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독의 시간] 잭 레비슨 <내가 알지 못했던 성령>(감은사)
| 1. 내가 알았던 성령 |
인생 주기의 변화는 곧 '성령관'의 변화다. 적어도 내 경험에 따르면, 신앙인은 자기 인생에 중요한 사건을 겪고 나면 '성령관'이 바뀐다. 성령은 실로 다양한 모습을 하고, 각 사람의 삶에 시시각각 다르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캠프 사역에 열광해 청소년 선교 단체에서 봉사하던 10대 시절의 나에게, 성령은 '나를 강력하게 하는 특별한 힘이자 권능'이었다. 그러던 내가 아주 주지주의적인 장로교의 신학교에 입학한 이후로, 성령을 그다지 필요하지도 않고 중요하지도 않다고 여기기 시작했다. 성령보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스스로 더 정확한 성경 지식을 가질 수 있는가'였다. 그런 내게 성령의 의미를 굳이 찾자면, 성령이 '지혜', 즉 옳음을 분별하는 판단력이자 안목을 준다는 점이었을 것이다.
그러던 2014년, 세월호 참사를 목도했다. 위에서 기술한 내 성령관의 변화는 일견 극에서 극으로 변한 것처럼 보이겠지만, 어찌 보면 그렇지도 않았다. 10대 때나 신학교 입학 후나 성령을 '나를 위해' 존재하고, '나에게' 쓸모 있으며, '내 안에서' 작용하는 무언가로 여겼다는 점에서 똑같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 이후 수년간 경험한 신앙생활에서, 성령은 '친교(화해)를 이루시는 영'이라는 더욱 전통적이고 공교회적인 의미로 내게 다가왔다. 성령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공동체'를 만들고 세우기 위해 존재하며, 공동체 안에서 작용한다고 믿었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떤가? 지금 내게 성령이란, '끊임없이 세상을 창조해 나가는 존재'다. 나는 지금 만물을 돌보고 있는 성령, 모든 존재를 자신의 존재 안에서 떠받치는 성령을 보고 있다. 단순히 나와 공동체를 넘어서, 고요히 '모든 것'을 지지하는 성령 말이다. 이렇게 돌아보니, 어느덧 내년이면 29세 2호봉을 살게 되는 얄팍한 세월 동안 몇 번씩이나 성령에 대한 태도를 수정하며 살아왔다는 게 새삼스럽다.
잭 레빈슨의 <내가 알지 못했던 성령 - 신선한 공기>(감은사)는 이러한 경험, 다시 말해 '성령은 매우 다양한 면모를 갖고 있다'는 내 경험에 여러 사례를 더해 풍부한 이해를 가져다 줬다. 건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대체로 성령에 대해 적당히 모난 데 없는 견해를 갖고 있겠지만, 한편으로 한국교회가 겪는 성령의 '현상'은 매우 단조로운 형태를 띄고 있다. 한국교회에서 성령은 '힘'이자 '권능'이다.
"성령이 언제나 넘치면 은혜로 얼굴이 환해요"라는 복음성가 가사가 대변하듯, 한국교회에서 성령은 사람으로 하여금 지금 당장이라도 수백 명은 전도할 수 있을 것 같은 '충만함'을 선사하고, 어떤 근심도 걱정도 없는 상태로 '텐션 업' 하게 만들어 주며, 늘 하나님을 찬송하고 덩실덩실 춤추게 하는 '넘치는 기쁨'을 공급해 주는 존재로 현상한다. 사람들은 이러한 현상 때문에 성령을 열성적으로 추종하면서, 그 성령이 내 삶에 어떤 '활력'과 '효용감'과 '만족'을 주기를 바란다.
