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가해자 말만 믿고 낭설 퍼뜨리지 말고, 재발 방지 대책 마련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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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대학생 시절 한국대학생선교회(CCC)에서 순장으로 활동하다가, 당시 전임 간사에게 성폭력 피해를 입은 김아영 씨(가명)가 쓴 것이다. 가해자는 CCC에서 제명됐고, 1심에 이어 항소심에서도 징역 2년형을 받았다. 결과적으로만 보면 잘 해결된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피해자에 대한 유언비어가 떠도는 2차 가해가 계속됐으며, 피해자가 CCC에 요구한 공론화와 재발 방지 대책 마련 등은 이뤄지지 않았다. 항소심 판결 후 김 씨는 자신이 받은 2차 피해와 CCC의 대처에 대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며 글을 보내왔다. - 편집자 주 |
2심 판결문을 읽으면서 눈물이 났습니다. 그동안 너무 억울하고 힘들었던 마음을 드디어 이해받은 것 같았습니다. 그럼에도 현재까지 가해자 편에서 가해자를 옹호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CCC에 본 사건에 대해 제보할 당시 제가 당했던 2차 피해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가해자와 가장 가까운 사이로 지냈던 한 간사는, 사건에 대해 가해자의 말만 들은 상태에서 제 이야기는 들어 보지도 않고 CCC의 다른 제 친구에게 이 사건을 전달했습니다. 저는 그 친구가 이 사건에 대해 알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그 이유는 친구가 CCC에 헌신하면서 쌓았던 좋은 기억들을 그대로 간직하길 바랐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간사는 사건에 대해 제 이야기는 듣지도 않은 상태에서 제 동의 없이 제 친구에게 이 사건을 이야기했을 뿐 아니라, 그 과정에서 "아영이가 예전에도 남자와 성관계를 했던 것을 알고 있느냐"고 하며 제 지난 사생활까지도 제 동의 없이 이야기하고 저를 깎아내리려 했습니다.
제가 이 일에 대해 따지고자 그 간사에게 전화했을 때, 그는 저에게 "그동안 생일에도 연락 한 번 없던 애가 왜 전화를 했느냐. 관계란 쌓여 가는 것인지 모르느냐"고 이야기하며 사건의 사실관계보다 가해자 간사와의 친분을 중요시하는 말을 하였습니다.
또한 "너가 예전에 남자랑 관계가 없던 애면 내가 니 말을 믿겠다. 그런데 너는 예전에도 남자랑 관계가 있었던 애다. 니가 어떤 애인지 내가 예전부터 알기 때문에 나는 니 말을 믿을 수 없다"고 하며, 본 사건과 관련 없는 제 상처를 들추어 내는 말을 하였습니다.
저는 저와 같은 피해자가 또 생기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사건을 제보한 것인데, 오히려 저를 모욕하는 말을 들어야 했고 저는 이 2차 피해 이후 두 번이나 자살을 시도할 정도로 심각한 정신적 피해를 입었습니다.
제가 우려하는 것은 그 간사 역시 목사 안수를 받은 목회자라는 점입니다.
성폭력 사건에 있어 사실관계를 정확히 파악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가해자 말만 믿고 피해자에 대한 선입견으로 피해자를 모욕하며 가해자를 옹호하는 것은 분명한 2차 가해이고 잘못된 행동입니다.
이것이 잘못된 일인 줄 모른다면 그 간사는 앞으로 본인이 활동하는 사역지에서 비슷한 일이 발생했을 때 똑같은 대응 방식으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줄 것이 분명합니다.
이러한 2차 가해는 기독교 공동체 내에서 정말 흔히 발생하는 일이고, 피해자가 피해 사실을 알리지 못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저는 그 간사뿐 아니라 많은 사역자가 성 인지 감수성을 갖추고, 이러한 행동은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라는 것을 분명히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가해자 편에서 가해자를 옹호하는 사람이 많은데, 그 마음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닙니다. 왜냐하면 저 역시 가해자를 전적으로 믿고 따랐던 사람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얼마나 가해자를 믿고 따랐는지는 그 당시 같이 활동했던 주변 사람들도 다 알고 있을 것입니다.
가해자는 평소 온화하고 따뜻한 성격입니다. 저도 가해자가 저에게 범죄를 저지르기 전까지는, 그 사람이 저에게 나쁜 짓을 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해자 주변인들이 가해자의 평소 성품을 보고 '그 사람이 그럴 리가 없어'라고 생각하리라는 것을 잘 압니다.
한때는 화가 나기도 했습니다. 왜 이렇게 나를 믿어 주지 않느냐고, 왜 나를 비난하느냐고 분통을 터뜨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직접 겪지 않고는 믿기 어렵다는 걸 이해합니다.
그래도 저는 과연 그들이 이 사건에 대해 얼마나 정확히 알고 있는지, 모든 정보를 다 듣고도 가해자를 옹호하는 것인지 묻고 싶습니다. 가해자 측에서 주장하는 것만이 아니라, 피해자 측에서 내놓은 증거자료들까지 모두 다 보고 나서도 그의 편에 서기로 결심한 것인지 말입니다. 누구의 편에 설지 결정하는 것은 그들 자유겠지만, 모든 정보를 가장 객관적인 입장에서 보고 판단한 법원에서 가해자에게 유죄판결을 내렸기 때문에, 최소한 CCC 내부에서 더 이상 저에 대해 잘못된 말들을 퍼뜨리지는 않기를 바랍니다.
저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저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성범죄는 원래 이렇게 벌어지는 것이라고. 상상도 못 한 사람이, 상상도 못 한 장소에서, 상상도 못 한 방법으로 저지르는 것이라고. 상상을 못 할 일이기 때문에 피해자 또한 의심 없이 믿었다가 당하게 되는 것이라고. 믿고 싶지 않겠지만 이것이 진실이라고, 이 모든 일이 차라리 거짓이길 누구보다 간절히 바라는 사람은 오히려 나라고 말입니다.
CCC의 재발 방지 대책과 관련에서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CCC에서 저 말고도 다른 성범죄 사건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CCC에서는 이러한 사건을 공론화하지 않고 쉬쉬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재발 방지 대책을 확실히 세우지 않는다면, 또 같은 피해자가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저는 기독교반성폭력센터를 통해 CCC에 재발 방지 대책 마련에 대한 요구 사항을 전달했습니다. CCC가 이를 이행하기를 바랍니다.
1. 'CCC 편지', 'CCC 그램' 등 공식적인 소식지 및 SNS에, 이 사건은 가해자 간사에게 책임이 있음을 명시하여 사과문을 게시할 것.
2. CCC에서 재발 방지 대책으로 만든 성 고충 상담(카카오톡 채널로 개설한 것으로 알고 있음)을 홈페이지 상단 메뉴에 노출해 접근이 용이하도록 할 것.
3. CCC 전체 학생들을 대상으로 분기별 또는 학기별 익명 설문 조사 등을 실시하여 비슷한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지 정기적으로 점검할 것.
제가 입은 피해는 절대 없던 일로 되돌릴 수 없겠지만, 지금부터라도 제대로 대책을 마련한다면 앞으로 일어날지 모르는 또 다른 피해를 막을 수는 있을 것입니 다. 저와 같은 상처를 입는 사람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기를 저는 진심으로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