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오전 11시가 되면 노인들은 세움공동체에 온다. 밥도 밥이지만 함께 말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다. 뉴스앤조이 최승현

[뉴스앤조이-최승현 기자] 난곡은 서울의 대표적인 달동네다. 노인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독거노인, 생활 형편이 어려운 이들이 많다. 신대방역에서 내려 관악산 줄기를 따라 언덕배기에 올망졸망 집들이 들어섰다. 서울 끝자락으로 내달릴수록, 창가 밖 노인들은 더 늙은 것 같고 허리는 더 휜 것 같다. 버스 종점을 두 정류장 앞두고 내렸다. 몇몇 노인이 지팡이에 의지해 힘들게 고갯길을 오르고 있었다.

여기서 '지극히 작은 자'들과 부대끼며 사는 목사 부부가 있다. 일주일에 다섯 번 노인들에게 점심을 대접하고, 오후에는 한 사람 한 사람 찾아다니며 민원을 해결해 준다. 벌써 15년째다. 노인들 수발 든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 묵묵히 한곳을 지켰다. '세움공동체'를 운영하는 예성교회 김영해·최정희 목사 부부다.

어린이로 변하는 오전 11시

오전 11시. 노인들 찬송가 소리가 난곡동 한 건물 지하에서 올라온다. 내려가 보니 노인 30여 명이 손뼉 치며 신나게 찬송가를 부르고 있었다. 믿지 않는 사람도 있는데 박수하며 부르는 폼은 영락없는 '권사님'이다.

찬송가가 끝나니 레크리에이션 강사가 다음 순서를 맡았다. "아이구야, 언니 귀 복귀네~" 서로 칭찬도 하고, 박수도 치고, 스트레칭도 한다. "성경은 모두 몇 자로 이루어져 있을까요?" 같은 난센스 퀴즈도 한다. 한 할머니가 자원봉사자에게 답을 들어 "두 자!"라고 외쳤지만 "왜 두 자인데요?"라는 질문에는 대답하지 못했다. 웃음꽃이 피었다.

'둥근해가 떴습니다'도 부르고 팔도 쭉쭉 펴며 천진난만하게 웃는 모습이 80대 노인이라기보다 유치원생 어린이 같다. 웃고 떠드는 사이 1시간이 훌쩍 지나가고 밥때가 됐다. 노인들은 주기도문으로 모임을 끝내고 밥 먹을 준비를 했다.

자원봉사 온 총신대학교 실코레봉사단이 식탁을 설치했다. 노인들은 익숙한 듯 자연스럽게 식사 대형을 이루어 앉았다. 가만히 앉아 있으면 식탁 놓고 수저, 밥, 국, 반찬을 봉사자들이 가져다주었다.

주 1회 식사 대접으로 시작한 세움공동체 사역은 노인들의 보금자리가 되면서 주 2회, 주 3회… 이제는 주 5회 식사를 대접한다. 오지 말라는 날도 오는 노인들이 꼭 있다. 저녁에도 와서 밥 먹고 가는 노인도 있다. 밥도 그렇지만 사람이 그리운 것이다.

안 믿는 사람들도 있지만 자연스럽게 찬송도 부르고 기도도 한다. 그러다 교회에 나오기도 한다. 뉴스앤조이 최승현

김영해 목사는 원래 사업가였다. 한때 이사 직함까지 달고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돌아다녔다. 잘나갔고 유복했다. 헌금도 열심히 하고 교회도 열심히 섬겼지만, IMF라는 재앙이 문설주 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아내 최정희 씨가 먼저 목사가 됐다. 사업 부도 후 나날이 기도만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던 때였다. 2000년 초, 추운 겨울 새벽 누가 문을 두드렸다. 술 취한 사람인가 무서워 못 열고 있는데 "너는 저런 사람들을 위해 일하라"는 음성이 들렸다. 용기를 내어 문을 열자 추위에 떨고 있는 할머니가 있었다. 그 사건이 계기가 됐다.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 지인이 재개발 전 난곡동 사역지를 소개해 줬고, 그때 정착해 지금까지 섬기고 있다. 이후 김영해 씨도 신학을 공부해 목사 안수를 받았다.

