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에이티드 칼럼] 한국 개신교의 코로나19 대처가 재조명한 종교와 미디어 문화 연구 담론

아래는 10월 6일 한국종교문화연구소 뉴스레터에도 실린 글입니다. - 편집자 주


얼마 전 교회발 코로나19 확산이 늘어날 때 한국의 보수 개신교계를 '대표'하는 것처럼 소개되는 인물·단체들의 발언을 접했다. 그들에게 정말 심각하게 질문하고 싶은 게 생겼다. 해당 발언을 정리해 보면, 그들이 말하는 '목숨'과도 같은 '종교의자유'는 맥락상 '예배를 집행할 자유'에 방점을 두는 것 같고, 그 '예배' 역시 좁은 의미에서의 예배, 즉 함께 모여서 일정 시간 동안 진행하는 '제의'(ritual)로서의 예배를 의미하는 것 같다. 이러한 좁은 의미의 제의적 행사에 대한 대면/비대면 여부는 각 교회가 자발적으로 결정할 문제이지, 정부가 허락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라는 주장이 핵심인 것 같다. 주장을 펼치는 과정에서 교회를 '영업장이나 사업장'으로 취급하지 말아 달라는 발언도 나왔다.

보수 개신교계 안에서조차도 비대면 예배의 타당성을 지지하는 발언은 이미 적지 않게 나오고 있으니, 이 글에서는 '대면 예배만을 예배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주장에 대한 변증을 따로 다루지 않겠다. 다만, 비대면 예배도 '신학적으로 문제가 없다' 정도 시각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예배를 포함한 다양한 종류의 '매개된 종교 행위'가 실용적 측면과는 별도로 그 자체만으로도 너무나 경이로운(marvelous, awe-inspiring) 일로, 종교적 맥락 안에서 이루어지는 매개된 소통(mediated communication)은 그 자체가 어떤 면에서 신적인 것이기까지 하다고 첨언하고 싶다.

즉, 매개된 소통 그 자체는 다른 종교들은 물론이거니와, 기독교적 관점에서 봤을 때, 인간이 마땅히 누려야 하는 신적인 속성(divine attribute)을 지닌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매개된 소통의 장은 각종 악용에 따른 병든 부분들을 더욱 회복해야 하고 해방해야 할 영역이다. 이러한 개념은 필자의 학위논문 일부에서도 다뤘으며, 올해 무료로 배포된 <Digital Ecclesiology(디지털 교회론)>라는 전자책에 포함돼 있는 여러 해외 학자의 글들도 해당 주제와 관련해 많은 통찰을 제공하고 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더 이상 나열하지 않겠다.

그럼에도 대한민국 개신교를 대표한다는 분들에게 기초적이고도 근본적인 질문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도대체 언제부터 종교개혁을 통해 탄생한 개신교가 '제의 중심'의 종교가 됐는가. 개신교인에게 '목숨과도 같은' 것이라면 '개신교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는데, 그게 언제부터 '제의'였단 말인가. 물론, 한국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의 보수 개신교회에서도 이른바 '주일성수'를 중심으로 한 정기적 제의가 개신교 신앙의 핵심으로 여기게 된 지 오래다. 신학교는 고사하고 고등학교 세계사 시간에 종교개혁에 대한 겉핥기식의 정보만 접했어도, 제의 중심적 신앙은 개신교와 결이 매우 다르다는 사실을 알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왜 한국의 보수 개신교계를 대표한다는 분들이 오히려 개신교에 대한 근본적인 오해를 고착화하는 발언을 하는 걸까.

