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는 '공동체와 기독교 세계관'라는 제목으로 전성민 교수 페이스북에 실린 글입니다. 전성민 교수가 <묵상과설교> 2016년 11~12월호에 게재한 내용을 확대 수정한 글이기도 합니다. 허락을 받고 전문 게재합니다. - 편집자 주

윌킨스와 샌포드는 그들의 책 <은밀한 세계관>에서 우리 문화에 너무나 자연스럽게 녹아 들어가 있어 참된 기독교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흐리게 만드는, 심지어 왜곡시키는 감추어진 세계관들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들의 은밀한, 그러나 그만큼 치명적인 위험을 경고한다. 그런 잘못된 세계관들은 "교회 뒷문으로 스며들어 기독교 사상과 뒤섞이고 때로는 기독교적인 견해로 행세하기도 한다."(윌킨스 & 샌포드, 13쪽) 이렇게 "우리를 [은밀히] 조종하는 8가지 이야기" 중에 그들이 가장 먼저 다루는 것이 개인주의이다. 개인주의는 기독교의 중요한 진리의 일면을 반영하고 있어 더욱 위험하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각 개인의 삶에 관심을 갖고 개입하신다는 진리를 받아들인다. 하지만 매우 극단적으로 받아들여 더 이상 기독교 진리가 되지 못하게 한다."(윌킨스 & 샌포드, 33쪽)

이렇게 은밀하게 스며든 개인주의에 대한 근본적 성찰과 고민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리 성경을 읽고 묵상하여 영성을 충만케 하려고 해도 성경이 얼마나 공동체적인지 잘 이해하지 못한다. 주기도에서 하나님을 향한 세 가지 간구가 끝난 후 이어지는 일상의 은혜를 구하는 세 가지 간구를 살펴보자. "오늘날 우리에게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며,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한 것 같이 우리의 죄[에 대해] 우리를 용서하옵시며,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우리를] 악에서 구하옵소서." 여기서 가장 많이 반복되는 표현은 "우리"다. 그러나 개인주의에 물든 우리는 이 표현의 중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며"라는 부분을 생각해 보자. 죄를 용서해 달라는 기도는 개인에게 정말 필요해 보인다. 그런데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기도가 개개인에게 정말 필요한가? 여기서 우리는 이 기도는 일용할 양식을 "우리"에게 달라고 간구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이 기도가 절실해 지는 것은 일용할 양식을 필요로 하는 존재가 내가 아니라 "우리"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부터다. 나는 먹을 밥이 있지만, "우리"중에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이 기도는 정말 중요하다.

공동체는 신앙의 본질이다

성경이 개인주의를 지향하지 않는다는 것은 성경의 몇몇 진술에 근거한 정도가 아니다. 공동체 영성 그리고 그것의 확장인 사회 영성은 복음의 이차적 관심이 아니라 복음 자체의 핵심이다. 복음은 개인 영혼이 멸망된 세상에서 탈출하는 구원을 받아 천국에 갈 수 있게 되었다는 개인주의 사교의 가르침이 아니다. 복음은 온 피조 세계를 회복하는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 참여하는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에 속하게 되었다는 공동체적, 사회적 영성으로 충만한 소식이다. 기독교 세계관으로 설명해 볼 수도 있다. 기독교 세계관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사람은 어떤 존재인지, 세상은 어떤 곳인지에 대한 이해가 그 토대와 내용이 된다. 이 세 가지 주제 모두에 담긴 공통 주제 중 하나는 공동체이다.

하나님 이해에 있어 기독교의 가장 핵심적인 특징은 삼위일체에 대한 고백이다. 삼위일체는 양태론이나 삼신론으로 흐르게 만드는 어떻게 셋이 하나와 같을 수 있냐는 수리적인 수수께끼가 아니라 독립된 세 인격이 한 신성 안에서 "상호 침투"(perichoresis)의 교제를 나누며 존재한다는 매우 실존적인 고백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신성을 고백하면서 형성된 기독교 유일신론의 새로운 측면이다(라이트, 152~194쪽). 기독교와 유대교가 경전의 많은 부분을 공유하면서도 분명 다른 것은 하나님의 관계성 또는 공동체성에 대한 이해다. 이슬람의 강력한 유일신 이해는 다양성 속에 일치를 함의하는 신학을 구성할 수 없다. 삼위일체 신론이 함의하는 하나님의 공동체성은 기독교 신론의 정수다(Grenz, 71~76쪽).

인간은 어떠한가? 창세기 1-2장이 보여 주는 인간의 가장 중요한 본질 또한 공동체성이다. 인간의 공동체적 본질은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창조하실 때, 남자와 여자로 창조했다는 진술에서 확인된다.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이 남자와 여자의 공동체로 존재하는 것은 하나님의 공동체성을 반영하는 것이다. 창세기 1장이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시는 족족 보시기에 좋았다고 선언했던 반면 (둘째 날은 흥미로운 예외다), 2장에는 하나님이 만드셨음에도 좋지 않았던 것이 언급된다. 그것은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에덴 동산에 두시면 주셨던 동산을 경작하고 보살피는 사명은 혼자 이룰 수 없었던 공동체적 사명이었다. 하나님의 창조가 좋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해 보면 "돕는 짝"이 만들어졌을 때, 비로소 사람의 창조가 완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만큼 공동체성은 인간의 매우 중요한 본질이다(Provan, 4장 참고).

세상은 이러한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이해가 삶으로 드러나는 장이다. 그런데 조너선 윌슨하트그로브는 그의 책 <다시, 그리스도인 되기>에서 복음이 요구하는 개인적, 가정적, 사회적 가치들을 지키고 펼치는 데 교회가 소위 보수나 진보를 막론하고 실패했다고 진단하며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되기란 어려운 일이다"(윌슨하트그로브, 22쪽)라고 말한다. 기독교의 하나님 이해, 사람 이해대로 살기가 어렵다는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윌슨하트그로브는 구체적으로는 새로운 수도원 운동을, 좀 더 포괄적으로는 공동체에 대한 깊은 인식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전쟁과 낙태"가 횡행하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공동체가 필요하다는 것이다(윌슨하트그로브, 59~79쪽, 205~214쪽). 요컨대, 공동체와 세상에 대한 관심과 강조야말로 참된 기독교 신앙과 세계관의 본질이다.

참고문헌
Grenz, Stanley. <Theology for the People of God>. Grand Rapids: Eerdmans, 2000. 
Provan, Iain. <Seriously Dangerous Religion>. Waco: Baylor University Press, 2014. 
이재영. <오두막>. 서울: IVP, 2016.
조너선 윌슨하트그로브. <다시, 그리스도인 되기>. 서울: 비아, 2015. 
톰 라이트. <톰 라이트의 바울>. 서울: 죠이선교회출판부, 2012. 
스티브 윌킨스, 마크 샌드포드. <은밀한 세계관>. 서울: IVP, 2013.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