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와 정당에서 반복되는 성폭력 은폐

"우리는 정의로운가?"

정의롭다고 믿는 집단, 혹은 정의를 추구한다고 기대받는 조직일수록, 그 내부에서 정의에 반하는 사건이 발생했을 때의 충격은 크다. 그러나 이 충격도 반복되다 보면, 점차 무뎌진다. 이제는 놀라움보다 익숙한 불쾌감이 먼저 떠오른다.

최근 조국혁신당 내에서 발생한 성폭력 사건과 이후의 대응 과정을 지켜보며 들었던 감정도 그러했다. 이는 교회 성폭력 사건이 공론화될 때마다 우리가 마주해 온 모습들과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사건 발생이 드러낸 이중성

조국혁신당은 '검찰 개혁'을 기치로 내세우며, 보다 정의롭고 평등한 민주주의를 실현하겠다는 의지를 밝히며 출범했다. 그러나 조직 내부에서 성폭력 사건이 발생하자, 그들이 내세운 공적 가치들은 현실의 위기 앞에서 아무런 실천력도 발휘하지 못했다.

지난 9월 4일, 강미정 대변인은 탈당 기자회견을 통해 당내 성 비위 사건과 그 대응 과정의 문제점을 폭로했다. 사건 접수 이후 5개월 가까운 시간 동안, 피해자들은 보호는커녕 더 많은 고통에 노출되었고, 사건을 접수한 실무자마저 물리적 폭력을 당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윤리위와 인사위는 가해자와 가까운 이들로 구성되었으며, 문제 해결을 촉구한 조력자들은 조직 내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

결국 피해자들은 '사소한 문제'로 '당을 흔드는 사람', '배은망덕한 자'로 낙인찍혔고, 조직은 스스로 말했던 '정의'와 '개혁'이라는 이름 아래 피해자들을 침묵하게 했다.

교회 성폭력 사건과의 평행선

이러한 구조는 교회 성폭력 사건에서도 반복된다. 교회 성폭력 피해자 가운데 하나님과 교회를 사랑하지 않았던 이는 거의 없다. 말씀에 감동하고, 신앙의 가치에 이끌렸기에 공동체에 깊이 헌신했고, 바로 그 맥락 안에서 피해를 입었다. 피해를 입고도 교회를 염려하며 조심스레 말문을 연 이들은, 진실이 드러나면 교회가 정의롭고 공정하게 대응해 줄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기대는 배신으로 돌아왔다. 강단 위에 선 가해자는 "용서와 화해"를 먼저 말하고, 피해자는 "거짓말하는 자", "교회를 공격하는 자"로 몰렸다. 교회 재판 절차는 실효성 없이 흐지부지되었고, 가해자의 가족이나 지인이 재판위원이 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공소시효가 지났다", "임기가 곧 끝난다", "교회는 할 수 있는게 없다", "사법 절차를 권한다"는 말로 접수조차 회피하기도 한다. 피해자를 제외한 채 자기들끼리 용서와 화해를 나누고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치유를 말한다.

기독교는 언제나 고아와 과부, 나그네와 같은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라고 가르쳐 왔다. 하지만 성폭력 피해자 앞에서 교회는 이들을 약자가 아닌 시험거리로, 심지어 '신천지'와 같은 교회를 위협하는 세력으로 간주하며 내몬다.

"정말 사람이 없어서 가해자의 지인이 재판위원이 되는 것인가?"

"교회 성폭력 문제를 다룰 전문가, 절차, 제도는 왜 매번 없는 것인가? 정작 없는 것은 해결하려는 의지가 아닐까?"

피해자는 떠난 것이 아니라
밀려난 것이다

강미정 대변인은 결국 조국혁신당을 떠났다. 마찬가지로, 수많은 교회 성폭력 피해자들도 공동체를 떠난다. 그러나 그들은 자발적으로 떠난 것이 아니다. 공동체가 그들을 밖으로 밀어낸 것이다. 성폭력 피해자가 목소리를 낼 때, 공동체는 과감하게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버리고 99마리의 양을 택한 것이다. 말은 정의와 사랑을 외치지만, 행동은 조직의 명예를 우선시하고, 가해자의 안위를 지킨다.

성폭력은 단지 개인의 일탈이 아니다. 그 조직의 권력 구조와 문화가 만들어 낸 폭력이다. 그 권력 구조와 문화는 이후 해결 과정에까지 내내 영향을 끼치며 피해자를 압박하고 몰아세운다. 공적 가치를 외치는 조직일수록, 스스로를 장담하기보다 더 엄격하게 점검해야 한다. 조국혁신당이든, 교회든, '정의'와 '개혁'을, '사랑'과 '공의'를 입에 올리는 순간부터, 그 말에 걸맞은 책임을 질 각오가 있어야 한다.

정의는 선언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그들이 외쳐 온 공적 가치가 진실한지는, 가장 연약한 자에게 그것이 어떻게 적용되었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성폭력 피해자 앞에서 그 정의가 작동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외침은 말뿐인 이상에 불과하다. 공적 가치는 대의를 위한 명분이 아니라, 실제로 누군가의 고통을 덜어 주는 방식으로 실현될 때에만 의미를 가진다. 정의롭고 싶다면, 그 정의는 조직을 위한 것이 아니라, 조직 안에서 상처 입은 이들을 향해 더 세밀하게, 더 깊이 있게 적용되어야 한다.

교회라면 더욱 그래야 한다. 교회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랑과 회복을 말한다면, 그 말은 먼저 교회 안에서 가장 고통받은 이들에게, 가장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방식으로 다가가야 한다. 그것이 없으면, 아무리 복음을 말해도 그것은 복음이 아니다.

말씀이 강단에서만 울리고 삶에서는 침묵한다면, 그 교회는 진리를 전하는 곳이 아니라 진실을 외면하는 공간일 뿐이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말해 온 모든 정의와 개혁, 사랑과 공의는 결국 피해자에게는 아무 의미 없는 언어로 남게 될 것이다. 이제 우리가 다시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의 정의는, 누구를 지키고 있는가?"

박신원 / 기독교반성폭력센터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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