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시작하는 주된 업무는 전화 민원 처리였다. 간밤에 우리 학생들 때문에 일어난 항의 민원이었다. 이웃 학교 학생과 폭력, 흡연 등 있을 수 있는 모든 사건이 매일 벌어졌다."

[뉴스앤조이-최승현 기자] 온양한올고등학교 박준호 교감은 13년 전을 이렇게 회상한다. 충남 아산에서 여자상업고등학교로 시작해 수십 년 지역에 뿌리박아 왔지만, 지역사회 눈초리는 곱지 않았다.

상전벽해. 2016년 한올고 모습은 그야말로 상전벽해다. 이제는 아산 일대에서 가장 인기 있는 학교가 됐다. 매년 신입생이 넘쳐난다. 학교 폭력은 몰라보게 줄었다. 최근 몇 년간 사건 사고가 없었다.

변화의 중심에 교목실이 있다. 2003년 부임한 한올고등학교 교목 이성재 목사, 그리고 2008년부터 합류한 엄세호 목사를 중심으로 학교가 드라마틱하게 변했다. 두 목사는 "우리가 한 게 아니다"라고 손을 내젓는다.

물론 종교 수업과 채플이 아이들 삶을 바꿔 놓았다고 직접적으로 증명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한올고 내부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그럴 만도 하네"라는 생각이 든다.

▲ 아이들이 자신의 꿈을 찾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창의적 체험 활동' 수업은 MBTI 검사부터 시작해 아이들이 자신을 발견하도록 돕는다. 한 학생이 원하는 꿈에 입찰을 하고 있다. ⓒ뉴스앤조이 최승현

공부는 잠시 뒤로, 자신을 찾아 나선 아이들

변화의 출발은 2003년 이성재 목사가 시작한 '나를 찾아서'라는 수업이었다. 이 수업은 지금은 '창의적 체험 활동'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된다. 학생들의 꿈과 흥미, 진로를 찾는 여정이다. 전교생이 MBTI 검사를 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발견하는 진지한 탐구 시간이다.

책상에 엎드려 침 흘리며 자는 종교 수업이란 한올고에서 상상할 수 없다. 학생들 만족도도 높다. 2013년 수업 만족도 조사에서 학생들 90.9%가 창의적 체험 활동을 '만족한다'(매우 만족+만족)고 응답했다.

학교는 "선생님들은 성적으로 구분하던 학생들을 성격과 흥미로 구분해서 보게 됐고, 학생들은 자신이 무기력한 이유가 성적이 낮아서가 아니라 삶의 목표를 찾지 못해서였음을 깨닫게 됐다"고 평가했다.

'창의적 체험 활동' 수업을 직접 참관해 봤다. 기자가 참여한 날은 '꿈 경매' 시간이 열린 날이었다. 40가지 직업을 놓고 아이들이 경매로 그중 하나를 산다.

각자 받은 돈은 1억 원. 어떤 학생은 에베레스트산에 등정할 수 있는 능력에 베팅했다. 또 다른 학생은 사랑하는 남편과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꿈에 수천만 원을 베팅했는데, 경쟁자가 붙었다. 그렇게 아이들은 저마다 자신이 원하는 꿈을 하나씩 낙찰받았다.

▲ 'We Can Fly' 캠프는 한올고 학생이라면 2학년 2학기까지 매 학기 참여해야 한다. 이 기간 모든 수업을 빼야 하지만 아이들의 반응은 좋다. 내면을 발견하고, 친구들과의 공동체성을 다지는 시간이다. ⓒ뉴스앤조이 최승현

여기서 얻은 성과와 자신감에 기반해 '위 캔 플라이' 캠프가 시작됐다. 2008년 시작한 이 캠프는 한올고 학생이라면 한 학기에 한 번씩 이틀 수업을 모두 빼고 참석해야 하는 필수 코스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격인 'We Can Fly 0'로 시작해 2학년 2학기까지 총 5번을 이수해야 한다.

9월 23일 월요일 아침. 1학년 11반 학생들이 몰려왔다. 첫날 오전은 '비폭력 대화’를 배우는 시간. 이성재 목사는 이날 오전 엄마와 딸의 문제를 다룬 한 TV 프로그램을 아이들에게 보여 줬다.

한집에 사는 엄마와 딸이 서로 대화 대신 메신저로 이야기하는 모습이 영상에 펼쳐졌다. 분노 지수가 98에 달하는 중고등학생 영상을 보며, 자기 감정을 되돌아보게 했다. 다른 사람 감정을 '판단'하는 것과 있는 사실을 그대로 '관찰'하는 것을 구분하는 연습이다.

화가 날 때도 있고 기쁠 때도 있지만, 중요한 건 내 마음이 어떤지 정확히 느끼고 표현하는 것이다. 이성재 목사는 "느낌은 내 마음으로 가는 지름길"이라고 아이들에게 설명한다. 마음의 소리를 듣는 게 낯선 아이들은, 눈을 크게 뜨고 이 목사 말에 집중한다.

캠프 마지막 시간에는 '행복'이 무엇인지 함께 생각해 본다. 17세 소녀들이 쓴 행복론이 사뭇 진지하다. "행복은 지금이다. 매일 일상 속에서 지금을 후회하지 않고 사는 것이 행복인 것 같다", "행복은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다. 그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면 그 사람에게 행복을 주는 것과 같기 때문에" 같은 문구들이 눈에 띄었다.

