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루터교회 최주훈 목사가 '명화'를 주제로 연재를 합니다. 연재는 격주 수요일 발행합니다. - 편집자 주  
James Tissot, 'Crucifixion of Jesus'. 사진 출처 Brooklyn Museum
James Tissot, 'Crucifixion of Jesus'. 사진 출처 Brooklyn Museum

도화지 한 장 던져 주고 '십자가 사건'을 그려 보라고 하면, 백의 아흔아홉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부터 그릴 게 뻔합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이런 예상을 비껴갑니다. 십자가와 예수님은 전혀 보이지 않고, 그저 못 박힌 발가락만 그림 바닥 중앙에 살짝 보입니다. 그것도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아채지 못할 정도입니다. 게다가 더욱 당황스러운 사실은 그림 속 등장인물 모두가 감상하는 나를 응시한다는 점입니다. 내가 그림을 보는 게 아니라 그림이 나를 꿰뚫어 봅니다. 

도대체 무슨 그림이 이럴까요? 작품 제목을 알고는 한 번 더 놀랍니다. 작품명 '우리의 구원자는 십자가 위에서 무엇을 보았는가(What our Savior saw from the Cross)'. 프랑스 화가 띠소(James Tissot, 1836~1902)는 이 작품을 통해, 예수님이 매달렸던 십자가 위에 우리를 매달아 놓습니다. 그리고는, 십자가 위에 처참히 달린 예수의 시선으로 그 상황을 보게 만듭니다. 그러고선 묻습니다. '당신은 저기 어디 자리에 있는가.' 이 질문은 곧바로 '예수가 아니라 바로 당신이 십자가에 달려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물음으로 무겁게 돌아옵니다. 이로써 십자가 사건이 남의 일도 아니고, 고상한 감상 주제도 아니라는 걸 깨닫게 합니다.

나는 어디에 서 있나

이 작품은 복음서에 나오는 십자가 사건이 배경입니다. 사순절이나 고난주간의 끝자락인 성금요일에 이 그림을 조용히 감상한다면 어떨까요. 십자가 주위에 모인 군중은 깊은 묵상거리를 던집니다. 여기엔 네 부류의 군중이 모여 있습니다. 로마 병정, 유대 종교 지도자, 구경꾼,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

현장에는 동정심이라곤 찾아볼 수도 없이 그저 상관의 명령대로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는 병정들, 기득권 유지를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먹다가 결국 하나님의 아들을 핍박하고 죽음으로 내몬 종교 지도자들, 십자가 사건을 자신과 관계없는 흥밋거리로만 생각하는 구경꾼들, 그리고 절망에 휩싸인 십자가 밑의 제자들이 등장합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서 이 네 그룹을 봅니다.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요. 십자가에 모인 이 네 그룹은 2000년 전 옛날이야기로만 치부할 수 없습니다. 오늘도 여전히 이 네 그룹은 교회 안팎에 공존합니다. 교회 안엔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만 있고, 교회 밖엔 나머지 세 그룹이 있을 걸로 생각하면 착각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나'는 어디 서 있을까. 세상 가치와 상관의 명령에 순응하는 로마 병정 곁에?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신은 있지만, 직분과 신앙 연수를 자랑하며 남을 정죄하고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던 유대 종교 지도자 속에? 아니면, 교회 출석은 열심히 하고 성경 공부, 제자 훈련, 각종 교회 프로그램엔 열심이지만 여전히 주변인 아니면 구경꾼 속에 숨어 있지는 않은지 돌아봅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중심을 봅니다. 

십자가 아래 사람들 

다시 한번 주목할 것은, 십자가 앞에서 제자들도 절망한다는 점입니다. 그동안 예수와 친분 두텁다고 자랑하던 사람들이 모두 도망가 버렸으니, 여기 십자가 밑에 남은 사람이야말로 참제자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조차 절망하고 괴로워합니다. 더 특별한 건, 마지막 십자가 밑자리를 여인들이 차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신약성서를 꼼꼼히 읽어 보면, 여성 인권이라든지, 역사의 주도권이라든지 이런 건 생각지도 못할 시대에 구원사 중심에 여인들이 서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 주위뿐 아니라 부활의 소식을 가장 먼저 접하고, 그 소식을 알린 사람도 여인들이고,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하고, 로마 교회에 전달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은 겐그레아 교회 지도자도 여성입니다. 그 외에도 수많은 여성의 사역이 성서에 남아 있습니다. 이들이 아니었다면 선교 역사와 교회는 존재하지 못했을 게 거의 확실합니다. 

여하튼 십자가 사건에서 중요한 것은, 그렇게 사랑하며 믿었던 주님이 운명하실 때 여인들이 절망했다는 것, 그러나 이 절망 다음에 부활의 소식이 찾아왔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끊임없이 말하는 메시지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칠흑 같은 죽음과 절망 속에도 하나님은 계신다는 것, 절망 한가운데서 하나님의 구원이 나타났다는 것, 그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이고 복음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도 고난과 절망의 순간은 찾아옵니다. 예수 잘 믿는다고 고난이 비껴가는 법은 없습니다. 십자가 밑에서 비통에 잠긴, 십자가 밑에서 모든 희망을 잃고 흐느끼던 사람들처럼 누구에게나 시련은 찾아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마지막 목적지는 절망과 패망이 아닙니다. 오히려 절망의 자리 한가운데 구원의 길이 있다고 깨우칩니다. 절망하던 여인들에게 부활의 소식이 주어집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절망이라고 생각하는 그때가 바로 하나님이 행동하시는 절호의 기회가 됩니다. 사람의 가능성과 기대가 끊어진 그곳부터 하나님은 당신의 방법으로 구원의 일을 시작합니다. 그것이 십자가 사건이고,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리고 이 능력을 믿는 게 신앙입니다. 

