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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죄 폐지 이후, '여성의 건강권' 초점 맞춰 대책 마련해야"
윤정원 산부인과 전문의 "사람마다 선택 이유 달라…'안전한 임신 중지' 인프라 필요"
  • 이은혜 기자 (eunlee@newsnjoy.or.kr)
  • 승인 2019.05.28 19:09

[뉴스앤조이-이은혜 기자] 그리스도인들은 낙태죄 폐지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논하는 청어람ARMC(양희송 대표) 두 번째 강좌가 5월 27일 청어람홀에서 열렸다. 5월 21일 첫 시간에 낙태죄 폐지 운동에 앞장서 온 나영 활동가가 헌법재판소 결정이 갖는 의미를 설명한 데 이어, 이번에는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여성위원장이자 녹색병원 산부인과 전문의 윤정원 과장이 '낙태죄 폐지 사회를 준비하기 위한 의료적 질문들'이라는 주제로 강의했다.

윤 과장은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 불합치 결정은 끝이 아닌 시작"이라고 말했다. 헌재는 국회에 2020년 12월 31일까지 대체 법안을 만들라고 주문했다. 여기서 논쟁이 다시 시작된다. 임신 중지 허용 주수 제한부터 의료인 재교육, 피임과 임신 중지의 보험 적용, 포괄적 성교육 제공 등 쟁점이 많다. 윤정원 과장은 쟁점을 하나하나 설명하며, 현장에서 여성을 만나는 의료인 시각에서 임신 중지가 왜 여성의 건강권과 연관이 있는지 이야기했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임신 중지"
한국 시술 현실은 WHO 기준 미달

윤정원 과장은 낙태를 향한 잘못된 시선부터 짚었다. 임신중절을 선택한 여성을 '문란한', '부주의한' 사람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윤 과장이 현실에서 만난 여성들은 항암 치료를 한다거나 지병으로 피임약을 복용하지 못하고 피임을 해도 실패하는 등 다양한 이유로 임신 중지를 선택했다. 그는 "한국 사회에서 임신 중지는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녹색병원 산부인과 윤정원 과장은 한국에서 의료 서비스 관점에서 임신 중지가 어떤 상황이고, 이를 개선하기 위해서 어떤 부분을 보완해야 하는지 설명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한국은 임신 중지 수술을 받는 여성과 수술을 하는 의사 모두를 형사처벌해 왔다. 물론 낙태죄가 있을 때도 강간과 같은 극단적 상황이라면 합법적으로 임신 중지 시술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시술하는 병원은 처벌받을까 두려워, 피해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판결이나 경찰에 신고했다는 증명을 요구하기도 했다. 조건을 맞추기 위해 움직이다 보면 시간이 지연되고, 늦어질수록 임신 중지 후유증은 고스란히 여성 몫으로 남는다.

이런 상황은 국제사회 기준에도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WHO는 △충분한 교육을 받은 의사가 △가이드라인에 맞춰 △위생적 환경에서 시술하는 게 '안전한 임신 중지'라고 했다. 이 기준에서 보면, 한국은 아무것도 충족하지 못한다.

윤정원 과장은 산부인과 전문의 교육과정에서도 '임신 중지'에 대해서는 배우지 않았다고 했다. 어차피 불법이었기 때문이다. 의사들은 67개국에서 인증받은 유산 유도제도 처방하지 못한다. 임신 중지를 원하는 여성들은 비전문가인 브로커에게 구입해야 했다. 윤 과장은 많은 여성이 안전한 임신 중지에 접근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인권'이라고 말했다.

낙태죄 폐지를 반대하는 사람들도 '여성의 건강'을 이유로 든다. 임신중절이 위험한 수술이고, 약에 따른 부작용 및 정신건강 문제를 지적한다. 윤정원 과장은 "합법적으로 훈련받은 의료인이 정확한 방법으로 시술한다면 임신 중지는 안전한 시술"이라고 말했다. 임신 중지가 위험하다는 주장은 의학적 근거가 아닌 신념에 따른 발언이라고 덧붙였다.

"사람마다 다른 임신 중지 사유,
단순 주수 제한으로는
여성 건강 증진할 수 없어"

대체 법안을 마련하는 데서 가장 쟁점이 되는 부분은 임신 중지를 허용하는 주수 문제다. 헌재는 낙태죄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면서 22주를 제안했다. 그러나 윤정원 과장은 주수를 제한하는 방식으로는 여성의 건강권을 보장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는 "출생 하루 전, 혹은 30주에 임신 중지를 하면 어떡하느냐는 이야기를 하는데, 임신을 유지하다가 30주 1일 차에 갑자기 마음이 바뀌는 사람은 없다"고 말했다.

