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에이티드 칼럼] 코로나19 그리고 매개에 대한 개신교적 상상
종교와 미디어의 접점에 관심을 갖는 미디에이티드 연구자들이 지난 몇 주간 '코로나19 이후 한국 개신교와 미디어의 관계'를 짚는 연재 글을 내고 있다. 관심 있게 읽어 온 독자라면 눈치챘겠지만, 연재 글들은 '미디어'뿐 아니라 '매개'(mediation) 개념 또한 핵심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 글은 '매개' 개념이 중요해진 맥락을 소개하고, 이 개념이 현 코로나19 국면을 맞이한 개신교 신자 개인과 공동체에 가져다줄 수 있는 효용을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이성·과학·계몽을 골자로 하는 근대성이 종교의 쇠퇴를 불러올 것이라는 통념을 거슬러, 불안정성과 불확실성이 대두되는 후기 근대 사회에서 종교의 존재감과 영향력은 더욱 커져 왔다. 광기나 혐오의 외양을 보이든, 혹은 치유나 중재, 평화나 정의 같은 명분을 갖든 종교는 하나의 사회현상 혹은 이러한 현상에 대한 대응으로 대두됐다.
신문·드라마·영화를 비롯한 대중매체는, 현대인의 사적이고 공적인 삶에서 파급력과 중요성이 커져 가는 종교를 재현(representation)하지 않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종교도 스스로의 생존과 포교를 위해 대중매체 및 디지털 소셜미디어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동시에 제도 종교가 포섭하지 못한, 혹은 자의적으로 이탈한 다양한 형식의 영적-종교적 공동체 및 운동이 디지털 미디어 공간에서 스스로를 조직하고 표현하기 시작했다. 개인화한 종교 소비자들의 니즈를 맞춰 줄 다양한 영적-종교적 상품 또한 종교 방송, 스마트폰 앱, 유튜브 등을 통해 보급·소비되며 미디어 상품의 형식을 띠기 시작했다.
이러한 현상은 현대인이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일상에서 하는 사회적 상호작용, 의미 부여, 정보 및 감정 공유, 공동체 만들기 등의 근본적 커뮤니케이션 행위들이 '인터넷 - 스마트폰 - 소셜미디어'에 의존하면서 더욱 심화됐다. 전통적으로 제도 종교가 맡았던 종교적-영적 의미 발견 및 공동체 소속감 형성의 기능이 미디어 영역에서 이뤄지게 됐다. 종교와 미디어의 관계에 관심을 갖던 일부 연구자들, 특히 제도 종교의 쇠퇴가 완연한 북유럽 사회 연구자들은 이 현상들을 '미디어화'(mediatization) 개념으로 이론화했다. 후기 근대 사회에 이르러 종교적 공동체 형성, 커뮤니케이션 및 의례의 실천이 미디어 논리(media logic)에 종속되고 있다는 의미에서 이뤄진 이론화 작업이다.
예를 들면, 북미나 아시아의 일부 대형 교회, 불교 분파들은 대중매체와 온라인에서 스스로 영적 상품·서비스로 브랜딩하며, 미디어 상품 형식으로 존재 방식을 재구성한다. 한국의 경우 대한불교조계종이 여행 상품으로 내놓는 템플 스테이(Templestay)가 하나의 사례이며, 혜민 스님 또한 이러한 이론 틀로 설명하기에 적합한 미디어 스타이다. 이는 대중매체와 소셜미디어를 비롯한 미디어 일반이 영적-종교적 의미 발견 및 실천을 위한 주요 자원이 되었음을, 동시에 이를 표현하는 공간 및 언어가 되었음을 드러내는 사례다.
그러나 미디어화 이론은 비역사적이며 현대 중심적(presentist)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미디어를 근대 커뮤니케이션 기술로 한정해 종교와 미디어의 관계가 마치 후기 근대에 이르러서야, 혹은 세속화가 고도로 진행된 사회에 이르러서야 긴밀해진 것처럼 오도한다는 것이다. 특히 이러한 비판은 종교와 미디어의 관계를 '매개' 개념으로 이론화해 온 종교 인류학자와 역사학자들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이들은 종교가 근대사회 이전, 근대 커뮤니케이션 기술이 등장하기 훨씬 이전부터, 그 근본에서 매개(mediation) 실천이라는 사실에 주목한다. 인간과 초월적 존재 사이에 경계선을 긋는 것도 종교이며, 둘 사이를 잇고 연결할 매개의 기술들(technologies)과 실천들(practices)을 제시하고, 가르치며, 전수하는 것 또한 종교이다.
개신교를 예로 들면, 구약의 오프닝 창세기는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경계선을 긋고 둘의 멀어지는 거리를 이야기하는 반면, 신약의 오프닝 복음서는 둘 사이의 깨어진 관계를 예수가 다시 잇는 매개 이야기를 전한다. 개신교 내러티브에서 예수는 희생 제물임과 동시에 제사장이다.
