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순을 껴안고 살아가는 것은 인간의 필수 조건이 아닐까. 일관성 있는 삶을 원하지만 삶의 곳곳의 국면에서 모순이 구현되어 기어코 좌절하고 마는 것이 우리네 일상이다. 영화 '대부'의 주인공 마이클 콜레오네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해병대 장교복을 벗는다. 그는 결혼의 축복과 함께 폭력이 넘실대는 모순의 세계로 진입한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가족을 죽인다. 그렇게 가족은 파괴되고 그는 소외된다. 아이러니다. 이렇게 냉혹한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주변에서, 우리 자신에게서 삶의 아이러니를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좀 더 나아가 우리는 그러한 아이러니를 우리 자신이 해결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이러한 깨달음이 깊어졌을 때, 우리는 우리를 넘어선 무언가를 상상하고 그에게 시선을 돌린다. 그러고는 만물의 질서를 주관하는 신이 있을 거라고, 그는 모순으로 뒤엉켜 있지 않으며 그렇기에 모순으로 뒤엉킨 이 세상을 일거에 해소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우리가 그에게 충성을 맹세하면 그는 우리에게 이 모순으로 가득 찬, 아이러니한 삶을 반듯하게 해 주는 해결사가 되어 줄 거라 믿는다.

모든 그리스도교인이 이러한 믿음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종교'인으로서, 혹은 종교적 인간으로서 그리스도교인은 이러한 믿음을 보여 왔고 그러한 방식으로 '거룩한 책'인 성서를 읽었다. 많은 그리스도교 독자들은, 모순으로 가득 찬 아이러니한 삶을 '성서'는 '해결'해 줄 수 있는 길을 제시한다고 '믿고', 이 책을 '경전', 더 나아가 '하느님의 말씀'으로 대하고 읽었다.

그러나 신약성서를 읽으면 마주하게 되는 건 거룩함으로 감싸진 질서가 아니라 또 다른 혼란이다. 신약성서를 읽으면 읽을수록 모순이 해소되기는커녕 모순은 심화된다. 조금만 신경 써서 읽더라도 마르코, 마태오, 루가의 복음서는 서로 내용과 어조가 미묘하게 다르다. 그리고 요한의 복음서는 앞의 세 부분과 확연하게 구분된다. 이 네 편의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의 모습도 사뭇 다르다. 다를 뿐만 아니라 때때로 충돌한다.

마르코의 복음서에서 예수는 죽음을 앞두고 두려워할 뿐만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고 하느님을 원망한다. 그런데 루가의 복음서에서 예수는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라고 말하면서 짐짓 당당한 자세로 죽음을 맞이한다. 심지어 요한의 복음서에서 예수는 "다 이루었다"면서 초월자적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삶의 모순과 충돌이 여러 물음을 낳듯 성서의 모순과 충돌도 여러 물음을 낳는다.

카일 키퍼의 <신약: 문학으로 읽는 신약성서>(비아)는 이런 물음을 지닌 독자에게 제안할 만한 책이다. 그는 모순과 함께 걸으면서도 신약성서를 읽을 수 있다고 말한다. 좀 더 나아가 신약성서에 있는 '모순과 함께'할 때 이 텍스트를 더 풍요롭게 읽을 수 있다고 제안한다.

<신약: 문학으로 읽는 신약성서> / 카일 키퍼 지음 / 김학철, 이승호 옮김 / 비아 펴냄 / 256쪽 / 1만 4000원

성서에서 모순을 발견한 뒤 이에 대한 반응은 달라질 수 있다. 가장 손쉬운 방법, 혹은 종교 영역에서 가장 자주 사용하는 방법은 성서가 진리임을 전제하고, '믿음'이라는 눈으로 성서를 읽는 것이다. '성서는 진리이기 때문에 진리이다'라는 순환논증에 갇혀 있다고도 볼 수 있지만, 오늘날 대다수 신자들은 이러한 방식으로 성서를 읽는다.