납득이 잘 안 되는 발언은 또 있다. 바로 교회를 '영업장이나 사업장'으로 취급하지 말아 달라는 부분이다. 역시 종교개혁에서 가장 파격적이었던 선언들 중 하나가 '성속 구분'에 대한 반론이 아니었던가. 개신교 신앙의 핵심 원리를 일관성 있게 적용할 경우, 모순적이게도 제도 교회 및 리더들의 종교적 권위와 권력이 근본적으로 도전받게 되기 때문에, 오히려 그러한 권력을 보호해 줄 수 있는 종교개혁 이전의 관점으로 돌아가려는 생각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그렇다면 개신교와는 도무지 맞지 않는 이러한 신앙관·예배론·교회론 등이 왜 확대재생산되는 것일까? 더군다나 현재의 코로나19 시국에 왜 그러한 관점들을 재고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강하게 밀어붙이려고 하는 걸까? 물론 이러한 (실제로 일어나는 사회·문화 현상에 대한 실증적 질문이라는 측면에서) 사회과학적 의문점들을 한 방에 해결할 수 있는 설명을 내놓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적어도 큰 부분을 설명해 줄 수 있는 학문적 접근들은 이미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미디어와 (종교를 포함한) 문화의 영역에서 권력 문제를 비판적으로 들여다보는 학자들이 있다. 이들이 취하는 접근은 크게 둘로 구분해서 정치 경제(political economy)와 문화 연구(cultural studies)로 나눌 수 있다. 정치 경제적 관점에 가까울수록 '문화' 영역도 결국 권력으로 구성된 경제적 구조에 좌우되는 경향이 강한 것으로 보고 있다. 문화 연구에 더 집중하는 학자들은, 그럼에도 그러한 구조들을 유지하려는 권력에 대항해 다양하고도 창의적인 형태로 저항하고 스스로를 해방하려는 시민들의 활동에 더 초점을 둔다.

다시 말해, 구조(structure)와 주체성(agency) 중 어느 부분에 더 방점을 두느냐의 차이이다. 물론 극단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 둘 중 어느 한쪽의 접근만 타당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케바케'(case by case)일 수밖에 없다. 구체적으로 어떤 문화 현상을 어떤 맥락에서 다루고 있느냐에 따라, 정치 경제와 문화 연구의 접근이 각각 갖고 있는 설명력이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정치 경제와 문화 연구 간의 상호 관계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Robert Babe의 <Cultural Studies and Political Economy: Toward a New Integration>이나 Tanner Mirrlees의 <Global Entertainment Media: Between Cultural Imperialism and Cultural Globalization>이라는 책에서 잘 정리하고 있다).

그런데 필자가 보기에는 적어도 목사 중심, 제의 중심, 성속 구분과 같은 한국 개신교 내의 현상들은 정치 경제적 관점으로 많은 부분이 설명되는 것 같다. 이 말을, '대한민국 목사들 개개인이 돈에 눈이 멀어 교회 운영을 위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뜻으로 오해하면 안 된다. 오히려 많은 경우 그들은 자신들이 하는 말들을 스스로도 굳게 믿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믿고 있는 개념들이 개신교 본래의 가르침과 정면으로 충돌하지만 왜 확대재생산이 되고 수많은 개신교인이 받아들여 믿고 실천하고 있는가, 하는 거시적 질문에 어느 정도는 일반화할 수 있는 대답을 제공하는 관점이 정치 경제적이라는 말이다.

통계 발표 시기 및 단체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현재 대한민국에는 대략 6만~8만 개의 개신교회가 있다고 한다. 참고로 편의점은 대략 4만여 개 있다고 한다. 개신교회 숫자가 많게는 편의점 숫자의 두 배다. 그런데 편의점은 아무나 거부감 없이 드나드는 장소이다. '개종'과 같은 인식 변화의 필요 없이 모든 사람이 대상 고객이다. 반면, 대한민국 개신교인 수는 1000만이 조금 안 돼서, 이제 전체 국민의 20%에 못 미친다.

시장의 용어를 빌려 개신교인 수를 수요(demand)로 보고, 개신교회 및 목사의 수를 공급(supply)로 상정해 봤을 때, 수요보다 공급이 이만큼이나 과하게 유지되는 '업종'이 또 있을까. 신자유주의 경제체제하의 시장 모습을 어느 업종보다도 충실하게 구현해 내고 있으며, 그에 맞게 개신교회 간의 신도 수, 보유 자산, 건물 크기 등의 차이도 너무 크게 난다. 세계에서 미국 다음으로 많다고 하는 한국의 대형 교회와 서울에서 거의 길 건너에 하나둘씩 보이는 상가 교회 간의 격차는 웬만한 대기업과 영세기업 간의 격차에 못지않다.

