고전 라틴어 발성에 따라 부르는 것이 제격이라한다. 다른 언어인 영어로 읽는 시편은 아무래도 발성이 달라 뚝뚝 끊어진다고 했다. 라틴어 운율과 발성을 따라 그레고리안 찬트가 발전했으니 당연하다. 영어로 시편을 낭송하기에 적합하도록 가능한 운율을 맞춰 번역한 것이 바로 이 책이다. 한글 번역 시편은 산문체를 벗어나지 못해 낭송하기에 적합하지 못하다. 한글 시편은 아직 진정한 시가 되지 못했다.

4. 오전 여덟 시 예배에서 시편을 읽고 이어서 성찬을 했다. 매일 성찬을 드리는 것은 번거로운 형식이 아니었다. 성찬은 말씀과 더불어 은혜의 방편이다. 날마다 그리스도의 희생을 상기하는 것은 매우 유익했다. 여기서 열세 번의 성찬을 했으니, 교회에서 매월 한 번 하는 나로서는 일 년치 성찬을 한 셈이다.

아브라함 수사가 짧은 수업을 진행했다. 신학과 현실의 괴리, 우리는 매일 실패하지만 매일 새롭게 좋은 수사의 삶을 다시 시작한다는 것, 베네딕트 수도 규칙 등을 짧지만 통찰력 있게 들려주었다. 여름 프로그램을 맡은 아브라함 수사는 2003년, 그러니까 16년 전 내가 처음 수도원을 방문했을 때, 네 시쯤 도착하니 배가 고파 식당에 있는 빵을 찾아 먹으려는 나를 제지하며 의학적 응급 상황이 아니면 정규 식사 시간까지 기다리라 말한 그 수사다. 이제는 여름 프로그램을 총괄하고 가르친다.

작은 수도회지만 사람들의 삶이라 수사들끼리 갈등도 있고, 수도 생활을 깨는 상황도 발생한다. 이를 위한 지침이 베네딕트 수도 규칙이다. 성그레고리수도원의 일곱 수사는 작은 모임이지만, 서로 조금씩 상황을 봐 주면서 나태해지거나 타락하지 않고, 지키기로 정한 규칙을 엄하게 지키려고 노력한 결과 지금까지 수도원을 존속하게 만들었다.

다른 수사들도 이제는 많이 늙어 거동이 느려졌고, 그때 젊었던 수사는 머리가 희어졌다. 91세 쥬드 수사는 아직도 수도원에  있긴 하지만 휠체어에 의지하며 예배에는 가끔 참석한다. 수도자에게 은퇴는 없고 수도원 옆 무덤이 마지막이다. 아이스크림 껍질도 벗길 수 없는 쥬드 수사를 도와드렸다. 그의 인생은 마지막을 맞고 있었다. 수도원에 오기 전 한국전에도 참전했다는 그의 후반 오십년은 어떤 의미 였을까.

5. 오전 노동, 나는 잔디밭 관리를 맡았다. 점심·저녁 식사 후 정리도 맡았다. 오전과 오후 노동은 과하지 않다. 예배가 중심이다. 대신 600ac 넓은 토지는 데이브와 존이 자율적으로 맡아 관리한다.

점심은 부리또. 맛집을 찾아 온 것이 아니다. 주는 대로 먹어야 한다. 식전 기도 후 식사 중엔 침묵하며 독서자가 읽는 책을 듣는다. 식사를 마치면 말하지 않아도 또 한사람 치우는 봉사자가 와서 번개같이 식기를 수거해 간다. 식사 중에 불필요한 대화로 침묵을 깨지 않도록 베데딕트가 정해 준 규칙대로다. 그러니 식기를 가져가는 수사에게 '고맙습니다'라고 해서는 안 된다.

식사 중 독서는 <Fatal Discord>, 루터와 에라스무스의 교차 전기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부분을 읽고 있는데, 동시대를 살던 루터와 에라스무스의 전기를 번갈아가며 편집한 수작이다. 수사들은 이렇게 식사 시간을 이용해 깊이 있는 책들을 듣고 배운다. 영적 독서의 연장이다.

