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에이티드 칼럼] 코로나19가 불러온 비대면 예배, 신앙 공동체의 새로운 가능성

국내 코로나19 확산세가 잠시 누그러진 5월, 한국교회총연합(한교총·공동대표회장 김태영·류정호·문수석)은 짐짓 비장한 어조로 '예배 회복의 날'을 선포했다. '교인 80% 이상 주일예배 참석'이라는 애초의 계획은 산발적 지역사회 감염으로 대폭 축소됐지만, 코로나19 이전 상태로 돌아가려는 한교총의 결연한 의지는 분명히 전달됐다.

필자는 대다수 교회가 대면 예배를 비대면 혹은 가정 예배로 대체하는 상황에서 특정일을 예배 '회복'의 날로 칭한 것에 의아함을 거둘 수 없었다. 도대체 예배의 무엇이 붕괴됐기에 회복해야 한다는 말인가. 온라인 미디어를 통한 예배나 소규모의 가정 예배는 온전하지 못하다는 말인가? 그러나 그들의 우려와 달리, 한 신앙 공동체에 속한 교인이자 미디어를 연구하는 학자로서 필자가 경험한 비대면 예배는 결코 대면 예배의 결핍만을 드러내지 않았다. 오히려 예배의 매개(mediation) 방식이 변화될 때 가능해질 수 있는 새로운 신앙 공동체 모습을 상상하게 만들었다.

흔히 신앙인들에게 예배는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만나는 의례로 여겨진다. 매주 반복되는 이 의례 속에는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 맺음을 구조화하는 수많은 매개가 존재한다. 예배 시간에 부르는 찬양이나 기도, 성경 말씀, 주기도문, 교회라는 공간은 모두 성도가 특정한 방식으로 신적 존재를 경험하게 하는 매개로, 미디어(media)이다. 성도 중 누구도 하나님을 즉자적으로 대면하지 못한다. 다만, 다양한 매개 실천으로 하나님을 이해하고 경험하며 그분과 관계를 맺는 것이다.

예배를 구성하는 매개는 각각 상징과 의미를 갖는다. 문제는 정전(cannon)으로 여겨지는 특정한 매개가 하나님과 성도의 올바른 관계 구성을 넘어 지나치게 절대화되거나 종교 권력을 뒷받침하는 수단으로 사용될 때 발생한다. 예를 들어, 교회는 보통의 장소와 '구분'되어 신적 존재를 특별히 경험하게 만드는 매개지만, 종종 하나님이 머무르는 공간으로 신성화되어 세속 사회와 '분리'되고는 한다. 매개라는 수단이 하나님이라는 목적을 대체하는 것이다.

제도화한 매개는 이처럼 오랜 세월 반복되며 그 자체가 숭배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종교 권력을 유지하게 하는 기능을 수행하여 신이 아닌 목회자를 숭배하게 만들기도 한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예배를 구성하는 전통적 매개는 목회자와 성도의 관계를 '말하는 자/듣는 자', '보는 자/보이는 자'로 고정하며 종교 권력을 지속하게 한다.

오늘날 교회에서 이뤄지는 주일예배를 상기해 보자. 예배 시작부터 끝까지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은 예배 인도자와 설교자로 한정된다. 예배에 참여하는 성도는 찬양과 사도신경, 성경 봉독 및 주기도문 같은 장치를 통해 발화하지만, 그 속에는 자신만의 언어가 결여되어 있다. 가장 사적이고 내밀한 진실의 언표를 뜻하는 고백(confession)이란 개념이 점점 특정 교리에 대한 규범적 진술인 '신조', 혹은 그것을 진리로 삼는 '교파'를 의미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기독교가 제도화하는 과정에서 성도들의 언어가 가난해졌음을 드러낸다.

물론, 경우에 따라 일종의 이벤트로 성도들의 간증이 예배 시간에 발화되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간증은 '기 - 승 - 전 - 하나님이 하셨어요'로 끝난다. 소재만 달라질 뿐 내러티브 구조가 크게 변하지 않는다. 교회라는 공간이 주는 위압이, 신앙 공동체에 엄연히 존재하는 미시 권력이, 진리로 공표된 타인의 언어가 스스로를 검열하게 만든 결과이다.

심지어 예배 중 가장 많은 시간을 차지하는 설교는 오로지 목회자의 것이다. 목회자는 예배를 통해 선포될 성경 구절을 선택할 권한뿐만 아니라 성경에 대한 해석을 독점한다. 성경을 해석한다는 것은 단순히 해당 텍스트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 텍스트에 해석자의 실존을 밀접하게 접목해 의미를 확장하는 실천이다. 대부분의 한국 개신교 목회자들이 중년 남성인 탓에 해석의 지평은 특정 젠더와 나이, 사회적 신분에 국한된다. 성경에서 배제된 여성들의 목소리를 복원하는 작업이나, 장애인, 이주 노동자, 청소년 및 비정규직 노동자의 삶으로 읽어 낸 성경 말씀이 좀처럼 교회에서 들리지 않는 이유이다. 종교개혁 이후 모든 성도에게 성경을 해석할 권한이 주어졌지만, 제도화한 매개는 목회자만을 공인된 해석자로 만든다. 그렇게 목회자는 하나님과 성도를 잇는 '매개자'가 아닌 진리 담지자가 된다.