문제는 이 '믿음'이라는 것이 일종의 필터로 작용해 신약성서 텍스트 안에서 충돌하는 요소들이나 복잡다단한 면모들을 '제거'하게 된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 믿음이 '무엇'에 관한 믿음인지가 사실은 불확실하다.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사람은 저마다 다른 '하느님'상을 갖고 있으며 '믿음'의 눈으로 본다 해도 '자신이 생각하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라는 틀(혹은 특정 집단이 생각하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라는 틀)에 비추어 성서를 읽는다. 그러다 보니 성서 본문의 풍요로움을 제거함은 물론 '자의적인' 읽기(자신의 믿음을 확인하기 위한 읽기)라는 한계에 봉착하게 된다.

또 다른 반응은, 양질의 지식을 섭취한다면 신약성서라는 음식을 제대로 소화할 수 있다는 전제를 가지고 성서를 다시 읽는 것이다. 역사적 접근법(historical method)으로 대표되는 이 방법은 성서에 대한 정보를 차곡차곡 머릿속에 쌓아가 신약성서의 모순이 사실은 모순이 아니라고 생각하려 한다. 신약성서 각 저자의 정황을 알고 당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 로마제국의 역사에 익숙해지면, 그만큼 신약성서 본문에 있는 낯선 요소들이 자연스럽게 해소될 거라 믿는 것이다.

그러나 이 방법은 앞의 방법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성서라는 본문이 지닌 풍요로움을 축소한다. 이는 예술가와 예술 작품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분명 예술가의 시대적 상황, 예술가의 성장 배경, 예술가가 지닌 능력을 파악하면 예술 작품을 '이해'하는 데 '부분적'으로는 도움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부분'이지 '전체'는 아니다.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생각해 보더라도 다빈치의 생애를 완전히 파악한다고 해서 모나리자 특유의 매력과 아름다움을 완전히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이러한 방법은 지나치게 전문적이기 때문에 성서를 읽는 대다수 독자층은 택하기 힘든 방법이다.

카일 키퍼는 <신약: 문학으로 읽는 성서>에서 앞의 두 방법을 넘어선 '문학'이라는 렌즈로 성서를 읽는 독법을 권한다. 그는 텍스트 안에 있는 모순들을 굳이 해소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문학의 렌즈로 성서를 바라본다면 모순은 해소되어야 할 무엇이 아니라, 오히려 성서를 풍성하게 하는 핵심 요소일 수 있다는 것이다. 문학이라는 눈으로 볼 때 신약성서는 더 이상 문제지가 아니다. 캐릭터, 플롯, 어조 등으로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일대기이자 서간체 문학 또는 통속문학으로 변모한다.

시인 이성복은 시론집 <극지의 시>(문학과지성사)에서 이야기의 힘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그에 따르면 이야기는 "의미 전달이 끝나자마자 효과가 소멸하는 '정보'와 달리, '이야기'는 그 의미를 최종적으로 유보하기 때문에 계속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아는 것'이 정보의 핵심이라면, '모르는 것'은 이야기의 핵심이라는 뜻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신약성서는 그 모순으로 인해 '모르는 것'들이 계속 생겨나기 때문에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지은이는 복음서의 모순 사이를 헤매면서 독자들이 다양한 예수의 얼굴을 만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비유하자면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얼굴은 한 장의 정밀한 사진이 아니라 여러 초상화'들'에 가깝다. 마르코의 복음서 속 예수는 다빈치가 스토마토 기법을 사용한 것처럼 윤곽선이 흐릿하다. 이에 비해 마태오의 복음서가 그리는 예수의 얼굴은 렘브란트의 초상화처럼 명암 대비가 두드러진다. 루가의 복음서에서 예수는 카라바조 그림처럼 생동감 넘치는 표정과 구도로 그려진다. 문학 작가가 다르면 인물의 표현과 묘사도 달라지기 마련이라는 문학의 단순한 관점을 받아들일 때, 독자는 복음서가 그리는 모순을 모순으로서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 문학은 실증이 아니라 재현(representation)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바울로 서신들에서 발견되는 모순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에서 감지되는 어조와 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편지의 어조는 다르다. 심지어 바울로는 유대인과 말할 때는 유대인임을 내세우면서 이방인과 말할 때는 유대 정체성을 슬그머니 밀어 넣는다. 독자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이렇게 작가의 스타일과 성격이 모순적이라는 사실은 작가로서 함량 미달이 아닐까, 라는 식으로.

