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서른일곱 번째 생일을 맞았습니다. 제 또래가 대부분 그럴 텐데요. 생일이라고 대단히 설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평소와 다른 감정이 올라오는 것도 사실입니다. 제가 세상에 없지 않고 있다는 신비로움 때문입니다. 조금 아쉽게도, 이번 생일은 아침에 마음이 좀 상했습니다. 출근 때문에 바쁘게 케이크를 자르려는데, 5살 난 아들이 그날따라 '생떼'을 심하게 부리는 바람에, 생일상이 엉망이 됐기 때문입니다. 아들이 조금 얄미웠지요.

곧 있으면 예수님의 생신입니다. 제 생일상이야 망쳐도 되겠지만, 예수님의 생일상만큼은 잘 차려 드리는 게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귀하고 마땅한 과제임이 분명합니다. 이 발언에 동의가 되신다면, 글을 끝까지 차분히 읽어 보시면 어떨까요? 분명 상차림에 작게나마 도움이 되실 겁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계신 독자분께선 혹시 목회자이신가요? 그렇다면 지금쯤 '성탄 행사'에 대한 생각으로 분주하시겠군요. 물론 코로나 때문에 행사를 준비하지 않는 목회자도 계실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성탄 즈음마다 반복되는 목회자의 분주함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행사 치르느라 정작 예수님과는 많이 데면데면하시지요? 참 아쉬운 목회 현실인 것 같습니다. 

"요즘 대림 시기는 그저 상인들이 한몫 잡는 시기로 변해 버렸습니다." [기스베르트 그레샤케, <낮은 곳에 계신 주님>(분도출판사), 13쪽]

아니면 혹시 일반 교인이신가요? 그렇다면 평소보다 들떠 계실 수도 있겠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예수님에 대한 설렘이 아니라) 집 가까운 곳에 백화점나 유동 인구가 많은 거리가 있기 때문일 가능성도 크겠지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실은 저도 어제 볼 일이 있어 평택역 백화점 앞을 지나다가, 화려한 성탄 분위기를 품고 있는 '세일'이라는 간판을 보게 됐고, 그 순간 잠시 예수님과 이별을 경험했으니까요. "대림절은 상인들이 한몫 잡는 시기에 불과하다"는 저자의 지적은, '독일'의 상황에서 나온 말이지만 그리 낯설지 않습니다. 이른바 자본주의가 잠식한 이 세계는 한국에서도 사람들의 영혼을 굴복시키는 데 매년 성공을 거두고 있을 테니까요.

물론 이 대목에서 고민되는 지점이 있습니다. '물건을 팔아야만 먹고살 수 있는' 교인들에 대한 고민인데요. 사실 그들이 단단히 '한몫' 잡았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은 진심입니다. 그래야 어려운 살림에 자식들 학비도 대고 할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정말 중요한 것은, 그분들이 많이 팔아야 교회에 헌금을 낼 수 있고, 저는 그 헌금을 통해 '사례비'라는 고상한 이름의 월급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마치 이 구조에서 완벽히 자유로운 듯 소비문화를 비판만 하는 것은, 그 토양에 발 딛고 살아가는 교인들에 대한 폭력일 것이고, 제 자신에게도 진실하지 못한 처사일 겁니다. 

그럼에도 성탄절을 맞이할 때마다 피할 수 없는, 한 사람의 신앙인으로서의 고민은 '그리스도인들이 해마다 차려 드리는 생일상을 예수님께서 정말 받으실까?'하는 것입니다. 귀여운 내 새끼 율동 장면을 카메라에 담느라 정신이 없고, 성탄절이 일요일이 아닌 '평일'일 때에도 기꺼이 예배당에 와 앉았지만, 정작 마음은 백화점과 길거리에 가 있는 우리들이 준비한 생일상 말입니다. 우리가 "성탄 분위기에 취해 어디를 가나 난장판"(13쪽)이라는 지적을 외면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방금 언급한 교인들의 먹고사는 문제에 대한 고민은 부득이 옆으로 제쳐 두고, <낮은 곳에 계신 주님>(분도출판사)의 저자 그레샤케의 생각을 따라 성탄의 본질에 주목할 수밖에 없습니다.

