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나수진 기자] 미국 연방대법원이 6월 24일 여성의 임신 중지 권리를 보장한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으면서,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비판의 목소리가 제기됐다. 여성의 인권과 기본권을 강조해 온 국가 정상들은 시대에 역행하는 판결이라며 미국 연방대법원을 비판했다.

반면 임신 중지 자체를 금기시해 온 한국 보수 교계는 환영의 뜻을 밝혔다. 한국기독교생명윤리협회·바른인권여성연합·에스더기도운동 등으로 구성된 행동하는프로라이프는 미국의 낙태죄 폐지 위헌 판결을 두고 "태아는 엄연히 보호받아야 할 소중한 생명임을 다시 한번 일깨워 준 역사적인 사건"이라고 했다. 한국 사회가 태아의 생명을 보호할 수 있는 법을 조속히 마련해야 한다고도 했다. 

낙태죄 이슈가 전 세계적으로 일고 있는 상황에서, 여성주의적 기독교윤리학 관점으로 임신 중지와 재생산권 문제를 살펴보는 자리가 열렸다.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제3시대·양권석 소장)가 6월 28일 개최한 월례 포럼에서 김혜령 교수(이화여대 호크마교양대학)는 '편들기의 윤리학'이라는 주제로 발제했다. 

김혜령 교수는 최근 미국 연방대법원이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은 것처럼, 한국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김혜령 교수는 최근 미국 연방대법원이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은 것처럼, 한국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김혜령 교수는 한국에서도 낙태죄 문제가 위기에 처해 있다고 했다. 헌법재판소가 2019년 낙태죄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렸지만 아직까지 대체 입법은 이뤄지지 않았고, 보수 교계를 중심으로 한 낙태 반대 운동이 거세지고 있기 때문이다. 김 교수는 "한국은 낙태 금지와 관련해 미국의 담론을 그대로 수용해 왔다. 트럼프 정권에서 임명된 보수 성향의 대법관들이 이번 판결에 영향을 미친 것처럼, 향후 윤석열 정부가 임명한 헌법재판관들이 낙태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우려했다. 

한국교회는 때에 따라 임신 중지를 묵인하기도, 반대하기도 했다. 김혜령 교수는 국가권력이 '인구 계획'이라는 명목하에 임신·출산 정책을 펴며 여성의 삶에 비일관적으로 개입해 왔다면, 한국교회는 그러한 정책 방향에 암묵적으로 순응해 왔다고 했다. 김 교수는 박정희 정부 때 교회가 YWCA의 임신 중지 의식화 활동을 암묵적으로 승인한 반면, 이명박 정부 때는 미국의 '프로라이프' 운동을 도입해 조직적으로 '낙태 반대 운동'을 전개한 점을 들었다.

김혜령 교수는 "임신 중지에 대한 개신교의 입장은 급격히 변해 왔다. 오늘날 다수 개신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낙태죄 존치'를 주장하는 이유는, 그것이 기독교 생명 윤리에 부합해서가 아니라 반동성애·반페미니즘 운동과 함께 정권과의 밀월 속에 개신교계를 보수 정치의 주류 세력으로 집결시키기 위함"이라고 비판했다. 

한국의 낙태죄는 2021년 부로 효력을 잃었다. 하지만 국회는 사회적 갈등을 이유로 아직까지 입법 공백을 메우지 않고 있다. 사진은 2019년 4월 11일 헌법재판소 결정 당시 여성단체들이 시위하는 모습. 뉴스앤조이
한국의 낙태죄는 2021년부로 효력을 잃었다. 하지만 국회는 사회적 합의를 내세우며 아직까지 입법 공백을 메우지 않고 있다. 사진은 2019년 4월 11일 헌법재판소 결정 당시 여성 단체들이 시위하는 모습. 뉴스앤조이 이은혜

