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에서 가르치는 한 초빙교수(기독교교육학 전공)가 기고한 글입니다. - 편집자 주

한국교회에 또다시 목회자 성폭력 문제가 상처를 주고 있다. 잊을 만하면 되풀이되는 '성'과 '하나님의 권위'의 잘못된 만남이 가져오는, 공동체를 와해하는 이러한 일이 왜 계속 반복되는 것일까.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이를 개인 문제로 치부할 수 없다. 이번 이동현 목사 사태로 떠오르고 있는 '행위 금지적인 성교육'은 꼭 필요한 일이겠지만, 이것이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 방안은 아니다. 계속해서 반복되는 목회자에 의한 성폭력, 성추행 등은 교회 자체의 가부장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분위기에 뿌리내리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의 근원은 개인의 잘못된 성 이해나 한순간의 판단 오류가 아니며, 그 해답 역시 개인의 '회개'나 '개인에 대한 교계의 치리'가 아니다. 우리는 이제 교회가 목회자를, 그리고 신자들을, 그중에서도 특히 여성들을 어떻게 교육하고 있는지,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교육해야 할 지를 물어야 한다.

교육이 아닌 주체의 문제

흔히들 '교육'이라고 하면 명시적인 교육과정을 주로 떠올린다. 그래서 지금 교회의 교육이라는 것이 충분히 건강하며, 본 사태와는 별로 관련이 없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 교육이라는 것은 '가르쳐지기'보다는 '살아 나가는' 이야기 속에서 전해지는 것이다.

교육과정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 '커리큘럼'(curriculum)은 라틴어의 '쿠레레'(currere)에서 온 말로서 '달린다'는 동사형의 의미를 지닌다. 다시 말해 교육이라는 것은 교실 안에서 정해진 내용을 습득하는 것으로 완료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달려가는, 즉 살아가는 중에 계속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명시적으로 가르쳐지는 내용보다는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에 훨씬 크게 영향을 받는다.

아이를 키워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여기에 동의할 것이다. 아무리 책 읽어라, 공부 좀 해라 잔소리해도, 혹은 왜 공부가 필요한지에 대해 논리적으로 구구절절이 설명해도 아이는 부모가 켠 TV 앞에서 떠날 줄을 모른다는 것을. 아이는 자신이 지내고 있는 공동체의 생활 방식을 그대로 배운다. 말을 험하게 하는 부모 밑에서 말을 곱게 하는 아이가 자라나기는 힘들다.

마찬가지로, 여성들은 교회에서, 예배나 주일학교, 청년부 및 부서 활동 중에 이와 같은 일들을 겪는다. 많이 논의된 대로 대다수 교회에서 여성은 아직도 '제2의 성'이다. 이는 명시적인 교육에서도, 잠재적인 교육에서도 지속적으로 확대재생산된다. 고대 남성 중심적인 문화는 예배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전해진다.

교회의 많은 일을 결정하는 기구는 주로 남성이 운영한다. 엄마가, 할머니가 앞치마 두르고 '식사 봉사'하러 식당으로 들어가는 그 시간에 양복을 입은 중년 남성들은 회의를 하러 모인다. 모든 '권위'는 남성이 대표하며, 그것은 또한 '신적 질서'로 이해된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여성이 스스로를 신앙의 주체로 생각하기는 쉽지 않다. 교회 내 성폭력 사건 피해자 여성들은 일반 사회에서 일어나는 성폭력 사건보다 하나의 멍에를 더 둘러야 하는 것이다.

가부장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기독교의 분위기는 또한 '몸'과 '성'을 은밀하거나 혹은 수치스러운 영역으로 치부하며 공적 담론에서 배제한다. 특히 '여성의 몸'은 '남성을 유혹하고 실족하게 하는' 대표적인 '죄'의 상징으로 회자된다. 이것은 메타포로서만이 아니라 실제적으로도 그러하다.

여성 사역자들과, 특히 청년기 여성들 의상은 엄격한 '침묵의 검열'을 거친다. 약간만 여성성을 드러내도 '주의'를 받는 경우가 빈번하다. 여성은 스스로의 몸과 성을 자랑스러운 것이 아니라 감추어야 할 것, 드러내지 말아야 할 것으로 학습받는다. 이렇게 성장한 여성들이, 그리고 살아가는 여성들이 그가 비록 나이가 얼마이건, 결혼을 했던 하지 않았건, '하나님의 권위'로 다가오는 교역자들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는 얼마나 힘들 것인가.

지금 논의되고 있는 '목회자 성폭력 사태'의 근본적인 해결 방안은 여성이 스스로의 '몸'과 '성'의 주체로 서는 것이지, '남성들을 교육해 여성을 존중하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다. 이는 또다시 여성을 대상화하는 일일 뿐이다.

