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안녕, 기독교>(토기장이) 저자 김정주 전도사가 진행한 평신도 글쓰기 모임 '쓰고뱉다' 완성반 참석자가 쓴 글입니다. '한 권의 책 쓰기' 프로젝트에서 저술한 단행본 형식의 미출판 원고 중 일부를 필자의 허락을 받아 게재합니다. '사모행전 - 교회밖에 사모'는 10회에 걸쳐 격주로 연재됩니다. - 편집자 주

○○여고 졸업. □□대학교 국문과 수석 입학. 4년 전액 학비 및 생활비 보조 장학생. 교직 이수. 중등 국어 정교사 2급 자격증 有. 학원 강사 및 과외 경력 다수. 고등학교 기간제 교사 경험 有. □​​□대학교 국어학 석사과정. 내신 9등급을 1등급으로. 010–XXXX-XXXX.

전에 살던 지역 벼룩 신문에 실었던 과외 광고다. 문의 전화는 제법 많았다. 낮에는 지역 중·고등학교 시간강사, 다문화센터 한국어 강사, 밤에는 과외를 하며 가정을 꾸렸다. 신학대학원에 진학한 파트타임 전도사 남편의 월급은 60만 원, 우리 가족이 숨만 쉬어도 나가는 돈은 월 100만 원이었다. 거기에 아이들 기저귀값, 가족 식비 등 생활비는 모두 나의 몫이었다.

남편의 도움 없이 아이를 돌보며 일과 공부까지 병행하는 건 힘들었지만, 그나마 고향에서는 가능한 일이었다. 아이는 친정 부모님이나 시어머님께 잠깐씩 맡길 수 있었고 일자리도 많았다. 공공 언어 진단 사업부터 사회 통합 프로그램 강의 등 교수님을 통해 들어오는 일자리, 인맥을 통해 알음알음 들어오는 학교 강사 자리, 과외는 언제나 있었다. 시간이 없어 몇 개는 거절해야 할 정도였다. 

하지만 새로운 곳으로 이사 온 후에는 사정이 달랐다. 일단 1년은 둘째를 돌보느라 아무 일도 하지 못했다. 친정 부모님은 모두 돌아가셨고, 시댁은 멀었다. 아이를 맡아 줄 분들이 없으니 마음대로 일을 하러 나갈 수가 없었다. 시간이 흘러 둘째까지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한 뒤로는 평일 오전 9시부터 오후 4~5시까지 일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내 경력과 형편상 학교 강사나 기간제 교사 자리밖에는 일할 곳이 없어 보였다는 게 문제였지만, 다행히 지역 교육청 홈페이지 게시판에는 기간제 교사 모집 공고가 넘쳐 났다. '할렐루야, 골라 가면 되겠구나!'

크나큰 착각이었다.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접수한 이력서만 100통이 넘었지만, 대부분 '서류 광탈'이었다. 면접까지 간 건 5번도 채 되지 않았고 어렵게 나선 면접에도 이미 내정자가 있어 들러리로 앉아 있다 돌아온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면접관들은 내 이력서를 보며 연신 대단하다고 감탄사를 연발했지만, 돌아오는 건 불합격 통지뿐이었다. 예전처럼 주말 과외라도 해 보고 싶었지만, 주말이 제일 바쁜 데다가 출퇴근 시간도 일정하지 않은 남편의 사역 특성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개학 이후라 기간제 교사 모집 공고가 더 이상 올라오지 않던 3월 중순의 어느 날, 오전 11시에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우리 집에서 버스로 40분 정도 거리에 있는 한 초등학교에서 온 전화였다. 오늘 오후 2시까지 계약하러 올 수 있겠느냐는 제안에, 연신 감사하다 인사하고 급하게 챙길 수 있는 서류만 들고 가서 계약했다. 새로운 곳으로 이사 온 후 구한 첫 일자리였다. 일주일에 2시간씩 2번, 시간당 2만 원, 방과 후 기초학력 국어 강사 자리였다. 아이들 어린이집 하원 차량 시간이 애매해, 일당 4만 원 중 1만 원은 택시비로 길바닥에 뿌려야 했지만 이마저도 감지덕지였다. 

