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퀴어 문화 축제가 3년 만에 서울광장에서 개최됐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서울 퀴어 문화 축제가 3년 만에 서울광장에서 개최됐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살자, 함께하자, 나아가자!"

[뉴스앤조이-나수진 기자] 도심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성소수자 자긍심의 장, '서울 퀴어 문화 축제'가 돌아왔다. 올해로 23회를 맞은 서울 퀴어 문화 축제가 7월 16일 서울광장에서 개최됐다. 서울퀴어문화축제조직위원회가 정한 이번 축제 슬로건은 '살자, 함께하자, 나아가자'였다. 성소수자를 향한 혐오·차별이 만연한 사회에서 각자의 삶을 살아 낸 성소수자들이 축제에 나와서 함께 있음을 확인하면, 그로 인해 세상은 조금씩 변한다는 의미가 담겼다.

2000년부터 이어져 온 서울 퀴어 문화 축제는, 지난 2년간 코로나19로 인해 온라인으로 전환하거나 규모를 축소한 채 진행됐다. 3년 만에 서울광장에서 다시 만난 참가자들은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참석자들은 이따금 내리는 소나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서로 포옹하고 반가운 얼굴을 맞대며 축제를 즐겼다. 광장 입구는 축제에 참가하려는 사람들로 쉴 새 없이 붐볐고, 잔디밭 위에 돗자리를 펴고 가족·연인과 낮잠을 즐기는 이들도 눈에 띄었다. 경찰은 이번 축제 참가 인원을 1만 3000여 명(오후 3시 기준)으로 추산했다.

성소수자 인권 단체를 비롯한 종교계·정당·시민단체 72곳은 광장에 부스를 열고 참석자들을 맞았다. 개신교계에서는 성소수자 친화 교회·단체 로뎀나무그늘교회·큐앤에이·무지개신학교·무지개예수가 연합 부스를 차렸고, 성공회무지개네트워크도 바로 옆 부스로 참여했다. 퀴어 크리스천과 앨라이(지지자)들이 두 부스에 줄을 이었다. 퀴어 크리스천의 자긍심을 나타내는 스티커와 옷을 제작한 로뎀나무그늘교회·큐앤에이·무지개신학교·무지개예수 부스는 "해피 프라이드"라고 외치며 참가자들을 맞았다. 성공회무지개네트워크 부스에서는 '영원한 축복' 등의 문구를 타투로 그려 주는 행사를 진행했다. 

민숙희 사제(대한성공회 광명교회)는 참가자들의 머리에 손을 얹어 축복하고, 말린 장미꽃을 건넸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민숙희 사제(대한성공회 광명교회)는 참가자들의 머리에 손을 얹어 축복하고, 말린 장미꽃을 건넸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꽃잎을 뿌리며 퀴어한 그리스도인을 함께 축복하는 예식도 진행했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꽃잎을 뿌리며 퀴어한 그리스도인을 함께 축복하는 예식도 진행했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개신교계 부스는 퀴어 문화 축제마다 성소수자 그리스도인과 지지자를 축복하기 위한 예식을 진행해 왔다. 이번에도 성소수자 존재를 긍정하는 축복식이 열렸다. 무지개색 스톨을 목에 건 민숙희 사제(대한성공회 광명교회)는 찾아오는 사람들의 머리에 손을 얹고 "전능하신 하나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님 위에 강복하소서"라고 축복했다. 한국기독교장로회 소속 김정원 목사는 오전·오후 두 차례에 걸쳐 꽃잎을 뿌리며 축복식을 진행했다. 부스 앞에 둥글게 선 참가자들은 함께 기도문을 읽고, 무지개색 끈을 이어 잡으며 서로의 존재를 축복했다.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의 하늘 아래 모였습니다. 우리는 퀴어입니다. 우리는 서로의 앨라이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이며, 우리는 주님의 사람들입니다. 이제 우리가 서로를 축복합니다. 큰 소리로 서로를 응원합니다. 우리가 주의 사랑을 이어받아 서로를 축복하니, 이 시간 우리에게 복에 복을 더하소서!"

축제 중 연대 발언을 하기 위해 대형 무대 위에 오른 김유미 간사(큐앤에이)는 "개신교인으로서 여러분에게 빚진 게 많다. 한국교회가 퀴어 커뮤니티에 저질렀고, 저지르고, 지금도 이 시각 저렇게 북 치고 장구 치고 난리를 치는데 교회 이름을 달고 나와서 무슨 낯짝으로 이야기를 나눌까 싶다"라며 발언을 시작했다. 이어 김 간사가 "예수는 차별과 억압을 무너뜨린 사람이었다. 저 혐오 세력들이 말하는 '동성애 쓰나미', 가정을 망치고 교회를 망치고 나라를 망하게 할 거라는 그 '동성애 쓰나미'가 실은 그들의 믿음대로라면 바로 하나님나라의 시작"이라고 외치자 참가자들은 무지개 깃발을 흔들며 큰 소리로 환호했다.

