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가 여성 안수의 역사와 현재 의미를 짚는 기획 '비하인드 스토리 - 여성 안수 투쟁사' 특별 페이지를 제작했습니다. 특별 페이지에서는 1930년대 자료와 타임라인 등을 보실 수 있습니다. (바로 가기)

 

"우리 장로교회는 아직도 장로와 집사(안수집사)의 권도 주지 않고 공공연하게 남녀를 차별한 헌법을 만들어 놓고 여권의 신장을 막고 있다는 것은 참 모순도 심한 모순이올시다. (중략) 이 같은 차별적 헌법은 남녀평등이니 여자 해방이니를 강단에서 외치는 우리의 주장과는 근본적으로 배치되는 것이며 이 법을 하루를 더 둔다면 우리 스스로를 하루 더 모욕함이요, 교회 발전을 그만치 지연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뉴스앤조이-구권효·나수진 기자] 지금도 한국교회에 유효해 보이는 위 글은 무려 88년 전 나온 것이다. 조선예수교장로회 함남노회 성진중앙교회에서 사역하던 김춘배 목사는 당시 교계 연합 신문 역할을 하던 <기독신보>에 1934년 8월부터 '장로교 총회에 드리는 말씀'이라는 제목의 글을 3회 연재했다. 그중 두 번째 글 세 번째 소주제는 '여권 문제'였는데, 김 목사는 여기서 '여성 장로제'를 기각한 총회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일부 교단은 그로부터 8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차별적 헌법을 고수하고 있다.

한국교회의 고질적 문제 중 하나는 구성원 반수가 넘는 여성들이 의사 결정 권한을 가진 자리로 갈수록 급격히 줄어든다는 것이다. 한국교회 80% 이상을 차지하는 장로교회의 경우 당회는 목사와 장로로 구성된다. 여성 안수가 도입된 교단에서도 여성 목사·장로 비율은 매우 낮다. 아직도 여성에게 안수직을 주지 않는 교단은 교회의 모든 의사 결정을 남성들이 한다.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의사 결정 권한을 주지 않는 것은 구조적인 차별이다.

교회 밖 사회에도 여전히 성차별이 존재하지만, 이제 적어도 대놓고 구조적 차별을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한국교회에는 아직도 여성에게 안수직을 주지 않고, 이를 성경적·신학적이라고 주장하는 교단이 있다. 주요 교단 중에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과 고신, 합신 등이 있다. <뉴스앤조이>는 이번 '비하인드 스토리 - 여성 안수 투쟁사' 기획을 시작하며, 한국 장로교회가 분열하기 전까지 여성 안수와 관련해 어떤 논의가 있었는지 짚고 넘어가려 한다. 고어古語는 최대한 원문을 살리되, 지금 우리가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자구를 수정했다.

일명 '김춘배 목사 필화 사건'의 발단이 된 '장로회 총회에 올리는 말씀'. 뉴스앤조이 나수진
일명 '김춘배 목사 필화 사건'의 발단이 된 '장로회 총회에 올리는 말씀'. 뉴스앤조이 나수진
88년 전에도 있었던 '지면 논쟁'

총회 차원에서 최초로 여성 안수가 언급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90년 전, 한국 장로교의 모태인 조선예수교장로회 시절이었다. 1930년 당시 미국장로교회(PCUSA)가 여성 장로제를 채택하자, 경안노회는 1932년 조선예수교장로회 21회 총회에 교단 입장이 무엇인지 질의했다. 21회 총회는 "경안노회에서 문의한 '미국북장로회에서 여장로 세운 것은 어느 성경에 근거하였으며 동일한 신조 아래에 있는 우리는 왜 달리 해석하느냐' 하는 것은, 미국북장로교에서 여장로 세운 것은 우리가 상관할 것이 없고 우리 조선 장로교는 본 정치에 의하여 여장로를 세울 수 없사오며"라고 답했다.

하지만 이듬해 함남노회는 정식으로 여성에게 장로 및 총대 자격을 부여해 달라고 헌의한다. 이와 동시에 함남노회 최영혜 여전도회장 외 여성 103명이 연명해 여성에게 치리권을 달라고 총회에 헌의했다. 이 안건은 1933년 조선예수교장로회 22회 총회에서 다뤄졌으나, 정치부는 "정치 제5장 3조(교단 헌법 중 목사의 자격 부분 - 편집자 주)를 개정할 필요가 없으므로 허락할 수 없사오며"라는 말로 기각해 버렸다. 여성 총대 안건은 별다른 설명도 없이 "허락할 수 없는 일이오며"라는 말로 기각됐다.

