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 종교, 혹은 이웃 종교와 관련해 오늘날 그리스도교인들이 즉각적으로, 가장 많이 묻는 질문은 아마도 '타 종교에도 구원이 있는가', 혹은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는가'일 것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고유성, 유일성을 강조하는 이들은 이 질문에 두말할 것 없이 단호하게 '아니다'라고 말할 것이고, 종교의 보편성 혹은 궁극적 가치, 혹은 하느님의 사랑을 강조하는 이들은 '그렇다'라고 답할 것이다. 둘 사이에는 '깊은 심연'이 자리 잡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현상이 교회 현실에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타 종교에도 구원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상이한 답변은 신학계에서도 나타난다. 어떤 신학자들은 그것이 조금 더 완고한 방식이든, 유연한 방식이든 그리스도교의 고유성을 강조하고 이를 고수해야만 그리스도교가 이 사회에서 유의미하게 작동할 수 있다고 판단하며 현대 사상, 현대 문화의 언어, 현대의 여러 학문적 성과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거나 거부하는 방식으로(때로는 그리스도교는 '종교'가 아니라 말하며), 그리하여 그리스도교의 고전적인 신학 체계를 재천명하고 (다른 문화, 종교와 구별되는) 그리스도교의 정체성을 강화하고자 한다.

또 다른 신학자들은 현실 세계에서 각 종교들이 '진리'라는 기치를 내걸어 이것이 쉽사리 갈등으로 격화되고 있음을 인지해야 하며 '인권', '평화', '사랑'과 같은 인류 보편의 가치를 위해 모든 종교가 헌신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한다. 이러한 입장에 있는 이들은 대체로 타 종교와 그리스도교의 유사성(신 혹은 가르침)을 발견하려 노력하며 공통의 기반을 마련해 인류에게 놓인 공통의 문제들을 해결하려 한다. 결국 이 문제는 '그리스도교인'인 '나'와 '다른 종교'를 갖고 있는 너, 혹은 나와는 '다른' 타자와의 관계를 어떻게 자리매김해야 하느냐, 이러한 타자들로 둘러싸인 "현대라는 시대에서 '그리스도교인'인 '나'의 정체성을 어떻게 자리매김해야 하는가"라는 질문과 관련이 있다.

앞서 언급한 두 가지 길 사이는 도저히 해소되지 않을 것 같은 깊은 간격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나'와 '너'의 관계로 보면 사실상 같은 전제를 하고 있다. 즉 '나'는 '그리스도교'라는 정체성을 확실하게 갖고 있고, '너'는 너대로 '다른 종교'라는 정체성을 고정적으로 갖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러한가. <종교신학 강의>(비아)의 지은이가 이 책을 통해 근본적으로 제기하는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종교신학 강의 - 다종교 상황에서 그리스도교인이 가야 할 길> / 정재현 지음 / 비아 펴냄 / 276쪽 / 1만 3,000원

<종교신학 강의>는 먼저 기존의 서구를 중심으로 진행되어 온 대표적인 종교 간 관계 유형-배타주의, 포괄주의, 다원주의-의 탄생 배경과 흐름을 논하고 각 유형의 논리 구조를 살핀다. 실제 대학원 강의를 바탕으로 한 책답게 각 관점마다 다양한 학자들-알리스터 맥그래스, 알베르트 슈바이처, 에른스트 트륄치, 칼 라너, 폴 니터, 레너드 스위들러, 라이문도 파니카-이 언급되며 각 학자들의 텍스트와 문헌을 분석하는 것이 주를 이룬다. 저자는 각 텍스트를 충실히 따라가지만, 이때 '충실히'는 '무비판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를 구성하는 요소들이 텍스트 안에서 어떠한 위치에 놓여 있는지, 그 요소들이 얽혀 어떠한 논리를 만들어 내는지, 그리고 그 논리의 강점과 한계가 무엇인지까지를 살피는 '비판적 읽기'를 의미한다. 지은이는 말한다.

"원근적으로 넓고 크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각 입장의 형태를 살피고 비교 근거를 살피십시오. 이러한 작업 없이 한 입장으로 들어가면, 그 입장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93~94쪽)

조금 더 구체적으로 지은이는 본격적으로 글을 살피기 전에 제목을 음미하라고 조언한다.

"그(슈바이처)가 그리스도교와 다른 종교들에 대해 어떠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지는 '그리스도교와 세계 종교'라는 제목만 보더라도 어느 정도 감을 잡을 수 있습니다. 한편에는 '그리스도교'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세계 종교'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제목을 통해 그리스도교가 세계 종교와 어떻게든 관련이 있다는 것을 바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교와 세계 종교를 떼어 내고 그리스도교를 앞에 놓았다는 점에서 둘을 관계 짓고 비교하면서도 결국에는 그리스도교를 앞세울 것이라는 걸 예상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우월성을 제목이 이미 주장하고 있는 셈입니다." (100~101쪽)

때로 지은이는 텍스트의 소제목들을 따로 떼어 내 살피기도 하고(169~170쪽), 때로는 하나의 개념을 두고 이와 관련한 사상사적 흐름을 언급하기도 한다.

