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루터교회 최주훈 목사가 '명화'를 주제로 연재를 합니다. 연재는 격주 수요일 발행합니다. - 편집자 주  
루카스 크라나흐, '율법과 은총'. 사진 출처 Herzogliches Museum
루카스 크라나흐, '율법과 은총'. 사진 출처 Herzogliches Museum

독특한 그림입니다. 그림 한 장에 성경 전체 사건과 메시지를 담는다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요. 교회 좀 다녀 본 사람이면 누구라도 이 그림을 성경과 연결해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교회학교 아이들에게 설명을 맡겨도 훌륭한 교육교재가 될 겁니다. 

이 그림은 알브레히트 뒤러, 한스 홀바인과 더불어 16세기 독일의 3대 화가로 알려진 루카스 크라나흐(Lucas Cranach der Ältere, 1472~1553)의 작품, '율법과 은총'입니다. 크라나흐의 아들도 아버지를 이어 화가가 되었는데, 이름도 같아서 보통 아버지는 대(大) 크라나흐, 아들은 소(小) 크라나흐라고 부르곤 합니다. 1529년 제작된 이 작품은 대 크라나흐의 것입니다. 제목대로 그림은 정확히 두 부분으로 구분되고, 내용도 '율법과 은총'에 썩 잘 어울립니다. 크기가 82.2×118cm로 꽤 큰 그림이지만, 이 작품이 처음 나온 이래로 조금씩 변형된 모습과 크기로 수십 종이 보급됩니다. 가장 유명한 건, 종교개혁 도시 비텐베르크 루터하우스에 전시된 그림일 겁니다. 1550년 제작된 그 작품은 지금 소개할 1529년 작품과 이름은 같지만, 두 손바닥 합쳐 놓은 크기 만큼 매우 작습니다. 하지만 둘 다 내용은 거의 차이가 없습니다. 

한국에서 크라나흐는 낯선 화가입니다. 그렇다고 생판 낯선 사람은 아닙니다. 우리 머릿속에 있는 루터 초상화는 십중팔구 이 사람의 그림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는 비텐베르크에서 화방을 운영하면서 여러 제자를 거느리고 있었는데, 화방뿐 아니라 약국도 운영하고 나중에 비텐베르크의 시장(市場)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입니다. 특히 루터와 가장 가까운 사이로도 유명합니다. 루터의 부인인 카타리나 폰 보라가 수녀원에서 탈출해 종교개혁의 도시 비텐베르크에 왔을 때, 그녀가 취업한 곳이 크라나흐가 운영하던 약국이었고, 이게 인연이 되어 루터와 결혼하게 됩니다. 게다가 루터와 크라나흐의 자녀들이 세례를 받을 때마다 서로의 대부가 되어 주기도 했다고 합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는 가정, 참 아름다운 관계지요.

종교개혁 역사에서 크라나흐 부자(父子)의 역할은 간과할 수 없습니다. 그는 루터가 책을 낼 때마다 그의 생각을 그림과 판화로 집약해서 민중이 이해하기 쉽게 전달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대표적으로 1534년 루터의 독일어 신구약 성서를 꼽을 수 있지요. 크라나흐 부자는 루터가 번역한 성경 본문을 꼼꼼하게 살펴 123장의 채색 삽화를 그려 그 안에 첨부했는데, 각각의 그림에 담긴 상징들만 이해해도 성경의 메시지가 무엇인지 단박에 알 수 있을 만큼 대단한 그림으로 평가받습니다. 이런 게 한 장의 그림이 지닌 위력일 겁니다. 개인적으로는, 한국에도 그 그림들이 소개되어 간략한 성경 공부 교재로 활용하면 좋겠다 싶습니다. 그 외에도 크라나흐 부자는 루터의 글이 출판될 때마다 거의 모든 표지와 삽화를 판화로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냥 아무렇게 만든 건 아닙니다. 저작물에 삽화를 넣을 땐, 언제나 루터의 의견을 세심하게 경청하고 반영했기에 그림 곳곳에서 루터가 이해한 성경의 복음과 그가 가르치고자 했던 종교개혁 사상이 어떤 것인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기 소개하는 그림도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크라나흐가 그린 루터 초상화.
크라나흐가 그린 루터 초상화.
율법과 은총

원래 이 그림의 독일어 제목은 '저주와 구원 Verdammnis und Erlösung'입니다. 하지만, '율법과 은총', 또는 '율법과 복음'이라는 표제로 더 유명합니다. 알고 보면 둘 다 같은 말이니 시비 걸 필요는 없습니다. 이 작품이 만들어진 1529년은 루터가 <대교리 문답>과 <소교리 문답>을 출간해서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목사들과 성경을 모르는 일반 신자들을 위해 교육에 힘을 쏟던 특별한 시기라서 이 그림도 평신도 성서 교육을 위해 만들어졌을 겁니다. 