함남노회 여신도들은 굴하지 않았다. 이듬해 1934년에는 함남노회 여신도 639명이 연명해 여성에게 치리권을 달라는 안건을 총회에 올려 달라고 노회에 청원했다. 그러나 함남노회는 "연년이 (여성 안수) 문제를 총회에 제출하기 미안하다"는 이유로 여신도들의 청원을 총회에 올리지도 않았다.

하지만 교회 내 여성의 지위를 향상해야 한다는 담론은 이미 계속되고 있었다. 한국교회 최초의 초교파 신문이었던 <기독신보>는 1920년대부터 해외 소식을 전하며 교회 내 여성의 지위에 대해 꾸준히 보도해 왔다. 조선 교회 여성들이 직접 쓴 글을 싣기도 했다. 1930년 1월 감리교와 장로교 여성 11명이 4번에 걸쳐 연재한 '여전도인의 불평과 희망'이라는 글이 대표적이다. 

<기독신보>는 191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교계 연합 신문 역할을 했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기독신보>는 191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교계 연합 신문 역할을 했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1934년에는 서두에서 언급한 일명 '김춘배 목사 필화 사건'이 있었다. 김춘배 목사는 1934년 8월 22일 <기독신보> 977호에, 전년도 22회 총회에서 여성 관련 안건을 기각한 점을 지적하며, 여성이라는 이유로 안수직을 주지 않는 것은 남녀 차별이라고 비판했다.

"작년 총회에 함남노회에서 여자에게도 장로 자격을 주자는 헌의와 겸하여 최영혜 씨 외 103인이 연서하여 여자에게도 치리권을 허락하여 달라는 청원을 하였었습니다. 이에 대한 정치부의 '정치 제5장 3조를 개정할 필요가 없으므로 허락할 수 없사오며'라는 간단한 보고에 의하여 이 헌의는 부결되고 말았습니다.

 

이 보고문이 그 헌의와 청원을 부결하는 이유의 만족한 설명도 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마는, 그 헌의를 채용치 못함은 심히 유감이며 그같이 부결한 원인이 어디 있는지 이해가 힘든 바입니다. 아직까지도 남존여비의 낡은 풍습을 고수함도 아닐 것이요, '여자는 거내이불외居內而不外하라(안에 머물고 바깥일을 말하지 않아야 한다 - 편집자 주)'는 남루가 된 도덕을 지키느라고 그러는 것도 아닐 것이요, '여자는 조용히 하여라', '여자는 가르치지 말라'는 2000년 전의 지방 교회의 교훈과 풍습을 만고불변의 진리로 알고 그러는 것도 아닐 터인데요. 그렇지 않으면 장로교회 내 여성들의 지식 정도와 기타 등등이 아직도 남성들에게 미치지 못하는 데 원인함일까요.

 

같은 땅 안에서 똑같은 역사의 길이를 가지고 있는 감리회는 상하 모든 회에 있어 남녀 간 아무 차별과 현격이 없을 뿐 아니라 교회 최고 기관에서 그 위를 점하고 여목사까지도 있는데, 우리 장로교회는 아직도 장로와 집사(안수집사)의 권도 주지 않고 공공연하게 남녀를 차별한 헌법을 만들어 놓고 여권의 신장을 막고 있다는 것은 참 모순도 심한 모순이올시다. 이 같은 차별적 헌법을 고수한다는 것은 여자의 향상을 저해하는 것이오. (중략)

 

여자의 정도程度가 아직 뒤떨어짐이 있다면 그것을 향상시킬 만한 기회와 권을 주어야 합니다. 그들에게 치리권을 주는 것은 활동할 무대를 주는 것이요, 향상할 기회를 주는 것이 될 것이올시다. 따라서 우리 교회의 힘을 크게 하여 발전을 촉진합시다. 그런 고로 금년 총회에서는 하회의 헌의가 있건 말건 주저치 말고 여자에게 치리권을 부여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이 같은 차별적 헌법은 남녀평등이니 여자 해방이니를 강단에서 외치는 우리의 주장과는 근본적으로 배치되는 것이며 이 법을 하루를 더 둔다면 우리 스스로를 하루 더 모욕함이요, 교회 발전을 그만치 지연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중략) 여자 치리권은 마침내는 주고야 말 것이며 그같이 될 줄 굳게 믿는 바입니다. 아니 주지 못할 것이요, 우리 정신의 어그러지는 헌법 조문을 그대로 두고 여권 부여를 지연함은 후일에 스스로 배꼽을 쥐어뜯는 한을 남길 뿐일 것이매 이에 대한 처단의 속함이 있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김춘배 목사의 글이 실린 <기독신보> 977호에는 여성 안수를 반대하는 글도 실렸다. 교회 내 여권 문제에 대한 '지면 논쟁'이 벌어진 것이다. 서울 중화읍교회를 담임하던 채정민 목사는 '정통의 교회도 속염俗染은 가외可畏(세속에 물드는 것 두려워해야 - 편집자 주), 여자에게 언권 없다'는 제목의 글에서 성경을 근거로 성차별적인 주장을 펼쳤다.

