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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머니 속 성탄
유대 경계선 너머 낮은 곳에 임하신 하나님
  • 최주훈 (newsnjoy@newsnjoy.or.kr)
  • 승인 2016.12.25 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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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최주훈 목사(중앙루터교회)의 2016년 12월 25일 성탄절 설교입니다. 설교 본문은 누가복음 2장 1-20절입니다. 허락을 받고 전문 게재합니다. - 편집자 주

메리 크리스마스! 오늘 아침 우리는 2,000년 전 베들레헴 구유에서 나신 아기 예수를 기억하고 감사하며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어떤 이에겐 이 성탄이 참으로 기쁜 소식이고, 어떤 이에겐 그저 일 년에 한 번 반복되는 연례행사이고, 또 어떤 이에겐 별로 감동적이지 않는 날로 변해 버린 성탄 아침입니다.

올해는 유난히 캐롤 소리도 들리지 않고, 변변한 성탄 카드도 주고받지 못하는 수상한 시절이 되었습니다. 성탄 분위기를 도무지 어디서도 느끼기 어렵고 괜스레 성탄 기분을 내는 것조차 눈치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렇다면 2,000년이 훌쩍 지나 버린 성탄의 소식은 이제 우리에게 구닥다리가 되어 버린 것일까요? 성탄의 기쁨과 신비가 사라져 버린 오늘, 우리는 도대체 어디서 하나님의 성탄 음성을 들을 수 있을까요?

보통 예수 믿는 이유를 보면, 하늘에서 천사들의 찬송이 울려 퍼지며 아기 예수가 탄생하는 것처럼 신비한 일이 생기기를 바라기도 합니다. 가난한 사람은 갑자기 부자 되기를 바라고, 이전에 없던 능력, 재물, 행운이 찾아오길 소원합니다. 어떤 사람은 방언, 치유, 미래를 보는 환상 같은 신비한 능력 받는 것을 예수 믿는 목표로 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게 신비한 장소, 신비한 능력 한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만나길 소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만나는 성탄의 소식은 그런 신비한 것들에 별 관심이 없어보 입니다. 오히려 신비가 아니라 평범한 일상 한 가운데 그 가치가 있다가 가르칩니다.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는 성탄의 이야기를 곰곰이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의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가 어떤 사람인지 잠깐 생각해 봅시다. 그들은 아주 평범하다 못해 여관방 하나 구할 수 없을 정도로 권력과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습니다. 게다가 돈도 없고 빽도 없어서 이른 나이에 조혼을 해야 할 만큼, 없는 집안 출신 소녀가 바로 마리아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힘없고 가난하고 평범한 사람을 선택했고, 그 한가운데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게 보내셨습니다.

성탄의 장소는 또 어떻습니까? 성탄의 장소는 촌구석 베들레헴입니다. 세계의 수도 로마, 성도 예루살렘, 항구 도시 가이사랴, 욥바, 아름다운 해변 도시들도 있는데, 하필이면 이 작은 마을 베들레헴입니다. 미가 선지자가 주전 650년경에 예언하기를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가장 작다!" 했던 것을 떠올려 보면 베들레헴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촌구석이었는지 알 만합니다.

이곳은 이스라엘 땅의 평범한 서민 마을입니다. 지금도 팔레스틴 자치구에 속해 있고 인구 수는 용산구 후암동보다 적습니다. 학자들 말로는 몇 백 명 살던 흔하디 흔한 가난하고, 평범한 마을일뿐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작고 가난한 마을을 역사상 가장 거룩하고 위대한 탄생의 장소로 선택했습니다.

어디 그것뿐입니까?

아기 예수 탄생 소식을 가장 먼저 접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지식인이나 교계 지도자, 사회 지도층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엔 두 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하지요. 목자와 동방박사입니다.

유대인은 하나님이 선택한 '선민'으로 알려져 있고, 그런 자부심으로 사는 민족입니다. 유대인들 율법엔 선민으로서 지켜야 할 최저선이 설정되어 있습니다. 그 최저선이 무엇인고 하니 바로 안식일 준수입니다. 유대인 사회에서 안식일 법은 최고의 법인 동시에 가장 기본에 속하는 것이기에 안식일을 지키지 못하면 죄인이고, 지옥에 갈 자로 낙인찍혔습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십시오. 성탄의 소식을 처음 접한 목자도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목자들은 안식일을 지킬 수 없는 직업군에 속해 있었지요. 왜냐하면 양의 꼴을 먹이는 직업이기 때문에 이들은 어쩔 수 없이 안식일을 지킬 수 없는 하층 노동자 계층이었습니다. 뒤집어 본다면, 일반 유대인들이 안식일 준수를 하기 위해 고용한 가난한 유대인 하층민들이 바로 목자들인 것이죠.

