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제도권에서 신학·인문학을 바탕으로 시대를 사유하고자 하는 인문학&신학연구소 에라스무스가 '우리 시대의 그리스도교 사상가들'을 주제로 <뉴스앤조이>에 글을 연재해 왔습니다. 이 시대 주목할 만한 그리스도교 사상가를 소개하는 에라스무스 연구원들의 글은 이번 편을 마지막으로 연재를 종료합니다. - 편집자 주

이미 어느 정도 알려지고 국내에 상당수의 책이 소개된(소개될 예정인) 제임스 스미스(James K. A. Smith, 1970~)에 관해 학자 아닌 사람이 소개문을 쓴다는 건 상당히 부담스러운 일이다. 게다가 철학자 김동규 선생께서 이미 <뉴스앤조이> 지면을 통해, 뛰어나고도 접근성 좋은 제임스 스미스 개론을 쓰기도 했다.1) 그 글은 스미스의 신앙·학문 여정과 저술을 간략히 설명하고, 그가 구사하는 신학의 특징을 파악한 뒤 비판점과 의의를 제시했다. 그런 글이 공개돼 있는 마당에 스미스의 여정이나 기타 저술을 재서술해 지면을 낭비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간략하게나마 언급하자면, 캐나다 출신인 스미스는 대학 시절 그리스도인으로 회심했다. 그는 캐나다 기독교학문연구소에서 제임스 올타이스(James H. Olthuis)의 지도 아래 철학적 신학으로 석사 학위논문을 썼고, 그러는 동안 오순절과 개혁주의 신앙을 동시에 경험했다. 박사과정에서는 빌라노바대학교 존 카푸토(John D. Caputo)의 지도 아래 논문을 쓰며 현상학과 현대 프랑스 철학을 연구했다. 그 이후 로욜라메리마운트대학교 조교수를 거쳐 현재까지 칼빈대학교(원래 칼빈칼리지였다가 2019년도에 전환)에서 오랜 시간 가르치고 있다. 스미스는 개혁주의·복음주의권 학자들과 다양하게 교류·작업하고 있으며, 대중을 위한 저술 활동도 활발히 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스미스의 대표작으로 자리 잡은 '문화적 예전 시리즈' 3부작을 거칠게 개괄하고, 그에 대한 간략한 소감을 남기려고 한다.

제임스 스미스(James K. A. Smith, 1970~). 사진출처 제임스 스미스 홈페이지
제임스 스미스(James K. A. Smith, 1970~). 사진 출처 제임스 스미스 홈페이지
사랑하며 상상하는 인간, 실천을 통한 형성

'문화적 예전 시리즈'(Cultural Liturgies Series)는 '개혁주의 배경에서 이뤄지는 기독교 세계관 논의가 일종의 지성주의에 갇혀 있다'고 느낀 스미스가, 그 한계를 '예배'를 통해 극복하려는 시도로 출간됐다.

스미스는 시리즈 1권 <하나님나라를 욕망하라 Desiring the Kingdom>(IVP)에서 기독교적 관점으로 본 철학적 인간론을 제시하고, 이를 교육에 접목해 기독교 교육이 무엇인지 보여 준다. 미리 요약하자면, 그는 인간을 '사랑하는 존재'로 보고, 기독교 교육을 정보 전달이 아닌 형성과 관련한 기획으로 본다. 교육의 목적은 어떠한 내용을 암기하고 풀어내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스미스에게는 (머리가 아닌) 몸을 통해 마음의 습관을 형성하는 일이다. 교육이 일어나는 자리는 '예배'다. 예배는 매우 일상적인 일이면서 동시에 특별한 시간과 자리를 요하는 일이기도 하다. 

'예배하는 존재'로서의 인간론을 제시하기 위해 스미스는 앞서 개신교 인간론에서 다뤄 왔던 두 가지 관점을 비판한다. 하나는 인간을 '생각하는 존재'로 보는 관점이다. 스미스는 이러한 합리주의적·주지주의적 인간관이 어떠한 사상이나 추상적 가치관을 전파하고 메시지 자체에만 집중하는 경향을 보이며, 개신교 내에서는 이를 전적으로 수용하는 흐름이 있었다고 말한다. 또 하나는 이에 대한 반성으로 나온, 인간을 '믿는 존재'로 보는 관점이다. 스미스는 기존의 기독교 세계관 논의가 여기에 해당한다고 본다. 이 관점은 '전인적 인간'을 강조하며 합리주의적 인간관을 비판한다. 하지만 스미스가 보기에는 이 입장 역시 합리주의와 사실상 크게 다르지 않다. '신념' 차원에서 인간을 이해한다는 점에서 인간을 여전히 '생각하는 존재'로 바라보고, 인간의 '신체성'도 무시하기 때문이다.

