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차례 종이 울리는 한옥 교회

여행 목적이든 취재 목적이든 강화를 찾게 되면 꼭 한번 들르는 곳이 있다. 더욱이 찾게 되는 날이 주일이라면, 피할 수 없이 분명한 한 소리를 듣게 된다. 바로 강화읍이 내려다보이는 북산에서 울려 퍼지는 범종 소리다.

역사적 유래를 따지면, 강화읍이 내려다보이는 북산은 800여 년 전 고려가 몽골군에 맞서 임시로 도읍과 왕실을 옮겨 온 고려궁지의 남쪽 언덕이라 한다. 멀지만 생생한 여운을 남기는 그 소리는 그곳에서부터 청아하게 울려 퍼진다. 언뜻 들어 보면 절이나 사찰에서 나는 소리 같다. 불교 예식과는 사뭇 다른 한 가지가 특징적이다.

대한성공회 강화성당 외관.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신을 찬미하는 메아리를 연상케 하는 길고 긴 종소리가 그 여운과 함께 모두 아홉 차례 울려 퍼지는 걸 듣고 나면, 그곳이 절이나 사찰이 아닌, 주일미사를 시작하는 성공회 성당의 주일 풍경을 짐작하게 된다.

장엄하면서도 소박한, 표현하기 어려운 절묘한 여운을 남기는 종소리가, 마당 깊은 한옥 건물 앞에서 들려오는 걸 목격할 때마다 필자의 마음은 두 갈래로 양분된다. 익숙해진 안정감을 느끼면서도 새로운 갱신의 요구와 부름에 민감하게 반응케 되는 필연성을 피하기 어려워지는 것이다.

범종(위)과 범종에 새겨진 성경 구절(아래).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한옥 건물, 더 정확히 말해 주일미사를 드리기 위해 아홉 차례 종이 울리는 이 한옥 교회의 정식 명칭은 '대한성공회大韓聖公會 강화성당江華聖堂'이다. 대한제국 시절 세워진 한국 최초의 한옥 성당으로, 현재 대한민국 사적 제424호로 지정되었다.

건축 당시를 살펴보자. 프랑스와 미국이 각자 벌였던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를 경험한 강화도 주민들에게 상대적으로 신사적인 이미지를 지닌 영국인들은 적이 아니었고 친숙한 느낌을 유지하고 있었다. 영국에 뿌리를 둔 성공회는 강화도 주민들의 친숙함에 힘입어 1897년, 조선 왕실 산하 해군사관학교인 '통제영학당' 교관으로 재직 중인 영국 장교 콜웰(William H. Callwell) 대위에게서 강화 중심부의 관사와 대지 3000여 평을 매입했다. 1900년 11월 15일, 성베드로·바오로성당과 유사한 양식으로 축성한 곳이 현재의 강화성당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여기까지가 우리에게 친숙한 이미지로 다가온 대한성공회 강화성당의 역사적 배경이다. 이제 그 익숙한 인상과 배경을 품고, 교회의 본질에 대한 두 가지 질문을 던져 보고자 한다. 문화재와 신성성 사이의 의미를 묻고자 함이다.

성공회를 아울러 교회는 하나님의 대표성을 담아낸 곳이다. 그전에 우리의 이성 세계, 혹은 현상계를 넘어선 그 어떤 영역을 탐지하고픈 장소 역시 신성성으로서의 교회다. 세월의 풍상은 역사가 되고, 그 역사를 퇴적의 결로 담아낸 것이 문화재라면, 성공회 강화성당은 문화재로서의 교회로 표현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런데 필자는 여기에 또 한 가지 의미를 더 찾고자 한다. 본질으로서의 교회, 그 자리가 어디 있을지에 대해 말이다.

측면에서 전경을 보면, '구원의 방주'가 연상된다.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외부 - 한국적인, 너무나 한국적인

강화도에서만, 그리고 강화도이기 때문에 가능한 역사의 흔적일까. 성당이라 불리지만 외부는 영락없이 국보급 사찰 대웅전과 흐름이 비슷하다.

