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주석적 망각증

"로마서 9~11장은 로마서 1~8장에 덧붙여진 부록이 아니라 로마서 전체의 절정 부분이다." (179쪽)

이 인용구를 보면 무슨 생각이 드는가. 아마 이제는 색다를 것도 없는 명제라서, 이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별 감흥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게 1963년에 출간된 아티클, 아니 그전(1961년)에 있었던 강연에서 이미 발화된 명제라면 어떨까. 참고로 E. P. 샌더스의 <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교>가 출간된 연도가 1977년이다. 혹시 까무러쳤나? 까무러쳤어야 이 글을 시작할 수 있으니, 다들 까무러쳤다고 치자. 그렇다면 그들에게 해 줄 얘기가 있다.

학교에서 신약 공부를 하는 신학생이 반드시 듣게 되는 말이 하나 있다. 물론 모든 신학생이 그렇지는 않았겠지만, 적어도 나는 이 얘기를 1년에 한 번은 꼭 들었던 것 같다. 그 말인즉슨 1900년대 초·중반에 이뤄진 신약학 연구들을 '옛 연구'로 치부하지 말고('독일어니까 못 읽을 거야'라고 포기하지 말고) 일생에 한 번은 꼭 읽어 봐야 한다는 말이었다. 당시 교수님들은 하나같이 난제를 눈앞에 둔 수학 너드마냥 열렬히 말했다. 그 시절 글들을 읽다 보면, 정말 해 아래 새것이 하나도 없으며 현대 연구자들이 최신 논쟁이라고 달려들어 서로 물어뜯고 있는 주제가 20세기 초 독일 '구닥다리' 신약학자들에게는 너무 당연한 소리거나, 적어도 그때도 최신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라고.

그러니까 이 예시는 주석학 세계에서 발생하는 '망각증' 문제를 말한다. 현대 주석가들은 현대 문제의식과 최신 이론에 몰두하느라, 가끔(사실은 자주) 자신의 성경 주석이나 신학 방법론이 어디서 유래했으며, 어떤 흐름을 타고 이 시절까지 흘러와 자신의 지식으로 자리 잡았는지 잊어버린다. 이러한 주석적 망각증에 시달리는 석학들은 가끔 신진들의 연구사 정리를 통해, 자기도 몰랐던 자기 연구의 근원·노선을 영문도 모른 채 전해 듣게 되며, 이를 통해 자기가 누구를 계승하는지도 모르고 연구했다고 조롱을 당하거나 어느 누구의 연구를 훌륭하게 계승했다고 찬사를 당하기도 한다. 아무튼 망각증에 걸린 주석가들은 그들이 망각하는 한, 무엇이든지 당하는 위치에 놓여 있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있는 바울> / 크리스터 스텐달 지음 / 김선용·이영욱 옮김 / 감은사 펴냄 / 256쪽 / 1만 9800원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있는 바울> / 크리스터 스텐달 지음 / 김선용·이영욱 옮김 / 감은사 펴냄 / 256쪽 / 1만 9800원 

크리스터 스텐달(Krister Olofson Stendahl, 1921~2008)의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있는 바울>(감은사)은 학계는 모르겠고, 적어도 한국 강단을 주석적 망각증에서 깨우기에는 충분한 저작이다. 아마 독자들 중에는 이 책을 읽고 '내용도 새로울 것이 없고 똑같은 말하는 좋은 책 많은데 왜 굳이 이 책을 출간해야 했느냐'고 물을 사람도 있을 것 같다. 만약 그렇다면 그 사람은 망각증으로 얼얼한 상태임에 틀림없다. 그 사람은 정신을 차려야 한다. 이 망각증에서 빠져나오지 않으면, 우리는 같은 의견을 중심에 두고 과거와 현재를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과거보다 더 나은 현재의 연구를 하는 데 상당히 먼 길을 돌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적어도 크리스터 스텐달은 지금 바울을 주석하는 이들이라면 '잊고 싶지 않은, 잊어서는 안 되는 너의 이름은君の名は'이어야 한다.