반면에, 성령을 통한 개인적 만족만을 추구하며 정작 타인에게는 아무렇게나 상처를 주는 몇몇 사람들의 행태 때문에, 누군가는 성령, 성령 운동, 영적 생활 자체를 경시하고 터부시하기도 한다. 어쨌든 한국의 많은 신자들은 대개 '성령'에 이런 이미지를 부여하고 있을 것이다.
| 2. 우리의 이미지를 비켜 가는 거룩한 영의 여러 모습 |
하지만 레빈슨은 성령이라 하면 흔히 떠오르는 이러한 '현상'들이 실제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을 표현하기에는 너무나 피상적이지 않냐고 질문한다. 물론 지금 나에게 '성령의 능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으면, 나 역시도 앞서 말한 열광적인 성령 현상만을 떠올리고 거부감을 숨기지 못할지 모른다. 하지만 레빈슨은 그런 피상적인 '현상'에 속지 말고, 성경에 등장하는 아주 다양한 '현실'의 성령을 떠올리라고 촉구한다. 그가 성경을 통해서 바라본 이 '거룩한 영'의 실제 모습은 그만큼 다채롭다. <내가 알지 못했던 성령>은 내가 겪어 온 것과는 또 다른 거룩한 영의 모습들을 다채롭게 보여 줬다.
레빈슨은 가장 먼저, 거룩한 영이 '특별하게 또는 '활기차게' 작용한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이미지를 비켜 간다. 물론 거룩한 영은 특별한 순간에 강력한 힘으로 사람을 활기차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가 볼 때, 거룩한 영을 '특별하고 활기차게'만 여기는 사람은 야망으로 들끓으며 과도하게 생명력 넘쳐, 도리어 잿더미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쉽사리 상처를 준다.
그러나 사실 거룩한 영은 반복되는 일상의 아주 단순하고 소박한 순간에 깃들어 고요히 존재하기도 한다. 나아가 활기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고통이나 어둠 속을 헤매는 것 같은 부정적 상태에 처한 사람의 '숨' 속에서도 거룩한 영은 존재한다. "그 숨이 그의 속에 있고, 하나님의 영이 그 코에 있는 한"(33쪽) 사람은 절망스런 순간에도 거룩한 영으로 충만하다고 할 수 있다. 심지어 병들어 죽어 가는 순간에도 말이다.
이러한 모습을 우리는 여러 성경 내러티브에서 만날 수 있다. 이를테면 욥은 하나님의 대적으로부터 시험을 당하는 처참한 상황 속에서도, 자신을 하루하루 살아가도록 지탱하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영"이라고 고백한다(욥 27:3, 33쪽). 그는 삶과 죽음 양쪽에 한 발씩 걸친 상태에서, 생명을 가져다 주는 거룩한 영이 실제로 어떻게 일하는지 그 현실을 똑바로 바라본 사람이다.
다니엘은 거룩한 영으로 충만한 사람이 쉬이 갖게 되는 '특별하게 살아야 한다'는 야망으로부터 비켜 간 사람이다. 소위 거룩한 영으로 충만해진 사람들은 내가 하나님 대신 말해야만 하고, 내가 일해야만 하고, 내가 어떤 사명감을 가져야만 한다는 고양감에 도취되기 쉽다. 그러나 다니엘은 달랐다. 사람들은 그가 페르시아의 고위직에 올라갔다는 것에 주목하지만, 정작 다니엘은 그런 지위를 얻기 위해 야망을 불태운 적이 없다. 그는 왕이 바뀌고 나라가 바뀌는 긴 시간 동안, 단순·소박한 삶을 하루하루 꾸준하게 살았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더러 "거룩한 신들의 영"(단 4:8)이 있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레빈슨은 거룩한 영이 '나에게' 임한다고만 여기는 인식 또한 비켜 간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영에 관해 이야기 할 때에는, 거의 항상 개인적인 관점에서 이야기한다."(135쪽) 물론 레빈슨도 성경에서 나오는 영에 관한 여러 내러티브가 개인과 관련돼 있다고 인정한다. 하지만 개인에게 작용하는 거룩한 영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는 거룩한 영으로도 시선을 돌리라고 환기한다.