그러나 카일 키퍼는 "서신은 급하게 휘갈긴 메모가 아니라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진행한, 수사학적 행위의 결과물"이라고 단언한다. 서간체 문학인 바울로 서신은 일대기 문학이라고 볼 수 있는 복음서와 다른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로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편지를 보냈기 때문에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다른 가면(persona)를 쓰는 행위를 주저하지 않았다. 교수님께 성적 정정 메일을 보낼 때 쓰는 가면과 여자 친구(혹은 남자 친구)에게 연서를 쓸 때 쓰는 가면이 같을 수 없듯이, 바울로가 서신을 쓸 때 쓰는 가면도 제각각인 게 자연스럽다.

이렇게 보면 바울로가 미국 드라마 '하우스 오브 카드'의 주인공 프랜시스 언더우드처럼 보이기도 한다. 바울로는 가차 없는 실용주의자(ruthless pragmatist)에 불과한 것일까. 카일 키퍼는 바울로에게 변치 않는 근본이 있으니 그것은 "복음 자체"라고 변호한다. 문학이라는 눈으로 바울로 서신을 읽을 때 독자는 복음이라는 '커다란' 기준 아래 드러나는 바울로의 '사소한' 모순을 곱씹으면서 서신들의 풍요로움을 충분히 만끽할 수 있다.

남은 질문이 있다. 왜 신약성서가 하나로 묶여야 하느냐는 물음이다. 카일 키퍼는 정경을 만들어 낸 사람들이 "다양성 그 자체를 정경화"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모자이크 사진의 비유로 정경의 '통합성'을 설명하는데, 나는 박물관의 비유가 더 적합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정경은 일종의 박물관이다. 앞서 복음서의 그림들은 1층에 있고 바울로의 서신은 2층에 있다. 요한의 묵시록을 비롯한 성서 본문도 다른 층에 전시되어 있을 것이다. 이 신약성서라는 이름의 박물관에서 독자는 자유롭게 여행하면서 1층과 2층 그리고 나머지 층에 있는 전시들을 비교할 수 있다. 그렇게 각각의 그림을 훼손하지 않고 박물관 전체 콘셉트를 가늠해 볼 수 있다.

모순의 세계를 피해 도착한 신약성서에서 독자는 다시 모순의 세계와 만난다. 그리고 깨닫게 된다. 삶에서 튀어나오는 모순은 간단히 해소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오히려 모순은 그것을 껴안고 뒹굴면서 나아가야 하는 것임을. 신약성서를 이루는 여러 텍스트들이 한데 모여 하나의 '정경'으로서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 중 하나는 바로 이것일지도 모른다. 모순은 섣불리 해결하기보다는 응시하게 하는 것으로 이를 응시하는 나 자신을 더 깊고 넓게 만드는 일종의 선물인 것이다.

그러한 면에서 (모순과 혼란으로 뒤엉킨) 삶이 궁극적으로 하느님이 주신 선물이라고 할 때 좀 더 의미심장한 의미를 갖듯, 성서의 모순과 혼란을 정직하게 인정할 때 (손쉽게 해석되지 않는) 이 속에서 울려 퍼지는 다채로운 음성을 감지할 때 오히려 신약성서가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 더 나아가 하느님의 말씀이 담긴 문헌이라는 고백은 좀 더 깊은 의미를 갖게 된다.

믿음은 이러한 복잡다단한 세계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갖추어야 할 준비물이 아니라, 이 복잡다단한 세계를 거치며 형성되는 산물일 것이다. 신약성서라는 낯설고도 풍요로운 세계를 그대로 만끽하고자 하는 이들, '자기 확인으로서의 성서 읽기'가 아니라 '또 다른 세계와의 만남으로서의 성서 읽기'를 하고픈 이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이영근 / 대학에서 신학과 역사를 공부했다. 쉽게 읽을 수 있으면서도 뼈가 있는 글을 쓰기 위해 노력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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