식후 정해진 낮잠을 한 시간 했는데 잘 잤지만 아쉽고, 두 시 예배 전에는 하루가 참 길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운데 수단까지 걸치니 힘겨워서, 아래는 반바지에, 윗옷은 얇은 것으로 입었다. 샌들도 가져올 걸 그랬다. 사실 샌들이야 말로 검소한 수도사의 정복에 가깝다. 시애틀에 살다 미시간 여름을 접하니 발에 땀이 마르지 않는다.

오후엔 달력과 회지 교정을 보았고 주방에서 오이, 토마토를 다듬어 샐러드 준비를 도왔다. 저녁엔 읍내 빨래방과 식당에서 자유 시간을 가졌다. 천둥과 번개가 짧지만 강하게 훑고 지나갔다. 습도가 여전했지만 바람도 불고 월요일만큼 덥지는 않아 다행이었다. 폭풍 덕분에 나머지 시간은 비교적 시원하게 지낼 수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미시간주 여름 햇볕은 따갑고 잠시만 일해도 땀에 젖었다.

6. 수요일은 여름 수사에겐 새벽 예배 두 번을 면제해 주어 푹 자며 피로를 풀 수 있었다. 비로소 시차가 적응되었다. 수사들도 돌아가면서 아침에 좀 더 쉴 수 있게 한단다. 노동으로 재활용 통을 닦고 은식기를 닦았다.

낮 예배 시편 낭송을 녹음했으나 소리가 아주 작다. 보여 주기 위한 쇼가 아니라 묵상이므로 일부러 낮은 소리로 작고 천천히 읊는다. 녹음하기엔 환경이 나쁘다. 예배당도 어두워 촬영도 힘들다. 보여주기 위한 예배가 아니다.

7. 7월 4일. 독립기념일 폭죽 소리를 듣지 않아도 된다니 기쁘다. 오늘은 휴일이라 네 시가 아닌 다섯 시 반에 아침 독서 예배가 있음이 생각났다. 어젯밤에 확인한 건데 하루 일곱 번 예배다. 여덟 번이 아닌. 4 마틴스 독서 예배, 6 라즈 아침, 8:15 털스와 성찬, 11:30 섹스트, 2 누네 점심, 5 베스퍼 저녁, 7:45 콤플라인 취침. 에코의 중세 책에서 3·6·9·12·3·6·9 일곱 번으로 기원을 설명했다. 모이는 것은 일곱 번인데 성찬이 있으므로 여덟 번이나 다름없다.

휴일과 일요일에는 다섯 번으로 모임이 줄어든다. 좋아했지만, 실상은 다르다. 마틴스와 라즈를 한꺼번에 한다. 즉 다섯 시 반에 모여 네 시에 읽어야 하는 분량을 다 읽고 여섯 시에 읽을 시편도 읽는다. 시편 하나를 읽으면 다같이 일어나 허리를 숙여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영광을 돌리세, 영광이 처음과 지금, 그리고 나중에도 영원할 것입니다' 절하며 고백한다. 한 시간 반 동안 몰아서 시편을 읽고 시편마다 앉았다 일어섰다 굽혔다 폈다를 반복하니, 저질 체력인 내가 버틸 수가 없다. 결국 책상에 손을 대고 허리를 굽히는 꼼수를 쓰게 되었다. 플로리다에서 온 몸집이 큰 모세도 절하는 것과 무릎 꿇을 때 고역을 치렀다. 이에 비해 노년의 수사들은 한번에 일어난다고 다들 놀라워한다. 연습의 결과다.

어둑해지자 먼 들판에서 들려오는 폭죽 소리가 여기도 요란하지만 그래도 시애틀 도시에 비하면 조용히 지나간 편이다. 저녁 먹고 훤할 때 수도원에서도 작은 폭죽 세트를 사서 발사했는데, 나도 처음 불을 당겨 보았다. 그걸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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