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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적 세계에 드리운 희망의 빛
[서평] 로완 윌리엄스 <삶을 선택하라>(비아)
  • 김진혁 (newsnjoy@newsnjoy.or.kr)
  • 승인 2018.01.08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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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톤 체호프(Анто́н Па́влович Че́хов, 1860∼1904)의 희곡 <세 자매>는 20세기 초 제정러시아의 한 작은 도시에서 살아가는 젊은 사 남매 이야기이다. 그들은 새로운 세상이 올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특별히 모스크바로 가서 성공적이고 의미 있는 삶을 사는 꿈을 꾼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도 일상은 변하지 않는다.

희망은 이내 지긋지긋한 지루함으로 바뀌고 얽히고설킨 인간관계는 그들의 숨통을 조여 온다. 온 가족의 희망이었던 맏아들인 안드레이는 대학교수를 꿈꿨으나 결국 소도시의 하위 공무원이 된다. 삶의 권태와 가족 부양이라는 책임에 짓눌린 상태에서, 그는 마음속 깊은 감정을 격하게 토로한다.

"아아 도대체 어디로, 어디로 가버렸지, 내 과거는?
젊고 쾌활하고 머리가 영리했던 그 시절은?
아름다운 공상과 사색에 잠기던 그 시절,
현재와 미래가 희망에 빛나고 있던 그 시절은 어디로 사라졌지?
왜 우린 생활을 시작하기가 무섭게 권태롭기 짝이 없는 회색빛의 나태함과 무관심과 무익하고 불행한 인간이 되어 버리는 것일까?
도시가 시작된 지 벌써 2백 년이 된다.
현재 인구는 10만 명이다.
허나 그중에 한 사람도 보통 사람들과 다른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1)

안드레이는 일상의 압박에 숨조차 쉬기 어려운 우리 모두의 대변인이다.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환경에서 누군가를 향해 손가락질하고, 누군가를 향해 연민을 느끼다 여느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망가져 버린다. 어느새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생존만을 위해 매일매일 몸부림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여기에 새로움은 보이지 않으며 의미를 찾으려는 시도는 사치로 보일 뿐이다.

황무지 같은 삶, 인간은 누구나 이러한 현실을 마주하고 이러한 현실을 겪어 나간다.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가치들, 서로에 대한 격려·우애·희망조차 이 비극적 구조는 탈색하고 뒤틀고 잠식한다. 우리는 잘 짜인 비극은 즐겨 보며 카타르시스를 느끼지만, 실제로 비극적 현실을 마주하기는 꺼려 하며 더 나아가 자신이 이 비극적인 현실의 주인공이 되어 일정 부분 현실을 더 비극적으로 만드는 데 기여하고 있다는 진실을 거부한다.

사상가·정치인·종교인·교육자들은 때로는 이 비극을 넘어설 수 있다고, 때로는 비극을 없애고 삶을 희극으로 만들 수 있다고 외치고 이런저런 프로그램과 처방전을 제시하나 인류가 자기 앞에 놓인 비극적 운명을 회피하려, 넘어서려 발버둥 칠 때마다 그 무게는 더 무거워지고, 더 끔찍해지고, 더욱 복잡해졌음을 역사는 보여 준다.

그리스도교, 그리스도교가 선포하는 복음은 인간이 이 비극적 현실과 마주해 일어나는 연약함·두려움·의심·갈등을 맹목적인 믿음으로 해소하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이 복음은 이 비극적 현실을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그리스도를 만나는 창조적인 변혁의 지점으로 자각할 것을 요청하고, 그 가능성을 알려준다. '정통' 그리스도교는 언제나 그래 왔다고 로완 윌리엄스(Rowan Williams, 1950∼)는 <삶을 선택하라 Choose Life>(비아)를 통해 말한다. 캔터베리 대주교 시절 성탄절과 부활절 설교 모음집인 이 책에서 그는 성육신과 부활에 대한 진지한 묵상을 통해 비극적 상황에서도 희망을 품는 법을 아름다우면서도 설득력 있게 보여 준다.