그 전혀 다른 방식이란 '공동체'에 존재하는 거룩한 영을 말한다. 거룩한 영의 영역은 단순히 개인 소유의 힘·권능·생명력을 넘어, 보다 광범위하다. 거룩한 영은 사람들이 서로 모여 공동체를 만들게 한다. 개개인의 내면뿐만 아니라 공동체에 자리 잡고 그 안에서 작용한다. 거룩한 영이 작용하는 영적 공동체는 서로에게 배우고(169쪽), 서로 귀기울여 듣고(171쪽), 서로를 위해 베풀고(174쪽), 공동체 외부를 향하여서도 연대(179쪽)하며, 공동체 안에서의 다양성을 지향한다(181쪽).
레빈슨이 비켜 가는 가장 도전적인 이미지는 거룩한 영이 나에게 '이롭게' 작용할 것이라는 점이다. 보통 사람들은 '성령 충만'을 긍정적인 모습으로만 그린다. 거룩한 영으로 충만하면 늘 좋은 일만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레빈슨은 거룩한 영이 우리를 '구렁텅이'로 내몰기도 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는 하나님의 영과 다른, 별개의 영이 벌이는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른 무엇도 아닌 '하나님 자신의 거룩한 영'이 우리를 고생길로 내몰기도 한다.
성경에서 이러한 일을 겪는 대표적인 인물은 예수다. 복음서는 예수가 광야에서 받는 유혹과 시험을 그리는데, 특히 마가복음은 이 시험이 "영이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막 1:12~13)면서 시작됐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거룩한 영은 다른 누구도 아닌 하나님의 "아들이자 사랑하는 사람"(막 1:10~11)인 예수를 광야의 수난 속으로 몰아넣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외면하기 쉬운 '교훈과 성장을 위한 시련'을 상기시킨다. 사람이 겪는 모든 고난이 이런 종류의 것은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 말할 때 매우 신중해야 한다. 하지만 사람은 때때로 사건을 통해 성장한다. 거룩한 영은 사람들을 바로 그 사건 속으로, 다름 아닌 예수가 겪은 수난 속으로 몰아넣는다.
| 3. 우리가 알지 못했던 성령의 현실을 보기 위해 |
레빈슨은 거룩한 영의 다양한 모습을 제시하며, 이것들이 '성령 충만'과 '영적 생활'의 실제 모습이라고 말한다. 누군가가 영에 대해 말할 때 그들은 자신이 갖고 있는 아주 단조로운 이미지와 주변 현상들만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더 깊이 생각해 보면 그들이 실제로 겪었던 성령, 그들이 살고 있는 실제 영적 생활은 고작 그런 것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혹시 여러분은 강한 카리스마와 긍정적인 삶을 기대하며 영적 생활을 열렬히 추종하는 사람인가? 그렇다면 천천히 되돌아보며 내 삶 구석구석에 하나님의 영이 실제로 어떻게 존재해 왔는지 생각해 보라. 혹시 여러분은 '성령 충만'이라는 말을 들으면 자신이 영적이라고 자처하는 이들의 폭력성이 떠올라 치를 떠는 사람인가? 그렇다면 거룩한 영으로 사는 삶이 정말 그런 것인지를 다시 한번 물으며 되짚어 보라. 무엇보다 성경을 들고 펴서 읽어 보라. 성경에서 그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영은 정말 그런 것인가? 우리는 거룩한 영의 현실이 실제로는 그렇지 않음을 알게 될 것이다.
레빈슨은 요청한다. 혹시 우리가 세간의 성령 '현상'에 속아 성령의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라고 말이다. 제대로 된 현실을 마주할 때, 우리가 알지 못했던 성령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권우진 / 틈을 내는 사유의 실천, '짓;다' 에디터. 학부에서 신학을 공부했고 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하는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