"(전략) 사람을 창조하실 때부터 선후가 있고 직분이 다르다. 아담은 주장자요, 하와는 보좌자이다(창 2:18). 범죄 후에는 더욱 직분이 판이하였다. 남자는 사업이요, 여자는 생산이다(창 3:16~19). 그런 고로 남자에게는 사업대로 봉급을 주어 교역을 시키려니와, 여자에게 봉급을 주어 교역을 시키면 누구를 대신 보내 생산을 시키며 아동을 교양하며 가산을 정리하여 남용여역男傭女役(남성의 할 일과 여성의 역할 - 편집자 주)을 지도케 하겠느뇨(잠 31:15). (중략) 이상 성경 구절을 보고야 어찌 여자 목사, 여자 강도를 허하리오. 성경은 시대를 초월하였다. 절대로 시대별로 말하지 못할 것이요, 여자 학식도 말하지 못할 것이다. (중략) 어느 여목사가 자기 아들에게 성경을 교수하다가, 그 아들이 말하기를 '디모데전서 2:12에 여자는 가르치거나 남자를 주관 말고 조용하라 하였는데 어머님은 왜 목사 노릇을 합니까' 하면, 그 여목사는 틀림없이 성경이 잘못되었다든지 아이는 성경 볼 필요가 없다든지 무슨 기괴한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한국의 장로교회는 처음부터 남성들만 총회에 참석할 수 있었다. 
한국의 장로교회는 처음부터 남성들만 총회에 참석할 수 있었다. 

김춘배 목사와 채정민 목사의 지면 논쟁 2주 후 9월 5일, 함남노회 최영혜 여전도회장은 <기독신보>에 채 목사 주장에 대한 반박문을 게재한다. 최영혜 회장은 채 목사 주장을 조목조목 옮겨 적으며 낱낱이 비판했다.

"'사도 시대부터 여자의 신앙이 남자보다 승한 점이 많으나 강도권과 치리권은 남자에게만 주셨다' 하나, 주님 당시 교회 제도가 없었으니 만치 치리권을 남자에게만 주고 여자에게는 허락지 않았다는 말씀도 없습니다. 다만 주님께서 최후에 부탁하신 말씀은 '너희는 땅끝까지 내 복음을 전하라' 하셨으며(눅 24:48~53), '너희'라 하신 말씀 중에는 남자만 아니고 여자도 있지 않습니까. 오순절에 성신도 남녀 차별이 없이 각 인에게 임하셨고 우리 주님께서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후 최초에 여제자 마리아에게 보이시고 명하신 말씀은 '너는 가서 내 동생들에게 나의 산 것과 하느님께로 올라갈 것을 말하라' 하셨으니(요 20:17), 공포심에 눌린 남제자에게 활기 있고 권위 있는 소식을 전하라는 직분은 여신도에게 먼저 주셨으니 어찌 여자에게 언권이나 치리권이 없사오리까. (중략)

 

'여자에게 봉급을 주어 교역을 시키면 누구를 대신 보내 생산을 시키며 아동을 교양하며 가사를 정리하며 남용여역을 지도케 하겠느뇨' 하나, 남자는 치리권이 있으니 가사를 돌아보지 않고 남편의 권을 타인에게 대신하게 하여 교회의 치리자가 됩니까. 어떤 여자가 교회 치리권이 있다고 가사를 돌아보지 않고 생산권을 타인에게 대신하게 하겠습니까. 그것은 너무 지나친 염려입니다. 남녀 물론하고 처지와 형편을 따라 직분에 피임될 것이요, 교역자 된 남성이 자기 남편 직분을 떠나서 교역에 종사하는 것을 저는 보지 못하였습니다. 남자이면 물론 치리권이 있으나 그렇다고 다 치리자가 될 것이 아닌 것같이, 여자도 치리권이 있다 하더라도 가사를 돌아보지 않고 다 치리자가 될 것은 아닙니다.