스미스는 위 두 관점 대신 '사랑하는 존재', '예배하는 존재'로서의 인간관을 제시한다. 스미스의 대안 모형은, 의식은 언제나 '무언가에 대한 의식'이라는 후설(Edmund Husserl)의 공리를 끌어와 인간이 '지향성'을 지닌 존재임을 명확히 하는 데서 시작한다. 그다음 스미스는 곧바로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 <존재와 시간>(까치)을 인용해, 후설의 지향성 이론이 환원론적이라 지적한다. 인간이 무언가를 지향하는 것은 맞지만 늘 의식적으로 인지하면서 지향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2) 하이데거가 보기에 우리가 세계를 경험하는 방식은 인지라기보다는 촉각적으로 느끼는 정서적 방식에 가깝다. 그리고 그에게 세상을 지향하는 가장 원초적인 형식은 '염려'(care)다. 여기서 스미스는 하이데거의 '염려'를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의 '사랑'(love)으로 전환한다.

스미스는 사랑에는 목적이 있음을 지적한다. 즉 우리는 '목적론적 피조물'이다. 우리의 사랑은 좋은 삶에 대한 암시적 그림이다. 우리가 접하는 수많은 문화적 요소에는 각 요소가 그리는 전망이 있으며, 우리는 이렇게 경쟁하는 전망을 욕망하고 상상하며, 때로는 충돌을 경험하며 그 전망이 그리는 인간으로 형성돼 간다. 그래서 스미스가 보기에 "문화적 분별의 핵심 과제는 여러 다른 문화적 제도와 이야기들이 전제하는 왕국의 특정한 구성을 '읽어 내는' 것이다."3)

스미스는 (기존 방식인) 세계관보다도 '사회적 상상'(social imaginary)으로 나아가기를 권한다. 그가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를 끌어와 제시하는 사회적 상상은 일종의 무의식, 비-사유, 배경에 가깝다. 구체적 술어로 표현되는 지적 체계라기보다는 공동적으로 형성되는 이미지·이야기에 가깝다. 공동적으로 형성된 사회적 상상은 우리 문화 속에 깔려 있으며, 사실상 현대 문화는 서로 경쟁하는 사회적 상상의 각축장이다. 우리는 이 안에서 실천하면서 문화가 의도하는 사회적 상상의 모습으로 우리 자신을 형성해 나간다.4)

스미스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형성이 이루어지는 자리다. 스미스는 쇼핑, 영화, 소설, 광고, 경기장, 학교 등은 일종의 종교적 본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즉, "우리의 충성을 요구하고, 우리의 열정을 얻기 위해 경쟁하며, 좋은 삶에 대한 특정한 전망으로 우리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하는 제도라는 뜻이다. 이런 제도들은 그저 우리에게 오락이나 교육을 제공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우리를 특정한 사람으로 만들기 원한다."5) 스미스의 지적 중 특별히 소비주의와 국가주의 예전에 관한 내용은, '자본주의사회 속에서 경쟁하는 상호 주관적 자아'와 '부족주의적 습성'을 동시에 가진 현대인에게 의미 있는 지적이다.

IVP가 출간한 제임스 스미스의 '문화적 예전 시리즈' 3부작. 사진 제공 IVP
IVP가 출간한 제임스 스미스의 '문화적 예전 시리즈' 3부작. 사진 제공 IVP
예배를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나라의 사회적 상상

스미스는 이러한 세속 예전에 대한 대항 예전으로서 기독교 예배와 기독교적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스미스가 전반적으로 인간 행위의 예전적 성격을 이야기하고 있긴 하지만, <하나님나라를 욕망하라>에서 다루는 논의의 중심은 일상 예전보다는 그리스도인이 함께 드리는 공교회적 예배에 있다.

