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구권효 기자] 연말부터 유난히 성폭력 사건 취재가 많았다. 지난 두 달간 만났던 피해자들은 <뉴스앤조이> 문을 두드리기까지 많은 고민을 거쳤다고 했다. 역시나 처음 만난 기자에게 내밀한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부담감과 긴장감이 느껴졌으나, 이들은 피해 사실과 요구 사항을 조목조목 말했다.

가해자들에게 물으니 오히려 피해자를 탓했다. 피해자의 도덕성을 문제 삼거나 그들에게 다른 의도가 있는 것처럼 말했다. 이런 태도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데, 설사 피해자에게 다른 도덕적 문제가 있다 해도 본인이 준 피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른 의도'라는 것도 들어 보면 대부분 음모론 수준이다. 피해자를 신천지로 몰아가는 건 단골 레퍼토리다.

그렇게 생각하는 증거(?)는 '목회직을 내려놓으라'는 피해자들의 요구였다. 가해자들은 피해자들이 무슨 이유에서건 자신에게 불만을 품고 있으며, 자신을 무너뜨리려 음해하는 것이라고 했다. 거기다 피해자들이 배상금이라도 요구하면 '거봐라, 결국 돈이지 않느냐'는 식으로 이야기했다.

가해자야 자기방어 수단으로 그랬다 쳐도, 힘이 돼 주어야 할 주변인들마저 피해자들의 요구를 의심하는 경우가 잦았다. 주변인이었던 한 목사와의 통화가 기억에 남는다. 그는 피해자들에게 연민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가해자 목사 말대로 피해자들의 의도에 대한 의심을 지우지 못했다. 특히 피해자들이 가해자의 목사직 박탈을 요구하는 것을 문제 삼았다. '과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어디까지가 성폭력 피해자의 '정당한' 혹은 '적절한' 요구일까. 사실 성폭력을 저지른 목사가 더 이상 목회하면 안 된다는 사실은 조금만 생각해 봐도 명백하다. 그리고 이는 자진 사임이 아니라 징계의 결과여야 한다. 단지 도덕적 책임을 지고 그만두게 하는 차원을 넘어, 징계하지 않을 경우 같은 일이 또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피해자들도 이를 가장 우려한다. 게다가 대부분 반성은커녕 가해 사실을 인정하지도 않는데, 이런 자들에게 진정한 회개를 기대할 수는 없다.

피해자가 공개 사과나 언론을 통한 공론화를 원한다면 어떨까. 만약 가해자가 성폭력을 저지르고도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여전히 영향력을 가진 자리에 있다면, 비슷한 일이 벌어질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스스로 주변에 가해 사실을 알리게 하거나 언론을 통해 공론화하는 일은 재발 가능성을 현저히 낮추는 일이 될 것이다.

법적책임을 묻는 건 어떤가. 강제 추행 이상은 형사법으로 처벌되는 범죄다. 교회나 교단 내에서 소위 '공동체적 해결'을 기대하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피해자들이 호소해야 할 곳은 어디인가. 아무리 그래도 교회 일을 사회 법정으로 가져가는 것은 부적절한 일이니 그냥 묻어 두고 살아야 할까? 제대로 된 치리에 번번이 실패한 한국교회 현실을 감안하면 피해자들이 형사 고소를 결정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배상금을 요구하는 건 과한 일일까. 피해자들은 대부분 사건의 충격으로 정신적 고통을 안고 살아간다. 믿고 의지했던 사람에게 성폭력을 당한 고통은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피해 자체에 대한 배상뿐 아니라 사건 때문에 고통 속에서 보낸 시간에 대한 배상, 치료 비용 등이 필요하다. 배상금을 합의할 수 없다면 민사소송을 통해 위자료를 청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돈에 대한 부분은 외려 피해자들이 극도로 조심한다. 민사소송 계획이 있느냐는 질문에 한 피해자는 "그래도 되는 거예요?"라고 되묻기도 했다. 돈을 요구하는 순간 피해자의 순수성(?)을 의심받는 사회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차근차근 생각해 보면 성폭력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배상금을 요구하는 것 또한 지극히 상식적인 일이다.

"성폭력 피해자를 지원하면서 이와 비슷한 사례는 무수히 많이 만나게 된다. '돈'과 결부된 성폭력 피해는 그 '정당성'을 쉽게 상실한다. '배상'을 요구하는 것은 가해자의 책임을 묻는 일임에도, 성폭력에 대한 그릇된 통념은 '돈'이 필요한 피해자의 '어떤 의도'로 읽혀진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피해자는 '가짜 피해자'로 의심 받고, 심지어 성폭력 피해자에서 무고 피의자가 되는 심각한 인권침해를 당하기도 한다." (최선혜, 한국여성의전화 성폭력 피해자의 손해 배상권과 소멸시효 포럼, '성폭력 피해자의 배상권과 과제' 중)

단일한 피해자상은 없다. 피해자 중에는 소극적인 사람도, 적극적인 사람도 있다. 요구 사항도 각기 다를 것이다. 가해자의 징계나 사임만을 요구하는 사람도, 민형사 고소까지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건 그들이 어떤 선택을 하든 비난받거나 의도를 의심받을 일은 아니라는 점이다.

피해자들이 피해 사실을 말한다는 것은 존재를 건 행위다. 피해자의 의도를 쉽게 의심하는 공동체에서, 의심받을 각오를 하고 피해 사실을 진술하기까지는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이렇게 피해자가 피해 사실과 요구 사항을 알렸을 때, 주변인들은 의심이 아니라 공감하는 자세로 들어 줘야 한다. 피해자의 요구가 과하다고 생각하거나 그 의도를 의심하는 것은, 어쩌면 그 아픔에 충분히 공감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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