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박요셉 기자] 1급 뇌병변장애가 있는 장희영 씨(47)는 2010년 시설에서 나왔다. 그가 시설에 들어갔을 때가 1996년이었다. 침상 위에서 15년간 누워만 지냈다. 지금은 서울 성북구 길음동에 있는 한 아파트에서 김경남 씨(42)와 새로운 삶을 꾸리고 있다. 김경남 씨는, 장희영 씨가 시설에 있을 때 같은 방을 쓰던 '언니'다.

희영 씨는 강원도 홍천에서 2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선천적 장애가 있었지만 부모님은 다른 자녀들과 똑같이 희영 씨를 대했다. 말을 안 듣거나 오빠들과 싸우면 부모님은 야단을 치고 때리기도 했다.

희영 씨는 중·고등학생 때까지는 걷거나 뛸 수 있었다. 가족들과 산이나 바다로 놀러가기도 했다. 장애가 심해지면서 펜도 쥐기 힘들게 됐지만, 공부는 누구보다 열심히 했다. 직업학교에서 컴퓨터도 배우고, 국립재활원에서는 재봉 기술을 배워 섬유 공장에 취직했다. 의류 회사 직원이었던 전 남편과 결혼도 하고 딸도 낳았다.

아이를 낳은 뒤 장애가 심해졌다. 거동이 힘들어져 종일 누워 지냈다. 당시는 지금처럼 활동 보조 서비스가 없었다. 남편은 직장을 관두고 희영 씨 옆을 지켰다. 육아와 집안일도 병행했다. 희영 씨는 남편에게 미안했다.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어 짜증만 부렸다. 집에서 큰소리가 나는 날이 많아졌고, 가계도 안 좋아졌다. 남편에게 더 이상 부담을 주기 싫었던 희영 씨. '시설행'을 선택했다.

"그때는 서로 많이 지친 상태였어요. 둘 다 끝이 안 좋을 거라고 예상했죠. 먼저 입을 연 건 저였어요. 남편에게 요양원에 들어가겠다고 얘기했죠."

장희영 씨(사진 왼쪽)와 김경남 씨(사진 오른쪽). 시설에서 같은 방을 쓰던 둘은 2010년 시설에서 나와 자립했다. 사진 제공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딸 낳고 장애 심해져
부담 주기 싫어 시설행
'죽음' 마주하며 자립 고민

희영 씨는 1996년 강원도 철원에 있는 장애인 요양원에 들어갔다. 시설은 살 만한 곳이 못 됐다. 요양원에서는 머리를 짧게 하고, 단체복을 입어야 했다. 옷 하나 마음대로 입을 수 없었다.

"제가 있던 곳은 그래도 상황이 나은 편이었어요. 다른 시설에서는 직원이 수용인을 괴롭히는 일도 있었으니까요. 그래도 자유가 없다는 게 힘들었어요. 살다 보면 밖에 나가고 싶거나 특별한 음식을 먹고 싶을 때가 있잖아요. 시설에서는 불가능해요. 직원 허락 없이는 어디에도 갈 수 없고, 저 하나를 위해 차량을 지원하지 않아요."

어느 날, 희영 씨는 수용인 중 한 명이 자립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때는 자립이 뭔지도 몰랐다. 장애인도 자립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활동 보조 서비스가 생겼다는 말도 들었다. TV 프로그램에 자립하며 사는 장애인이 출연하기도 했다.

'나도 가능할까?' 희영 씨는 잠깐 생각했지만 금세 마음을 거두었다. 화재나 사고가 나면 신고라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자신은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립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랬던 희영 씨가 자립을 결심하게 된 건 죽음과 맞닥뜨리면서다. 시설 안에서 한 수용인이 얼어 죽는 일이 있었다. 그때부터 인생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침상 위에 누워 10여 년을 살았어요. 존재감을 잃어버린 것 같았어요. 이렇게 살다 가 버리면 누가 나를 기억할까. 내 인생은 어떤 의미를 갖는 걸까. 평생 방 안에 갇혀 남 눈치만 보고 무엇 하나 자유롭게 결정하지 못한 채 죽으면, 그런 인생이 무슨 가치가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한참 했던 거 같아요."