경력이 한 줄 생기니 다음엔 좀 나아졌다. 적어도 서류에서 탈락하는 일은 없었다. 이력서를 냈던 방과 후 강사, 교육청 다문화 상담사 같은 자리에 지원하면 적어도 면접까지는 올라갔다. 집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해 다닐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서류를 접수하고 면접을 봤다. 

우여곡절 끝에 아랍어를 배우겠다는 조건으로 집에서 버스로 20분 거리에 있는 초등학교에서 한국어 강사로 일하게 됐다. 교육청 사업비로 뽑는 인력이라 주 14시간 근무에 계약 기간은 방학 포함 8개월 남짓이었고, 매년 공고를 통해 새로 채용하는 자리였다. 감사하게도 내년에도 같이 일하자는 약속을 받았지만, 학교가 교육청 사업비 공모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구직 8개월 만에 또다시 이력서 100통의 악몽이 시작됐다.

그렇게 5년이 지난 지금은 오전·오후 매년 최소 2개, 많으면 3~4개 기관에서 일한다. 보따리 장사의 삶이었다. 올해는 감사하게도 작년에 일했던 학교에서 다시 일하게 됐다. 차 트렁크에 고이 넣어 둔 짐들을 그대로 풀어놓으면 된다. 내년 일은 또 내년이 돼 봐야 알 수 있을 것이다.

거창하지만 새로운 곳으로 이사 온 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한 아브라함이 떠올랐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들의 가족이 떠올랐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말씀과 그 음성을 직접 들었을 테지만, 가족들은 그저 아브라함의 증언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따랐을 텐데, 그들은 어떻게 그렇게 불평 한마디 없이 순종할 수 있었을까.

오늘도 이 땅의 많은 사모님들과 그 자녀들이 아브라함의 가족과 같은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남편의 사역지를 따라 하루아침에 낯선 곳으로 가서 적응해 내야 하는 일상들, 그 과정을 순종으로 받아들이는 그 마음들. 나는 이사 온 이후로 이들을 바라보고 위하고 품는 마음이 이전과 확연히 달라졌다. 어떤 사모님이 남편을 따라 새로운 지역으로 이사한다는 소식을 들으면, 그 가족들의 마음과 삶을 인도해 달라고 더욱 기도하게 된다. 

게다가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매일 고군분투하며 얻은 일터에서 아브라함의 가족들을 마주한다. 내가 한국어를 가르치는 이들은 모두 부모님 손을 잡고, 혹은 남편 손을 잡고 낯선 땅에 왔다. 특히 아이들의 경우,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들어 본 적도 없고 오고 싶은 마음도 없었지만, 단지 부모님 손에 이끌려 정든 고향과 친구와 학교를 떠나 말조차 통하지 않는 곳에 온 친구들이다.

내가 이들의 마음을 모두 헤아릴 수는 없겠지만, 잠깐이나마 나그네가 되었던 그 마음, 아브라함의 가족이 된 마음으로 이 아이들을 바라본다. 아이들 앞에서 표면적으로는 한국어를 가르칠지라도, 종국에는 그들의 마음까지 품어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먼저 된 나그네로서 나중 된 나그네들을 품는 마음으로 말이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남편을 따라 나를 이곳에 보내시고 매년 고군분투하며 나그네의 마음을 느끼게 해 주신 이유는, 내가 가진 소명을 일깨워 주시기 위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항상 나그네 된 마음을 잊지 말라고, 낯선 땅에서 생존을 위해 한국어를 배우며 나그네처럼 살아가는 이들을 품고 기도하며 하루하루 살아가라고 말이다. 칠흑 같은 어둠에 둘러싸인 것처럼 삶이 힘들고 고될 나그네들을 위해, 밤하늘의 별빛 하나를 수놓는 그런 길잡이 같은 나그네가 되고 싶다.

민달팽이 / 사모師母가 아닌, 하나님을 사모思慕하는 사람으로 살겠다고 다짐하며, 매일매일 아등바등 삶을 살아 내고 있는 이 시대의 '불량 사모'. 교회 '밖에'서가 아닌, 교회'밖에' 모르던 삶으로 돌아가려 여전히 애쓰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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