먼저 스미스는 기독교 예배가 갖는 '물질성'에 주목하기를 촉구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가 매우 물질적인 일이며, 예배 수행자가 신체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당연한 일이지만 의외로 간과돼 왔다. 예배는 물질·신체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행위다. 여기서 우리는 물질이 하나님으로부터 수여받은 단순한 물질 이상임을 깨달으면서도, 섣불리 초자연주의로 흐르지도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예배 안에서 하나님의 성육신적 본성을 깨닫게 된다. "예배는 자신을 낮추시어 우리를 짓는 재료였던 물질 안에서 우리를 만나 주시는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매개된 만남이다. 그리고 그 물질 안에서, 물질을 통해서 하나님은 행동하신다."6)

스미스는 <하나님나라를 욕망하라> 5장에서 상당한 분량을 할애해 예배 실천에서 드러나는 하나님나라의 사회적 상상의 모습을 그려 낸다. 우선, 그리스도인는 세속 시간을 살아가지만 동시에 그 안에서 독특한 시간을 살아간다. 전통적 기독교 예전의 공간 구성과 그 안에서 느낄 수 있는 시간적 흐름은 바쁜 현대인에게 자신이 궁극적으로는 더 고차원적인 시간을 살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스미스는 예배로의 부름, 하나님의 인사와 상호 인사, 찬양, 율법, 죄 고백과 사죄의 확신, 세례, 신조, 기도, 성경과 설교, 성만찬, 봉헌, 증인의 파송 등 예배 속 요소들을 하나하나 언급하며 앞서 제시한 인간론과 성례전적 상상력이 어떻게 예배 속에서 구현되며 기독교의 이야기를 드러내는지 설명한다. 하나님, 피조된 세계, 죄와 타락, 분열된 세계, 구속, 환대, 공동체, 대위임령 등 기독교의 주요 요소는 예배를 통해 그 의미가 풍부하게 드러나며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향을 계속해서 재조정한다.

물론 스미스는 한정된 예배 시간이 그 외의 모든 시간을 포괄한다는 식으로 순진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기독교 예전이 그리스도인 정체성을 함양하는 실천의 집약체이자 일상의 여러 예전적 실천의 방향을 잡아 주는 키 역할을 한다고 강조한다. <하나님나라를 욕망하라>는 기독교 예배와 그리스도인의 일상적 실천이 상호작용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마무리된다.

사회적 몸을 통한 상상의 교육

시리즈 2권 <하나님나라를 상상하라 Imagining the Kingdom>(IVP)에서 스미스는 예전의 작동 방식을 구체적으로 규명하는 작업을 시도한다. 이는 시리즈 1권에 나타난 신체성·물질성 강조의 연장선이다. 특히 스미스는 '몸'에 집중한다.

