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부독재 시절부터 2016년에 이르기까지 국가 폭력을 온몸으로 겪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안용수 목사도 그중 한 사람입니다. 월남전에 파병된 형 안학수 하사가 귀국 1주일을 앞두고 납북됐지만, 정부는 그가 대남 방송에 출연했다는 이유로 자진 월북자로 규정하고 안 목사 가족을 괴롭혔습니다. 정부를 상대로 끝까지 싸운 끝에 안학수 하사는 42년 만에 납북자로 인정받았지만, 전사자 처리 등 명예 회복과 보상의 길은 멀기만 합니다. <뉴스앤조이>는 안용수 목사 인터뷰와 각종 자료를 토대로 그가 겪어야 했던 국가 폭력을 1인칭 시점으로 재구성했습니다. - 기자 주

[뉴스앤조이-최승현 기자] 형은 평양발 라디오방송에서 "위대한 수령님 품에 안겨 행복하다"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박정희를 욕하고 김일성을 찬양하는 목소리는 분명 형이 맞았으나 마치 원고를 읽는 듯 부자연스러웠다. 살붙이가 북한에 끌려갔다니 미칠 노릇인데, 더 미칠 노릇은 같은 나라 사람이 저질렀다.

보안사령부(보안사·국군기무사령부 전신)는 내가 제일 만만했다. 교장 선생님이던 아버지는 강원도 산골로 쫓겨났고, 큰형은 서울에, 작은형은 군대에 있었다. 동생은 너무 어렸다. 중학생이었던 내가 고분고분 말을 잘 들을 거라 생각한 모양이다. 나는 보안사에 수시로 끌려갔다.

보안사는 정말 악질이다. 보안사 포항 지부는 내가 다니던 포항고등학교와 붙어 있었다. 보안사 최 계장은 "어이 용수!" 하고 수시로 나를 불러냈다. 어떤 때는 집 근처에 잠복하고 있다가 들이닥치기도 했다.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고 일단 나를 데리고 갔다. 먼저 흠씬 두들겨 패고 시작했다.

▲ "주월 한국군 실종자는 전투 중에 발생한 행방불명자가 아니고 모두 자의에 의한 탈영자로서 일부는 북한에서 방송한 사실이 있고 나머지는 범법 도주자임으로 주월사령부는 이들을 포로로 간주하지 않고 있으며 송환 요청을 제기할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견해." 당시 국무회의에서는 형 문제를 이렇게 처리했다. 형은 2009년까지 월북자였다. (사진 제공 안용수)

나중에 알게 됐다. 그들은 '간첩'을 만들어 돈을 버는 사람들이었다. 간첩을 하나 만들면 그들에게 평생 먹고살 돈이 생긴다. 논 수십 마지기, 소 수십 마리 생기니 없던 간첩도 만들어야 했다. 최근 들어, 과거 간첩 조작 사건이 잇달아 무죄로 판결 나는 이유다.

일제강점기 때 고문 기술이 그대로 답습됐다. 나는 일명 '통닭구이'라고 불리는 전기 고문 빼고 다 당했다. 야전 삽자루으로, 야구방망이로 맞았다. 거꾸로 매달거나 고춧가루와 소금 탄 물에 나를 담갔다. 대검을 들이밀며 하도 많이 협박을 해서 지금도 숟가락이나 포크가 나를 향해 있으면 화들짝 놀라곤 한다. 어떨 때는 보안사 신참들의 훈련 교재가 되기도 했다. 대검을 내 목에 대고 나보다 더 벌벌 떨던 그 모습도 기억난다.

무엇보다 무서웠던 건 권총을 관자놀이에 대고 방아쇠를 당기는 것이었다. 그때 너무 벌벌 떤 나머지 지금까지 심장이 좋지 않다.

그렇게 패고 고문하고 나서야 본론에 들어갔다. "정보에 의하면 남파 간첩이 너희 가족과 접촉한다고 하던데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다. 최 계장은 집요했다. 그런 일이 없다고 해도 무조건 "정보에 의하면 그렇다니까!" 쏘아붙였다. 어떤 때는 집에 있는 쌀은 어디서 났느냐, 등록금은 어떻게 마련했느냐 물을 때도 있었다.

