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박요셉 기자] '노느매기'는 순우리말로 "여러 몫으로 갈라 나누는 일"이라는 뜻이다. 이사장 김건호 목사는 노숙인 자활과 자립을 돕기 위해 노느매기협동조합을 만들었다. 조합원 70여 명 대다수가 노숙인이다. 노느매기를 창립했을 때, 김 목사는 이렇게 다짐했다. 노숙인들이 스스로 원하는 것을 말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자유로운 공간을 만들겠다고.

노느매기는 현재 다양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서울 영등포에서 재활용 매장을 운영하고 마을 텃밭에서 채소도 기른다. 최근에는 지역 교회 후원을 받아 파주에서 농사를 시작했다. 김건호 목사는 자부하는 게 하나 있다. 이 모든 사업이 사회복지사나 자원봉사자의 생각이 아니라, 노숙인 '선생님'들의 생각으로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스스로 결정한 일이 아니면 지속해서 이어지지 않는다." 김 목사가 평소 노느매기 사훈처럼 여기는 말이다. 그는 "어떤 일이든 선생님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그는 인터뷰 내내 노숙인을 '선생님'이라고 표현했다).

노느매기는 올해 10월, 책 3권을 공식 출판할 계획이다. 노느매기 조합원들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각 책에는 한 사람의 생애가 담겨 있다.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이 남들처럼 열심히 일하며 살았는데도 어떻게 거리를 떠돌게 됐는지 보여 준다. 2012년부터 노숙인 임시 보호 센터 햇살보금자리(햇살)에서 봉사 활동을 하는 과천교회 청년들이 책을 썼다. 출판과 관련한 펀딩이 텀블벅에서 진행 중이다.

김건호 목사와 과천교회 청년 나성훈·박은식 씨를 9월 17일 만났다. 6년 전, 봉사활동을 하기 위해 처음 햇살에 얼굴을 내밀었을 때만 해도 풋풋한 청년이었던 두 사람은 지금은 모두 아기 아빠가 되었다. 대견하다고 여기는 이는 김 목사뿐이 아니다. 매달 같이 밥 먹고 산책을 즐기며 시시껄렁한 농담으로 자신들을 괴롭혔던 청년들이 이제는 자기와 꼭 닮은 아기를 데리고 오는 모습을 볼 때마다, 노느매기 선생님들도 놀란다. 이날 세 사람에게 노느매기 선생님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노느매기 조합원 진화영 선생님(사진 왼쪽)이 교육 프로그램을 이수하고 김건호 목사와 기념 촬영을 했다. 김 목사는 노숙인 자활과 자립을 위해 노느매기협동조합을 만들었다. 사진 제공 장은혜
진화영 선생님(오른쪽에서 세 번째)이 청년들과 인터뷰하고 있는 모습. 진화영 선생님의 이야기는 책으로 출간됐다. 책 이름은 <지금 여기가 맨 앞>이다. 사진 제공 장은혜

'예수님은 어디에 있을까'에서
출발한 빈민 사역
노숙인에게 평등권·발언권 부여
"욕심 갖게 하는 것이
자립·자활의 시작"

김건호 목사는 1980년대 후반, 장로회신학대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사회는 변혁기를 맞고 있었다. 거리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학생들 시위가 연일 계속됐다. 김 목사는 매번 시위에 참석하면서 앞으로 사역을 고민했다. '하나님이 이런 혼란스러운 시기에 누구와 함께 계실까.'

그는 도시 빈민이 모여 있는 달동네를 떠올렸다. 예수는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있다고 생각했다. 빈민 사역에 헌신하기로 다짐한 그는 친구들과 '도시빈민선교회'라는 동아리를 조직했다. 대학 졸업 후에는 서울 신림동 신양교회 부교역자로 들어가 지역 아동을 위한 공부방을 운영했다.

노숙인 사역에 뛰어들기 시작한 건 2011년 6월부터다. 영등포산업선교회에서 노숙인 보호 센터 햇살을 맡아 달라는 제안이 들어왔다. 그는 당시 일산두레교회(현 사랑누리교회) 개척 멤버로 활동하다 몸이 안 좋아져 사역을 쉬고 있었다. 하나님이 자신을 다시 빈민 사역으로 부른다고 생각한 그는 서울 영등포로 사역지를 옮겼다.

