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독의 시간] 구권효·나수진 <여성 안수 투쟁사 비하인드 스토리>(뉴스앤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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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소영 교수(강남대학교 기독교학과)가 <여성 안수 투쟁사 비하인드 스토리>(뉴스앤조이)에 쓴 '들어가는 글 - 목사가 되기 싫었으나 못 되는 건 더 싫었던 한 여성 신학자가 여성 안수 투쟁사를 읽고'를 옮겨 편집한 글입니다. - 편집자 주 |
아버지가 목사님이었던 나는 자꾸 '사모감'이라고 말하는 교회 어른들의 '칭찬'이 싫었다. "차라리 목사를 할래요." 사회학적 분석을 할 수 있었겠나 아니면 신학적 입장을 가졌겠나. 그저 어린 눈에도 사모의 역할이 마음에 안 들었었나 보다. 어린 눈에 늘 '멋진'(내 눈에는 가운이 그렇게 보였다) 옷을 입고 강단에서 힘 있는 메시지를 전하는 '목사'인 아버지와 비교할 때, 애들을 업고 끌고 교인들의 속사정 이야기를 들으며 언제나 식구 수 이상의 밥을 짓던 어머니를 보며 나도 모르게 스며든 생각이었을 거다. 하여 '사모감' 운운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입버릇처럼 되받아쳤던 것인데, 그 모습에 어른들은 껄껄 웃으며 또 한 번 내 미래의 삶을 제한했다. "이 녀석, 장군감인데 아깝구먼. 하나를 달고 나왔어야 했는데."
문득 궁금했다. '나는 무엇을 달고 나왔어야 했나?' 후에 아리스토텔레스의 <동물의 역사>를 읽으며 답을 얻었다. 물론 그 시절엔 정자, 난자의 개념도 모르고 과학적 근거를 제시할 수 없었겠지만, 남자의 권위에 더하여 학자의 권위까지 가졌던 아리스토텔레스는 단언했다. 모든 개체 생명은 정상적으로 발달단계를 다 거친다면 수컷이 된다고. 그 과정 중에 마지막 발달단계를 성취하지 못한 개체가 암컷이 되는 거라고. 유교 가부장제에 갇혀 있던 우리 문화도 다르지 않았다. 여자를 '반푼이'라고 불렀으니 말이다. 남자가 온전한 한 푼인데 비하여 여자는 그 반이라는 의미이다. 어쩌면 시대가 다르고 공간이 달라도 이렇게나 한결같이 여성을 비하했는지. 이 '공통의 응시'가 가부장제 때문이라는 것을 학교에서 배우며 비로소 '아하' 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신학의 길을 걸으며 개인으로서의 나는 목사가 되기 싫었다. 이건 여성 안수와는 다른 주제인데, "만인이 하나님 앞에 모두 다 제사장"이라는 프로테스탄트의 원칙에 위배되는 성직자/평신도 가르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평신도'의 권위를 위해 싸우기로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나의 이 개별 결정이 '여성 목사'를 제도적으로 막는 것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동의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현대사회의 모든 직업이 그러하듯, 개인이 원하는 직업에 적합한 전문성을 갖춘다면 그 개인은 타고난 것으로 인한 제약을 받으면 안 된다. 그것이 민주 사회의 기본 토대이다. 물론 보수적인 교단에서는 사회의 법 위에 작용하는 '하나님의 법칙', 그러니까 성경의 권위에 기대어 여성의 자리를 제한하는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때문에 이 싸움은 단지 현대사회의 인권 투쟁을 넘어서, 성서가 말하는 '사람됨', '인간 권위'에 대한 근본적 물음이 될 수밖에 없다.
창세기 1장만 제대로 읽어도 이해 가능한 '하나님의 법칙'이건만 안타깝기 그지없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아담)을 지으시되 그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다. 그 사람(남자와 여자)은 만물을 '다스릴 권위'를 가진다. 이 '명료하고 근본적인' 법칙을 못 읽게 만든 것이 가부장제의 힘이다. 악한 의도가 없었더라도 그 안에서 보고 듣고 자란 대부분의 남자들은, 그리고 그 시선을 내면화해 온 여자들은 '근본'을 잊고 '제도'를 따랐다. 이에 저항하며 '다시 근원으로 (ad fontes)' 돌아가려는 운동 중 하나가 바로 '여성 안수 투쟁'이다. 안 그래도 싸울 것 천지인 세상에서, 안 싸워도 될 일로 에너지를 소비한 세월이 참으로 길었다. 아직 끝나지 않은 싸움이기도 하다.