친한 친구 이름을 적으라고도 했다. 이름을 적으면 최 계장은 그 친구들을 새로운 먹잇감으로 삼을 게 분명했다. 끝내 이름을 적지 않아 또 맞아야 했다. 친구들은 나를 멀리했다. 공무원 부모를 둔 친구들은 나를 집에 부르지 않았고 어떤 집에서는 재수 없다며 소금을 뿌렸다. 나는 월북자 동생으로 낙인찍힌 채로 평생을 살아야 했다.

공부를 잘해서 서울대 법대에 도전했지만 두 번 떨어졌다. 경희대라도 가야겠다는 마음에 문을 두드렸지만 역시 낙방했다. 그제서야 나는 내 힘으로 대학에 갈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군대에도 갈 수 없는 몸이었다. 국가는 나를 서울교대에 집어넣으려 했다. 당시 교사는 군대에 안 가도 되었다.

열 받는 마음으로 시험 답안지에 '민주주의', '민주주의', '민주주의'라고 썼지만 최우수 합격이라며 나를 입학시켰다. 유신 반대 운동이나 하자는 반항심으로 학교를 다녔다. 미련이 남았다. 어렸을 때부터 영어에 소질이 있어 영문학 교수가 되자는 꿈으로 연세대학교 영문학과에 편입 신청을 했지만 결과는 역시나였다. 연세대에서 데모할까 두려웠던 모양이다.

▲ 50년 동안 인고의 삶을 살았다. 어릴 때 당한 고문으로 정신과 몸이 많이 무너졌다. 도피도 생각했고 그만둘까도 생각했다. 그럼에도 진실을 밝혀야 한다. ⓒ뉴스앤조이 최승현

목사가 될 생각은 없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학수 형을 따라 교회에 다녔다. 형은 베트남에서 "성경을 보내 달라"고 편지를 보낼 정도로 신앙심이 깊었다. 나는 그냥 재미로 다녔다. 신앙심은 없었다.

그러나 중학교 3학년 이후로는 더 이상 교회에 갈 수 없었다. 유교 문화에서 살아온 어머니는 형이 그렇게 된 건 교회 때문이라고 했다. "우리 집에 종교가 두 개라 우환이 생긴 것이다. 교회 가지 마라"고 했다.

그렇게 멀어진 교회를 20대가 되어 다시 찾았다. ESF(기독대학인회) 선교 단체 활동을 했고, 교대를 다니며 학원선교회 활동도 시작했다.

교사 생활은 나와 맞지 않았다. 보안사는 나를 계속 따라다녔다. 신학대는 안 건드리겠지, 하는 마음에 신학대학에 들어갔다. 머릿속에는 한국을 떠나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마침 여권 신원 조회가 폐지됐다. 무작정 영국으로 넘어갔다. 당시 애버딘대학교 학장이던 하워드 마샬 교수가 맞아 준 덕에 거기서 공부할 수 있었다.

친구들은 나를 미쳤다고 했다. 미치더니 목사가 됐다며 한심해했다. 한 친구는 "야, 보이는 세상도 믿고 살기 힘든데 어떻게 안 보이는 걸 믿고 살려 하냐"며 나무랐다.

나는 죽기 살기로 공부했다. 애버딘대학교에서 석의학을 배우면서 성경 속 많은 이야기를 접했다. 예레미야애가에 나오는 구절들이 내 심정 같았다. 욥기 얘기가 남다르지 않았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 23:10)"라는 구절을 보며, 나는 정금이 되지 않아도 좋으니 단련을 멈춰 달라고 기도했다. 숟가락이라도 상관없다고 했다.