자기들이 고용해서 안식일을 지킬 수 없도록 원천 봉쇄해 놓고선 목자들을 죄인이라고 부르는 우스운 꼴이 바로 이런 경우입니다. 어쨌든 유대인들은 안식일 법을 준수하지 못하는 목자들을 죄인으로 분류할 정도로 누구하나 관심을 갖지 않던 직업군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렇게 관심받지 못하고 소외된 직업군을 선택해서 성탄의 메시지를 가장 먼저 알려 주십니다.

동방박사는 또 어떻습니까? 이들은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입니다. 유대인들 생각에 이방인은 이미 하나님의 구원 계획 속에 없는 자들입니다. 심지어 랍비들은 "지옥의 땔감으로 쓰기 위해 하나님이 이방인을 만들었다"고 할 정도로 무시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이방인에게 하나님은 성탄의 비밀을 기꺼이 알립니다.

게다가 우리가 동방박사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박사는 유식한 '박사'라는 뜻이 아닙니다. '박사'라고 번역된 말은 '마고이'라고 되어 있는데, 요즘으로 말하면 '점쟁이들'이란 뜻입니다. 다시 말해 '동방박사'는 동쪽 나라 출신 용한 외국 점쟁이라는 말이 원문의 의미에 더 가깝습니다.

동쪽에서 온 용한 점쟁이, 게다가 구원의 반열에서 이미 제외된 이방인들, 이들이 동방박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유대 경계선을 넘어 온 세상에 하나님 아들의 소식을 전하셨습니다.

이쯤 되면 이제껏 알고 있던 거룩과 속된 것의 구별이 모호해집니다. 우리는 이제껏 성속의 구분선을 그려 가면서 신앙을 논해 왔지만 최소한 성탄의 메시지는 우리가 그어 대던 구분선을 지워 버립니다. 그것도 하나님 자신이 성탄의 소식을 통해서 그렇게 하십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성탄의 신비란 우리가 생각하고 판단하는 범위를 훨씬 넘어서는 것이며, 우리가 구별하고 차별하는 모든 이들의 삶의 자리까지 미치는 소식이란 뜻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특별한 것, 신비한 것, 우리가 그어 놓은 경계선 안으로 들어오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일상 한가운데로 밀치고 들어오십니다.

성탄의 복음은 이런 것이 아닐까요?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우리가 매사를 구분하듯 중요한 일과 중요하지 않은 일이 따로따로 구별되지 않습니다. 성탄의 소식을 이런 눈으로 보면 우리가 그동안 하찮게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실은 하나님의 거룩하고 기쁜 소식을 발견할 수 있는 장이 됩니다.

여기서 한 가지를 더 깊이 묵상할 것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서 본문을 봅시다. 눅 2:9-10을 보면 천사들이 나타났을 때 목자들이 두려워했고, 이내 천사들은 "두려워 말라"고 일러 줍니다. 그런데 여기 나온 '두렵다'는 뜻은 '존경하다', '떠받들다'는 말입니다. 무슨 말일까요? 목자들은 한밤중 나타난 천사들을 보고 떠받들고 존경합니다. 그런데 천사들은 10절에서 자기들을 존경하거나 떠받들지 말고, "온 백성에게 미칠 기쁜 소식을 보라"고 합니다. 그 소식은 다름 아니라 베들레헴 초라한 곳에서 태어난 아기입니다. 특별한 일이 아닙니다.

천사가 나타난 일은 참 기이하고 신비한 일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기이하고 신비한 일이 눈을 팔고 있는 우리에게 다른 곳을 보라고 가르칩니다. 바로 보잘것없는 마을 베들레헴, 가난한 한 부부, 더럽고 냄새나는 구유 안에 누워 있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늘 위를 쳐다보라는 게 아니라 낮고 낮은 곳을 바라보라고 가르칩니다. 이게 성탄의 메시지입니다.

가끔 보면, 거룩한 일 따로, 평범한 일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을 봅니다. 그래서 교회 일 따로, 사생활 따로, 따로국밥 인생을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한국교회가 예수 신앙의 힘을 잃어버리고 가나안 성도가 급속히 늘어난 이유, 국민 다섯 중 한 명이 기독교인이라는 대한민국 사회가 이리도 아픈 까닭이 여기서 비롯되지 않았을까요? 주일엔 거룩한 성도로, 나머지 6일은 악독한 직장 상사로, 욕심 많은 욕쟁이 아줌마로, 세상과 교회 사이를 오가며 복면을 썼다 벗었다 하며 사는 게 지금 우리 모습인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그렇게 이중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지 않냐?'는 핑계가 먹힐 만한 시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비록 우리가 그렇게 척박한 시대 한가운데 살고 있다고 할지라도, 성탄의 이 아침, 복음서에서 한 구절은 꼭 가슴에 새기고 가시길 바랍니다.