시리즈 1권의 주요 논지(머리 대신 마음, 지성 대신 욕망·사랑)에 대한 비판을 의식한 듯, 스미스는 <하나님나라를 상상하라> 서두부터 자신의 기획이 지성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당장 자신의 작업이 지성적임을 스미스 본인도 잘 알고 있다) 지성의 자리를 다시 설정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다만, 그는 무엇보다 신체성·상상력·이야기의 상호작용을 강조하는 자신의 기획이 그리스도인의 행동에 실질적 변화를 일으킨다고 주장한다. 스미스의 인간론에 따르면, 우리 행동은 성품에서 나오고, 성품은 우리가 속해 있는 이야기를 통해 형성된다. 이야기는 우리의 감정을 훈련시켜 상상력을 사로잡는다. 스미스는 시리즈 1권부터 이어진 자신의 논지를 재차 강조하며 현대 인지과학·신경과학 분야의 연구 결과도 자신의 논지를 뒷받침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특별히 몸을 강조하기 위해 스미스가 끌어오는 논의는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의 <지각의 현상학>(문학과지성사)이다. "메를로퐁티의 <지각의 현상학>은 몸이 어떻게 '아는가'를 설명한 책"으로, 그는 "이러한 신체적 앎을 '지각'이라고 부른다."7) 메를로퐁티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우리가 혼종적 존재라는 것이다. 우리는 단순히 지성적이거나 본능적이지 않고 그 사이 어딘가에 있는 존재다. "메를로퐁티는 우리에게는 몸과 정신의 이분법에 사로잡히지 않고 우리가 '사이에 있음'(betweenness)과 이 '사이에 있음'이 가진, 의식보다 앞선 독특한 지식을 제대로 설명해 내는 인간 모형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8) 실제로 일상생활에서 우리 행동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생각해 보면 이해하기 쉽다. 내가 우리 동네를 아는 것은 지도를 보고 외웠기 때문이 아니라 다니면서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자전거 타기나 운동의 기본자세가 연습을 통해 점차 익숙해지는 것도 마찬가지다. 우리 습관은 일종의 체현된 노하우다. 그렇기 때문에 기존 습관·행동을 바꾸기 위해서는(이를 '치료'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이 과정을 이해하고 그에 맞게 몸으로 실천하는 일이 필수다. 무언가를 어떻게 해야/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단순히 아는 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메를로퐁티가 맞다면, "세상에 대한 우리의 신체적 태도 안에 내재되어 담겨 있는 상상력을 어떻게 징집할 수 있는가?"9) 이를 위해 스미스는 부르디외(Pierre Bourdieu)가 고대에서 가져와 독창적인 방식으로 제시한 '아비투스'(habitus) 개념을 끌어온다. 아비투스는 "영속적이며 치환할 수 있는 성향의 체계, 그리고 구조화하는 구조로서 기능하는 성향을 갖게 하는, 즉 목적에 대한 의식적 지향이나 그것을 획득하기 위해 필수적인 작용의 명시적 숙달을 전제하지 않은 채 그 산물에 객관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실천과 재현을 생성하고 체계화하는 원리로서 기능하는 성향을 갖게 하는 구조화된 구조"다.10) 아비투스는 메를로퐁티가 말하는 '지각'처럼 의식적 자각 없이 몸으로, 실천을 통해 '체내화'(incorporation)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내가 사회적 몸 안에 통합되는 동안, 그 몸은 내 안에 아비투스를 심고, 이는 내게 제2의 성향으로 작용하여 내 삶의 전 영역에 영향을 주기 시작한다. 스미스가 말하는 교육은 이러한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프랑스의 현상학자 모리스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 1908~1961).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프랑스의 현상학자 모리스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 1908~1961).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스미스가 메를로퐁티, 부르디외와 더불어 자신의 논지를 강화하고자 끌어오는 사람은 마크 존슨(Mark Johnson)이다. 스미스는 존슨을 통해 인간이 의미를 만드는 과정에는 신체가 필수적으로 개입함을 주장한다. 우리 몸과 뇌는 환경과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면서 우리 몸에 "신경 지도"를 그린다. 신경 지도는 "자극이 감각의 장 안에서 인접한 위치를 가로질러 움직일 때 연속적으로 그 자극에 반응하는" 일련의 신경세포다.11) 존슨은 신경 지도 형성에 가소성이 있다고 보는데, 이는 스미스에게도 중요하다. 우리 사회가 다양한 사회적 상상을 품은 문화의 각축장이고 내가 세계-내-존재로서 그 안에서 살고 있다면, 그 속에서 행하는 다양한 실천은 내 몸에 세상에 대한 성향을 나타내는 신경 지도를 그리며, 이 지도는 (긍정적으로건 부정적으로건) 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존슨의 논지는 스미스에게서 예전의 변혁적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쓰인다. 스미스는 특별히 공교회적 예전의 형식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각 기독교 교파별 예전에 공통된 형식이 있어 온 점을 제시하면서 스미스는 형식은 단순히 내용을 잘 담아내는 그릇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예배는 단순히 어떤 내용의 유포나 '내적' 감정의 표현이 아니기 때문에, 예배의 형식 자체가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그의 말은,12) 그가 개혁주의자이면서 동시에 신앙 초기에 오순절 신앙을 경험했고 이를 매우 존중한다는 사실을 떠오르게 한다. 스미스에게 예배 형식은 기독교 내러티브를 구현하고 그리스도인의 감각을 형성하는 장이다. 성령께서는 형식을 통해 역사하신다.