 

또 '여자가 예언할 때나 기도할 때 머리에 쓰라'고 한 바울의 말씀을 주장하나, 금일도 여자가 굴뚝 같은 치마나 수건을 머리에 쓰지 아니하면 교회에 나아가 공동 기도할 수 없을까요. 성경을 어찌 단편적으로만 생각하십니까. 바울 당시 고린도교회 부녀들이 분수에 넘치는 권리를 행사한 것은 예수께서 여자에게서 탄생하신고로 여자의 지위 존귀하였고, 또 주님 당시 남제자 중 가룟 유다는 은 삼십에 자기 주를 팔았으나, 그 반대로 여신도 마리아는 삼백 냥의 가치 되는 향기름으로 주님의 몸에 부었으며(막 14:4~5), 그 반대로 여제자들은 가슴을 치며 예수를 따라갔고(눅 23:27), 베드로는 주를 3차나 저주까지 하며 배반하였습니다(마 26:71~72). 그 반대로 부녀들은 주의 십자가까지 갔고(요 19:15), 열두제자는 주의 무덤을 버리고 다 도망하였으나, 그 반대로 여성도들은 향속을 사 가지고 주의 몸에 바르려고 무덤까지 갔으니(막 16:1), 이러한 모든 사실을 듣고 알게 된 고린도교회 여성들은 너무도 질서 없이 권리를 남용할 뿐만 아니라 구원함과 하느님의 말씀이 자기들에게서만 낳다고 주장하는 고로 바울 선생은 그들을 교훈하기 위하여 하신 말씀입니다(고전 14:30). 절대로 후세 여신도들까지 주님의 교회에서 언권이나 치리권이 없다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바울 선생 말씀 중에도 '남자는 여자에게서 낳다'(고전 11:12) 또 말씀하시기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남자 여자가 차별이 무하다' 하였지요(갈 3:28). (중략)

 

현 사회에서도 남녀 차별을 아니하는 이때에도 기독교 안에서 남녀 차별할 까닭이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여성은 교회에서 권리가 없으므로 책임감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제가 주의 도를 받은 지 28년인데 이러한 모든 것이 유감의 원인이 되어 다년간 기도하던 중, 작년에 104인의 동의를 얻어 여신자에게도 남성과 동일한 교회 치리권을 달라는 청원을 함남노회를 거쳐 총회에 진정하였던 바, 총회에서는 정치 5장 3조를 개정할 필요가 없다는 조건으로 여지없이 퇴각을 당하였으나, 역시 금년에 함남노회 구역에서 22교회 여신자 639인의 동의를 얻어 재차 함남노회를 거쳐 총회에 올리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여성 안수 불가는 '만고불변의 진리'
1934년 열린 조선예수교장로회 23회 총회. 
1934년 열린 조선예수교장로회 23회 총회. 

조선예수교장로회 23회 총회가 열리기 직전인 1934년 8~9월 교단지에서 이 같은 지면 논쟁이 일었지만, 정작 총회에서는 실망스러운 결과가 나왔다. "이번 총회에서는 주저치 말고 여자에게 치리권을 부여했으면 좋겠다"는 김춘배 목사의 바람과는 정반대로, 23회 총회는 오히려 '김춘배 목사의 성경 해석 문제'를 조사하는 연구위원회를 구성했다. 연구위원은 당시 평양신학교 교수나 큰 교회 담임으로 재직하던 나부열·부위렴·염봉남·윤하영·박형룡 목사가 맡았다.

연구위원회는 1년 후 1935년 9월 조선예수교장로회 24회 총회에서 결과를 발표했다. 한국 장로교회가 총회 차원에서 처음으로 여성 안수에 대해 연구한 결과물이었다. 연구위의 결론은 "김춘배 목사의 성경 해석은 큰 오류"이고 "도무지 용납할 수 없는 해석"이며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와 디모데전서에서 여자의 교회 교권을 불허한 말씀은 만고불변의 진리"라는 것이었다.

