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의 이스라엘은 신정국가였다. 교회가 국가였고, 국가가 교회였다. 선지자들은 언제나 세상을 향해 말했다. 왕에게 말했고, 제사장에게 말했고, 관헌들에게 말했고, 방백들에게 말했고, 그리고 백성에게 말했다. 따라서 오늘날 일부에서 "교회는 정치와 무관하니 침묵하라"는 가르침은 대단한 기만이다.

민주국가에서 '정교분리'란 정치 행위와 종교 행위의 보편적 분리 원칙을 의미하는 것이지 근본적으로 정치와 종교가 서로 무관하다는 뜻은 아니다.

선지자 요한은 왕을 비판했다

혹자는 예수가 당시 로마의 식민 정권에 저항하지 않고 정치에 직접 개입하지 않았으니 교회도 정치에 관여하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예수께서 할례를 받으셨으니 현대인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만큼이나 허술한 논리다.

우리는 성경을 그렇게 단순하게 해석하면 곤란하다. 도리어 예수는 헤롯왕의 비윤리적 사생활을 통렬하게 공격한 세례 요한의 발언을 자제시키거나 금하신 적이 없다.

어떤 사람들은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롬 13:1)고 하신 성경을 인용하며 무조건 공권력에 복종하라고 역설한다. 하지만 이 역시 문자적 해석의 함정에 빠지면 곤란하다. 이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일반적인 통치 질서에 복종하라는 뜻이다. 정상적인 권세를 존중하라는 의미다. 결코 비정상적인 부정이나 폭정에 대해서도 마냥 묵인하거나 동조하라는 뜻이 아니다.

실제로 성경의 선지자들은 무조건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하지 않았다. 필요하면 오히려 세상 권력을 강하게 규탄했다. 모세는 애굽왕 바로와 맞짱 떴고, 나단은 다윗 왕의 범죄를 꾸짖었고, 미가는 백성들을 약탈하는 지도자들의 잔혹성을 통렬히 책망했고, 그리고 예수는 제도권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유대 지도자들에게 화가 있다고 경고했다.

따라서 대통령 비리를 무작정 감싸며 감히 비판하지 말라는 일부 귀족 목사의 주장은 아주 지고한 무식의 소치일 뿐이다. 이들은 성경을 조각내 그저 자기 입맛대로 해석하고 가르친다.

과거에도 교회는 그런 심각한 신학적 오류로 인해 큰 만행을 자주 저질렀다. 교회는 공권력을 이용해 이단을 학살했고, 흑인 노예를 매매해도 침묵했고, 유대인을 처형해도 침묵했고, 그리고 북미 토착민을 살해할 때도 마냥 침묵했다. 심지어 호주 교회의 일부 교인은 주일예배를 마치고 나가 토착 원주민들을 마치 짐승처럼 무참히 사냥했다. 이는 교회가 무지하면 언제든 악마로 변신할 수 있다는 걸 잘 보여 준 뼈아픈 사례다.

교회는 수도원이 아니다

교회는 세상과 격리된 지성소가 아니다. 교회는 언제나 세상과 소통해야 하며 세상을 향하여 바른 처신과 언행을 해야 한다. 예배당 속에 갇힌 교회는 그저 자기 수양을 위한 수도원이 될 뿐이다.

물론 교회가 세상에 대해 말할 때는 매우 신중해야 한다. 교회는 국회도 아니고, 법원도 아니고, 그리고 언론사도 아니다. 그래서 특정 정치 세력을 일방적으로 지지한다거나 배척하는 행위는 교회가 할 본분은 아니다. 그런 면에서 정권의 시녀가 되어 아부를 일삼는 일부 대형 교회 목회자들의 행태는 저질 중에 극저질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호국'이니 '구국'이니 포장하며 나서서 설치는 인간들 중에 제대로 된 목사는 아예 없다고 보면 된다.

이 세상에 정치와 무관한 인생은 단 한 명도 없다. 사실 인간사 자체가 정치다. 정치를 벗어난 인간사란 없다. 이건 신자들 개인사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신자 개인과 교회 공동체를 분리하는 건 논리적으로 불합리하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다. 교인 자신이 곧 교회다. 그러니 "교회가 정치와 격리되어야 한다"는 말은 부분적으로만 맞는 말이다. 도리어 교회는 필요할 때 세상에 할 말을 해야 옳다. 그게 세상에 선지자들을 계속 보내신 성경 역사의 진실이다.

우리는 지상의 유형 교회를 마치 아무런 흠이 없는 천사 같은 존재로 너무 신성시할 필요는 없다. 죄인들의 공동체가 교회다. 그래서 때로는 목사가 틀릴 수 있고, 장로가 틀릴 수 있고, 총회장이 틀릴 수 있고, 그리고 교단의 판단도 틀릴 수 있다.

그럼에도 "교회가 틀릴 수 있으니 말하지 말라"는 건 정말 웃기는 논리다. 역으로 말하자면 아마 오늘날 교회처럼 틀리는 말을 많이 남발하는 곳도 별로 없을 것이다. 수백 개의 교단에 소속된 수많은 목사가 주마다 강단에서 온갖 헛소리를 연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 모두가 항상 맞는 말만 하는 게 아니다. 게다가 완벽하게 무오한 인간이나 집단이 세상 어디에 있겠는가. 만약 그런 우스운 논리가 옳다면 세상 사람들은 모두 입 다물고 살아야 할 것이다.

교회는 광야에 서야

비록 온전히 무오할 수는 없겠으나 그래도 교회는 하나님의 공의를 세상에 분명히 말해야 한다. 성경에서 오직 구속사만 읽고 보는 것은 색맹과 같다. 교회는 사회정의에 큰 책임이 있다. 성경은 언제나 고아와 과부를 돌보라고 했다. 가난한 이웃을 외면하거나, 약한 자의 억눌림을 방관하거나, 고통받는 자의 억울함을 방치하거나, 권력자의 불의에 침묵하는 건 하나님의 계명을 크게 오해하는 거다.

교회가 굳이 정당을 만들어 권력이나 이권을 추구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만일 종교나 종파마다 모두 정당을 만들어 직접 정치 행위에 나선다면 얼마나 꼴불견이겠는가. 아울러 매사에 교회가 정치 개입을 할 이유도 없다. 하지만 교회가 필요시 매우 중요한 국민적 정치 사안에 대해 하나님의 공의에 근거하여 "예" 또는 "아니오"를 표명하는 건 절대로 잘못된 게 아니다. 아니 오히려 그건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기 위해 오셨다. 성경은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사 58:6)라고 했다. 하나님의 복음은 단지 개인의 구원에서 끝나는 게 아니다.

백성의 회개를 촉구했던 선지자 요한은 동시에 권력자의 불의에 저항하며 공의를 촉구하다 순교했다. 교회는 개인 구원과 동시에 사회정의 구현에도 책임을 져야 한다.

교회를 짖지 못하는 '벙어리 개'로 만들지 말라. 그건 개신교가 개독교로 망하는 길이다. 진정한 교회라면 광야에서 외치던 선지자 요한의 심정으로 세상에 서야 한다.

"이스라엘의 파수꾼들은 맹인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들이라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들이요 누워 있는 자들이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들이니 이 개들은 탐욕이 심하여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요 그들은 몰지각한 목자들이라." (사 56:10-11)

신성남 / 집사, <어쩔까나 한국교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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