특정 종교 공동체 구성원들이 초월적 대상을 공통으로 상상-인식-경험하려면 무엇인가가 공동체 구성원들의 공통 감각 안에 주어져야 한다. 초월적 대상을 인간의 감각에 와닿게 만드는 모든 매개물은 근본적 의미에서 '미디어'다. '매개' 이론을 경유한 논의에서 미디어는 TV나 디지털 미디어 같은 근대 커뮤니케이션 기술로 정의되지 않는다. 인간과 초월적 존재 사이, 그 거리와 경계를 잇는 모든 매개체, 종교적 실천과 경험에 동반되는 모든 종류의 물질, 즉 의상·음식·향·조명·음악·텍스트·이미지·몸·표정·육성·의례·건축 등이 미디어로 파악되기에 이른다.
이렇게 보면, 초월적 존재와 인간을 잇는 매개물들과 매개 실천들의 전수·훈육이 바로 종교 전통의 핵심이다. 개신교 전통 안에서 △설교 △기도 △예배 △찬양 △성경 읽기의 훈련과 전수는 핵심적이다. 찬양을 이루는 가사, 선율 및 악기들, 성경 텍스트, 강단에서 선포되는 설교자의 언어와 음성, 대형 스크린을 통해 나오는 이미지 등은, 하나님에 대한 신자들의 이해-감각-경험을 구성하는 재료들을 제공한다.
당장 모국어가 아닌 외국어로 진행되는 예배만 봐도, 우리의 '하나님' 경험이 얼마나 절대적으로 매개물에 의존하는지 깨달을 수 있다. 같은 한국어라도 어떤 성경 번역본을 접하는가에 따라, 하나님의 신성한 말씀으로 경험되기도 하고 그렇게 경험되지 않기도 한다. 오랜 세월 교회를 다니신 고령의 교인들은 새번역성경이나 현대인의성경에 거부감을 종종 느낀다. 이는 이분들의 '귀'가 오랜 시간 개역개정성경이라는 매개에 반복 노출되며 훈육돼 왔기 때문이다.
다른 예로, 불과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보수적 교회에서 전자 기타는 세속 음악의 상징으로서, 신성한 예배 음악을 구성하는 악기로는 적합하지 않다고 여겨지곤 했다. 하지만 힐송(Hillsong)으로 대변되는 현대 워십 음악에 익숙한 젊은 세대에게 전자 기타 소리는 하나님에 대한 신성하고 거룩한 경험을 구성하는 주요한 매개물 중 하나이다.
종교개혁 후예들이 (인간의) 행위보다 (하나님의) 은혜를, (가톨릭 성상 같은) 물질보다 (이성-양심-믿음 같은) 정신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인간이 만든 매개'물'과 매개 '행위/실천'을 비본질로 여기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그리 놀랍지 않다. 이들에게 매개물은 하나님이라는 본질을 전하는 비본질적인 도구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신도들로 하여금 신성함의 감각을 형성하게 하는 다양한 매개물의 예에서 그렇지 않음을 확인한다. 제임스 스미스의 <습관이 영성이다>(비아토르)도 일상과 예배를 구성하는 다양한 매개물들의 형성적 힘을 강조한다.]
다만 매개물을 비본질로, 형성적 힘이 전혀 없는 단순한 도구로 격하하려는 이러한 개신교회의 노력들 기저에는, 인간이 만든 매개물이 언제든지 하나님의 위상에 준하는 우상으로 변할 수 있다는 불안이 도사리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자. 또 하나, 매개물은 비본질이라는 인식 혹은 비본질이어야만 한다는 주장들이, 개신교 내부에 도사리는 '우상화한 매개체'들을 직시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모종의 알리바이로 작동하고 있다는 점 또한 지적하자.
단적으로, 한국 개신교회 공동체의 권위적이면서도 살가운 일상의 상호작용 속에서 목회자는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신도에게로 전해 주는 매개자의 자리와 하나님의 위상에 준하는 우상의 자리를 끊임없이 오가고 있다. 만인 제사장이라는 종교개혁의 핵심 교리와, 스스로를 하나님의 '도구'로 낮추는 일부 목회자의 자기 이해가 무색할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스스로를 하나님이라 칭하는 정신 나간 이들을 논외로 한다면, 우상은 그것/그자를 떠받들고 숭배하는 이들에 의해 그 위상에 올라선다. 아론의 금송아지는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 싶은 의도나 진정성을 갖지 않는다. 한국교회 풍경 속에서 목회자가 매개자와 우상의 위상 사이를 오가고 있다면, 이는 목회자 개인의 의도나 진정성과는 다른 층위에서 이를 가능케 하는 구조적 문제가 있음을 시사한다(즉, 목회자들이 '나는 하나님의 자리를 탐하지 않는다'는 말로 면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단편적 예로, 성찬 예식은 개교회들(churches)을 넘어 공교회 일반(Church)의 일원으로서 신도 스스로를 정체화하는 경험을 형성한다. 이는 역설적으로 개교회에서 주일예배 설교를 통해 목회자가 수행해 온 가히 독점적인 매개 권력을 약화한다. 이 같은 이유인지 몰라도, 한국의 대다수 교회 풍경 속에서 성찬 예식은 목회자 설교에 비해 상징적 중요성이나 빈도 면에서 극적으로 약화돼 있다.