"성진중앙교회 목사 김춘배 씨가 <기독신보> 제977호에 '장로회 총회에 올리는 말씀'이라는 문제로 기재한 논문 중 '여권 문제'라는 대지하에 사도 바울이 '여자는 조용하여라', '여자는 가르치지 말라'고 한 것은 '2000년 전 한 지방 교회의 교훈과 풍습'이요 '만고불변의 진리'가 아니라는 의미의 성경 해석을 술한 것은 큰 오류(誤謬)라고 인정하나이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와 디모데전서에서 여자의 교회 교권(敎權)을 불허한 말씀은 2000년 전 한 지방 교회의 교훈과 풍습을 의미한 것이 아니라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고린도전서 14장 33~35절에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와 같이 부녀는(헬라어 성경 원문에 33절 문구가 34절에 연접하였음) 교회 가운데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느니라' 한 말씀에 대해, 성경을 시대사조에 맞도록 자유롭게 해석하는 사람들은 성경 본문을 떠난 여러 가지 구구한 설명을 붙이면서 주장하기를, 사도 바울이 여자의 교권을 금한 이 말씀은 고린도의 특수한 교회에게, 특수한 기회에, 특수한 교훈으로 준 것이요, 당시 모든 교회를 위하여 법을 세우려 한 것이 아니며, 장래 모든 교회를 위하는 의사는 더욱 없었다고 하나이다. 이런 해석은 여권운동이 대두하는 현대사조에 환영을 받는 해석은 되지만, 성경 본문에 상하 문맥을 살펴볼 때 도무지 용납할 수 없는 해석입니다. (중략)

 

고린도전서 14장에 여자의 교회 공석상 언권을 불허한 것도 그 교훈 강도권과 치리권을 모두 금지하는 의미를 가진 것은 분명하지만 디모데전서 2장 12절에는 두 가지를 갈라 말하였으니 즉 '가르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여 여자의 공예배석에서의 교훈 강도권을 금하고 또 '사나이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여 그 교회 치리권을 금하였나이다. (중략)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 여자에게 교권을 불허하는 이유 두 가지를 다시 말하였으니 (1) 13절에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는 후에 지음을 받았으며'라고 말하여 창조의 차례에서 여자가 남자보다 뒤졌다는 것을 지적하였나이다. (중략) (2) 다음에 14절에는 바울이 하와가 아담보다 먼저 유혹을 받아 죄에 빠진 사실을 말하여 선천적으로 여자는 남자보다 교도(敎導)의 재능이 결핍함을 지적하였으니 그것은 여인의 교권을 금함에 보다 더 강한 이유였나이다. 그리고 15절에서 여자의 천직은 가정생활이라는 의사를 표시하였다는 것도 여러 성경학자의 주장하는 바 참고할 만한 견해라고 생각하나이다. 그러면 창조의 차례와 천부(天賦)하신 재능에 의하여 교회에서의 남녀의 지위와 직무가 다르다는 것을 가르친 이 말씀을 어찌 일시적 지방적 교훈으로 볼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정하여 놓으신 원리 원칙에 의하여 명령된 것은 아무래도 만고불변의 진리 됨이 분명합니다. (중략)

 

성경은 여자의 교권을 불허한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여권운동이 대두하는 현 시대사조에 영합하기 위하여 성경을 자유롭게 해석하는 것은 그 정신 태도가 파괴적 성경 비평의 정신 태도와 다름이 없나이다. 성경 상하 문맥에 가르친 말씀은 돌아보지 않고, 세상 사람의 욕심에 맞도록 난데없는 딴 해석을 붙이는 것은 성경의 신성과 권위에 대한 막대한 능욕입니다. 이렇게 성경을 경멸히 여기는 인물들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요, 신앙과 본분의 정확 무오한 유일의 법칙으로 믿는 우리 장로교회의 교역자로 용납할 수 없나이다."

이에 따라 연구위원회는 김춘배 목사를 치리해야 한다고 했다. "성경의 파괴적 비평을 가르치는 교역자들과 성경을 시대사조에 맞도록 자유롭게 해석하는 교역자들을 우리 교회 교역계에서 제외하기 위하여 총회는 각 노회에 명령하여 교역자의 시취 문답을 행할 때에 성경 비평과 성경 해석 방법에 관한 문답을 엄밀히 하여 조금이라도 파괴적 비평이나 자유주의의 해석 방법의 감화를 받은 자는 임직을 거절케 할 일이오며 이미 임명을 받았던 교역자가 그런 교훈을 하거든 노회는 그 교역자를 권징조례 제6장 제42조, 43조에 의하여 처리케 할 일입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24회 총회 회의록 중 김춘배 목사 조사 보고서 일부. 
조선예수교장로회 24회 총회 회의록 중 김춘배 목사 조사 보고서 일부. 

김춘배 목사는 23회 총회가 자신에 대한 조사를 목적으로 한 연구위원회를 구성하자, 1935년 2월 20일 이미 위원회에 '석명서'를 보내 자신의 입장을 철회했다.