<삶을 선택하라 - 성육신과 부활에 관한 설교> / 로완 윌리엄스 지음 / 민경찬·손승우 옮김 / 비아 펴냄 / 256쪽 / 1만 5,000원

비극의 렌즈로 보는 그리스도교 신앙

로완 윌리엄스의 신학적 독특성은 비극에 대한 그의 태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인간이 비극적 존재라면, 그리스도교는 근원적으로 비극적 종교이다. 그가 보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죽음·부활은 모두 인간의 비극적 현실과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다. 성육신 사건은 하나님께서 직접 인류의 비극적 드라마로 들어오셨음을 보여 준다.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께서 인간 삶의 곤란을 다루시는 방식이 놀랍게도 비극의 핵심 주제인 배신과 상실, 비밀과 폭로, 고난과 죽음임을 드러낸다. 또한 부활은 삶의 비극적 구조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궁극적으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존재가 될 수밖에 없음을 알려 준다. 이런 시각에서 그리스도교 신학은 안락한 삶에 대한 망상과 환상을 깨트리며, 인간의 비극적 실존을 가식과 망상 없이 바라보게 도와주는 실천적 지혜다.

삶의 모순과 비극성을 포착해 내는 윌리엄스의 예리한 시선은 비극에 대한 헤겔의 독특한 철학적 정의에 빚진 바가 크다. 헤겔에게서 비극의 핵심은 가슴을 찢고 눈물을 자아내는 플롯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 나름의 정당성을 가진 두 '옳은' 이야기가 충돌한다는 사실에 있다.2) 윌리엄스의 진단에 따르면 이 같은 실존의 비극적 구조를 인정하지 못할 때 삶의 비극은 더욱 가중된다. 즉, 양립하는 이야기가 자아내는 긴장과 무게를 우리가 견디지 못하고, 두려움과 적개심에 사로잡혀 "주위 사람들에게 우리들의 이야기가 옳다고, 반대편에서 겪는 고통이 얼마나 극심하든, 반대편이 얼마나 커다란 비극 속에 있든 간에 우리의 고통과 비극에 견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데 동의해 주기를"(182쪽) 바라는 데서 더 큰 갈등과 모순, 폭력이 나온다.

이 곤고한 상황을 인간이 자기 힘으로 벗어날 수 있을까. 영웅이 되어 이 비극적 운명에 맞서야 하는 걸까. 이에 대해 윌리엄스는 인간의 운명을 자기 것으로 만듦으로써 비극의 새로운 차원을 여신 하나님을 응시하고 신뢰하라고 권한다.

"십자가 사건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든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든 간에, 너나 할 것 없이 모든 이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하며 주님의 죽음이라는 연극에서 자신이 어떠한 배역을 맡고 있는지를 묻게 합니다. 이 연극에서 무고한 인물은 단 한 명뿐이며 그 인물은 저나 여러분이 아닙니다. (중략) 그러나 부활의 날 이 암울한 인식은 완전히 뒤집힙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의 죽음에 연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이 저지를 실패와 잘못의 무게가 아무리 무겁다 할지라도 하느님의 창조적인 사랑은 짓누를 수가 없습니다." (191~192쪽)

십자가는 '나의 이야기'는 옳고 '너의 이야기'는 틀렸다고 규정하며 악화되는 비극의 메커니즘을 무력화하며, 인류를 불신과 갈등으로 몰아가는 두려움과 편견과 자만심을 '나' 스스로는 해결할 수 없음을 깨닫게 한다. 또한 삶에서 정의와 사랑이 실패하는 것처럼 언제나 보일지라도, 부활은 인간의 배신과 죽음의 힘마저 꺼트리지 못한 영원한 사랑이 결코 소멸할 수도 패배할 수도 없음을 보여 준다. 그렇기에 그리스도교적 희망은 비극적 상황이 사라진 곳이 아니라, 비극의 심연 한복판에서 찾아볼 수 있다. 비극적 상황은 믿음의 기저를 뒤흔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이 (그를 통해 그러난) 참된 인간성을 거듭 보여 주는 신뢰의 존재가 되어야 할 배경이 되어 준다.