루카스 크라나흐 부자의 '율법과 은총' 1536년 작품. 사진 출처 en.wikipedia.org
루카스 크라나흐 부자의 '율법과 은총' 1536년 작품. 사진 출처 en.wikipedia.org

자, 이제 그림을 봅시다. 나무 한 그루를 중심으로 그림이 두 폭으로 나뉩니다. 예상하듯, 율법과 복음, 또는 신약과 구약으로 구분됩니다. 왼편부터 봅시다.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선악과 사건이 보일 겁니다. 이는 인간의 범죄를 상징하는데, 그 운명이 바로 밑에 그려집니다. 마귀와 한패가 된 해골이 창을 들고 왼편 구석, 불이 치솟는 지옥으로 사람을 몰고 갑니다. 원죄로 인한 인간의 운명을 성경은 죽음이라고 가르칩니다. 마귀 옆에 살아 있는 해골은 유혹에 약한 인간의 육신을 가리킵니다. 둘이 어깨동무를 한 걸로 보아 뿔 달린 마귀와 육신은 절친한 관계로 묘사됩니다. 마귀의 배를 잘 보면, 그 안에 고철 덩어리들이 보입니다. 이것들은 모두 마귀가 사람을 유혹할 때 사용하는 도구들입니다. 돈과 물질의 신인 맘몬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로마서 1:21 말씀대로, 범죄한 자연인은 생각이 허망해지고 마음이 미련해진 상태라서 그 운명은 죽음을 향해 달려가게끔 되어 있다고 경고합니다.  

이런 인간에게 출구는 없을까요? 벌거벗고 도망가는 사람의 오른편 울창한 나무 앞에 십계명을 들고 있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십계명은 인간이 마땅히 지켜야 할 하나님의 율법이지만, 성경에 따르면 이걸 완수할 재간이 인간에겐 없습니다. 그러니 이게 있다 한들 여전히 인간의 결말은 지옥입니다. 오히려 십계명은 인간의 죄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독특한 것은, 돌판을 들고 있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여기 등장한 사람들의 복장은 모두 16세기 루터가 살던 시대 복식입니다. 빨간 망토는 제후, 돌판을 들고 있는 사람은 제후의 명령을 대언하는 서기관, 그 뒤에 있는 두 사람은 모두 관료들입니다. 즉, 십계명을 들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공권력을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루터의 신학에서 '두 통치론'(또는 '두 왕국론')이라는 게 있는데, 하나님은 오른손에 복음을 들고 교회를 통해 영적인 통치를 맡기고, 왼손엔 칼을 들고 국가 공권력을 통해 악을 차단하며 세계 질서를 바로잡는다고 설명합니다. 이런 루터의 사상이 십계명을 들고 있는 관료들을 통해 묘사됩니다. 

이제 가운데 있는 텐트촌을 가 볼까요. 민수기 21장에 나오는 불 뱀 사건이지요. 광야에서 백성들이 불 뱀에 물려 죽게 되었을 때, 모세가 만든 놋 뱀을 바라보는 자는 살고, 그 말을 믿지 않는 사람은 죽게 되는데, 이 사건은 전통적으로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사건으로 이해됩니다. 그 옆에 있는 하늘을 봅시다. 한스 멤링의 '최후의심판'을 소개하면서 설명한 대로, 이 형상은 중세 매우 흔한 최후 심판의 전형입니다. 요한계시록과 마태복음 25장 31절에 묘사된 종말의 모습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예수님의 얼굴 양편에 있는 백합과 불 칼입니다. 성경에 명징한 표현은 안 나오지만, 통상 예수의 얼굴 옆에 있는 백합은 영원한 구원을, 불 칼은 영원한 형벌을 의미합니다. 중세에 이 도상이 흔했던 건, 백합을 손에 쥐든 불 칼에 맞아 죽든 그건 다 자기 하기 나름이라고 가르치던 교회의 공로신학 탓입니다. 요건 기회가 나면 다시 이야기하기로 합시다. 여하튼, 왼편 그림이 전하는 주제는 '인간은 죄인이고, 죄인은 심판받아 죽을 운명'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 기준은 율법이라는 것이지요. 