십자가 밑의 여인

그림으로 돌아옵시다. 띠소의 작품엔 십자가 아래 여인의 모습으로 다섯 명이 등장합니다. 특이한 건, 십자가 사건이 사복음서 모두 나오지만, 십자가 주위에 있던 여인들의 수와 이름이 조금씩 다르다는 점입니다. 

마태복음[27:56,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과 마가복음[15:40,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와 요세(셉)의 어머니 마리아, 제자 살로메]에는 세 명의 여인이 등장하고, 요한복음[예수의 모친 마리아, 예수의 이모 (마리아),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막달라 마리아]에선 총 네 명의 여인이 등장하고, 누가복음에선 여인들의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정확히 누가 그 자리에 있었는지 확실치는 않지만, 띠소의 작품은 요한복음을 배경으로 삼은 게 분명합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에 나오는 네 명의 여인 모두 '마리아'라는 점은 매우 특별합니다. 히브리어로는 '미리암', 아람어로는 '마리암', 헬라어로는 '마리아'인데, 이스라엘에서 여자를 대표하는 가장 흔한 이름입니다. 이 이름 속엔 '쓰다(Bitter)', '반란(Rebellion)'이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고통스럽고 괴롭다는 뜻이다 보니 무척 안 좋은 이름입니다. 자기 딸에게 이런 이름을 지어 줄 사람이 어디 있을까 싶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안 좋은 이름이 구원의 역사에선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고통이 변하여 즐거움이 된다'라고 했던 이사야(9:1-7)의 예언이 이 이름과 연결됩니다. 실제로, 십자가 밑에서 절망하던 네 명의 여인 모두 마리아였지만, 부활의 예수를 가장 먼저 만난 사람도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요 20:15-17). 네 명의 마리아는 서로 다른 모습으로 쓰디쓴 인생을 살아가는 모든 신앙인을 상징합니다. 십자가는 마라의 쓴 물이 한 나무로 인해 단물로 변하는 사건(출 15:23-25)처럼, 쓰디쓴 인생이 그리스도로 인해 구원받는 사건입니다. 

세상의 모든 마리아들을 위해

사족 하나 더합니다. 띠소의 그림이 요한복음을 배경으로 했다면, 그림 하단에 매우 간절한 모습은 막달라 마리아, 세 명이 모인 중앙에 푸른색 옷은 모친 마리아로 보입니다. 그리고 모친 뒤에 서 있는 두 사람은 예수의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야고보의 어머니)일 겁니다. 성경의 스토리를 따르면, 왼편에 흰색 옷을 입고 두 손을 간절히 모은 채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은 주님의 사랑하는 제자 요한일 겁니다. 그런데 무척 특별한 건, 요한의 모습 어디를 봐도 남자 같은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종교화에서 요한은 예수님의 '사랑하는 제자'라는 통념 덕분에 여인 아니면 미소년으로 그려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작품에 나온 여인들 얼굴을 보면서 참 희한하게 느껴지는 건(저만의 착각일지 모르겠지만), 요한을 비롯한 네 명의 여인 모두 얼굴이 닮았다는 대목입니다. 뭐 모두 친척들이라서 그렇다고 하면 할 말 없지만, 억지로라도 띠소의 일생을 반추해 보면 여인의 정체를 추측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띠소가 그린 '자화상'과 캐서린 뉴튼. 사진 출처 wikipedia.org
띠소가 그린 '자화상'과 캐서린 뉴튼. 사진 출처 wikipedia.org

띠소의 작품에 유독 자주 나오는 한 여인이 있는데, 그가 사랑했던 비련의 여인 캐서린 뉴튼입니다. 그런데 이 둘의 관계가 기구합니다. 캐서린은 혼외 관계에서 아이를 가진 후 파혼당했고, 사회적으로 환영받지 못했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띠소는 이 여인의 암울한 과거까지 사랑해서 사회적 비난을 감수하고 캐서린과 그의 아이들까지 가족으로 받아들여 행복하게 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캐서린은 결핵에 걸려 죽게 됩니다. 본래 사교계 귀족들의 그림이나 그리던 띠소는 연인을 잃은 상처를 못 이겨 은둔 생활을 하며 종교화에 몰두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먼저 간 사랑을 잊지 못한 채 아파하다 고독한 죽음을 맞았다고 합니다. 

여기 소개한 띠소의 작품도 그 시기 만들어진 작품입니다. 띠소의 그림에 나오는 캐서린의 얼굴과 십자가 밑에서 서러워하는 여인들의 얼굴이 엇비슷하게 겹쳐 보이는 것 같습니다. 정말 캐서린을 다양한 얼굴의 '마리아들'로 그려 넣었다면, 이 작품은 결핵의 고통 가운데 죽은 캐서린이 부활하여 다시 만나길 소망하던 띠소의 간절한 기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 땅의 모든 마리아들과 함께, 저도 띠소가 갈망하던 그런 부활을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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