"'관계'라는 말의 뜻을 생각해 봅시다. '관계'라는 말이 성립하려면 반드시 둘 이상이 있어야 합니다. 둘은 관계를 구성하는 가장 작은 수이며, 모든 관계는 결국 둘로 환원됩니다. 둘이 있고 그래서 관계가 생길 때, 한쪽이 주도권을 갖고 다른 쪽으로 다가감으로써 관계를 형성하는 방식이 있을 수 있고 쌍방이 서로 다가가면서 만나는 관계를 형성하는 방식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전자를 중심주의적 관계라고 한다면 후자는 탈중심주의적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고대-중세나 근대의 관계 방식은 중심주의적이었고 일방적인 관계였습니다. 고대-중세의 신중심주의든 근대의 인간중심주의든, 어떻게든지 중심이 있고 주변이 있습니다. 이에 비해 현대는 중심주의를 거부하며 쌍방관계에 주목합니다." (39쪽)

이러한 '읽기'는 그 자체로 흥미롭다. '종교신학'이라는 한 분과에서 행해지는 논의들을 비판적으로 소개하는 책이기 전에, 이 책은 '텍스트 읽기', 여러 텍스트를 '비판적으로' 읽고 이를 자신의 언어로 소화해 내 자신의 주장을 개진해 나가는 하나의 탁월한 사례로 가치가 있다.

이러한 비판적 독해를 바탕으로 지은이는 그리스도교가 탄생한 1세기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다른 종교들과의 관계라는 차원에서 다시 살핀다. 그에 따르면 그리스도교가 다른 종교를 바라보는 관점은 그리스도교라는 역사적 종교가 처한 자리와 연관되어 있다. 즉 그리스도교가 막 태동하여 소수의 집단으로 구성되던 시절과 로마제국의 국교로 공인된 이후의 그리스도교는 전혀 다른 입장을 갖게 되었으며, 크리스텐덤이라는 단일한 정치적 문화적 배경에서 홀로 자존하는 정체성을 지니고 있을 때와, 지구촌이 되면서 불교나 힌두교, 유교나 이슬람교라고 하는 다른 종교 문화 전통과 만나게 될 때는 또 다른 태도, 다른 정체성을 지닐 수밖에 없다.

배타주의나 포괄주의, 다원주의라고 하는 타 종교와의 관계 유형들은 바로 이러한 그리스도교의 역사적 배경과 밀접한 연관을 지니며 동시에 사상사적 흐름과도 맥을 같이한다는 점을 지은이는 강조한다. 왜 배타주의, 포괄주의, 다원주의라는 관계 유형이 등장했는가. 그리고 이러한 유형들의 등장과 사상사적인 흐름, 역사적인 흐름은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는가. 각 유형에 깔려 있는 논리 구조와 진리관은 무엇인가. 지은이는 이러한 물음을 던지며(그리고 이러한 물음을 던질 것을 독자들에게 촉구하며) 논의를 진행해 나간다.

이런 과정을 통해 지은이는 모든 종교 전통이 이미 완성된 것이 아니라 되어 가고 있는 종교(Religions in the making)임을 일깨운다. 지은이는 묻는다. 기존의 종교 간 대화는 하나의 종교가 마치 고정되어 있고 완성된 것인 것처럼 설정하고 진행되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자신에게는 이상적인 모습을 투사하고 타자에게는 현실의 부정적인 측면을 묘사하면서 자신의 우월성을 확인하는, 그렇게 자신의 정체성을 구축하는 방식으로 '비교'를 행한 것은 아닌가.

여기서 지은이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완성된 것이 아니라 되어 가고 있는 것은 '종교'뿐만 아니라 그 종교를 신앙하는 '나', 즉 인간도 마찬가지 아닌가. 지은이는 종교 간 대화가 '종교'라는 단위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 아니라 종교'인'들 사이의 대화가 되어야 하며 배타주의든, 포괄주의든, 다원주의든 기존의 서구 종교신학 담론이 믿음을 지니고 교리와 제도를 만들어 온 '인간' 자체에 대한 분석을 소홀히 했음을 지적한다.