김건호 목사와 과천교회 청년들. 김 목사는 신학생이었을 때 빈민 사역을 위해 평생 헌신하기로 다짐했다. 사진 제공 장은혜

김건호 목사는 햇살을 찾는 노숙인들에게 자활과 자립 욕구를 불러일으키고 싶었다. 단순히 무료 배식하고 숙소를 제공하는 방법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그는 노숙인들이 주체성을 갖고 자신이 원하는 걸 말하고 행동할 수 있게 하는 구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구성원 각자가 동등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협동조합에서 가능성을 발견했다. 협동조합 노느매기가 탄생하게 된 계기다.

"평등권을 실현하고 각 선생님에게 발언권을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협동조합은 노숙인 선생님들의 정체성을 바꾸게 했다. 지역에서 주민들을 만날 때도 더 이상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됐다. 조합원이라고 소개할 수 있으니 말이다."

노느매기가 처음 시작한 사업은 재활용 매장이다. 재활용 매장은 노숙인들이 주민과 접촉할 수 있는 좋은 장소였다. 고립된 관계와 장소에서 빠져나와 이웃과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자립 준비 단계다. 김 목사는 현재 영등포구에서 진행하는 마을 사업에 노느매기 조합원이 제일 열심이라고 설명했다.

조합원들은 저마다 하고 싶은 게 달랐다. 농사를 짓고 싶은 사람도 있었고, 양봉을 하고 싶은 사람도 있었다. 김 목사가 하는 일은 교통정리였다. 그런 식으로 노느매기는 차차 사업을 확장했다. 문래동에서 마을 텃밭을 운영하다가 파주에서 본격적으로 농사를 시작했다. 내년에는 양봉도 할 계획이다.

김 목사는 "6년이 지나자 선생님들에게 '욕심'이 생기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직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다. 협동조합 재정은 매년 적자를 헤매고 있어서 후원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자활·자립이라는 목표가 6년 전에는 김 목사 개인의 것이었다면, 지금은 조합원 모두의 꿈으로 확장됐다고 김 목사는 말했다.

김건호 목사와 과천교회 청년들의 만남은 특별했다. 사진 제공 장은혜

과천교회 청년들, 2012년부터 봉사
한 달에 한 번 꾸준히 방문
"오랜 교제로 지금은 친구 같은 관계"

과천교회 청년들은 2012년 12월 처음 햇살에 찾아왔다. 당시 과천교회 청년부를 지도하고 있던 이도윤 목사는 김건호 목사의 옛 제자였다. 그는 김 목사가 햇살에서 노숙인을 돕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청년들을 이끌고 찾아갔다.

당시 청년부 회장이었던 박은식 씨는 "이도윤 목사님이 봉사하자고 제안해 아무 생각 없이 햇살을 찾았다. 청소와 도배를 정말 많이 했던 게 기억에 남는다"고 회상했다. 이후 과천교회 청년들은 2012년 12월부터 매달 한 번도 빠지지 않고 햇살을 찾았다. 선생님들과 같이 밥을 먹고 영화를 보는 시간도 있었다. 명절과 크리스마스에는 레크리에이션을 진행하기도 했다.

박 씨는 "매년 크리스마스가 되면 햇살 선생님들과 함께 딱지치기, 윷놀이, 몸으로 말해요 등 다양한 놀이를 했다. 6년 동안 매달 만나니 이제는 거의 친구가 되었다. 청년들이 나중에 결혼해서 아이를 데리고 가면, 선생님들이 놀라워하며 반긴다"고 말했다.

"매달 찾아가는 게 전혀 피곤하거나 힘들지 않았다. 우리의 활동이 선생님들에게 도움이 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선생님들이 처음에는 밥을 먹거나 잠을 때우기 위해 찾던 햇살을, 언제부턴가 다르게 인식하기 시작했다. 마치 이 공간을 자신들의 공간으로 여기며, 자신들을 객이 아니라 주인으로 인식하며 공간을 누리는 것 같았다."