눅 2:18-19 말씀입니다. 이 구절은 천사가 목자들에게 성탄 소식을 전한 다음, 목자들이 그 소식을 베들레헴에 가서 그대로 전할 때 나오는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제가 읽어 보겠습니다. "듣는 자가 다 목자들이 그들에게 말한 것들을 놀랍게 여기되,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새기어 생각하니라."(눅 2:18-19)

이 대목이 참 오묘합니다. 목자들이 한자리에서 같은 내용을 말했는데, 듣고 있던 사람들의 반응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지요.

"듣는 모두(마리아 제외)가 놀랍게 여겼다"와 "마리아는 마음에 새기어 생각했다"는 부분을 유심히 보시기 바랍니다.

여기 사용된 원어와 문법을 고려해서 비교해 보면 그 의미가 확연히 대조됩니다. '놀랍게 여기다'(다우마조)는 말은 이 말을 듣고 '그 자리에서 딱 한 번 이상히 여긴다'는 뜻입니다(과거형). 그리고 그 다음, 마리아에게 사용된 '마음에 새기다'(쉼발로)는 한 번이 아니라 이 일이 있은 후로 '계속해서'(미완료 과거형) '비교를 위해 함께 두다', 그 다음 '생각했다'(쉰테레오)는 '소중하게 계속 간직했다'는 뜻입니다.

간단히 말해, 마리아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모두 목자들의 이야기를 그저 딱 한 번 '신기한 일'로, 또는 '이상한 일'로만 여겼고, 오직 마리아만 이 일을 이후로도 계속해서 '소중하게 간직했다'는 뜻입니다.

조금 더 풀어 말하자면, 마리아가 "목자들의 이야기를 마음에 새기고 생각했다"는 말은 '마음 주머니에 넣고 자기가 흔들릴 만한 일이 있을 때마다 그것을 보물 다루듯 소중하게 만지작거렸다'는 뜻이 됩니다. 믿음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요? '단 한 번' 이상하고 신기하게 여기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을 살다 당혹스런 일이 일어날 때마다 마음 주머니의 보물을 소중하게 만지며 마음을 다잡는 것, 이것이 마리아의 믿음이었고, 복음서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성탄의 믿음입니다.

매년 말이 되면 옥스퍼드 사전은 한 해를 갈무리하면서 한 해의 주제어를 선정합니다. 2016년 올해는 '탈-진리'(post-truth)라는 단어를 표제어로 선정했습니다. 사실관계가 명확해도 사실 자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주장과 변명으로만 일관하고, 아니면 주변 분위기에 휩쓸리는 세태를 반영한 것입니다. 영국의 브렉시트 사태, 미국의 충격적인 대선 결과 같이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사건들이 올해 세계 사회 속에서 일어났고, 이런 충격과 허탈감이 '탈-진리'라는 말로 압축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탈-진리의 세태는 우리 대한민국 한가운데서도 여실히 드러났습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국정 농단 사태, 청문회에서 만나게 되는 뻔뻔함들은 우리 모두를 충격과 허탈감 속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그 결과 정치, 경제, 문화, 종교 할 것 없이 대한민국 구석구석은 무력감과 자괴감 속에 신음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기쁘고 감격적인 노래가 울려 퍼져야 할 성탄 시기에 그리스도인들도 무력감에 시달리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를 자괴감에 빠뜨리고 허망하게 만드는 탈-진리의 시대 속에도 성탄의 소식이 다시 전해집니다.

어쩌면 이런 시대에 그리스도의 성탄 소식을 붙잡고 사는 것이 우매하고 이상한 행동처럼 비춰질 수도 있습니다. 마치 목자의 이야기를 듣고 모두가 이상하게만 여기고 믿지 않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견실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런 시대일수록 성탄의 소식을 보물처럼 만지작거리며 일상을 사는 것이 바른 삶이 아닐까요?

성탄절 이 아침, 복음을 듣기 위해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께 진심으로 권면합니다. 바라기는 성탄의 소식을 마음 주머니에 담고 보물처럼 부여잡고 희망을 노래하는 복된 성도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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