강화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는 언덕 위 한옥 건물 한 채.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의 방주 모습을 형상화했다고 하는 한옥 담장이 길게 뻗어 있다. 안내판 설명처럼, 외관은 한옥이라는 한국식 풍습 아래 기독교적 메시지를 녹여내는 데 전력하고 있음을 짐작하게 된다.

"세상을 구원하는 방주로서의 의미를 분명히 하기 위하여 배의 형상을 따랐다."

당시의 건축 공사는 궁궐을 제작하던 도편수가 주도했다. 이후 몇 차례 보수가 있었지만, 처음 모습에서 거의 훼손되지 않았다. 세상을 구원하는 구원의 방주 이미지 구현을 더욱 확실히 하려는 듯, 배의 형상을 따랐다.

그곳에서 조금 더 성당을 향해 걸음을 옮겨 보면 이내 계단이 보였고, 그 계단을 오르면 끝에 세 칸 솟을대문이 무심히 모습을 드러냈다. 가운데 칸 지붕이 높이 솟아오른 예스러운 대문인데, 그 위용이 고위 관직의 기와집을 방불케 했다.

대문의 윗측과 좌·우측엔 홍살을 세우고 태극을 단 행랑 창이 자연스럽게 눈에 들어온다. 홍살과 태극의 표식은 한국적 전통에 의해 악귀 혹은 악한 풍습을 몰아내고 긍정적인 에너지만 넘쳐 나라는 염원을 표현한 것이다. 길표吉表의 의미로 사용된다.

긍정적 기운의 상징인 태극무늬는 성당 외관 곳곳에 계속된다. 문짝에도 향교나 사당 문 앞에, 길운으로 가득한 느낌의 태극무늬가 새겨진 것을 볼 수 있다.

외삼문(위)과 강화성당 예배당 현판(아래).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이렇게만 '성공회 강화성당'을 보면, 빛바랜 한자 편액이 없을 경우 전형적인 한국적 고택의 한 풍경을 떠올릴 법하다. 너무나 한국적이라 쉽게 잊힐 법한 당시 서양 종교의 흔적들은, 한국적 토착화의 한구석에서 수줍지만 그 역시 분명한 아로새김으로 면면히 흐르고 있었다.

우선 태극 문양 속에 숨겨져 있는 둥근 곡선이 성공회 십자가를 형상화하고 있다. 종각을 겸한 내삼문을 지나면 예배당이 보이는데, 처마 끝 서까래 둥근 마구리에 태극, 사각 마구리에 십자가를 그려 넣은 흔적이 있다. 이 흔적들은 가장 한국적이면서 가장 본질적인 기독교 가치의 병립, 혹은 조화의 의지 외에는 다르게 해석할 길이 없다.

강화성당의 십자가 역시 용마루 끝에 서 있는데, 쉽게 보여 주고 싶지 않은 수줍음 혹은 겸손을 느끼게 할 만큼 단출해 보였다. 또한 추녀마루 곳곳에 용머리 열두 개가 올라앉은 모습에선 필경 예수님의 열두제자를 떠올릴 수 있지만, 이 역시 쉽게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소박하게 표현되었다.

이처럼 성공회 강화성당 외관은 철저할 정도로 한국적 토착화의 의지로 점철되어 있다. 너무나 한국적인 바탕에 자신들의 정체성을 수줍게 소개하는 접근에서 필자가 조화를 보는 이유는 무엇일까. 더 본질적인 이유 탓이다. 외부에서 내부로 들어서는 진입의 순간 나타나는 바실리카양식으로 충만한 내부 세계가 그 해답을 던져 주고 있었다.

종각을 겸한 내삼문.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내부 - 바실리카, 신성의 극치

강화성당 외부는 전통 한옥 양식으로, 내부는 기독교 건축양식인 바실리카양식으로 지어진 기독교 토착화의 산물로 대표되고 있다. 현재까지도 강화성당에서는 매 주일 미사를 진행 중이다.