▲ 목사는 하나의 탈출구였다. 보안사가 목사는 안 건드릴 거라고 생각했다. 무작정 넘어간 애버딘대학교에서 죽기 살기로 석의학을 공부했다. "This is my point. We need your own point." 교수들은 까다로웠다.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이었고, 견디기 힘들다고 하나님께 기도했지만, 하나님은 끝내 단련을 거두지 않았다. ⓒ뉴스앤조이 최승현

나는 지금 PTSD(외상후스트레스장애)를 앓고 있다. 신경계가 고장 나 한여름에도 속옷을 두 벌 입고, 모자를 쓰고, 양말을 신는다. 귀 하나가 좋지 않고, 불안장애 때문에 낯선 곳에 잘 가지 못한다. 날카로운 물체를 보면 나를 찌를 것만 같다. 의사는 "목사님은 집에서 조용히 책 읽으시고 저술 활동을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라고 충고했다.

나는 그럼에도 싸워야 한다. 국정원은 형을 자발적 월북자로 규정하고 가족을 잠재적 간첩으로 조작한 중앙정보부 기밀문서에 대해 "이미 50여 년이라는 세월이 지나 사실관계를 아는 사람이 전무하다"고 회신했다.

그들은 "월북을 조작할 이유가 없을 뿐 아니라 불법 사찰도 없었다"는 말도 덧붙였다. 형은 월북자가 아니라 납북자가 됐지만, 아직도 참전 유공에 대해서 정부는 사실을 은폐하고, 축소하고, 이제 그만하라고 회유한다.

국가에 당한 고문으로 평생 먹은 약이 어마어마하지만 이에 대한 보상도 받은 바 없다. 나는 국정원을 상대로, 통일부를 상대로, 국방부를 상대로 싸워 왔다. 정부 변호사는 판사와 교감이 되는 듯했다. 법원에 갈 때마다 신발을 벗어 판사에게 던지고 싶었다. 기력이 다해 쓰러질 때도 있었다. 각종 소송으로 빚도 1억 원이 넘었다.

우리의 부끄러운 역사도 제대로 정립하지 못하면서 역사를 바로 배워야 한다고 말할 때마다 화가 치민다. 국민을 전쟁에서 희생시키고 더 큰 고통을 주는 것이야말로 전쟁범죄고, 그 일을 자행한 공권력이야말로 전범자다.

그러나 우리는 우병우 민정수석의 경우처럼 여타 뉴스에서 보듯 공권력이 일단 문제를 은폐해 놓고 시작한다는 것을 안다. 97%의 국민이 3%를 위해 살고 있다는 것도 잘 안다.

▲ 형의 억울한 죽음, 가족의 억울한 고통이 풀리는가 싶었다. 언론은 일제히 이 문제를 다뤄 줬다. 그러나 2009년 이후 시작된 두 번째 싸움은 더 길고 지루하다. 미군이 남긴 형의 기록, 기밀 해제된 외교부 문서 등 새로운 증거가 속속 발견돼 문제가 한 발짝씩 진보하나 싶지만, 정부와 벌이는 소송만큼 힘들고 어려운 게 없다. 형의 전사 처리, 그에 따른 보상은 아직도 소송 중이다. 내가 겪은 고문 또한 마찬가지다. 명예 회복을 원하지만 정부는 등을 돌렸다.

그리스도인에게 당부한다. 예수 믿고 천당 가는 개인 구원만이 구원이 아니다. 사회가 같이 구원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샬롬이라는 건 전 우주적인 구원이다. 하나님은 사회의 악을 제거하고 고통을 제거하라고 하셨는데, 믿는다는 사람들이 똑같은 짓을 하면서 동화되어서는 안 된다.

교회에 십일조 내면, 자기 할 일 끝났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역동성을 드러내지 못하고 하나님을 제한하고 있다. 죽어서 가는 나라만 천국이 아니라 주기도문에도 나오듯 이 땅에서도 하나님나라를 이뤄야 한다. 부디 "예수님 재림할 때까지 글렀다"는 말을 하지 말아 달라. 우리가 준비하지 않으니 예수님이 안 오시는 것이다.

나는 40년 동안 혼자 싸워 왔다. 세월호 참사, 백남기 농민 살인 진압 문제에서 보듯 목소리가 작으면 공권력은 듣지 않는다. 국민, 그리스도인 다수가 뭉쳐 함께해야 한다.

부디, 고난받는 사람을 기억하고, 그 고난에 동참해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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