이제 오른편(은총)으로 가 봅시다. 희미하지만, 화폭 중앙에 나무 옆 창공에서 잔디밭 사람들에게 내려오는 가느다란 빛이 보일 겁니다. 그 빛 가운데 새처럼 보이는 천사가 펼쳐진 두루마리를 들고 땅으로 내려옵니다. 천사가 전하는 소식은 아기 예수 탄생이고, 목자들이 그 소식을 듣게 된다는 성탄 기사를 묘사한 건데, 밤이 아니라 낮이라는 게 특이합니다. 그 이유를 사람마다 달리 해석할 수 있을 겁니다. 당신이라면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설명할 수 있나요?

조금 앞으로 나와 봅시다. 여기도 왼편과 같이 벌거벗은 사람이 보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 앞에 서서 십자가를 가리키는 사람은 세례 요한입니다. 요한의 손가락을 자세히 보면, 검지와 중지가 합쳐진 채로 십자가 예수를 가리키고 있지요. 이런 특별한 형태의 손 모양은 '참신이요, 참인간 예수 그리스도'라는 의미를 담은 도상입니다. 무덤 위에 승천한 예수의 손 모양도 같지요. 그리고 그 예수가 가리키는 곳은 구약의 심판주로 환원됩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 예수가 최종 심판주라는 뜻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세례 요한이 가리키는 곳을 봅시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있고, 십자가 상단 명패엔 'INRI'라는 죄목이 보입니다. 라틴어 'Iesus Nazarenus Rex Iudaeorum'의 앞 글자만 딴 두문자(頭文字)가 죄패로 새겨졌는데, 요한복음 19장 19-20절을 인용한 '나사렛 사람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는 뜻입니다. 십자가 뒤를 봅시다. 무덤이 열려 있고, 관은 비었습니다. 십자가 아래 어린양이 죽음의 세력인 용과 해골을 밟고 있는데, 세례 요한은 저 그림 전체에서 유독 십자가에 죽은 예수를 가리킵니다. 승천한 기적의 예수가 아니라 말입니다. 그리고는 벌거벗은 인간에게 십자가 예수가 구원자라는 것을 가르칩니다. 사실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지요. 이쯤에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옆구리에 주목해 봅시다. 거기서 붉은 피가 쏟아져 나와 요한을 통과하고 벌거벗은 사람 머리까지 도달합니다. 그리고 그 중간에 성령을 상징하는 백색 비둘기가 보입니다. 여기서 성령은 우리의 지식과 경험을 뛰어넘어 구원의 신비를 깨닫게 하는 보혜사의 역할을 합니다.  

루카스 크라나흐 초상화.
루카스 크라나흐 초상화.
복음

그림 제목을 놓고 한 번 더 생각해 봅시다. '율법과 은총(혜)', 교회에서 귀가 따갑도록 듣는 말인데, 율법은 뭐고 은총은 무엇일까요? 여러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루터의 말대로 하면, '율법은 사람이 반드시 해야 할 일'이고, 은총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사람이 하는 일로 구원을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만이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일이고, 죄인을 위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은총을 값없이 주어진 선물이라고도 하지요. 그래서 이것을 우리는 '기쁜 소식', '복음'이라고 부릅니다. 

크라나흐의 그림을 둘로 나누는 중앙의 큰 나무를 한 번 더 주목해 봅시다. 나무 중간에 크라나흐 작품의 개인 표식이 새겨져 있는데, 그보다 중요한 건, 양편 나뭇가지의 상태입니다. 왼편은 잎이 없고, 오른편은 풍성합니다. 크라나흐는 율법과 복음의 성격을 이런 식으로 풀이합니다.  

이 그림을 보면서 교회가 가르치는 율법과 복음을 생각해 봅니다. 율법과 복음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니 이 둘은 언제나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있습니다. 그러니 복음 없는 율법, 율법 없는 복음은 교회와 신자의 삶을 극단으로 치닫게 만듭니다. 

지금 우리의 교회는 어떤가요? 율법과 복음이 잘 균형 잡혀 있나요?  

루카스 크라나흐의 표식. 사진 출처 en.wikipedia.org
루카스 크라나흐의 표식. 사진 출처 en.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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