성당 내부의 전체적 규모는 250여 명 신자 수용이 가능한 40칸 규모다. 1층에는 현관 용도로 사용되는 전실과 예복실 용도인 퇴실, 그리고 두 줄로 늘어선 기둥 외측에 사람들이 이동할 수 있는 회랑을 배치했다.

천장이 많이 높았다. 자연 채광을 우선적으로 고려한 설계로 보였다. 더욱이 천창 용도로 유리창을 냈는데, 이는 서구 교회 전통 건축양식인 바실리카양식 도입 의지로 읽어 낼 수 있었다.

중앙에 기도 공간을 두고 좌우에 통로를 낸 바실리카양식의 신비는 서양을 대표하는 성스러움만 드러내지 않는다. '귀족의 집'이라는 뜻을 가진 가톨릭 성당의 원형인 바실리카양식은 본래 고대 로마와 그리스도교 시대 이전부터 사용되었다.

이탈리아의 시장, 관공서, 지붕이 덮인 야외극장, 강당 등 큰 지붕이 있는 공공건물에 이 양식이 도입됐다. 가장 큰 특징은 화려함과 세부적인 장식, 집요한 이콘의 나열을 배제하고 단순성과 장엄함을 최우선 가치로 설정했다는 점이다. 모든 이가 차별 없이 참여할 수 있는 공공 신비의 역설이 강하게 흐른다.

강화성당 내부. 바실리카양식을 적절하게 구현했다.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강화성당 내부는 다분히 바실리카양식의 적절한 구현으로 읽힌다. 내부를 들여다보면, 비록 바실리카양식의 대표 교회인 성바오로성당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구조를 동일하게 구현해 내려는 의지를 읽을 수 있다.

들보와 서까래를 그대로 드러내고 지성소는 구별하는 방식, 중심부를 측랑側廊보다 높게 하고 그 사이 창문을 내 빛이 틈입하도록 한 특징, 절 석등을 닮은 화강암으로 만든 세례대와 배흘림 모습을 띤 받침 기둥은 동양 종교를 향한 손 건넴이라기보다는, 단순성 속에 신비를 녹여내고자 하는 의지로 보이기에 충분했다.

성공회 강화성당은 외부와 내부를 통해 오늘날 기독교인에게 무엇을 말하려 하는 걸까. 공간을 점유한 성스러움은 늘, 혹은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을 드러내고자 한다. 그리고 말하려 한다. 너무나 한국적인, 하지만 너무나 본질적인 역사 속에서의 교회에 대해 말이다.

나무의 신비, 그 본질

천장 높은 장방형 공간에 세운 기둥은 회랑 전체를 장엄함으로 가득 채운다. 이 기둥은 1900년, 성당을 지은 트롤로프 신부가 백두산 적송을 뗏목에 싣고 와 세웠다고 한다.

어디 그뿐인가. 나무의 신비는 계속된다. 앞마당 한구석으로 눈을 돌리면, 10m는 훌쩍 넘는 보리수나무가, 그 왼편으로는 학자수學者樹라 부르는 회화나무가 우뚝 서 있다. 이렇듯 성공회 강화성당은 불교를 상징하는 보리수와 유교를 상징하는 회화나무까지 나타내면서 너무나 한국적인 종교 상황에서 종교의 본질을 묻고자 함은 아닌지, 외면할 수 없는 둔중한 화두를 던지는 듯하다.

사제관. 한옥 양식으로 지어졌다. 뉴스앤조이

나무는 나무다. 그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본질에 어긋나지 않는 한, 현지 문화에 융통성 있게 녹여내는 것이 성공회가 보는 기독교 선교다. 그 시도가 유의미할지, 성공적일 수 있을지는 여전히 미지수인 게 사실이다. 과연 사람들이 성공회 강화성당을 유서 깊은 문화재 이상의 종교적 가치로 인식할지도 의문이다.

그 너머의 성스러움, 본질을 향한 여정을 계속하는 일은 거대한 침묵 속에서 때론 바람으로, 때론 세월의 풍상으로 질문을 던지는 우리 몫이다. 결국 본질은 사람이다. 그 공간을 점유하거나, 공간의 한 조각일 수밖에 없는 사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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