'처음에 만난 그 느낌 그 설레임을 찾는다면'

이처럼 성육신과 부활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이다. 문제는 성탄절과 부활절이 사회와 문화에 흡수되면서 그 의미가 화석화했다는 점에 있다. 특히나 종교를 사적 문제로 환원하는 현대사회에서 이러한 문제점은 더욱 증폭되었다. 세속 시민들은 물론 그리스도교인들조차 '처음에 만난 그 느낌, 그 설레임'을 잃어버린 '아주 오래된 연인'처럼, 복음이 자아냈던 당혹감과 놀라움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렸다. 오늘날 설교자와 신학자는 (여전히 남아 있는 비극적 현실에 더해) 이 무덤덤하고 무감각한 상황을 의식해야 한다. 설교자-신학자로서 로완 윌리엄스도 이 점을 분명하게 의식하고 있다.

"(성육신과 부활은) 하느님과 인류에 대해 어떻게 말할지, 어떻게 생각할지, 둘을 어떻게 연결 지을지, 이에 관한 모든 생각의 풍경을 바꿔 놓는 사건입니다. (중략) 2000년 동안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지성과 상상력이라는 최고의 선물을 선사한 이 사건들을 어떻게 생동감 있게 전할 수 있을까요? 이 세계를 변화시켜 나가는 저 신비로운 사건들과 각각의 삶의 자리에서 시시각각 겪는 문제들, 공적 세계에 엄습하는 위기들을 어떻게 연결해야 할까요?" (9~10쪽)

성육신은 세상을 탄생하게 한 영원한 말씀이 한 인간이 되어 동료 인간과 함께 먹고 마시고 일하고 안식하던 사건이다. 부활은 창조 세계 전체가 목적과 의미를 되찾는 새 창조의 사건이다. 성육신과 부활을 통해 하나님은 죽음에 매여 있던 인류를 영원한 생명으로 초청하시며, 인간의 상상으로는 포착도 예측할 수도 없는 방식으로 자신을 환대의 하나님으로 계시하신다. 하지만 호의가 계속되면 그마저 자신의 권리로 착각하기 마련인 인간은, 자기 자신마저 선물로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마저 당연시하고 그 은혜를 자기 식대로 조종하기 원한다.

이러한 인간의 곤경에 마주하여 윌리엄스는 성육신과 부활이 주는 놀라움과 충격을 일깨우며, 역사를 변혁한 이 '역사적' 사건들의 의미를 현대인이 새롭게 발견하도록 돕는 역할을 용감히 맡는다. 이를 위해 그가 설교에 두드러지게 사용하는 방법 하나는 '낯설게하기'이다. 친숙함의 베일에 가려 당연히 보아야 할 바를 보지 못하고, 마땅히 깨달아야 할 바를 깨닫지 못하는 현대인을 위한 문학적 처방이다.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사무엘 테일러 콜리지(Samuel Taylor Coleridge, 1772∼1834)는 고정되고 죽어 있는 사물에 생명의 힘을 불어넣는 상상력은, 기존의 대상을 흩뜨리고 융합하고 재창조하는 활동이라 보았다.3) 윌리엄스 역시 풍성한 신학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잘 아는 성탄과 부활 이야기를 새롭게 조합하고, 여러 이미지를 녹여내며, 우리 현실의 삶의 이야기와 융합해 냄으로써, 성육신과 부활 교리의 의미의 다차원적 결을 생생히 되살려 낸다.

실제 <삶을 선택하라>에 등장하는 구원자의 모습은 다채롭지만 산만하지 않고, 낯설지만 친밀하다. 그리스도는 애처로운 아기의 울음소리로 이 세계의 가식적 평화를 뒤엎고(30쪽), 연약한 아기 몸에 담겨진 우주를 움직이는 타오르는 불꽃으로 우리 가운데 현존하며(40쪽), 가난하고 위협에 노출된 난민의 모습으로 은밀히 찾아오며(87쪽), 호랑이처럼 우리를 압도적으로 덮치시는 치명적이지만 선한 분이시다(235쪽).