지상 도성을 살아가는 천상 도성 시민의 자세

시리즈 3권 <왕을 기다리며 Awaiting the King>(IVP, 원서 2017년) 머리말에서, 스미스는 이 책이 '문화적 예전 시리즈'를 기획했던 초창기(2009년) 의도와는 조금 다른 책이 됐다고 말한다. 그 당시 신칼뱅주의 문화 변혁론에 아쉬움을 느꼈던 스미스는 개혁주의 전통 내에서 문화적 동화에 대항하는 목소리를 내는 시도를 3권에서 구현하려 했다. 하지만 절친한 동료 한스 부어스마(Hans Boersma)를 통해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분도출판사)과 올리버 오도노반(Oliver O’donovan)의 여러 주요 작품에 천착하게 됐고, 결국 "일반 은혜에서 출발해 대립으로, 다시 우리의 공동의 삶에 대한 강조로 돌아가게" 됐다.13) 다만 이것이 다시금 신칼뱅주의 문화 변혁론에 입각한 정치신학으로 돌아간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3권 <왕을 기다리며>는 개혁주의 공공신학을 개혁하려는 시도다.

스미스는 현재 기독교인이 구사하는 정치신학 패러다임이 대체로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초점을 맞춰 공간화된 관점으로 바라보고 있고, 시민들을 합리적 행위자로 전제하고 있다고 지적한다.14) 스미스에게 정치적 삶은 특정 공간의 경계를 논하는 문제도 아니고, 정치를 합리적으로 이해하는 일에 관한 문제도 아니다. 오히려 삶의 방식의 문제다. 이는 문화적 예전 시리즈의 연속선상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발상으로, 스미스는 정치 역시 예전적 관점으로 바라본다. 결국 중요한 것은 '방향'이다. 스미스가 그리는 구도 안에서 궁극적인(ultimate) 것과 준궁극적인(penultimate) 것의 구별은 흐릿해진다.

"천상 도성도 이 순례의 길에서는 지상 평화를 이용하고, 신심과 종교심에 의해 허용되는 한, 사멸할 인생에 속하는 사물들에 관해 인간 의지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적절한 조정을 보호하고 추구하며 지상 평화를 천상 평화에로 귀결시킨다."15) 아우구스티누스가 <신국론>에서 쓴 이 문장에 스미스가 기획한 정치신학의 대부분이 담겨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스미스의 말처럼 "지상 도성에 대한 긍정적이거나 낙관적인 자세를 요구하지도 않고, 정치적 사회를 근본적으로 거부하는 입장을 요구하지도 않는다."16) 오히려 지상 도성에서의 삶이 순례의 삶임을 인정하고, 순례의 삶 자체, 즉 자신에게 주어진 공간을 오롯이 받아들이고, 동시에 궁극적인 것이 준궁극적인 것으로 흘러들게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왕을 기다리며>에는 스미스가 관심을 두고 말을 거는 공공신학·정치신학 분야 다양한 인물·소재가 있는데,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한 이러한 이해가 모든 것을 관통한다.

2016년 휘튼칼리지에서 설교 중인 제임스 스미스. 사진 출처 wheaton college 유튜브 채널 갈무리
2016년 휘튼칼리지에서 설교 중인 제임스 스미스. 사진 출처 wheaton college 유튜브 채널 갈무리

<왕을 기다리며>에는 스미스의 관심사를 드러내는 다양한 학자가 등장하지만, 그중에서도 영국 신학자 올리버 오도노반은 특별히 주목할 만하다. 스미스가 오도노반을 통해 서구 자유주의와 기독교의 관계에 관한 계보학적 작업을 소개한다. 오도노반은 서구 자유주의 역사에는 복음의 영향력을 보여 주는 여러 '분화구'가 확인된다고 했다. 예컨대, 오도노반은 "근대의 '국가'라는 개념 자체가 기독교 세계의 유산, 즉 왕의 초림에 의해 정치적 권위가 대체된 후 남겨진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발굴 작업을 개시한다."17) 그는 <열방의 욕망 The Desire of the Nations>에서 "그리스도의 대표(representation)의 네 순간과 병행하는 자유주의 사회의 네 양상을 강조한다."18)

1) 교회의 증언의 선물로서의 자유
2) 심판 중에도 이루어지는 자비
3) 기독론적 갱신을 바탕으로 한 자연권 긍정
4) 복음을 두려움 없이 말하는 습관에 기인한 자유로운 말하기.19)

이러한 계보학을 통해 의도하는 바는, 현대 자유주의의 기독교적 기원을 탐구하면서 자유주의의 한계를 인지하고, 동시에 자유주의 정치체제에 참여하는 일을 비판적으로 긍정하는 것이다. 스미스는 오도노반 외에도 피터 라잇하르트(Peter Leithard), 더글러스 패로우(Douglas Farrow) 등의 작업을 제시하며 자신의 논지를 강화한다.