<낮은 곳에 계신 주님 - 오늘날 성탄의 의미> / 기스베르트 그레샤케 지음 / 허찬욱 옮김 / 분도출판사 펴냄 / 120쪽 / 1만 원
<낮은 곳에 계신 주님 - 오늘날 성탄의 의미> / 기스베르트 그레샤케 지음 / 허찬욱 옮김 / 분도출판사 펴냄 / 120쪽 / 1만 원

"성탄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선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19쪽)

이 인용구에 감동이 되시나요? 아마 매우 심심하게 보이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성탄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한 유일한 길이자 지름길임에 틀림없습니다. 세상의 현실을 외면한 채 성탄절을 이해할 수 있는 길은 없으니 말이지요. 우리를 유혹하는 쇼핑몰에서 고개를 돌려, 과연 이 세상이 어떤 곳인지 주목해야 합니다. 왜 그렇게 서로 싸우는지(20쪽), 왜 그렇게 스스로를 파괴하는 사람이 많은지(21쪽), 왜 그렇게 기아와 전쟁은 끝을 모르는지(22쪽), 한마디로 왜 이 세상은 고작 이 모양인지(22쪽) 말입니다. 왜 이런 것에 주목해야 하는지요? 바로 그런 세상 속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찾아오셨다는 것이 '성탄'의 기쁜 소식이기 때문입니다(43쪽). 찾아오셨을 뿐만 아니라 그런 세상의 '일부'가 되심으로(22쪽), 이 세상을 당신의 세상으로 받아들이신 것이 바로 '성탄'이기 때문입니다(23쪽).

"아무도 그보다 더 낮아질 수 없을 정도로, 그리스도께서는 가장 낮은 끝자리로 가셨습니다." (61쪽)

우리가 외면하지 말아야 할 '세상'이라 하면, 정말 많은 주제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낮은 곳'에 관한 이야기로부터 출발해야만 합니다. 예수님의 첫 출발이 근육질 남성이 아니라 '아기'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말입니다. 아기를 키워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신생아는 목욕 한번 시키기도 정말 어렵습니다. '부서질까 봐' 말이지요. 마치 두부를 만지듯 조심하느라 되레 온몸에 힘을 꽉 주고 겨우 목욕을 마칠 때마다, 저는 정말 허리가 부러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 그렇게 연약한 아기로 오셨다니, 얼마나 놀라운 말인가요?

그분은 심지어 가축들의 냄새나는 밥그릇에 누우셨지요. 그래서 우리는 '겸손'에 대한 정의를 내리려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우주의 주인이라는 분이 가장 연약하고 초라하게 태어나셨습니다. 겸손의 '끝판왕'입니다. <낮은 곳에 계신 주님>이라는 책 제목은 그래서 정말 적절한데요. 우리가 "고통받고 굶주린 이들, 소외되고 멸시받는 이들"(62쪽)을 외면한 채 성탄절을 맞이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그러한 낮은 곳에서 첫 번째 크리스마스가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그레샤케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중요한 이야기를 합니다.

"애틋한 연민의 마음으로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필요하다면 직접 낮은 곳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112쪽)