윌리엄스의 세심하고 전략적인 '낯설게하기' 작업 덕분에 그가 선포하는 성육신과 부활은 약 2000년 전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머무르지 않는다. 그때 거기서 태어나시고 다시 사신 주님은 바로 지금 여기서 나와 너를 만나시고, 우리를 말씀의 청자이자 복음의 증인으로 빚으시며, 그분의 화해 사역으로 우리를 초청하신다.

말해질 수 없고 보여질 수밖에 없는 신비

영국 성공회를 대표하고 전 세계 성공회의 상징적 수장인 캔터베리 대주교로서 윌리엄스가 행했던 10편의 성탄 설교와 11편의 부활절 설교에는 흥미롭게도 나사렛 예수의 동정녀 탄생과 죽음에서 부활을 역사적으로나 철학적으로 논증하려는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그는 이 중요한 사건들을 증명하려는 시도를 노골적으로 경계한다. 신앙은 근본적으로 인격적인 것인데, 객관적인 역사적 증거나 합리적 추론을 만들려는 지나친 노력은 성육신과 부활의 의미를 "비인격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림으로써 우리 자신으로 하여금 문제로부터 거리를 두게"(210쪽) 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근본적 이유는 복음이 논증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알려질 수밖에 없다는 윌리엄스의 신념에 있다. 여기서 그가 어린 시절부터 좋아했던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의 영향을 감지할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보여질 수 있는 것은 말해질 수 없다.4) 즉, 삶의 의미는 논증으로 증명되거나, 명제를 통해 구성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삶을 실제 살아감을 통해 보여질 뿐이다. 마찬가지로 윌리엄스의 사상에서도 성육신과 부활이 무엇인지는 오직 그리스도교적 삶의 실천으로 알려질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것이 진리임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과학적 증거와도 같은 결정적인 한 방을 통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한 사람의 삶 전체를 다룬 긴 이야기가, 이를 신뢰하는 공동체의 삶이라는 더 긴 이야기가 우리 안에서 살아 움직임으로써 우리는 부활의 메시지가 진리임을 알아 갑니다. 결국 부활이 진리임을 깨닫게 하고 익히게 하는 것은 그 진리를 살아 내는 (위험을 감수하는) 삶 (중략)입니다." (248쪽)

하나님이 살과 피를 가진 인간이 되신 성육신 사건은 그리스도교가 추상적 담론이 아니라 실제 몸을 가진 사람들의 삶의 문제가 되게 한다. 그렇기에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고도로 전문적인 논증이 아니라 부활의 삶을 실제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생한 이야기라고 그는 역설한다. 그래서 윌리엄스의 설교에는 언제나 극한의 자리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드러내는 사람들의 실제 이야기가 빛나고 있다. 테러 희생자 가족, 경제적 극빈자, 세계 곳곳의 양심수, 종교적으로 핍박받는 자, 난민들의 비극적 삶의 현장이 역설적이게도 십자가에서 이뤄진 하나님과 인류의 화해가 역사에서 현실화하는 장소가 될 수 있음을 그는 보여 주고자 한다.

하지만 윌리엄스는 우리의 능력과 전략으로 갈등이 있는 곳에 화해를 이루고, 비극의 자리에 희망을 자라게 하려는 태도를 경고한다. 화해가 현실화하고 죽음을 넘어선 희망이 잉태한 것은 인간의 가능성을 넘어선 부활의 신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새 창조의 미래를 만들어 가는 궁극적 주체도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이는 인간의 계획과 노력과는 무관히 하나님께서 영원 속에서 예정하고 계획하신대로 세상만사를 다 이루실 것이라는 태도와 혼동되어서 안 된다. 이 하나님의 궁극성, 피조물인 인간의 가능성과 겸손함을 동시에 부각하는 차원에서 그는 말한다.