"<기독신보>에 게재된 '여권 문제'에 관한 필자의 석명

 

<기독신보> 제977호에 게재한 '여권 문제' 중에 교회에 폐해를 끼칠 문구가 있다 하여 총회에서 논의되고 연구위원을 택하기에 이르러서 여러분들에게까지 걱정을 끼쳐드리게 됨은 필자로서는 황송함과 책임의 중대함을 느끼고 이에 필자의 본의를 고하여 여러분에게 참고하게 하려 하니 하량하소서.

 

1. 그 게재문의 근본 의도가 성경을 해석하려 함이 아닙니다.
2. 우리 조선예수교장로회에도 벌써부터 여자가 교회에서 가르치고 있는 사실에 의하여 그같이 말한 것이올시다.
3. 그러나 그 문구가 만약 성경의 권위와 신성을 손하고 교회에 폐해가 미칠 염려가 있다면 책임의 중대함을 느끼고 취소하기를 주저치 아니하나이다."

연구위는 이같이 김 목사가 석명서를 보내왔으니 소속 노회에 참고하게 할 것이라며 보고서를 마무리했다. 여성에게도 안수를 줘야 한다고 주장했던 목사에 대한 교단의 첫 반응은 '징계 위협'이었다.

쟁쟁한 신학자들에게 "성경 오해했다"

연구위원회 보고서는 24회 총회 회의록과 <기독신보>에 게재됐다. 이를 본 장민숙이라는 여성은 총회가 끝난 뒤 1935년 10월 16일과 23일, 30일 세 차례에 걸쳐 <기독신보>에 '기독신보를 읽고서'라는 제목으로 글을 썼다. 장민숙은 "목사도 아니고 전도부인도 아닌 평신도의 눈으로" 24회 총회를 비판했다. 그는 "교파 분쟁, 권리 다툼, 여권 문제 반대, 신구약 저자 논쟁, 그야말로 중세기 한가한 선배들이 바늘 끝에 천사가 몇 명이나 머물 수 있겠느냐 없겠느냐 토론한 것과 무엇이 다를 것이냐"고 강하게 규탄했다.

"(전략) 예수님 당시에 유대 나라가 퍽이나 남존여비의 사상이 뿌리박힌 것을 볼 수 있으니, 예를 들면 같이 죄를 범하였어도 여자만 끌고 왔던 것만 봐도 알 것이다. 이때 예수님이 어떻게 치리하셨는가. 그에게 구원을 허락치 아니하셨나. '너는 여자이니 유대국 사상에 의하여 벌주어야 되겠다'고 안 하셨다. 활발한 베드로 실수할 때 '너는 남자이니 용서하겠다'고 하신 예수님은 성경에서 찾아볼 수도 없다. 오직 예수님 세상에 계실 때 하루 저녁이라도 잘 대접하겠다고 분주히 음식 준비한 이도 여자이고, 떠나시기 전에 귀한 말씀 더 배우려고 애쓴 이도 오직 그 시대 어려운 남존여비 시대에 있는 마리아의 가정 아름다운 형제가 아니고 무엇이랴. 활발한 베드로는 세 번이나 모른다고 도망갔으며 마가 요한은 홑이불만 감은 채 도망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그 외 여러 부인들은 어찌 되었는가. 칼을 들고 몽치 가지고 창을 비켜 든 틈에서라도 모든 부인들 슬피 통곡하며 따라갔다. 그뿐이랴. 무덤에 먼저 간 이도 여자이며 예수를 먼저 뵌 이도 여자이며 제자에게 첫 번 전도한 이도 여자이다. (하략)"

"재작년에 어떤 목사님과 어떤 여선생이 '여자가 목사 될 수 없다, 될 수 있다' 많은 성경 구절까지 인용하여 글을 쓴 것 본 기억도 난다. '아직 조선은 시기상조'라면 모르거니와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은 1000만 여성을 무시하는 것이다. 아니 교회에서 그런 말이 나와야 할 것인가. (중략) 

 

세상 정치계에서도 여자가 대활약하거든 하느님나라에서야 어찌 남자와 같이 일을 아니할 것인가. 목사가 교회 위하여 땀을 흘리는가. 반드시 여자도 같이하여야 할 것이다. 순교한 이가 있는가. 어서 여목사도 있어서 예수님 위하여 순교할 만한 교역자가 조선에서 나기 바란다. 치리하지 말고 어서 나기를 바라야 한다. 칼이 잘 드는지 안 드는지 전쟁에 가서 시험하기 전에는 도저히 그 힘을 확실히 모른다. 아직 여목사가 조선 사람 중에 없고 또 조선의 장로교에서는 절대로 여자는 설교권을 안 주니까 얼마나 손해인가. (중략)