청년들은 2012년 12월부터 매달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햇살을 찾았다. 서먹서먹했던 선생님과 청년들이 지금은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사진 제공 장은혜

김건호 목사는 과천교회 청년들이 매달 꾸준히 참석하자, 특별한 미션을 부탁했다. 노숙인 선생님과 시간을 보내며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노숙인 생애사 작업의 시작이었다.

청년들은 선생님들이 살았던 곳에 방문해 어린 시절 추억을 묻기도 하고, 서울이나 관광지를 돌며 다양한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다. 주 인터뷰어로 참석했던 나성훈 씨는 "한 분마다 보통 8번 정도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청년들이 친구처럼 대화하면서 다양한 질문을 던지니 선생님의 삶을 다각도로 비춰 볼 수 있었던 것 같다"고 했다.

김건호 목사가 청년들에게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한 가지 원칙을 지켜 달라고 했다. 질문하되 충고하지 말라는 것이다. 나 씨는 생애사 작업을 통해서 노숙인을 향한 시각이 완전히 뒤바뀌었다고 했다.

나 씨는 머릿속에 있던 노숙인과 비노숙인을 구분하는 벽이 사라졌다고 했다. 그는 "생애사 작업을 하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나 선생님이나 별 차이가 없다는 사실이다. 차이가 있다면 나는 집이 있고 이분은 없다는 거다. 만약 선생님이 닥친 일을 내가 겪었다면 나도 아마 선생님과 같은 길을 걸을 것이다"고 생각했다.

박 씨는 한때 노숙인을 무기력하고 무능력한 사람으로 봤던 시각을 고쳤다고 했다. 그는 "선생님들은 누구보다 정말 열심히 살았다. 의지가 없거나 능력이 부족한 게 아니다. 결과가 안 좋았을 뿐이다. 누구도 이분들을 탓할 수 없다"고 했다.

암 투병 중인 김건호 목사
"회복되면 교회 공동체 시작하고파
한국교회는 '사회 선교사' 양성 필요"

왼쪽부터 나성훈 씨, 김건호 목사, 박은식 씨. 6년 전 풋풋한 청년이었던 성훈 씨와 은식 씨는 지금 아빠가 되었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이날 인터뷰는 서울 노원구에 있는 병원에서 진행했다. 김건호 목사는 암 말기다. 그는 "할 일이 쌓여 있는데 의도치 않은 병이 찾아와 잠깐 쉬고 있다. 비록 삶과 죽음 사이를 헤매고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꿈을 놓지 못하게 하고 있다"고 했다. 노느매기 조합원 중에는 기독교인도 있다. 이전에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지만 지금은 교회를 등진 이들이다. 김 목사는 몸이 회복된다면 이들과 함께 교회 공동체를 시작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오늘날 한국교회가 사회적 약자를 열심히 돕고 있지만 패러다임을 바꿀 필요가 있다고 했다. 김 목사는 "한국교회가 봉사를 많이 하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어느 시기가 지나면 정부나 전문가들이 사회복지를 더 전문적으로 잘할 수 있다. 교회는 기존 방식에서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한국교회가 새로운 모델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김 목사는 햇살과 노느매기에서 활동하면서 따로 임금을 받지 않았다. 일산두레교회(현 사랑누리교회)가 그의 사역을 지지하며 후원했기 때문에, 이를 기반으로 다양한 사업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이다.

"한국교회가 자꾸 재단을 만들거나 정부 기관을 위탁 운영하려고만 하지 말고, 사람에게 투자했으면 좋겠다. 사회적 약자와 함께하며 이들을 섬길 수 있는 사회 선교사를 양성하고, 이들이 간섭받지 않고 자유롭게 사역할 수 있도록 후원하는 모델이 필요하다."

※ 김건호 목사가 투병 끝에 11월 22일 51세 나이로 별세했다. 노느매기협동조합은 당분간 노숙인 조합원들을 중심으로 운영될 예정이다. "스스로 결정한 일이 아니면 지속해서 이어지지 않는다." 김 목사가 평소 강조했던 가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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