그리스도교와 불교는 대화하지 않는다. 유교와 그리스도교는 만날 수 없다. 그리스도교'인'과 불교'인'이 만나는 것이고 유교'인'과 그리스도교'인'이 대화하는 것이라는 새삼스러운 사실을, 그리고 이러한 당연한 현실을 지금까지의 종교신학의 많은 논의는(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 신학은) 간과해 왔음을 지은이는 강력하게 비판한다. 특히나 비서구/비그리스도교 사회인 한국에서 '그리스도교', '유교', '불교' 등과 같은 '이름'을 벗겨 내고 인간으로서 자신을 들여다보고, 무수한 타자를 대할 때 자기에 대해 훨씬 더 깊은 이해가 가능하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한국 그리스도교인의 삶에서 '그리스도교'는 실제로 얼마나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가. '그리스도교'라는 기치를 내건다 할지라도 그 사람의 정신세계를 구성하는 요소에는 훨씬 더 다양한 요소들이 얽혀 있지 않은가. 이러한 요소들을 정직하게 직면하고 나 자신과 타자를 대할 때 더 성숙한 '나', 온전한 의미에서 신앙의 길이 가능하지 않겠는가.

이러한 면에서 <종교신학 강의>는 '지금, 여기'에서 다시금 '성찰하는 인간'이 되기를, 그리하여 온전한 의미에서 '신앙인'(자기를 돌아보고 벼린 뒤 새로운 길을 걸어가는 여정에 참여하는 이)이 되는 길로 독자들을 초청하는 책이다. 언젠가 한 저술가는 현대인은 '신'을 믿지 않은 대신 아무거나 믿게 되었다고 말한 바 있다.

<종교신학 강의>의 지은이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은 자기를 위해 '신'을 포함한 모든 것을 '자기화'해 버렸다고 말한다. 신이든, 그리스도교든, 정치 이념이든, 무신론이든, 유신론이든 '나'는 모든 것을 '자기화'해 버리고 맹목적인 믿음의 폐쇄 고리에 갇혀 허우적댄다. 하지만 현실은 이 자기를 벗어나, 자기라는 틀을 깨고 새로운 길로 나아갈 것을 요청하고 있고 더 나아가 '자기' 안에 이미 무수한 '타자들'이 있음을 보도록 요청하고 있다. 이때 신앙인이 해야 할 것은 '다름'을 '틀림'으로 읽고 '같음'을 '옳음'으로 생각해 왔던 오랜 습관에서 벗어나고, 타자와 비교 우위를 통해 만족을 느끼는 자기중심적 경향에서 탈피하여 삶의 생기를 되찾는 것이라고 지은이는 말한다.

"우리를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똬리를 틀고 있는 다름, 나아가 그름도 보아야 합니다. 우리 자신 안에서 다름과 그름을 보았다면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우리 안에 있는 다름을 통해 남들을 만나고 그름을 봄으로써 우리 자신을 고쳐 나가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다고 어느 순간에도 다할 수는 없겠지요. 다만 앞을 향해 달려갈 뿐이라는 사도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다름들이 한데 어우러지는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 그름을 고치면서 서로를 올곧게 벼려 내는 기쁨을 얻는 것, 이것이 바로 믿음의 참된 뜻이 아닐까 합니다. 아울러 삶의 맞갖은 길이기도 할 것입니다." (274쪽)

한반도는 오랜 다종교 전통들이 서로 공존하고 상생해 온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무교와 불교, 유교라고 하는 오랜 문화적 전통 속에서 구한말 새로 유입된 그리스도교는 한국인들에게 진정 무엇이었던가. 새로운 변화 속에서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한국의 그리스도교인들은 스스로를 어떻게 인식하며, 어떠한 그리스도교를 일구었고, 또 지금 일구어 나가고 있는가. 그리고 어떻게 일구어 나가야 하는가.

종교가 있어야 할 자리를 모색하고, 참된 신앙의 길이 무엇인가를 묻고, 찾고 있는 오늘날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검색이 아니라 사색이다. 이 책은 깊은 사유의 산물임과 동시에 독자들을 좀 더 깊은 사유의 길로 인도하는 저작이다. 한국 그리스도교의 성숙한 걸음을 위한 디딤돌 하나가 놓였다. 이 길에 동참하는 이들이 늘어나길 바랄 뿐이다.

한문덕 / 대학에서 신학을, 태동고전연구소에서 한학을, 대학원에서 종교철학을 공부했다. 신학과 동양 사상의 대화를 통해 한국에 맞갖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성찰하고 재구성하는 데 관심을 두고 있다. 현재 생명사랑교회에서 사목한다. <스탠리 하우어워스 - 시민, 국가 종교, 자기만의 신을 넘어서>(마크 코피, 비아, 2016), <교회 - 왜 교회에 가야 하는가? 교회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존 프리처드, 비아, 2017)를 우리말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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