희영 씨는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라고 생각했다. 이대로 여생을 보내나, 밖에서 사나 똑같을 거 같았다. 몇 달 전, 상담을 위해 찾아왔던 시민단체가 떠올랐다.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이라는 단체로, 장애인이 시설에서 나와 자립하는 일을 돕는 곳이다. 희영 씨는 활동가에게 전화를 걸어, 시설에서 나오고 싶다고 도움을 청했다.

1급 뇌병변장애가 있는 희영 씨는 침상에 누워만 지냈다. 자립 이후 연극, 강의 수강 등 다양한 활동을 시도하고 있다. 사진 제공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2년 만에 내 집 마련
'장애인 극단 판'
연극 주연 맡기도

2010년 희영 씨는 경남 씨와 함께 요양원을 나왔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성북구 성북동에 있는 집을 무료로 제공해 줬다. 서울시는 자립을 준비하는 장애인에게 500만 원을 지원하고 있다. 희영 씨는 장애 수당과 서울시 지원금을 모아 2년 만에 길음동에 있는 임대 아파트에 입주했다.

"악착같이 돈을 모았어요. 밖에서 지내면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 올 수 있잖아요. 우리는 어디 의지할 데도 없어요. 휠체어 하나 고장 나도 수리하거나 새로 구입하려면 큰돈이 필요해요. 전세금을 입금하고 집에 입주했을 때는 무척 뿌듯했어요. 냉장고, 세탁기, TV 모두 저희 돈으로 직접 구입했어요."

희영 씨는 매달 520시간 활동 보조 서비스를 받는다. 겨울에는 주로 집에서 쉬지만, 날씨가 따뜻해지면 휠체어를 타고 외출한다. 지난해 여름에는 장애인자립생활지원센터 동료들과 대천해수욕장도 놀러 가고 산에도 다녀왔다.

2012년에는 '장애인 극단 판'에 들어가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시설에서 나와 자립한 여주인공 이야기를 다룬 '역전 만루 홈런'에서 주연을 맡았다. 어릴 때부터 배우를 꿈꿨던 희영 씨가 수십 년 만에 꿈을 이루던 순간이었다. 희영 씨는 꿈을 성취하기 위해 반년간 휠체어를 타고 성북동과 극단 연습장이 있는 보문동을 오갔다.

희영 씨와 경남 씨가 살고 있는 길음동 임대 아파트. 냉장고, 세탁기, TV 등 모두 희영 씨와 경남 씨가 돈을 모아 직접 구입했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편견 없이
말동무 되어 준 교회

매주 일요일이 되면 희영 씨는 옥인교회에 나간다. 장애인 전용 버스가 현관 앞까지 찾아온다. 버스에 승강기가 있어 편하게 다닐 수 있다. 몸뿐 아니라 마음도 편하다. 교인들은 희영 씨에게 좋은 말동무가 되었다. 희영 씨를 편견 없이 보통 사람처럼 편하게 대했다. 같이 점심 먹고 한참 대화하다 집에 오면 기분이 좋았다.

"어릴 때부터 동네 교회에 다녔어요. 그때는 교회가 오락실 같았어요. 친구들 만나고, 같이 놀 수 있는 장소였죠. 특별한 순간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교회에 계속 나가면서 신앙이 생겼던 것 같아요. 힘들 때 의지할 수 있고, 지칠 때 기댈 수 있는 분이 저를 사랑하신다는 게 좋았어요."

처음부터 옥인교회에 출석한 건 아니다. 길음동에 왔을 때, 동네 교회를 먼저 찾았다. 하지만 가는 길이 불편했고, 사람들도 불편했다.

"교회에 가면 돈 있는 사람만 찾아오는 거 같아요. 다들 옷차림이 세련되고 고급스러워요. 원래 없는 사람이 많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저 같은 사람이나 노숙인이 편하게 가는 곳이 교회 아닌가요?"

올해부터는 성북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동료 상담' 교육을 받고 있다. 희정 씨가 갖고 있는 또 하나의 꿈은 좋은 상담가가 되는 것이다. 자립을 고민하거나, 시설에서 나와서 살고 있는 중증 장애인을 돕고 싶다.

"힘든 일 있으면 같이 나누고, 도움이 필요하면 능력이 되는 대로 돕고 싶어요. 중증 장애인들의 멘토가 되고 싶어요. 저도 시설 경험이 있고 지금은 나와서 살고 있으니, 제가 이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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