2. 바울을 바라보는 '양심'이라는 렌즈

스텐달의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있는 바울>은 여러 논문을 모아 놓은 책이다. 그러나 각각의 논문은 대체로 유사한 논지를 갖고 있는데, 이 책의 두 번째 챕터인 '사도 바울과 서구의 성찰적 양심'이라는 논문이 그 논지의 시발점이다. 이 글은 1961년 미국 심리학회 초청 연설에서 비롯된 논문이자, 바울신학의 '심리적 해석'을 다룬 연구다(11쪽). 바울을 심리적으로 해석한다고 해서 '이상한 거 아닌가' 겁먹을 필요는 없다.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내용이니까.

스텐달은 당대 '성찰적 양심'에 입각한 바울 해석을 언급한다. 이러한 해석은 바울서신의 여러 서술에서 '하나님 앞에서 내가 고작 나인 것이 너무 고통스러운 바울'을 발견해 낸다. 더 높은 선에 굴복하고 싶지만, 나를 사로잡는 죄 때문에 아무것도 지키지 못하는 자신이 너무 슬퍼서 은총을 구하는 감성. 악의 굴레에서 자신을 건져 준 용서의 무조건성에 감격하는 그 감성. 양심에 몸서리치며 "나는 내가 바라는 선을 행하지 않고 내가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한다"(롬 7:19)고 호소하는 바울(?)의 감성. 스텐달은 바로 이 감성을 공유하는 (현대적으로 거칠게 말하면) '바울신학에 관한 구관점'이 바울신학의 대전제가 되어 주석가들을 지배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이러한 바울 주석의 대전제는 자연스레 이신칭의에 대한 당시 주석가들의 해석으로 이어진다. 스텐달은 '성찰적 양심'에 따른 바울 이해가 '피스티스(pistis,믿음·신실함)'로 의에 이른다는 바울의 주장을 왜곡한다고 봤다. 이미 지배적 전제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보기에, '이신칭의'는 엄격한 법도를 지켜야 하는 인간의 내적 성찰과 양심의 가책에 대한 돌파구로 제시된 교리이며, 행위로 구원을 얻고자 하는 유대인들을 비판하는 교리다. 그러나 스텐달이 보기에, 이는 '아우구스티누스'와 '루터'의 신학이지 바울의 신학이 아니다. '피스티스로 의를 얻는다'는 바울의 주장과 '개인의 신앙 양심을 구원해 줄 구원의 은총'이라는 개념은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바울 주석가들은 자신들이 아우구스티누스와 루터로부터 물려받은, '도덕성 앞에 흔들리는 성찰적 양심'이 그들 자신뿐만이 아니라 바울의 것이라고 굳게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크리스터 스텐달(Krister Olofson Stendahl, 1921~2008). 사진 출처 WCC 홈페이지
크리스터 스텐달(Krister Olofson Stendahl, 1921~2008). 사진 출처 WCC 홈페이지

그렇다면 바울이 자신의 서신에서 진정 말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인가. 스텐달에 따르면, 바울의 '이신칭의'는 당시 교회 내에 이방인 신자가 늘어남에 따라 발생한, 유대인·이방인의 관계성에 대한 고민에서 탄생한 교리다. 바울이 그리스도를 다마스커스에서 처음 마주했을 때, 바울 스스로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죄에서 용서받았다'고 여기지 않았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바울에게 중요한 것은 죄와 용서가 아니며, 바울의 비판 대상 또한 유다이즘의 율법관과는 거리가 멀다. '할례와 율법'으로 의로움을 판단하던 유대인과는 다르게,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서 이방인에게 주어진 할례와 율법이 곧 '믿음과 사랑'이었던 것뿐이다. 그러나 바울의 텍스트를 시대의 주석가들이 오해하기 시작하면서, 서구의 '양심'이라는 전제가 바울신학의 당연한 주제가 되어 버린 것이다(183쪽).

그렇다면 도대체 왜 서구인들은 바울을 읽을 때 '양심'이라는 렌즈를 벗고 보지 못했을까. 왜 그들은 자신들이 아우구스티누스와 루터로부터 물려받은 '죄인으로서의 자기 혐오'와 거기서 빠져나오게 해 주는 '용서의 은총'을 바울도 그대로 느끼고 있었을 것이라고 당연스레 생각했을까? 스텐달은 이를 당시의 사회적 심리가 교회에도 강력하게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 같다(79~80쪽, 해제를 쓴 김선용도 20쪽에서 이를 언급한다). 기독교가 세상과 우주의 차원에서 사고하기보다는 '주체'와 '개인'을 중심으로 실존이나 도덕을 사고하기 시작하면서 발생한 지배적 정서가 존재했고, 여기서 비롯된 욕구가 성경 읽기에 반영되면서 '오독'이라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80쪽).