무대에 올라 연대 발언하는 큐앤에이 김유미 간사. 뉴스앤조이 나수진
무대에 올라 연대 발언하는 큐앤에이 김유미 간사. 뉴스앤조이 나수진
무지개예수, '찬송가 EDM' 부르며 퍼레이드
"퀴어 크리스천, 앨라이는 '경계인'
경계인 있기에 다리 놓일 수 있어"

이날 <뉴스앤조이>가 만난 퀴어 크리스천들은 한국교회가 성소수자 혐오·차별에 앞장서고 있지만, 교회 안에는 환대를 바라는 성소수자들이 존재한다고 말했다. 연인과 함께 축제를 처음 찾았다는 A는 "성소수자를 반대하는 교회를 다녔다. 원래는 저기 있는 반대 집회에 마음으로 함께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교회가 모든 존재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성소수자를 차별하는 것에 대한 의구심이 생겼고, 성소수자를 환대하는 교회를 다니게 되면서 성 정체성을 깨달았다. 내가 교회를 떠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 의구심을 해결하고 싶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신학생이라고 밝힌 B는 "코로나 이후 첫 퀴어 문화 축제라서 기대하고 왔다. 퀴어 크리스천으로서 교회 안팎에서 소외감을 많이 느꼈는데, 개신교 부스도 있고 비슷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 많아서 해방감을 느꼈다. 여전히 교회 안에는 성소수자를 차별·혐오하는 분위기가 만연하지만, 교회에 끝까지 남아서 문화를 바꾸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B와 함께 축제를 찾은 C도 "(성소수자) 혐오 발언을 듣고 교회를 떠났지만, 지금은 퀴어 친화적인 교회에 다니고 있다. 성소수자에 열린 교회들이 더 늘어나고, 틀을 깨는 노력을 할 때 퀴어들에게 힘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2014년부터 매년 퀴어 문화 축제에 참여했다는 모태신앙 개신교인도 있었다. D는 "시간이 흐르며 퀴어 인권이 더 확대되기를 바라는데 오히려 축소되고 있다고 느낀다. 과거 퀴어 문화 축제는 긴 기간 광장을 대여할 수 있었는데, 올해 오세훈 서울시장은 조건부로 하루만 승인했다. 때문에 이를 규탄하는 시위도 벌여야 했다"고 말했다. 그는 "교회가 성소수자를 지지할 수 없을지언정 반대하지는 않기를 바란다. 기독교 집안에서 트랜스젠더라고 커밍아웃한 이후 부모에게 의절당한 지인이 있다. 많은 기대를 하지는 않지만, 성소수자를 받아들이려고 노력하고 교육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성소수자 기독교인·앨라이들은 '무지개예수' 차량을 따라 평화롭게 행진했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성소수자 기독교인·앨라이들은 '무지개예수' 차량을 따라 평화롭게 행진했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퀴어 문화 축제의 하이라이트인 퍼레이드에는 무지개예수 차량도 함께했다. 장대비가 퍼붓는 날씨에도 참가자들은 EDM 형식으로 편곡한 찬송가 등을 따라 부르며 행진했다. 개신교·가톨릭·불교 성직자·신자로 구성된 퀴어길벗들과함께걷는종교인일동은 '우리는 종교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모든 종류의 혐오와 차별에 반대합니다. 우리는 종교의 이름으로 퀴어 길벗들을 조건 없이 환대하며 축복합니다'라는 현수막을 들고 따라 걸었다. 이들은 서울광장을 출발해 을지로입구역·종각역·을지로3가역·명동역을 거쳐 다시 서울광장으로 돌아오는 3.8km 거리를 평화롭게 행진했다.

퍼레이드를 준비한 자캐오 사제(대한성공회 용산나눔의집·길찾는교회)는 "종교가 사랑과 환대의 이름으로 성소수자들과 연대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 기쁘지만, 한편으로는 현실 종교가 혐오·차별에 앞장서고 있기 때문에 양가감정이 든다. 퍼레이드에 참가하는 교회의 모습에 기뻐하는 성소수자가 있는 반면, 어떤 분들에게는 상처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퀴어 크리스천과 그들과 동행하는 앨라이는 분명 존재하고, 이들은 '경계인'이다. 경계에 있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다리가 놓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존재 자체가 '질문'이자 '메시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서로 기억하고 연대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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