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서울 퀴어 문화 축제에서 오세훈 서울시장은 일종의 제약을 걸었다. 신체를 과다하게 노출할 시 내년부터 서울광장 사용을 제한하겠다는 것이다. 자신이 기독교인이라 밝히며 짐짓 합리적인 척하는 그는 "만에 하나 그런 선량한 풍속을 해치는 행위가 있게 되면"이라는 조건을 내걸었는데, 건조한 듯 내민 저 말에서 모종의 '욕망'이 느껴지는 건 나 혼자만의 착각이 아닐 것이다. 저 말은 차라리, 그 '만에 하나'가 일어나길 바라면서, 필요하다면 신체 노출과 '선량한 풍속'의 훼손 정도를 자율적으로 해석해 조치하겠다는 말처럼 들린다. 물론 선량한 풍속(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은 지켜지는 편이 좋을 것이고, 공연음란죄 수준의 노출로 뭇 사람을 실족케 하는 일은 막아야 할 테다.

이 지점에서 두 가지가 궁금해졌다. 첫째, 퀴어 문화 축제와 공연음란죄 발생이 유의미한 상관관계를 가진 적이 있나? 아무래도 대규모 행사인 만큼 매번 현장에는 경찰 인력이 많이 배치됐을텐데, 정말 퀴어 문화 축제가 '망국적 공연 음란의 노출 대소동'이라면 한 번쯤은 행사 장소가 경찰서로 급히 변경되는 일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정도로 문제가 됐다면 이렇게 23회까지 성황리에 열릴 수도 없었을 것이다. 해당 사안을 직접 찾아봤는데, 주로 극우·기독교 계열의 언론(?)에서만 열심히 이 문제를 다뤘다. 역시 퀴어 걱정하는 건 이들밖에 없다.

"그러나 퀴어 문화 축제와 같은 규모가 비교적 큰 집회에서 실제로 공연음란죄 등으로 처벌된 경우는 많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단순한 노출 자체로 범죄가 성립되지 않고 그 의도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실제 서울광장에서 지금까지 세 차례 퀴어 문화 축제가 진행되는 동안 이런 죄목으로 처벌된 경우는 없었다." [<크리스천투데이>, '노출 심한 퀴어 축제, 경찰은 왜 막지 못하나?', 2018. 6. 26.]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런 일은 없었다. 알다시피 보수 기독교계는 꾸준히 퀴어 퍼레이드에 대한 가처분 신청과 고발을 일삼아 왔다. 2015년부터 2019년 5월까지, 주로 '공연 음란'을 이유로 4건의 고발과 가처분 신청이 있었으며(당연히 모두 기각됐다), 해당 수법이 먹히지 않자 '청소년 보호'를 명분으로 내걸며 개최 금지를 요구했다. 물론 재판부는 "청소년에 대한 직접적 침해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결론을 내렸다. 당연하다. 싫으면 안 가고 안 보면 되니까. 오직 보수 기독교계만이, 참여도 안 할 거면서 열심히 가고 또 열심히 본다.

여기서 드는 두 번째 궁금증. 물론 미풍양속 중요하고 중요한데, 그래서 다른 행사·집회, 문화 콘텐츠에 대해서도 동일한 기준과 잣대로 판단하고 있나? 사실, 조사를 하면서 '충격! 퀴어 퍼레이드의 음란한 실체…경악!'처럼 빼다 박은 듯한 말초적 제목으로 떠도는 몇몇 사진을 보긴 했다. 어디서 올린 건지는 굳이 말 안 하겠다. 여튼, 사진들을 아무리 봐도 무엇이 문제인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래도 날이 더운 만큼 몸에 섬유를 덜 걸치고 있긴 했지만, 아예 안 걸친 것도 아니지 않나. 어딘가에선 그런 옷을 팔고, 또 누군가는 그런 옷을 사서 입을 뿐이다. 바닷가에서는 중요 부위만 가리는 옷을 입는 게 익숙하고, 영화 '탑건: 매버릭'에서는 성인 남자 여럿이 속옷만 걸치고 배구를 하는데 뭐가 문제인가.