한편, 의례로 행해지는 매개는 성도를 '듣는 자'인 동시에 '보이는 자'로 구성하며 종교 권력에 성도를 종속시킨다. 전통적 예배당 구조를 한번 떠올려 보자. 높은 강대상은 언제나 공간의 중앙에 위치하며, 예배에 참여하는 성도들의 신체를 목회자가 한눈에 볼 수 있도록 만든다. 마치 제러미 벤담(Jeremy Bentham, 1748~1832)이 고안한 원형 감옥(panopticon)처럼, 성도들은 목회자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심지어 규모가 큰 교회는 종종 카메라 기술을 활용해 '모범적인' 성도의 모습을 실시간으로 스크린 위에 전시한다. 언제 카메라 '세례'를 받을지 알 수 없는 성도들은 매 순간 자신의 태도를 스스로 검열한다. 결과적으로 종교의 시선 권력을 내면화한 성도는 예배에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하나님께 구속되는 대신, 오히려 종교 권력에 종속된다.

이처럼 목회자와 성도의 관계를 '말하는 자/듣는 자', '보는 자/보이는 자'로 위계화하는 모든 과정의 중심에는 찬양, 설교, 예배당과 같이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의례로서의 매개'가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앞선 진술은 목회자 한 사람의 탐욕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와 정반대로, 이 모든 과정은 성도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완성된다. 또한, 이 글이 오랫동안 전통으로 이어져 온 예배의 형식을 다 없애자는 주장으로 읽혀서도 안 된다.

전술했듯이, 문제는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를 잇는 매개가 본래의 상징과 의미를 상실한 채 절대화되거나 왜곡될 때 발생한다. 그리고 이러한 부작용은 역설적이게도 그 매개가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해질 때 발생한다. 특정 인물이나 도구, 장소 및 실천이 하나님과의 진실된 관계 맺기를 위한 매개이자 수단임을 인지하려면 그 대상과의 일정한 인지적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하지만 전통과 제도라는 이름으로 부여된 매개는 그러한 틈을 예배자에게 허용하지 않는다. 매주 환기 없이 반복되는 의례 또한 인지적 거리를 좁혀 놓는다. 그렇게 대상과의 인지적·정서적 거리가 충분히 확보되지 않았을 때,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라 그 대상을 숭배하게 된다.

익숙함이 문제라면, 해결책은 익숙한 것을 낯설게 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사실 우리는 이미 이 낯섦을 경험하고 있다. 코로나19로 시작된 비대면 예배는 다양한 형태의 매개를 만들어 내면서 성도를 새롭게 주체화하는 것은 물론, 기존의 종교 권력을 곤궁에 몰아 넣고 있다. 온라인으로 매개된 예배에서 성도는 더 이상 보이는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철저히 비가시화하여 종교의 시선 권력으로부터 탈주한다. 보는 사람이 없으니 자신의 신체를 타인의 기준에 맞춰 규율할 필요도 없다.

이제 신체의 규율은 오로지 예배자의 진정성에 의존한다. 비가시화한 성도는 사적인 발화 또한 가능해지며, 때로 그들이 속도의 주인이 되기도 한다. 진리로 부여된 말씀을 수동적으로 소비하는 것 대신, 성도들은 재생 버튼과 일시 정지 버튼 사이에서 질문하고 성찰할 기회를 얻는다. 목회자의 설교를 포함해, 다양한 매개를 낯설게 보기 시작하는 것이다.

물론, 온라인 예배로 전환하는 것이 모든 문제의 답이 될 수는 없다. 디지털 미디어를 소유하지 못하거나 이용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게 비대면 예배는 낯섦이 아니라 이중의 소외다. 그럼에도 비대면 예배에 주목하는 것은, 낯설어진 예배의 형식이 우리를 '길 위의 신학'으로 초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학을 '진리-과정'으로 설명한 신학자 캐서린 켈러(Catherine Keller)는 부호화한 신학적 명제들이 현재 우리가 직면한 삶의 문제를 다르게 사유하도록 돕지 않는다면, 그 명제들은 생명력을 잃은 것이라 말한다.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의례적 매개들이 나와 하나님, 그리고 나와 내 이웃의 관계를 성찰하지 못하게 만든다면, 그것들로부터 한 걸음 물러나 진리-모험을 떠나야 한다. 낯선 길 위에서 우리는 기존 매개들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거나, 상상하지도 못했던 새로운 가능성과 만나게 될 것이다.

유지윤 / 콜로라도대학교에서 미디어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연구소에 소속된 전문연구원이자, 전북대학교에서 전임 강사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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