이러한 일련의 작업을 통해 스미스는 정치제도에 대한 기독교적 교육 가능성을 모색하면서 동시대 신칼뱅주의적 설명에서 아쉬웠던 점을 지적한다. 동시대 신칼뱅주의가 다원주의 공론장에 적응하는 데 몰두한 나머지 그 안에서 교회의 역할을 언급하는 일에는 너무 주저하게 됐다는 것이다. 스미스는 오히려 신칼뱅주의적 설명에 자양분을 공급했던 이전 시대의 카이퍼(Abraham Kuyper), 바빙크(Herman Bavinck), 도예베르트(Herman Dooyeweerd)에게서는 공적 삶에서의 기독교적 전망이 제시됐다고 주장한다. 스미스는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일반 은혜가 사실상 복음적인 것을 자연화했다고 지적하며, "오도노반의 영향을 받아 내가 추구하고 있는 개혁주의 공공신학의 개혁 중 하나는 역사의 구체성을 이해하는 것이며 명확하게 '복음적인' 정치신학, 즉 복음의 특수성, 특별 계시의 통찰, 교회의 정치적 유산을 자양분 삼아 다원주의 사회의 공동선에 기여하는 정치신학을 발전시키는 것"이라고 말한다.20)

하지만 이런 식의 시도는 현실 속 불의를 타개하는 데 기독교가 무력했던 기억을 가진 이에게는 의문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복음을 통한 공동선은커녕 역사 속에서는, 그리고 현재에도 복음을 통해 오히려 불의를 정당화하는 일이 횡행하고 있지 않은가. 스미스 역시 이 문제를 타개할 묘책은 없다고 인정한다. 다만 이러한 위선의 문제를 이해하고 해결하기 위해 늘 분투해야 한다고 할 뿐이다. 스미스는 자신의 논지를 정리하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요인에 주의를 기울이라고 요청한다.21)

1) 우리가 예전적 존재로서 형성되는 존재임을 자각해야 한다. 2) 이 형성은 미덕뿐만 아니라 악덕에도 해당됨을 자각해야 한다. 3) 예배를 삶의 방식으로 이해하고, 예배에서 그리는 기독교 내러티브와 삶 속에서 찾아오는 여러 부딪힘에 직면할 줄 알아야 한다. 4) 우리의 예배를 통해 구현되는 이야기가 동시대 여러 경쟁적 이야기에 포섭될 수 있다는 데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5) 종말론적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즉, 완전함을 추구하기보다는 우리 한계를 늘 인정해야 한다. 6) 예배는 단순히 도구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펼쳐지는 하나님의 화해의 이야기에 우리가 초청되는 공교회적 수행이다. 7) 이 세상에 거류하는 이방인으로서 우리 삶은 늘 복음에 닻을 내린 채 긍휼을 구하며(키리에 엘레이손) 계속해서 자세를 교정해 나가는 삶이다.

근원적인 것을 탐구하며 대화하는 그리스도인

문화적 예전 시리즈 3부작에 대한 소개를 마치며, 제임스 스미스를 '근원적인 것을 탐구하는 그리스도인'이라 말하고 싶다. 스미스는 최근작 <아우구스티누스와 함께 떠나는 여정>(비아토르)에서, 아우구스티누스를 경유해 인간의 여러 근원적 면모를 탐구한다. 이 책은 단순히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한 해설이 아니라,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동시대적 요소를 발견해 책 제목처럼 그와 함께 걸으며 작성한 일종의 실존적 에세이다. 각 장에서 서술하는 불안·자유·열망·관계·의존·우정·믿음·정체성·정의·용납·소망 등은 모두 인간에게서 나타나고, 그리스도인에게서도 (신앙 정체성에 따라) 독특하게 나타나는 근원적 요소다.