 

나는 지금 목사가 얼마나 많이 세상으로 보아서 타락한 이가 많은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여목사가 많이 생기게 되면 그런 재미없는 일은 없을 줄 바라고 참으로 목사다운 여자 목사가 조선에서 나기 바란다. 따라서 여러분 1000만 우리 여성들이여, 우리 권리, 우리 이상, 우리 할 사업 누구의 할 것입니까. 마땅히 우리가 해야 되겠습니다. 가정에서부터 귀한 하느님의 자녀를 기르실 때 부모 되시는 분은 아들과 딸을 당신의 소유가 아니고 물건이 아닌 이상 여자라고 천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을 중히 여기지 않는 가정이나 사회는 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다 주님의 나라와 부패한 이 사회에 한 줌의 비료라도 되기 위해 교육하고 부모의 전 책임을 쏟아 놓을 것뿐입니다. 이렇게 된다면은 할 일 많은데, 지금 이번과 같은 결의 조건은 생기지도 않을 것입니다. 남녀 차별을 버리고 예수님과 같이 인류 구원하기 위해 남녀가 다 일하러 나서야겠습니다. 우편 좌석이나 좌편 좌석을 차지할 분은 있습니다. 역시 하느님의 자녀랍니다. 누구에게 올지 모르나 하느님 자유에 있습니다. 여러분 여성들이여, 용기를 내소서. 

 

구라파에서는 동등을 외친 소리가 오래였으며 현재 혁명가가 얼마나 많은지 아실 것입니다. 사회에 눈뜨시고 우리가 가져야 할 책임을 반드시 가져야 되겠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 먼저 어느 사회보다도 기독교 신자가 먼저 여성운동 전선에 희생자가 안 되면 누가 되겠습니까. 무엇이든지 철저한 정의의 여성운동을 방해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 의미에서 여성운동 반대하지 말기를 여러 교역자께 바라는 바입니다. (중략)

 

한 가지 통탄할 일은 우리 조선은 여자 사회가 캄캄한 밤중이다. 언제나 깊이 든 꿈속을 뛰어나와 뒤떨어진 우리 갈 길 달음질쳐야 하겠다. 꼭 우리의 권리는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잃어버렸으니 우리가 찾아야 할 것입니다. 달라고 할 대상을 찾으려고 하지 말고 사실상 무엇으로 보든지 피동적이었으니 자발적으로 모든 사업을 순서 있게 하기 위하여 부단의 노력을 하여야 하겠다는 것을 주장하고 앞날의 성공을 예약하고 <기독신보> 독후감과 신자로서의 우리 교회가 너무도 문제가 많은 것을 비통히 생각하고 소나기 온 후 볕이 나는 것과 같이 어서 속히 흑운의 막이 걷어지기를 기도하면서."

최영혜 여전도회장은 <기독신보>에 여성 안수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의견을 피력했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최영혜 여전도회장은 <기독신보>에 여성 안수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의견을 피력했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최영혜 함남노회 여전도회장도 이듬해인 1936년 1월 22일과 29일 두 차례에 걸쳐 <기독신보>에 '여권 문제에 대하여'라는 글을 게재했다. 최영혜 회장은 당시 교단에서 신학적으로 이름을 날리던 연구위원회 위원들을 상대로, 성경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했다며 정면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전략) 성도답지 못한 남자가 교회의 최고 지위를 가지고 노회와 총회에서 질투 분쟁을 일으켜 세인에게 추태를 나타내는 남자가 많습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권리남용하는 여신도에게 '저들의 말하는 것을 허락치 않는다'는 말만 성구로 알고, 갈라디아 교인에게 '그리스도 안에서는 남녀 분별이 없다'는 말은 성경으로 간주하지 않으며, 부녀들을 도우라는 말과 겐그레아교회에서 여집사 뵈뵈를 자기와 같이 영접하고 성도의 합당한 대로 대접하라 하였으니, 대접이라 하는 것은 식물을 주는 것으로만 대접인가요? 바울과 같이 공기도권과 설교권과 행사할 수 있는 직권을 의미함이 아닌가요? (연구위원들이 - 편집자 주) 성도는 남자로만 아셨다 하면, 오해가 극심하든지 성경을 인식하지 못하였다고 아니할 수 없는 것은, 이 모든 성경이 증명하고 있는 남녀 동일한 교회 치리권을 알지 못함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자기 가족적 하나님으로 안 것과 유대인이 하나님을 자기 민족적 하나님으로 편견한 것과 다름이 없지요."