무슨 말일까요? 저는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의 연민이,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시혜'를 베푸는 일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내가 시혜를 베푸는 순간 여전히 나는 '윗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시지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시혜를 베푸셨나요? 물론 그렇게 이해할 만한 성경 구절들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성탄의 의미에 다가서기 위해 애쓰는 중입니다. 하나님께서 저 하늘에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기부금'을 내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아들이 하늘 영광을 통째로 버렸다는 게 성탄 이야기 아닌가요? 그렇기 때문에 그레샤케가 위와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필요하다면 직접 낮은 곳으로 내려가야 한다는 말은, 우리가 누릴 것을 다 누리면서 그저 시혜를 베푸는 일에 만족한다면, 그 연민이 진심이라 할지라도 '성탄절과는 무관하다'는 뜻일 겁니다. 결국 이 말은 기독교 신앙은 '정치'와 무관할 수 없다는 이야기로 연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가령 '먹을 게 사방에 넘쳐 난다는 데, 굶주리는 사람은 왜 헤아릴 수 없는지'를 정치적으로 따지지 않고, 과연 우리가 예수님께 온전한 생일상을 차려 드릴 수 있을까요? 자신의 욕망에 철저히 복무하는 정치관을 포기하지 않고, 그저 그 욕망의 부스러기를 나눠 주는 것에서 도덕적 보람을 느끼는 기독교인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제게 주어진 서평 원고의 분량이 벌써 채워지고 있어 난감하군요. 이 책을 통해 받은 도전을 아직 일부만 전달했을 뿐인데 말입니다. 지금까지의 제 이야기가 어느 정도 마음을 움직이셨다면, 부디 이 책을 통해 전체 이야기를 꼭 확인해 보시길 권합니다. 아마 이번만큼은 예수님의 생일상을 잘 차릴 수 있을 겁니다. 부득이 한 가지 이야기만 더 소개하고 펜 뚜껑을 닫아야 하겠네요.

"도대체 왜 하느님은 우리의 비참한 운명을 받아들이셨을까요? 바로 사랑 때문입니다." (64쪽)

저는 지금까지 우리가 '세상'을 외면하면 왜 안 되는지, 그리고 그 세상은 왜 '낮은 곳'이어야 하는지 저자의 생각을 따라 글로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그레샤케는 '낮은 곳'과 관련해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하나 더 들려줍니다. 예수님께서 강력한 군주의 모습이 아니라 연약한 아기로 태어나신 이야기 속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이 담겨 있다고 말입니다. 그는 중세 신비주의 사상가 마이스터 엑카르트가 말한 적이 있다는 한 예화를 들어 설명합니다. 그 예화는 서로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던 부부에 관한 것입니다.

어느 날 아내가 사고로 한쪽 눈을 잃게 되었는데요. 이어지는 이야기가 정말 놀랍습니다. 사고 이후 볼품없어진 외모 때문에 남편의 사랑을 확신하지 못하는 아내를 위해, 남편이 스스로 눈을 뽑았다는 겁니다(71쪽). 이상하게 들리시나요? 네, 정말 이상하게 들리실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야기의 의도를 잠시 헤아려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성탄 사건을 일으키신 이유가 꼭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꼭 말씀하고 싶어서, 마치 멀쩡한 남편이 스스로 눈을 뽑아 볼품없는 외모를 선택한 것처럼, 우주의 주인이 그 압도적인 영광을 버리고 지구인, 그중에서도 아기가 되셨다는 게 성탄절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그만큼 커다란 사랑을 받고 있다는 뜻이란 말이지요(72쪽).

사는 게 힘드시냐고 묻기도 민망한 시대입니다. 사실 저 역시 매일 눈앞에서 벌어지는 이 혼돈의 역사가 버겁기만 합니다.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신 게 맞나' 싶습니다. 그렇지만 곧 다가올 성탄절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을 건네고 계신다고 믿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 정말이야"라고 말이지요. 비록 우리에게 세상 모든 고통과 어둠을 해석할 능력은 없지만,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시간(성탄절)이 마련돼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면 어떨가요?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아기 예수의 탄생'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이것은 어떤 새로운 상품도, 어떤 화려한 쇼핑몰도 결코 건넬 수 없는 하늘의 극진한 위로입니다. 이런 사랑을 받는 우리가 소비주의의 덫에 걸려 성탄절의 참의미와 점점 멀어지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가장 낮은 자리에 태어나신 예수님의 이름을 이용해 권력과 욕망을 탐하는 것도 정말 이상한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크신 사랑에 응답하는 길은, 오늘도 가장 초라한 이웃의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오시는 예수님에게 반응하는 일 외에는 없을 겁니다(마 25:40). 시혜를 베풀며 조금의 도덕적 만족감을 느끼는 것을 넘어, 필요하다면 직접 낮은 곳으로 가라는 그레샤케의 이야기를 꼭 유념하며 말이지요.

메리 크리스마스.

이현우/ 김포에서 목회하는 감리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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