책 2장에서 스미스는 자신에게 아우구스티누스가 왜 이렇게 크게 자리 잡게 되었는지를 간략히 서술한다. 스미스는 토론토에서 공부하던 시절에 실존주의와 현상학에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여기에는 존 카푸토의 <포스트모던 해석학>(도서출판b) 영향이 컸다. 결국 스미스는 빌라노바대학교로 가서 존 카푸토 밑에서 박사과정을 시작한다. 하이데거와 데리다를 공부하기 위해 도착한 학교에서, 그는 학교 전반을 지배하고 있던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한 관심을 감지한다.

독일의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 사진 출처 플리커
독일의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 사진 출처 플리커

스미스는 아우구스티누스를 다룬 하이데거의 초기 강의록과 (특히)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의 박사 학위논문 '사랑 개념과 성 아우구스티누스 Love and Saint Augustine'를 읽고 아우구스티누스를 완전히 새로 이해하기 시작한다. "나는 그를 일차적으로 신학자였던 '중세' 신학자로 소개받았다. (중략) 나는 교리와 교의, 죄와 하나님과 구원에 관한 명제적 주장을 얻기 위해 아우구스티누스를 읽으라고 배웠다. 나중에야 비로소 이런 틀이 얼마나 억지 해석인지를 깨달았다."22) 아렌트를 통해 스미스는 "아우구스티누스를 현상학자로, 경험의 철학자로, 원형적 실존주의자로, 즉 우리에게 우리 자신에 관한 무언가를 보여 주려 했던 철학자로" 읽게 됐다.23) 이러한 아우구스티누스 이해는 스미스의 초기작부터 그 영향을 고스란히 드러내, 그 작업의 엄밀성 및 작업에 대한 학문적 평가와는 별개로 그의 또렷한 지향을 보여 주고 있다.

스미스를 읽을 때 그가 뛰어나다고 생각한 점은, 그가 자신의 학문적 작업 혹은 여정을 돌아보는 과정 속에서 자신의 성찰을 근원적(radical)·공교회적(catholic) 신앙 이해로 전환하는 데 게으르지 않다는 것이다. 아울러 그는 과거의 이해를 반성한다고 해서 자신이 성장한 전통을 쉬이 거부하지도 않는다. 개혁주의와 오순절 전통에 담긴 차이를 인지하면서도 함께 존중하고, 공교회적 전통에 닿아 있는 점이 무엇이며 그것들이 어떻게 그리스도인의 실천·형성·변화로 이어질 수 있는지 탐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이러한 스미스의 작업 방식은, 자기 전통 내 특정 요소에 대한 지나친 관심으로 필요 이상의 분열을 일으키거나 신앙의 풍요를 누리지 못하는 이들, 교리 논쟁이나 구원론 논쟁처럼 시작은 건전할지 모르나 점차 근원적 요소와는 괴리되는 논쟁에 빠져 있는 이들을 반성케 한다. 믿음의 내용과 구원 과정의 역학 관계(칭의와 성화의 관계 등)를 다루는 일이 어느 정도는 의미 있겠지만, 단순히 이를 정교하게 서술하고 논쟁하는 데 그친다면 인간과 신앙의 근원적 요소를 탐구하고 실천하는 일에 실패한다는 것을 스미스는 일찍이 깨달았다.

기독교 언어가 세상에서 통용되지 못한다고들 한다. 이러한 푸념은 과연 우리가 지금 어떤 언어로 통용하고 있느냐는 구체적인 질문으로 이어져야 한다. 형이상학적(그나마도 제한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특정 교리를 변호하는 방식의 언어나, 인간 형성의 근원적 요소를 고려하지 않고 성경 텍스트를 단순 인용해 내적 논리의 정합성을 맞추는 데만 치중하는 언어가 과연 세상과 소통할 수 있을까.24) 기독교 범주로 한데 묶여 보이는 언어라 하더라도, 인간 실존을 깊이 탐구하고 동시대 사상들을 이해하고 대화하는 언어라면 난센스를 일으키는 일이 덜 생기지 않을까. 언어의 게토화와 독특성은 구분돼야 한다. 그 점에서 스미스의 방식은 동시대 그리스도인이 진지하게 참고할 만하다.25)

아마도 가장 중요한 것은 학문적 역량 이전에 스미스가 보여 주는 정서에 공명하는 일일 것이다. 그리하지 못한다면, 스미스 혹은 그와 대화하는 여러 학자의 언어 표현을 섣부르게 끌어와 제시하며 그들을 단순히 기독교 호교론자로 만들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어떤 지향으로, 스미스를 비롯한 학자들이 어떤 과정을 통해 그러한 결론에 이르게 되었는지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설요한 / 인문학&신학연구소 에라스무스 운영위원. IVP 편집자.