"(전략) 작년에도 중화의 채정민 목사가 '여자에게는 교회에서 언권 없다' 하는 제목하에 우리 여성을 모욕적 언사로 저주까지 하고 성경을 짐짓 그릇 해석하여 <기독신보>에 기재한 고로 제가 즉시 <기독신보>를 통하여 변증하였거니와, 금번에 이 문제를 다시 진술케 됨은 총회 성경연구위원도 남녀 성의 동일한 교권을 부인함으로 답변치 않을 수 없사오며, 제가 주의 도를 받은 지 31년 이상 모든 성경을 의지하여 여자에게 교회 치리권이 있는 것을 확신하였는 고로, 장로교 정치를 모르는 것은 아니나 제가 깨달은 것을 묵과할 수 없으며 일반 교우에게 각성을 촉진할 수밖에 없어서 1933년 함남에 있는 여신도 104인의 동의를 얻어 연명하여 함남노회를 통과하여 선천에서 개회된 장로교 총회에 남녀 동일한 교권을 달라고 청원하였더니, 정치를 개정할 필요가 없다는 조건하에 퇴각을 당하였으나, 1934년에 다시 함남에 있는 22처 교회 639인의 동의자가 연명해 함남노회를 경유하여 총회 제출하여 달라 하였더니, 함남노회는 연년이 문제를 총회에 제출하기 미안하다는 조건하에 퇴각함으로 제가 당석에서 일장 설명하고 만고에 유한을 품고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낙심치 않고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을 믿고, 남자들이 여성에게는 치리권을 안 주는 것을 진리로 아는 것같이 '나는 치리권을 찾아야 하겠다'는 것은 내가 각오한 진리입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점령하여 그 땅을 자기 동족에게 주는 것이 주께 받은 사명이고 자기 책임인 고로, 이를 이행하기 위하여는 교회 규칙의 부자유한 정치를 타파하지 아니하고는 우리 여신자는 주께 받은 사명을 다할 수 없으니, 하나님의 공의와 의분을 가지신 성도여 일어나셔서 이런 불공평한 교회 정치를 철폐하여 주시오며 총회 성경연구위원 여러분은 주의종 바울이 정한 성경 한 구절만 가지고 우리 여신도를 압박하고자 하나, 저는 우리를 구원하신 내 주의 모든 허락하신 말씀을 믿고 의지하여 이 일을 성취하는 날까지 약한 무릎을 꿇고 주님께 기도하나이다."

이처럼 절규에 가까운 여성들의 목소리에도, 이후 10여 년간 총회에서 여성 안수 문제를 다룬 기록은 없다. 1946년 해방 후 첫 총회에서 여전도회연합회 지도자이자 여성 운동가였던 김필례·유각경·신의경·김말용 등이 치리를 무릅쓰고 여성 안수를 요구했으나, 총회는 "통일될 때까지 여성 안수는 보류한다"고 결정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이후 12년 뒤 1958년 43회 총회 때 "여전도대회에서 실행위원 김필례 씨 외 11명이 청원한 여장로를 피택케 하여 달라는 건은 허락할 수 없사오며"라는 결의가 있었다.

1950년대는 조선예수교장로회가 대한예수교장로회로 이름을 바꾸고, 크게 분열한 시기다. 1952년 고신파가 떨어져 나가고, 1953년에는 대한예수교장로회와 한국기독교장로회로 분열했으며, 1959년에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과 통합으로 분열하면서, 여성 안수 논의 또한 각 교단에 따라 향방을 달리하게 됐다.(계속)

참고 문헌

- <기독신보> 734~737호, 977호, 979호, 1037~1039호, 1051~1052호
- 조선예수교장로회 21~24회 총회 보고서
- 김양선, <한국기독교해방십년사>,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종교교육부, 1956
- 이우정·이현숙, <기장 여신도회 60년사>, 한국기독교장로회 여신도회전국연합회, 1989
- 양미강, '참여와 배제의 관점에서 본 전도부인에 관한 연구 ', <한국 기독교와 역사> 제6호, 1997
- 서영임, '여성 목회자 안수의 역사와 전망-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교단 중심으로', 숭실대학교, 2010
- 임희국, <공감, 교회 역사 공부>, 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 2014
- 홍인표, <여성과 한국교회>, CLC, 2019
- 서선영, '1930년대 함경남도 장로교회 여성들의 자아 정체성과 치리권 청원', 장로회신학대학교,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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