"누군가 말했습니다. 부활은 결코 계획을 세워 도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분명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저 하느님의 활동이 일어날 공간을, 여백을 만들 수는 있습니다." (252~253쪽)

그리스도인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일을 이루도록 '초청받은' 존재이다. 그리스도인은 그 일을 자기가 가진 능력이나 개발한 기술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활동에 '참여함으로써' 행할 수 있다. 내 삶의 여백에 현존하는 신비로 생명(life)의 중심추가 옮겨 감으로써, 우리는 이 세계에 거하면서도 하나님 나라를 향해 기울어진 창조적인 비대칭적 삶(life)을 살아가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성육신과 부활은 지금 여기서 그리스도인의 삶과 행동의 본질과 성격을 규정해 주는 사건이기도 하다.

성장의 공간으로서 세계를 향한 그리스도교적 선포

몇 년 전 대학원 세미나를 인도하며 윌리엄스가 일간지에 기고한 사설을 학생들과 함께 읽은 적이 있다. 세계 각지에서 모인 학생들이 그가 복음을 현실의 문제와 긴밀히 연결해 내고, 또 '세속화한' 영국인에게 호소력 있으면서도 무례하지 않게 그리스도교를 설명하고 있음에 감탄했다. 학생들이 너무 놀라기에, 다소 장난스럽게 글에서 받은 인상을 한마디로 요약했다. "조간신문에서 이런 사설을 읽을 수 있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공적 신앙을 가질 것이요."

<삶을 선택하라>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인 성육신과 부활의 깊은 의미를 끌어올리는 설교, 교회적 맥락을 넘어서 사회 전체의 성숙을 지향하는 설교,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가면서 겪게 될 성장통을 인정하고 인내하도록 도와주는 설교 모음집이다. 물론 윌리엄스의 메시지가 '공적' 호소력을 가지게 된 데에는 오랜 그리스도교 전통을 가지고 있고, 특별히 성공회가 국교인 영국이라는 특별한 상황이 작용하고 있음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반대로 영국만큼 복음의 메시지가 호소력을 잃은 곳을 오늘날 전 세계에서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우리로서는 헤아리기 힘든 어려운 환경과 위치에서 그가 이제껏 이룩한 업적과 현재 진행 중인 작업들을 통해,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그리스도교의 현실 적합성에 대한 고민을 깊고 예리하게 할 수 있지 않겠냐는 기대를 해 본다.

윌리엄스는 많은 것을 설명하는 신학자가 아니다. 그는 많은 것을 가르치거나 주문하는 설교자도 아니다. 단지 그는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자신을 주신 하나님을 응시하고, 그리스도가 계신 곳에 우리가 함께 있어야 한다는 단순하지만 근원적 사실을 거듭 강조한다.

"그분은 육신이 되셨습니다. 그분은 시시각각 분쟁이 일어나며 갈등이 찾아오고 역사가 멈추지 않는 세계, 변호와 불안정함이 주문 한마디로 바뀌지 않는 세계, 몇몇 위대한 지도자나 천재가 펜을 휘갈기거나 칼을 휘두르는 것으로 바뀌지 않는 세계의 일부가 되어 사셨습니다." (88쪽)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나아가 그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와 함께 그분이 거하셨던 세계를 긍정하고 그 일부가 되는 것에서 시작된다. 세계 자체가 고칠 것 없이 완벽한 곳이라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부활이 '세상성'의 의미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기 때문이다.

세계는 여전히 비극적인 곳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성장할 곳, 갈등과 폭력을 넘어 화해를 이뤄 나갈 곳, 각자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서로 벗이 되어 희망을 나눌 곳으로 변모하였다. 신학과 설교의 일차적 사명이 바로 이 새 창조의 놀라움과 의외성을 일깨우는 것에 있다는 점을 환기했다는 것만으로도 <삶을 선택하라>는 오늘의 한국 독자들에게 커다란 선물이다.

김진혁 /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신학 공부>(예책) 저자

각주

1) 안톤 체호프, 『세 자매』, 전훈 옮김 (서울: 애플리즘, 2005), 103-104.
2) Walter Kaufman, Tragedy and Philosophy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79), 201-202.
3) Samuel T. Coleridge, Biographia Literaria, in The Major Works, ed. H. J. Jackson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85), 313. 이 글에서 언급한 것은 콜리지의 '이차적 상상력' 개념이다.
4) Ludwig Wittgenstein,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4.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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