매주 성찬 예식을 진행하지 않는다고 문제 삼는 신자는 드물다. 하지만 매주 예배당에서 목회자 설교를 대면하여 들을 수 없을 때 하나님을 충만하게 만나지 못하는 신자는 적지 않다(코로나19는 이를 정확히 드러냈다). 신학 담론 차원에서 만인 제사장의 종교를 자처하는 개신교가, 신앙 실천 차원에서는 목사 제사장의 종교로 존재한다. 개신교의 예배(매개) 실천들은 목회자에게 매개 권력을 집중하는 방식으로 구조화돼 있다. 이 같은 현실을 이해하면, 목회자들이 매개자의 자리와 우상의 자리를 끊임없이 오가는 일이 개인적 의도나 일탈 문제를 넘어 특정 방식으로 구조화하고 제도화한 매개 실천의 문제라는 점을 명확히 알 수 있다.
코로나19 국면은 목회자에게 매개 권력을 집중하는 방식으로 구조화한 현장 예배의 매개 실천을 급격히 중지시켰다. 온라인 예배에서 우리는 목회자 설교를 매개하는 스크린 앞을 떠날 수도, 때에 따라 잠시 설교 영상을 멈출 수도, 영상이 아닌 목회자 음성만을 들을 수도 있다. 온라인 예배는 하나님과 신도 사이의 매개 실천을 상당 부분 신도 스스로 조정·조절할 수 있도록 만든다. 코로나19가 불러온 (대면 예배 중지라는) 단절과 (온라인 예배로의 전환이라는) 변화의 시간 속에서, 매개 개념은 우리의 신적·영적·종교적 경험을 가능케 했던 다양한 매개물과 매개 실천의 배치·수행·효과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도록 돕는다.
논지에서 벗어나지만, 꼭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 비판과 성찰은 '인식적 거리 두기'를 전제하기에, 여러 의미에서 우리의 신앙 대상에 대한 '몰입'과 '헌신'을 방해한다. 그리고 이는 적잖은 고통과 혼란을 초래한다. 몰입과 헌신이 이웃과 하나님을 향해 우리 몸을 끌고 가는 운동을 특징짓는 삶의 양식이라면, 비판과 성찰은 잠시 멈춰서 그 몸이 걸어온 거리·방향·속도를 재고하고 조정하고자 하는 사고 양식일지도 모르겠다. 근대의 풍경 속에서 예수를 우리 몸에 입어 제2의 천성으로 만드는 일은, '몰입-헌신' 그리고 '비판-성찰' 중 어느 하나에만 천착하는 것이 아닌, 이 둘을 부지런히 오가는 이동 및 운동에 그 알짬이 있다고 믿는다.
필자 스스로도, 매개 개념이 제기하는 질문을 비롯한 여러 질문과 함께 몇 년째 '비판과 성찰'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고통은 잦아들었지만, 여전히 혼란스럽다. 다만 이 모든 시간이 새로이 만날 하나님 혹은 진리 사건에 대한 '몰입과 헌신'의 시간을 위한 자양분이 되기를 소망할 뿐이다.
다양한 비판·성찰·질문과 함께 기존에 몰입·헌신했던 대상들에서 거리를 두며 나름대로 고통과 혼란을 경험하는 이들이 있다면, 그 끝이 무엇일지 몰라 필자처럼 공허함 및 두려움에 허덕여 온 이들이 있다면 말해 주고 싶은 게 있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우리 인식 너머의 '확실한 목적지'가 아니라, '몰입-헌신' 그리고 '비판-성찰' 사이를 오가는 이동 및 운동 중에 함께, 가까이 걸을 그런 '동무들'이 아니겠냐고.
마지막으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성찰-질문 속에서도 진리에 대한 몰입-헌신으로 그 십자가의 길을 걸어 낸 예수께서, 우리의 그 이동과 운동의 여정에 동무로서 함께, 가까이 걷고 계시다고 말해 주고 싶다.
김승수 / 태국 쭐랄롱꼰대학(Chulalongkorn University)에서 미디어·문화 연구를 가르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