게다가 숭하기로 따지면 퀴어와 관련해서보다는 다른 케이스가 더 많이 떠오른다. 기념품점이나 주류 백화점에 가면 종종 '벌떡주'라는, 그 뜻을 모를 리 없는 술이 정말이지 '벌떡' 한 모습으로 버젓이 팔린다. 싸이의 '흠뻑쇼'나 '워터밤', '신촌 물총 축제' 같은 행사는, 가뭄 시기에 눈치 없이 물을 퍼다 쓰는 건 둘째 치고, 잔뜩 젖어서 착 달라붙은 옷을 기본 설정으로 하는 '이성애 대파티'다. 최근에는 파격적인 포맷을 강조하는 새로운 이성애 예능이 화제인데, 신체 건장한 젊은 남녀가 제법 헐벗고 오래 깊이 밀착하는 장면이 꽤 나온다. 공연 음란에 가까워 보이는 이런 광경을 케이블 채널과 스트리밍으로 제공하는 이 예능의 이름은 무려 '에덴'. 나는 한국교회가 왜 저런 제목에는 문제 제기를 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다들 선악과를 먹었다 이건가…' 싶지만, 아무튼 퀴어 문화 축제에 노파심을 가득 담아 음란과 노출에 대한 경고를 날리는 만큼 다른 사안에도 똑같이 행동하는 것 같지는 않다. 당연하게도, 저것들도 다 같이 때려잡자는 얘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며, 단지 퀴어에만 '로널드 레이건' 수준의 검열을 들이대는 형국이 기묘하다는 게 이 글의 골자다.

무엇보다, 퀴어 문화 축제의 신체 노출에 거품을 무는 이들은 그 이상을 생각하지 못하는 듯하다. 실은 '노출'이야말로 퀴어 문화 축제의 본질이다. 그리고 이 노출은 '신체 노출'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신체 노출은 '다른 노출'에 따라오는 선택 가능한 효과 중 일부에 불과하다. 그 다른 노출이란, '그 사람들이 거기에 있다는 사실 자체'다. 흔히 '벽장(closet)'이라 불리는 퀴어 용어는, 자신이 퀴어라는 사실이 밝혀질 때 받게 될 비난과 혐오가 두려워 이를 숨기는 사람들을 뜻하는 말이다. 퀴어 문화 축제는 퀴어가 자신 말고도 많이, 여기와 저기에 있으며, 비슷하거나 다름에도 불구하고 함께할 수 있음을 확인하는 자리다. 그런 의미에서 퀴어 문화 축제는 굳이 옷장을 나서지 않고도 이어지고 맞닿는, 일종의 '나니아' 같은 환상의 공간이다.

기독교인은 믿는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고,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게 되는 이적을 믿으며, 나아가 단순히 보이는 것 너머의 중심을 믿는다. 또한 기독교인의 믿음은, 보이고 존재하는 것을 부정하고 억누르는 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퀴어가 퀴어임을 드러내고 외치는 '커밍아웃'의 순간은,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게 되는 은혜의 순간을 닮았다. 이처럼 퀴어는 우리가 충분히 안다고 믿던 존재가 스스로를 주장하면서 우리의 오해와 무지를 일깨우는 경험을 안겨 준다. 한편으로 익숙한 존재가 낯선 타자가 되는 경험은, 남에게서만 느끼는 게 아니라 우리 안에서도 얼마든지 겪을 수 있다. 이 사회의 '정상성'은 너무나 견고하고 세세해서, 그로부터 소외와 핍박을 경험한 이라면 누구든 크고 작은 '퀴어 됨'을 겪은 셈이다.

이 다채로운 인식 과정에 동참은 못할지언정 낙인을 찍고 손가락질하는 건 확실히 바람직한 모습이 아니다. 이를 억누르는 강퍅함과 편협함은 아마 예수도 좋아하지 않을 것이고, 자기 이름으로 혐오와 오해가 확산되고 있다는 것을 알면 냅다 채찍부터 들고 와서 혐오 세력 집회를 엎어 버릴 것이다. 그러니 갓니버시티를 비롯해 곳곳에서 이 더운 날 굳이 몰려와 자극적이고 숭한 선동과 비난의 문구로 미풍양속을 해치지 말고, 뭇 존재의 축제를 부디 함께 즐겼으면 좋겠다. '혐관'은 이만하면 됐다!

심정용 / 여차여차해서 책 만드는 일을 한다. 책 만드느라 책을 못 읽는 게 요즘의 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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