이러한 구조적 상황에서 '만인사제론' 등 개신교의 사상과 정반대일지라도 목사에게 부여되는 영적·신적 권위, 또는 '물리적 장소에 모여서 함께 드려야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다' 같은 생각이 쉽게 재고될 수 있을까? 적어도 '종교'를 포함하는 '문화'에 대해 정치 경제적으로 접근하는 학문적 입장에서는 쉽지 않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이것이 단순화한 경제적 결정론(determinism)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결정론에도 '결국에는 모든 것이 정치 경제적으로 결정된다'(determinism in the last instance)는 관점이 있고, '주체성과 저항도 일단은 정치 경제에 의해 결정된 상태에서 출발한다'(determinism in the first instance)는 관점이 있다. 요즘에는 전자를 주장하는 학자들이 거의 없다. 어떻게 보면 현 시국에서도 대다수 교회가 대면 예배를 자제했다는 사실이 단순화한 결정론을 반박해 주는 사례일 수도 있다.

하지만 방역 수칙을 무시하고 자신들의 관습을 강행했던 교회가 '일부'라고는 하더라도 그 '일부'의 숫자가 많다. 특히 나라 전체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해 보면 말이다. 그리고 대면 예배 강행까지는 아니더라도 제의 중심, 목사 중심, 성속 구분 및 제도 중심적 담론들이 재생산되는 개신교회 현장은 적어도 필자가 보기에 극히 '일부'는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앞으로 한국교회는 어떻게 될까? 역시 정확한 예측은 불가능하다. 억지로 예상해 보더라도 전문가들은 한 가지가 아닌 몇 가지 가능한 시나리오들을 내놓을 것이다. 여기서 미디어 문화 연구의 주요 논쟁점을 또 하나 언급해야 하는데, 바로 '기술결정론'(techno-determinism)에 관한 시각 차이다. 정보 매체 기술의 변화가 사회에도 피할 수 없는 변화를 가져다주는 막대한 영향력이 있다는 관점과, 인간의 주체성이 기술의 변화를 적극 분별하여 수용하기 때문에 기술의 변화가 '결정적이다'(deterministic)고는 할 수 없다는 관점 사이의 긴장이 존재한다.

이 역시 위에서 언급한 정치 경제와 문화 연구 간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맥락과 상관없이 어느 한쪽의 관점만 항상 옳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최근 학계 안에서 기술결정론을 기각하려는 유행이 없지 않다. 필자는 코로나19에 따른 온라인 종교 활동에 대한 논의가 필요해졌다는 현실 자체가, 기술결정론이 통째로 기각될 수 있는 관점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고 생각한다('매체', '기술' 등의 개념에 대한 광범위한 정의와 함께 '기술결정론'이 여전히 유효한 관점이라는 주장은 John Durham Peters의 <The Marvelous Clouds> – <자연과 미디어>, 이희은 역 – 라는 책에서 자세하게 풀어 주고 있다).

어떤 방향으로 종교, 특히 개신교가 변화할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혹자는 '가진 교회'와 '못 가진 교회'의 극심한 격차가 더 벌어져서, 새로운 환경에 대처할 자본과 기술 등을 갖춘 교회들만 살아남게 될 것이라고 예측한다. 어떤 비평가들은 원래부터 개신교가 추구해야 했던 정치적·신학적 민주화가 마침내 새로운 환경에 의해 반강제적으로 불완전하게라도 추진될 것이라는 다소 긍정적인 관측을 내놓는다. 한편, 웬만한 업종보다 훨씬 더 과잉 공급 상태인 '개신교회 시장'이 새로운 환경에서는 뼈를 깎는 고통의 과정을 거쳐 어느 정도는 '정리'될 것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분명한 것은, 교회를 운영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본래 의미에서의 '교회' 전체가 치열하게 고민하면서 지금까지 제기된 논의 지점과 씨름해야 한다. 개신교에서 제의와 목사의 위치 및 역할, 종교적 맥락에서 이루어지는 매개된 소통 행위가 던져 주는 시사점들, 성속 구분, 사회 문화 현상으로서의 종교에 대한 정치 경제와 문화 연구의 비판적 시각차, 종교와 기술결정론 등에 대해서 말이다.

홍승민 / 고려대학교 강사,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 종교와 미디어, 그리고 문화 간의 접점에 관심을 두고 연구해 오고 있다. 고려대학교 국제대학원과 국제학부에서 한국의 문화 및 한국의 종교에 관한 과목을 가르치고 있다.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