교회, 제도와 고정관념에 대해 비판적으로 성찰해야

여성이 스스로를 완전히 인정하고 납득하며 존중할 만한 존재로 보는 게 중요하다. 이것이 여성의 성적 대상화와 상품화가 만연한 현시대에 대해 교회가 선포해야 할 하나님 뜻이다. 인간을, 특히 여성을 중점적으로 상품화하며, 정형화된 여성의 아름다움을 중심으로 수많은 소비를 부추기고, 왜곡된 몸 이미지와 성을 판매하는 신자유주의 사회에 교회는 성, 인종, 문화, 계급에 관계없는 하나님의 평등을 이야기해야 한다. 그것이 초대교회 세례 고백문 아니던가?

'유대인도, 헬라인도, 노예도, 자유인도, 남성도, 여성도 모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인' 하나님나라가 곧 교회라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우리는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명시적이고도 잠재적인 교육이 과연 이에 합치하는 것인지를 새롭게 반성해야 한다. 명시적으로 이루어지는 교육, 여성이 눈으로 보고 듣는 교회의 분위기에서 일어나는 잠재적인 학습, 그리고 '몸'과 '성'-특히 여성의 성-에 대해 침묵하는 영 커리큘럼(null curriculum)까지 비판적인 성찰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더 이상 '몸'과 '성'은 쉬쉬해야 할 영역이 아니다. 오랜 세월 이를 감추고 덮어 온 결과, 교회는 건강한 몸과 성에 대한 하나님의 시각을 세상에 선포하는 예언자적 기능을 잃어버렸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건강한 성과 건강한 신체 상에 대해 다시 드러내고 논의해야 하는 시점에 와 있다.

특히 이는 우선적으로 여성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어느 사회에서건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여전히 남성은 성의 주체로, 여성은 대상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대다수이기 때문에 여성이 스스로를 몸과 성의 주체로 인식하도록 돕는 교육이 시급하다. 전통적인 여성의 덕목으로 강조되어 오던 순종, 인내, 희생 등은 그 자체로는 아름다우나 왜곡된 권위와 힘이 작용하는 상황에서 여성들을 공격하고 희생양이 되도록 만드는 경우가 잦았다.

따라서 여성들은 스스로가 하나님의 귀중한 창조물이며 그 어떤 인간의 권위나 가르침도 하나님의 권위에 우선하지 않는다는 것을 깊이 새길 수 있어야 한다. 남성 중심적인 교회나 사회의 가르침을 내면화하기보다는 여성을 창조하시고, 기르시며,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권위를 내면화하고, 풍성하고 사랑스러운 존재로 스스로를 인식할 수 있도록 돕는 교육이 필요하다.

이와 더불어 여성들은 성이 억압이나 혐오의 대상이 아니며 바람직한 성적 관계란 상호 보살핌과 존중, 그리고 책임감을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배워야 한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파괴하고 인격적인 관계를 손상하는 모든 성적 행위는 폭력이고 죄악이라는 이해를 형성해야 하는 것이다. 자신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법을 배운 여성은 이제 올바른 성관계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배워야 한다.

아가서에서 묘사하는 남녀의 사랑은 누군가에 의해 누군가가 일방적으로 착취당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찾아나서고, '서로'를 기뻐한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같이' 있는 것을 기뻐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이란 동등하고 인격적인 관계 안에서 신성한 합일을 이루는 것이지, '하나님을 대표하는 누군가'에게 '바쳐지는' 것이 아니다. 교회는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이 점을 분명하게 선포해야 한다.

그럼에도 가장 중요한 것은 위에 서술한 명시적인 교육과정이 아니라, 보다 힘을 가지는 잠재적 교육과정이다. 교회는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질서로 돌아가 남성과 여성이 동등하게 존엄한 존재임을 선포하고, 여성이 몸과 성의 주체로 설 수 있는 교육을 실시함과 동시에 목회자 성폭력이라는 사태를 끊임없이 불러일으키고 있는 교회 정신에 대해 회개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딸들이 스스로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눌려 있는 현실이 한 개인이 만든 일이 아니라 우리 전체가 공모한 일임을 깨닫고 대내외적인 자성의 자리를 펼쳐야 한다. 모든 교회 구성원들은 공동체 안에서 억압당해 온 여성들에 대해 사죄해야 한다. 물론 이것은 결코 여성에 대한 남성의 사죄나 반성에 국한되지 않는다. 가부장제를 내면화해 온 여성들에 의한, 같은 여성에 대한 억압 역시 철저한 반성과 자성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인간이 만든 제도나 고정관념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강요해 온 결과, 어리고 약한 싹들이 얼마나 고통받고 있는지에 대한 공동체 전체의 눈물과 반성이 가장 강력한 교육이라 할 수 있다. 여성들에게 주체성을 가지라고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교실을 나가는 순간 여전히 남성 중심적인 교회 환경이 반복되고 있다면 그 가르침은 힘을 가질 수 없다. 아이에게 책을 읽히고 싶으면 부모가 먼저 TV를 끄고 책을 잡아야 한다. 목회자 성폭력 사건을 더 이상 접하고 싶지 않다면, 교회는 이제 더는 물러날 곳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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