밤낮으로 전화가 온다. 아파서 기도해 달라는 요청은 믿는 사람 안 믿는 사람 구분이 없다. 새벽 세 시고 네 시고 전화가 걸려 온다. 김영해 목사도 전화 받는 게 일이다. "믿음이 없는 거 같아 보여도 위기 앞에서는 의지할 곳을 찾으시더라고요. 교회가 그분들 삶과 신앙을 책임져 줘야죠."

최정희 목사도 마찬가지다. 날마다 수십 명 먹을 밥하고 심방 다니는 게 고된 일이기는 하지만 이 일을 멈출 수 없다. 외로움 속에 사는 노인들, 인생의 끝자락에서 언제 생을 마감할지 모르는 그들이 눈에 밟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다리도 아파서 계단 올라가는 것도 안 되고, 힘들었죠. 어느 날 아침은 일어났다가 피곤해서 다시 잠이 든 적도 있어요. 그 짧은 사이 꿈을 하나 꿨는데 '일할 수 없는 밤이 속히 오리라' 찬송가가 나오더라고요. 꿈에서 깨서는 일할 수 없는 밤이 곧 올 텐데 이러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은 그런 마음으로 기쁘게 감당하고, 일상이 되다 보니까 몸도 마음도 힘들지 않아요."

장례도 여러 번 치른다. 상태가 악화된 할머니들을 자식들이 요양원으로 보내기도 한다. 언제 이별할지 모르는 이들 앞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두 목사는 말했다. 매일같이 심방 가는 이유다. 찾아가서 요강도 비우고, 얘기도 듣고, 집수리도 해 준다.

"할머니들 중 치매 있는 분들이 많아요. 어느 분은 화장실 변기에 꼭 고무장갑 같은 걸 함께 넣어서 변기가 막혀요. 그거 뚫는 데 10만 원 넘게 드는데, 이틀 있다가 또 고무장갑 넣어서 막히고… 그럼 돈 주고 다시 뚫어야죠. 어떤 분들은 온 화장실에 대변을 칠해 놔요. 옷에도 묻히고… 그런 거 남들이 보면 별로 안 좋아하잖아요. 제가 제일 먼저 가서 보는 게 낫지."

15년을 해 왔다. 부부는 노인들의 시계가 빠르게 흘러간다는 걸 안다. 그래서 사역을 멈출 수 없다고 말한다. 뉴스앤조이 최승현
'열매는 언젠가 맺힌다' 신자·비신자 구분 없이

지극 정성으로 대하니 할머니들이 믿든지 믿지 않든지 세움공동체를 의지하게 된다. 연락이 두절된 할머니가 4년 만에 다시 나타나기도 하고 "일요일날 누가 일당 준대. 교회 못 가" 하던 할머니도 목사 부부가 눈에 밟혀 교회를 찾아오기도 한다.

김 목사 부부는 말씀과 은혜를 무엇보다 우선시하는, 보수적인 신앙을 가진 이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노인들에게 믿음을 강요하지 않는다. 최 목사는 자신이 일해야 하는 근거를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마 25:40)라는 성경 말씀에서 찾는다. 그러다 보면 결실은 알아서 맺힌다는 것이다.

김해영 목사도 마찬가지다. 노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게 무얼까 묻자, 그는 "말씀이 가장 필요하죠"라고 대답하면서도, 그 길은 천천히 가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교회가,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 구분하지 말고 일단 섬기면 좋겠습니다. 전도를 하려고 한다면 아무래도 눈으로 나타나는 열매를 조급하게 찾을 수밖에 없죠. 묵묵히 하다 보면 5년 지나고 10년 지나 열매가 생겨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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