임신 중지를 반대하는 기독교의 대표 논리는 '태아는 생명, 낙태는 살인'이다. 이는 '프로 라이프(Pro-Life, 태아의 생명권)'와 '프로 초이스(Pro-Choice, 여성의 자기 결정권)'의 대결 구도를 형성했다. 여성계는 이 주장이 지닌 모순을 반박하며, 임신 중지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절박한 여성들의 생명과 삶을 중심에 둬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한편 개신교 내에도 세속적 여성주의 관점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여성의 임신 중지 문제를 변증하려는 신학자들이 있었다. 여성신학자 제니 화이튼 앤드류는 임신 중지를 겪는 여성들의 인종·국가·연령·계층 등 차이에 주목하며 '프로 러브'(Pro-Love Approach)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이웃 사랑'을 핵심 가치로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임신 중지 상황에 처한 취약 계층 여성들의 현실에 귀를 기울이고, 이들을 향한 낙인과 처벌을 해소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하지만 김혜령 교수는 이 같은 관점 또한 온정주의식 관용에 그칠 위험이 있다고 했다. 임신 중지 문제에서 여성의 '약자성'을 강조하면 여성을 억압하는 사회 모순을 드러낼 수 있지만, 그런 논리로는 특정한 사유 없이 임신 중지를 선택하는 여성들까지 포용할 수 없다고 했다. 또한 '태아 대 여성'이라는 반대 진영의 논리를 극복하지 못하는 한계도 있다고 했다. 태아와 여성 중 누가 더 약자인지 저울질하게 되므로, 근본적으로 태아를 향한 여성들의 죄책감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임신 중지 반대론자들의 주장과는 다르게, 여성의 임신 중지 결정은 일부 개인의 자기중심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고 했다. 김 교수는 "여성은 출산 앞의 단독자다. 자기 삶이 중단되거나 파괴될 수 있다는 두려움을 느낀다. 이 두려움은 자궁 속 존재인 타자를 외면하는 윤리적 죄책감보다 앞선 근원적 두려움이다. 여성의 임신 중지 결정이 비난받지 말아야 할 이유는, 이것이 지나친 자기중심성이 아니라 인간 보편의 윤리적 나약함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김혜령 교수는 그리스도인들이 '출산 앞의 단독자'인 여성의 두려움을 이해하고, 함께 책임져 나가야 한다고 했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김혜령 교수는 그리스도인들이 '출산 앞의 단독자'인 여성의 두려움을 이해하고, 함께 책임져 나가야 한다고 했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김혜령 교수는 교회가 전통적으로 임신·출산을 '자연적 행위'로 이야기해 왔지만, 성서는 여성의 의지를 포함한 '주체적·문화적 행위'로 묘사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임신·출산에 대한 선택권 없이 하나님의 계획에 사용된 재생산 도구도, 원하지 않는데 강제로 임신한 여성도 아니었다. 마리아는 자유로운 선택을 통해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주체적 동역자로 참여했다. '잘' 선택하기 위해 '선택하지 않을 권리' 또한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 준 이야기"라고 했다. 

김 교수는 "'출산할 수 있음'이 용기 있는 자들의 '복'이라고 하더라도, 복 받을 용기를 형법으로 강제할 수는 없다. 정교분리가 원칙인 시민사회에서 임신·출산이라는 복을 거부하는 이들에게 '이것만이 복'이라고 강제할 수도 없다. 처벌을 전제한 형법상 낙태죄를 존치하는 것은 기독교의 진리를 구현하는 일이 결코 아니다"라고 했다. 

임신 중지는 여성 개인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책임져야 할 문제라고 했다. 김혜령 교수는 "여성의 임신 중지는 사회의 다양한 구조적 부정의와 연결돼 있다. 신학이 공공 영역에서 임신 중지 문제와 관련해 할 수 있는 것은, 원치 않는 임신이 발생하지 않도록 성평등 문화와 제도를 지원하는 일, 어렵게 출산을 결심한 여성들이 좌절하지 않고 아이를 키울 수 있도록 돕는 일"이라고 말했다. 

나아가 교회 공동체가 임신 중지 여성이 처한 현실에 공감하고 함께 연대해 나가야 한다고 했다. 그는 "오늘날 임신 중지 반대 진영은 '태아의 생명을 살려야 한다'는 식의 단순한 논리로 접근하고 있다. 생명 담론은 양쪽에 상처를 주고 이야기를 어렵게 만들 뿐이다. 우리의 희망은 절망 속에서도 자신과 이웃의 고통을 사회에 알리고, 다른 사람을 설득해 구조 자체를 바꿔 내는 연대뿐이다. 교회가 개인의 임신 중지에 대해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임신 중지 경험을 가진 여성들을 위로하고 애도하는 예배를 시도해 볼 수는 있을 것 같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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