한국 개신교 내에서 가장 큰 교세를 가진 장로교의 경우만 보아도 그렇다. 1930년 미장로회가 여성 장로제를 채택하자 한국에서도 목소리를 내었다. 함남노회 여전도회를 중심으로 '여성 치리권'에 대해 건의했으나 총회에서 기각되었다. 기각 사유를 성의 있게 내놓지도 않았다. "허락할 수는 없는 일"이라나. 이 일화를 읽다 보면 미국의 급진적 페미니스트 모임인 '레드 스타킹'의 출발이 떠오른다. 흑인 인권 운동과 연대하여 여성 인권을 위해 목소리를 내고자 인권 집회에 참여했던 여성들도 성의 없고 무례한 답변을 들었다. "여기는 여성 해방보다 더 중요한 안건들이 다루어지는 장소란다." 마치 소녀를 타이르듯 말하는 인권 의장의 말에 '소녀들'은 비로소 깨달았다. 아, '민주'와 '인권'이라는 말로 점점 그 영역을 넓혀 가는 이 싸움에 '여자의 몫'은 없구나! 이 제도 역시 또 하나의 가부장제였구나. 그래서 그녀들은 가부장제의 종식과 새로운 제도의 창출을 위해 '밖에서' 싸웠다.
이에 비한다면 한국 여성 그리스도인들은 더 끈질겼던 셈이다. 제도 안에서 끊임없이 싸웠으니까. 그게 더 힘든 일이다. 포기하지 않고 다음 해(1934년)에도 다시 여성 연명 서명으로 총회에 건의했다. 이번엔 아예 안건으로 올리지도 않았다. 힘을 보태 준 남성 목사가 없지 않았으나(김춘배 목사가 <기독신보>에서 여성 장로제 기각한 것을 비판), 제도의 힘은 강했다.
"여편네가 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이 거룩한 자리에 서겠단 말인가?", "배때기가 남산만 해 가지고 어디를 올라오겠단 말이냐?" (41쪽)
제사법이나 부정함에 대한 유대교 응시를 그대로 가져온 이런 비아냥은 결코 '성경적'이지 않다. 그저 '가부장적'일 뿐이다. 왜냐하면 성경만이 아니라 유교도, 이슬람교도, 힌두교도, '경전'을 가진 모든 제도 종교들은 한결같이 여성을 향해 같은 이유로 금지와 제한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적'이라는 이유를 들어 가장 자주 소환된 구절은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과 디모데전서 2장 11~15절이다.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그들에게는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라."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 (중략) 여자들이 만일 정숙함으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의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디모데전서 2장 11~15절)
전통 가부장제의 종말 이후에 탄생한 개신교의 경우 이 구절을 민주 사회의 삶의 방식과 연결하려다 결국 탄생시킨 것이 '상보론' 이었다. 존재론적으로는 평등하지만, 기능에 있어서는 서로 보완하는 역할을 고정해 놓는 것이다. 현대 산업사회의 성 역할 분업과도 잘 맞아떨어지는 해석이라서 한동안은 교회 안에서 대중적 설득력을 갖기도 했다. 하지만 여자를 '안'에만 가두려는 제도가 끝난 마당에, 굴러가던 관성으로 움직이고 있는 가부장제적 힘을 부여잡고 애쓰는 남성들을 향해 창조적인 비판이 시작되었다.
"배불러서 강단에 못 올라온다면 목사들 중 똥배 나온 사람은 뭐냐. 운동 안 해서 배 나온 건 비생산적인 것이지만, 여성들이 임신·출산하는 건 생명적인 일이고 창조적인 질서다. 어디다 대고 그런 얘기를 하느냐." (84쪽)
교단을 초월한 여성 연대의 이야기도 가득하다. 길고 지루한 싸움이지만, 지지 않고 멈추지 않고 낸 목소리와 운동이 이 책 안에 오롯이 담겨 있다.
제도가 마련된 교단에서는 또 다른 싸움을 하고 있다. 여전히 존재하는 성차별과 성폭력을 없애기 위한 싸움이다. 그러니까 애쓰고 노력해서 제도권 안으로 진입한 여성 목사들에게 여전히 동료 아닌 '여자'로 대하는 응시와 처우에 대한 싸움이다.
