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을 못 본 척하고 기도만 하는 것이 신앙인가
지난 1월 19일, 분당우리교회 예배에서 설교자인 이찬수 목사가 "사분오열, 이런저런 상처들이 양산되는 시대인데, 네가 옳은지 내가 옳은지는 하나님만 아신다. 판단은 좀 유보하고 같이 기도하자"라는 견해를 전했다. 혼란스러운 국가 상황을 염두에 둔 말이었을 것이다.
과거 이 목사의 발언들을 염두에 둘 때, 이 말에는 아마도 신앙인은 정치적 입장에 서서는 안 되며, 다른 무엇보다 기도를 우선해야 한다는 강조가 담겼으리라 본다. 하지만 대다수 그리스도인은 일상인으로서 매일 정치적 입장을 취한다. 광장에 나가 있지 않고, 특정 정당을 지지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쓰레기가 덜 생기는 방식으로 쇼핑하거나, 길고양이에게 밥을 챙겨 주거나, 어린이 교육에 신경 쓰는 마음과 선택은 여러모로 정치적이다. 또한 우리는 이 지구와 사회가 더 나아지는 방향으로 행정과 법이 집행되기를 원한다. 성령이 지금 어디에서 일할지 상상하는 것과 그곳에 나도 참여하길 바라는 것은 기도라고 할 수 있는 한편, 옳고 그름의 판단이자 정치적 움직임이기도 한다.
하물며 위정자들과 무력을 갖춘 군경이 내란을 벌였고, 하마터면 국가 폭력으로 이어질 뻔한 위험을 겪었다. 이 정도 되면, 이제는 제발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같이 흐르게" 하라는 하나님의 경고로 듣는 게 마땅하다.
더구나 이 목사는 시편 23편 6절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를 본문으로, 하나님의 헤세드, 즉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강조하는 설교에서 자신의 견해를 전했다. 권력의 부조리가 목격되고 극우 세력에 의한 폭동까지 자행되는 마당에, 마치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을 유보할 줄 알아야 하나님의 헤세드를 구하는 것인 듯 발언했다.
그에 따르면, 현실을 못 본 척하고 기도만 하는 것이 신앙의 올바른 자세이다. 하지만 성서 어디에도 하나님의 헤세드를 현실 회피와 연결 짓는 구절은 없으며, 현실을 직시하지 않는 기도가 어떻게 기도일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오히려 성서는 우리에게 현실에 더 깊이 들어가라고 재촉한다. 그 대표 인물이 신체를 입고 이 세계에 온 예수다. 게다가 기도는 그리 만만하거나 쉽지 않다. 오죽하면 예수조차 그가 처한 현실에 땀방울이 핏방울이 될 때까지 기도했을 것이며, 우리에게는 기도의 내용까지 구체적으로 남겨 주었겠는가.
나아가 이 목사 스스로 정말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못했던 것인지도 의심스럽다. 아마도 아닐 것이다. 예상컨대, 대형 교회 특성상 회중에 보수 세력이 적지 않았다거나 그에게 영양분을 공급하는 극우 기독교를 염두에 둔, 나름 우회적인 발언이었으리라 본다. 그렇다면, 판단을 유보하자는 이 목사는 사실상 가장 또렷하고 극단적인 판단을 수행한 것과 다름없다.
그는 2022년 포괄적 차별금지법의 제정을 반대하기 위해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1인 시위를 섰는가 하면, 작년에는 손현보 목사 등 극우 기독교 세력을 주축으로 구성된 '10·27 집회'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분당우리교회 교인들에게 참석을 독려하기도 했다. 해당 집회 역시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왜곡하는 이들, 혐오와 권력을 지향하는 이들이 벌인 시위였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러니 이 목사의 발언은 내란 우두머리와 그 세력을 탄핵하고 처벌해야 한다는 판단, 민주주의의 회복을 다시 꾀하고 정의와 평화의 세상을 이루어야 한다는 판단을 저지하려는 의도에 가깝다. 여기에 덧붙여, 그는 설교 내내 하나님의 헤세드는 자격 없는 자에게 조건 없이 주어진다고 강조했다. 이와 함께,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한 후 그 모습 그대로 보기 좋다고 선언했다거나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다는 성서의 구절도 전했다.
그가 인용한 구절 앞뒤 어디에도 성소수자 예외라는 말은 없다. 성서의 이야기와는 다른 정치적 행보를 보이면서, 하나님의 헤세드와 기도 뒤에 숨어 자신의 판단과 의도를 감추려 했으니, 그의 발언은 의아할 뿐 아니라 괘씸하기까지 하다.
마지막으로, 설교의 본문인 시편 23편 6절은 해당 시편의 결론이다. 이에 앞서 4절에는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라는 말이 나온다. 시편 기자에 따르면,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믿기에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것 같은 절망 중에도 희망의 싹을 발견하며, 어둠 중에도 작은 빛을 지켜 나갈 수 있다.
시편 기자의 마음 한 편에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이들을 격려하고 용기를 북돋으려는 마음도 담겨 있으리라 여긴다. 성서의 이야기는 각 구절이 놓인 맥락 속에서 그 자체로 드러날 때 가장 강한 힘을 발산한다. 신앙인들이 성서의 이야기를 말씀이라 부르는 이유이다.
여기에 구태여 이런저런 견해를 보탤 필요도 없다. 1월 21일 워싱턴 D.C. 국립대성당에서 열린 '국가 기도회'에서, 워싱턴교구 매리언 에드가 버드(Mariann Edgar Budde) 주교가 트럼프 대통령에게 "성소수자·이민자·난민에게 자비를 베풀라"고 권하였다. 짧고 단순한 그녀의 부탁을 읽는 동안 성서 속 여러 장면이 연달아 떠올랐다. 아마도 많은 이가 그랬을 것이다. 마므레 상수리 나무 근처에서 이방인들을 환대했던 아브라함, 동족의 도움으로 살아남은 나오미와 룻, 사마리아 여인에게 자비를 베푼 예수의 이야기 등.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헤세드와 같은 자비를 베풀라는 당부는 누구나 공감할 만한 쉬운 이야기이지만, 아무나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것은 옳고 그름을 끊임없이 고민하고 판단하며, 하나님의 헤세드를 차별 없이 모든 존재가 누리길 진심으로 기도하는 이들만 할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이민희 / 목사, 옥바라지선교센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