윤 과장은 사람마다 임신 중지를 결정하게 된 사유에도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개개인의 절박한 사정이 있다. 성폭력 피해를 입은 초등학생을 지원한 적이 있는데, 그 친구는 피해 사실을 부모에게 말하지 못하다가 배가 불러오고 나서야 말하게 됐다. 이런 경우는 단순히 주수로만 제한할 수 없다. 20주 이후에 치명적인 심장 기형이 발견되기도 한다. 후기 임신 중지는 더 절박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이 택하게 된다"고 말했다.

낙태죄 폐지 운동 진영은 헌법재판소의 결정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게 아니라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말한다. 논의할 과제가 산적해 있기 때문이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임신중절 수술을 하지 않을 권리'에 대한 논란도 있었다. 낙태죄 헌법 불합치 결정 후 청와대 국민 청원에는 한 산부인과 의사의 글이 올라왔다. 신념에 따라 임신 중지 시술을 거부할 수 있도록 거부권을 달라는 것이었다. 윤정원 과장은 현행 의료법에 '진료 거부 금지' 조항이 있기 때문에 이는 사실상 말이 안 된다고 했다. 그는 "내 신념에 따라 행동할 때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래도 현실적으로 모든 산부인과 의사 혹은 병원에서 임신 중지 시술을 하는 게 힘들다면, 일단 원하는 병원에 한해 신청을 받아 재교육 후 서비스를 시작하도록 하는 방안도 제안했다. 특히 공공 의료 기관, 국립대학 병원 등을 우선으로 진행하는 것을 권장했다. 윤 과장은 "시술하는 의사, 하지 않는 의사 간 간극이 생길 것이고, 상대적으로 병원에서 먼 곳에 사는 사람의 접근권 문제도 있지만, 우선 이런 방향으로 시행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임신 중지 정보 접근성 높이고
의료인 재교육, 건강보험 정비해야

의료인 재교육도 필요하다. 한국은 임신 중지 시술이 불법이었기 때문에, 산부인과 의사라고 해도 임신중절을 잘 알지 못한다. 윤 과장은 대학 시절을 회상하며 "교과서에는 관련 내용이 있었지만 막상 그 부분이 나오면 '한국에서는 어차피 불법이니까 몰라도 된다'며 넘어갔다. 의대생을 교육하는 대학 병원에 실질적으로 임신 중지 시술 사례가 많지 않은 것도 문제"라고 말했다.

임신 중지와 관련한 모든 정보에 손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여성의 건강권을 향상하는 데 중요한 요소다. 윤 과장은 "해외 여러 나라는 정부 의료 기관에서 임신 중지와 관련한 모든 종류의 정보를 제공한다. 물리적인 시술, 경구용 임신중절약, 사후 피임약 등에 대한 안내가 체계적으로 일원화해 있다. 한국도 이 같은 준비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피임 및 임신 중지 시술을 건강보험으로 적용할지도 쟁점 중 하나다. 현재 피임약 처방 및 시술은 모두 비급여다. 피임 상담도 보험 적용을 받을 수 없다. 윤정원 과장은 "임신 중지를 줄이기 위해서는 원치 않는 임신을 줄여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결국 피임 교육과 함께 포괄적인 성교육이 필요하다"며 "여성의 인권과 건강권 관점에서 피임과 임신 중지를 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날 강연 참석자는 모두 여성이었다. 여성들이 얼마나 이 이슈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그는 여성의 건강권이 위협받는 현실에서도, 관련 부처들이 그동안 헌재 결정만 바라보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헌법 불합치 결정 후에도 먹는 유산 유도제 '미프진'은 식약청 허가를 받지 못했다. 윤정원 과장은 "하루 빨리 여러 쟁점을 고려한 정책을 만들고, 안전한 임신 중지를 위한 가이드라인을 현장에 배포해야 한다"고 말했다.

윤정원 과장은 아일랜드 사례를 들었다. 아일랜드는 임신중절이 전면 불법이었지만, 낙태죄 폐지 판결 후 관련 법을 제정하고 의료인을 재교육했으며 건강보험을 정비했다. 이런 인프라를 구축하는 데 6개월밖에 걸리지 않았다. 윤 과장은 한국 사회에도 '의지'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2시간으로 예정돼 있던 강의는 2시간 30분을 넘겨서야 끝났다. 그럼에도 시간이 모자라 청중의 질문을 다 소화할 수 없었다. 그만큼 낙태죄를 둘러싼 논의가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 줬다. 한국 사회 맥락에서 짚은 낙태죄 폐지의 의미, 의료 서비스 차원에서 본 임신 중지를 논의한 청어람ARMC는 6월 3일에는 백소영 교수(강남대)와 함께 기독교 윤리 관점에서 낙태죄 폐지 현실을 살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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