제도적으로 가장 빨리 여성 안수를 인정한 것은 감리교였다. 1930년부터 이미 법적으로는 승인을 했고 이듬해 한국에 와 있던 미국 여선교사들이 목사 안수를 받았다. 한국 여성의 목사 안수는 1955년에 이루어지긴 했지만(전밀라·명화용 목사), 제도적 싸움에 기운은 덜 뺐던 셈이다. 문제는 '실제적'인 적용에 있었다. "담임자로서 결혼한 여자 목사는 담임을 계속할 수 없다"는 제한과 함께 기혼 여성 목사의 사역을 기관 목회에 제한한 것이다. 역시 가부장적 질문에 가부장적 대답을 제도화한 것이었다. 아이를 낳고 기르는 '여성의 1차 의무'를 수행한다면 어찌 목양이 필수인 담임목사의 역할을 충실히 할 수 있겠냐는 질문이요, 이에 대한 해결이었다.
맞다.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 '전문적'으로 자신의 일을 하는 것은 목사만이 아니라 모든 '여성 전문가'가 다 만나는 제도적 장애물이다. 이 부분의 해결책이 '애만 보거나 일만 하거나' 혹은 '애도 보고 일도 할 만한 적당한 자리'로 제한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명백하게 성차별이다. 겨우 싸워서 이 제한을 폐지시켰더니(1989년) 새로운 조항이 생겨났다. "부부 목사는 한 교회에서 사역할 수 없다(2005년)." 현재까지도 존속되고 있는 조항이란다. 실제적으로는 함께 사역해야 가정과 일의 병행이 가능할 텐데, 왜 이런 제한을 두었을까?
"남편이 담임목사로 청빙받아서 교회에 가게 되면, 교회는 사모를 원할 텐데 왜 꼭 남편 앞길 가로막으면서까지 목사가 되려고 하느냐." (105쪽)
행여 아내 목사의 영적 권위나 교회 내 치리권이 남편을 앞설 것을 걱정한 것은 아닐까 싶었던 내 심증이 굳어지는 대목이다.
코로나19는 교회 내 여성 리더십에 있어 또 하나의 과제를 부여했다.
"팬데믹을 경험하면서 사회와 더불어 뒷걸음질 치지 않을까 하는 거예요. 노동 현장에서도 구조 조정이 있을 때 여성 노동자들이 먼저 희생된다는 이야기가 들려오는데요. 지금 교회도 마찬가지잖아요. 역사가 다시 후퇴하는 일은 막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돼요." (101~102쪽)
2021년 9월 한국기독교장로회 최초로, 아니 실은 한국교회 주요 교단에서는 처음으로 여성 총회장으로 선출된 김은경 목사의 말처럼 이제는 '유리 천장'을 깨는 '예외적' 개인기가 아닌, 제도적 지지 기반이 필요한 시절이다. 안수만이 아니라, 교회 내 역할 제한 금지, 실질적인 처우 향상(사례비의 평등성), 성폭력 특별법 등 아직도 많은 과제들이 남아 있다.
이 글들을 읽으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90년을 싸워 온 '피의 역사'를 이렇게 앉아서 편히 읽어도 되나? 더구나 나의 개인적 의미 추구 안에 성직에 대한 갈망이 없으면서? 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적절한 거리'를 가지고 읽을 수 있었던 것도 같다. 그 절절함과 치열함에 공감하면서도, 한편으로 이 싸움이 '여성'을 넘어 '여성적'인, 그리고 '여성주의적'인 리더십에 대한 고찰로 더 나아가야 함을 보게 된 것은 '평신도 여성 신학자'의 눈이어서 가능했던 것 같다. 여기서 '여성적'이란 돌봄 목회, 은사 집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쪼기 서열'의 가부장제 문화가 가득한 교회 안에서 하나님께서 여성에게 부여하신 다양한 재능과 시선, 능력들이 제도적으로 발현되는 것을 뜻한다. 이런 점에서 '여성적'이란 '아직 제도 안에서 실현되지 않은 인간성의 반'이다, 우리의 할 일은 이것을 제도 안으로 가져오는 것이다. 이제 생물학적 여성들 개인의 자리 차지하기를 넘어, 하나님이 창조하신 여성들의 능력과 의미와 언어가 제도를 가득 채울 때이다.
백소영 / 강남대 기독교학과 교수, 한국여성신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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