따라서 스텐달의 바울 주석은 자연스럽게 '현대의 사고방식을 성경 해석의 전제로 삼으면 안 된다'(169쪽)는 문제의식으로 귀결된다(24쪽). 우리는 과거의 사람과 지금의 우리를 '같은 사람'으로 인식하면서, 우리가 지금 생각하고 느끼는 것을 예수·바울 같은 고대인들도 똑같이 겪었으리라고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예수와 사도들은 지금의 우리와 2000년의 시간적 거리, 팔레스타인과 한반도만큼의 지리적 거리가 있다. 우리는 1세기 유대-그리스도인은 물론이고, 심지어 이방-그리스도인들의 눈에 보기에도 철저히 이방인이다. 때문에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을 그들도 당연하게 여겼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성경을 읽어서는 안 된다.

3. 스텐달은 시작이다

스텐달의 주장을 읽다 보면, 그가 바울을 읽어 내는 내용이나 태도가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논증 과정 중간중간에 미처 생각해 보지 못한 지점을 짚어 내는 스텐달의 통찰에 놀랄 수는 있어도, 전체적인 시사점이나 주석 내용이 아주 새롭거나 신박하지는 않다. 그러나 우리가 진지한 주석가라면, 내가 학계 연구자든지, 강단 설교자든지, 성경을 사용하는 타 분야 종사자든지, 성경 읽기를 사모하는 경건한 신자든지 상관없이 바로 이것이 우리가 계승하고 있는 신학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제 아무리 스텐달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어보는 사람이라도, 그를 직면하게 되면 주석적 망각증에서 깨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스텐달과 조우하며 망각증에서 깨어난 우리는, 같은 주장을 하고 있는 스텐달과 우리 사이에서 여러 가지를 비교해 볼 수 있게 된다. 스텐달은 바울이 정말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검토하는 과정에서, 당대의 정서적 요구와 욕망을 고찰해 낸다. 그리고 "바울에게서 우리가 듣고 싶은 이야기"와 "바울이 진짜로 전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따로 떼어 분리한다(27쪽). 다른 말로 하자면, 도덕에 관해 흔들리는 성찰적 양심은 당시 서구의 사람들이 "바울에게서 듣고 싶었던" 신학이고, 당시 "바울이 진짜로 전하고 싶었던" 말은 유대인과 이방인이 공존하는 1세기 교회에서 이방인들의 멤버십 문제를 처리하는 신학적 방법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현대의 요구와 성경의 실제 의도를 어떻게 분리할 수 있을까. 스텐달을 계승하는 내가 이 책을 통해 가장 심각하게 직면한 문제다. 현대는 스텐달의 시대와는 달리, 사실 그대로의 역사, 문자적인 의미에서의 역사, 완벽한 재현으로서의 역사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아 버린 시대다. 이러한 시대적 요구로 성경 주석에서도 앞선 두 가지 지평의 구분이 점점 흐릿해지고 있다. 보수적인 역사비평을 이어 받은 나는, 이런 시대에 '성경이 실제로 말하는 바'라는 가치를 어떻게 견지해 나가야 할까.

성경을 주석할 때,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 온 견해·이론·전제가 어느 상황에서 태어났고, 어떤 과정을 통해 우리에게까지 이르렀는지 탐색하는 일은 중요하다. 스텐달을 읽어 낸 나의 사례가 그 중요성을 충분히 전달했길 바란다. 스텐달 또한 당대의 지배적 주석이 어디에서 비롯했고, 어떤 과정을 통해 당연한 전제가 됐는지 탐색하는 과정에서 '바울이 진정으로 말하는 바'를 찾아낼 수 있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스텐달에게서 배울 수 있는 '더 나은 주석의 지평을 여는 길'의 힌트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스텐달은 시작이다. 우리에게는 스텐달 외에도 잊어서는 안 되는 이름들이 많이 있다. 우리의 사고를 구성하는 것들의 시원이 된 이름들. 그 이름들을 구닥다리 유물로 치부하기보다는, 일생에 한 번쯤 기억하고 살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권우진 / 카페 알바 노동자. 딱 2류로 1인분만 하고 살자고 결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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