엄세호 목사는 "일회성에 그치지 않고 네 학기 동안 꾸준히 해야 효과를 본다"고 말했다. 1박 2일짜리 일회성 캠프야 어느 학교에서도 할 수 있지만, 학교와 교목실이 협력해서 작심하고 진행하는 곳은 찾아보기 어렵다.

기독교인 30%라는데…채플이 이렇게 신나다니!

대광고등학교 사건 이후, 기독교 학교라면 채플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종교의자유를 침해하지 않아야 한다는 대원칙과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인재를 양성하겠다는 건학 이념 사이에 갈등이 있다.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채플에 참여하는 모습은 기독교 법인이 세운 중고등학교는 물론 신학교에서도 보기 쉽지 않다. 보통이라면 하품이 난무하고 휴대폰 들고 딴생각하는 학생들이 넘쳐난다. 그런데 한올고 채플은 뭔가 다르다.

한올고 채플은 시끌시끌하기로 유명하다. 20분 정도 이어지는 찬양 시간. 아이들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가며 노래를 부른다. '나로부터 시작되리', '아주 먼 옛날' 후렴구에 들어가면 아이돌 콘서트에서나 볼 법한 코러스가 쩌렁쩌렁 울리고, 작은 율동까지 빼놓지 않고 따라하는 아이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왁자한 10대의 에너지가 강당을 가득 메운다.

한올고 학생 중 비신자 비율이 70%에 달하지만, 아이들은 예배를 불쾌해하거나 짜증내지 않는다는 게 이성재·엄세호 목사 설명이다. 비결은 '신뢰'와 '관계'다. 아는 사람이 말하는 것과 생판 모르는 사람이 설교하는 건 천지 차이다.

엄세호 목사는 "중요한 건 종교가 아이들을 불편하지 않게 하는 데 있다"고 강조했다. 학생들이 종교를 강요당한다는 느낌을 받지 않기에 오히려 자발적으로 참여할 수 있다는 말이다. 지금까지 학교에서 종교의자유가 문제된 적은 없다.

오히려 너무 열정적인 것 아닐까 걱정도 든다. 마치 논산훈련소 교회 군인들처럼, 채플에서의 환호가 일종의 '엑스터시' 같은 게 아닐까 조심스레 물었다. 이 목사는 일견 동의하면서도 아이들의 자발성에 주목해야 한다고 했다.

아이들이 채플을 흥미로워하고, 설교를 귀담아듣는 것 자체에 큰 의미를 둔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교회 다니지 않는 아이들도 걸어 다니면서 찬양을 흥얼거리도 하고, 가끔은 기도해 달라고 찾아오기도 한다.

무보수에 봉사 시간도 인정되지 않지만 찬양단으로, 율동으로, 피아노와 드럼을 맡아 자발적으로 나서는 아이들도 상당수다. 이러니 지역 교회로부터 "우리가 잘 양육해서 학교에 보내야 하는데, 한올고에서 잘 배워서 교회에 온다"며 고마워하는 소리를 자주 들을 수밖에 없다.

▲ '상전벽해'가 된 한올고. 학교 선생님들은 학생들이 스스로를 발견하는 게 인성에 도움이 되고, 학교가 변화하는 계기가 됐다고 믿는다. ⓒ뉴스앤조이 최승현

학교 자랑 팔불출 목사

이 모든 변화가 기독교 교육으로부터 시작했다고 말하면 지나칠 비약일지 모른다. 이성재 목사는 '나를 찾아서'라는 수업도 여러 선생님이 적극적으로 나서 함께해 줬기 때문에 꾸준히 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고등학생의 수업 시간을 빼앗는 무모함. 먼 길을 돌아가는 것 같아 보이지만 그게 가장 빠른 길이라는 걸 이제는 모두가 안다. 학생도 알고 교사도 안다.

한 선생님은 이 목사에게 찾아와 "지금까지 영어 수업 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해석해 줬어요. 그런데 그건 교사 자기 만족이에요. 영어 수업 바꿔야 해요"라고 말했다. 과학 선생님들은 일주일에 두 시간 토론 수업을 한다. "오늘은 드론에 대해 토론해 보자"고 말을 꺼내면 아이들끼리 치열하게 토론이 시작된다. 수학 선생님들은 우열반 제도를 폐지했다.

변할 수 있었던 건 학생들이 스스로 진로와 꿈을 찾고 자기 주도적으로 공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선생님들도 학생들이 스스로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공부를 더 시켜야 한다는 선생님들도 있지만, 학교 전반적인 분위기는 아이들이 말하고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주자는 쪽에 기울어 있다.

서울대를 몇 명 보내고, 아웃풋이 어떻고 하는 얘기보다 학생들과 학교가 조금씩 변하는 것이 '기독교 교육'이 추구하는 모습일 것이다. 이성재 목사는 취재를 마치고 헤어질 때까지 학교 자랑을 멈추지 않았다. "학교 얘기만 나오면 팔불출이 돼요"라는 웃음 섞인 말 속에서, 참된 기독교 교육을 실천하고 있다는 자부심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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