1) 김동규, "'교회를 위한 철학자' 제임스 K. A. 스미스"(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217739). 사실 이 글이 '우리 시대의 그리스도교 사상가' 기획에 더 부합하는 글이다.
2) 단 자하비(Dan Zahavi)는 후설 사후부터 21세기 들어서까지 꾸준하게 발간된 '후설 전집'을 연구해, 후설의 사유가 토대주의적·관념론적·유아론적이며 따라서 그 이후의 학자들이 그를 넘어서거나 기피하게 됐다는 (하이데거와 그 영향 아래 있는 학자들에 의해 고착화된) 고전적인 후설 해석을 재고해야 한다는 주장을 편다. <후설의 현상학>, 박지영 옮김(서울: 한길사, 2017). 물론 이 글에서는 스미스의 논지 전개 및 그 취지만 파악하면 되겠다.
3) 제임스 스미스, <하나님 나라를 욕망하라>, 박세혁 옮김(서울: IVP, 2016), p. 79.
4) 찰스 테일러의 논의는 다음을 참고하라. <근대의 사회적 상상>, 이상길 옮김(서울: 이음, 2010).
5) 스미스, <하나님 나라를 욕망하라>, p. 133.
6) 같은 책, p. 227.
7) 제임스 스미스, <하나님 나라를 상상하라>, 박세혁 옮김(서울: IVP, 2018), p. 88.
8) 같은 책, p. 92.
9) 같은 책, p. 140.
10) Pierre Bourdieu, The Logic of Practice, trans. Richard Nice (Stanford, CA: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0), p. 53. 스미스, <하나님 나라를 상상하라>, p. 150에서 재인용.
11) Mark Johnson, The Meaning of the Body: Aesthetics of Human Understanding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07), p. 127. 스미스, <하나님 나라를 상상하라>, p. 150에서 재인용. 마크 존슨의 책 한국어판은 <몸의 의미>, 김동환·최영호 옮김(서울: 동문선, 2012), p. 206.
12) 스미스, <하나님 나라를 상상하라>, p. 290.
13) 제임스 스미스, <왕을 기다리며>, 박세혁 옮김(서울: IVP, 2019), p. 16.
14) 같은 책, p. 38.
15) 아우구스티누스, <신국론>, 성염 옮김(왜관: 분도출판사, 2004), 19.17.
16) 스미스, <왕을 기다리며>, p. 19.
17) 같은 책, p. 180.
18) 같은 책, pp. 183-184.
19) 같은 책, pp. 184-188.
20) 같은 책, p. 218.
21) 이하의 내용은 같은 책, pp. 336-347의 내용을 필자의 방식대로 재서술한 것이다.
22) 제임스 스미스, <아우구스티누스와 함께 떠나는 여정>, 박세혁 옮김(서울: 비아토르, 2020), pp. 57-58.
23) 같은 책, p. 58.
24) 초역사적 성격을 가진 것으로 보이는 교리가 실은 역사 속에서 형성된 사회적 구성물임을 지적하고, 그럼에도 하나님과 그리스도 사건이라는 초역사적 차원이 각 시대 그리스도인들의 현실 속에 내주하여 그들과 닿으며 교리의 지평을 새로이 엶을 탐구하는 책으로는 다음을 참고하라. 크리스틴 헬머, <교리의 종말>, 김지호 옮김(고양: 도서출판100, 2020).
25) 특별히 그가 자신의 저서에서 일반 교양서를 얼마나 폭넓게 참고하고 있는지 '문화적 예전 시리즈' 3부작 각주나 찾아보기를 통해 확인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그가 참고하는 교양서 가운데 상당수가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다. 아니면 그가 편집장으로 활발히 활동하는 <이미지 저널 Image Journal>에서 무엇들을 다루고 있는지 살펴봐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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