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제도권에서 신학·인문학을 바탕으로 시대를 사유하고자 하는 인문학&신학연구소 에라스무스가 '우리 시대의 그리스도교 사상가들'을 주제로 <뉴스앤조이>에 글을 연재합니다. 이 시대 주목할 만한 그리스도교 사상가를 소개하는 에라스무스 연구원들의 글을 격주 간격으로 게재합니다. - 편집자 주

리처드 스윈번(Richard Swinburne, 1934~)은 수많은 저서와 논문을 통해 기독교 신앙이 합리적이며 철학적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는 신념이라고 설명한 영국의 대표적인 기독교 철학자다. 스윈번이 활동하던 20세기 중반 영국에서는 종교철학이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전까지 종교철학은 철학적 토론에 끼지 못하고 그저 변방에서 서성이는 꼴이었다. 그러나 종교철학을 연구하는 이들이 분석철학 방법론을 등에 업고 비판적 학문의 장에서 조금씩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더니, 1960년대 이후부터는 다양한 내용과 주제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당시 영국은 칼 바르트로 대변되는 독일 신학과 달리 자연신학에 상당히 우호적이었고, 철학과 신학을 조화시키려는 다양한 시도가 많은 이의 노력을 통해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중심에 리처드 스윈번이 있었다.

스윈번은 '우주를 창조하고 유지하는 완전한 존재가 있으며, 그분은 전능하고 영원한 영적 실체이며,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는 명제가 문법적으로 정당하고 의미 있는 문장이라는 것을 증명하고자 했다.1) 그는 인간 정신 작용이 '신이 존재한다'는 합리적 논증을 충분히 구성하고 정당화할 수 있음을 보여 주려고 했다. 종교적 믿음 체계가 올바르고 합리적이기 때문에 우리 믿음과 행위도 충분히 이성에 의존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리처드 스윈번의 기독교 철학 방법론을 소개하고 그 내용이 얼마나 성공적인지를 이 글을 통해 평가해 보고자 한다. 먼저 그의 생애와 사상적 배경을 간단하게 살펴본 후, 그의 대표 업적이라 할 수 있는 '귀납적 신 존재 증명'을 소개하겠다. 귀납 논증을 통해 기독교 신앙의 개연성을 높이고자 했던 그의 철학 방법론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평가하겠다. 지면의 한계로 연구 활동 전체를 소개하지는 못하지만, 기독교 철학자로서 그가 남긴 유산과 소명을 간단하게 언급하며 글을 마치도록 하겠다.

리처드 스윈번의 생애와 사상적 배경2)
영국의 기독교 철학자 리처드 스윈번(Richard Swinburne, 1934~). Capturing Christianity 유튜브 갈무리
영국의 기독교 철학자 리처드 스윈번(Richard Swinburne, 1934~). Capturing Christianity 유튜브 갈무리

스윈번은 1934년 영국 웨스트미들랜드에서 태어나 기독교적 분위기 속에서 성장했다. 그는 1954년 옥스퍼드대학교에 진학하고서 자신이 기독교인이 된 것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고 회고한다. 학창 시절 그는 논쟁을 유난히 좋아했고, 형이상학적 질문과 자연신학에 관심이 많았다. 특별히 오늘날 교회가 세상과의 접촉점을 상실해 다양한 문제에 대답을 제공하지 못하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그는 당시 영국 교회 목회자들이 근대과학·윤리학·철학과 대화를 시도하지 않고 그저 믿음으로만 신앙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대학에서 철학·정치학·경제학에 관심을 두고 공부했다. 철학을 공부했지만 이후 신학 과정도 1년 정도 이수했다.

당시 영국에서는 옥스퍼드대학교를 중심으로 논리실증주의가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다. 논리실증주의는 언어 자체를 분석해, 동어반복적이거나 검증 불가능한 명제는 모두 무의미한 것으로 취급했다. 이런 검증 원리에 따르면 윤리적·종교적 진술은 참·거짓을 판가름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므로 무의미한 진술일 뿐이었다. 이런 지적 분위기 속에서 스윈번은 언어철학과 논리실증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특별히 당시 세계적 명성을 떨치고 있었던 일상언어학파 대부 오스틴(J. L. Austin)의 강의를 직접 들으며 이런 사상을 자연스럽게 전수받았다.

그러나 스윈번은 일상 언어를 넘어서는 형이상학·신학적 진술에 어떤 호의도 보이지 않았던 언어철학에 매력을 느끼지 못 했다. 그는 철학적 진술의 명쾌함과 논증의 철저함은 인정하면서도, 그 이면에 담긴 전제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언어철학이라는 도구를 사용해 기독교 신학을 다시 지적으로 존중받을 만하게 만들 수 있겠다고 생각했고, 자신이 여기에 이바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스윈번은 이러한 학문 여정 속에서 과학 이론이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당시 영국 철학계에서는 생소했던 과학철학에 자기 학문적 역량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는 헐대학교에서 처음으로 교수직을 얻은 1963년부터 10년간 대부분을 과학철학에 대한 글을 쓰면서 보냈다. 과학의 본성과 한계, 과학의 정당성을 탐구하면서 기독교 신학 역시 근대 자연과학의 기준을 사용해서 정당성을 입증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 기간에 그는 <공간과 시간 Space and Time>(1968)과 <확증이론 개론 An Introuduction to Confirmation Theory>(1973)을 쓰고, <기적의 의미 The Concept of Miracle>(1971)라는 책을 쓴다.

1972년 킬대학교 철학 교수가 된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자신의 프로젝트에 돌입한다. 이때부터 그는 하나님 존재를 증명하는 유신론 철학 3부작을 내놓는다. 그중 첫 책 <유신론의 정합성 The Coherence of Theism>(1977, 1993)은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말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설명한다. 두 번째 책 <하나님의 존재 The Existence of God>(1979, 2004)는 신 존재 증명을 본격적으로 다루는데, 여기서 그는 하나님이 존재할 확률이 그렇지 않을 확률보다 훨씬 높다고 주장한다. 세 번째 책 <신앙과 이성 Faith and Reason>(1981)은 하나님 존재에 관한 논증이 구체적으로 종교가 다루는 내용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 다룬다.

유신론 철학 3부작을 완성한 이후 스윈번은 더욱 구체적으로 기독교 신학 내용에 대한 철학적 탐구를 진행한다. 1982년부터 1984년까지 기포드 강연에서 발표한 내용을 토대로 <영혼의 진화 The Evolution of the Soul>(1986)를 쓰고, 다시 옥스퍼드로 돌아가 베이질 미첼(Basil Mitchell)의 뒤를 이어 '기독교 종교학과 놀로스 석좌교수' 직책을 맡아 왕성하게 활동한다. 이 시기에 그는 <책임과 속죄 Responsibility and Atonement>(1989), <계시 Revelation>(1992), <기독교 하나님 The Christian God>(1996), <섭리와 악의 문제 Providence and The Problem of Evil>(1998)를 집필한다. 2002년 은퇴 이후에도 연구를 멈추지 않고 <인식 정당성 Epistemic Justification>(2002),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부활 The Resurrection of God Incarnate>(2003)을 저술했다. 국내에는 그의 철학을 간략히 정리한 <신은 존재하는가 Is There a God?>(1996)가 번역됐다. 그는 공정하고 엄밀한 학문 장에서 영미 분석철학 전통으로 유신론 철학을 전개하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기독교 신학 체계가 참이 될 만한 합리적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고, 이를 입증하기 위해 온 열정을 쏟아부었다.

귀납 논증으로 신 존재 증명하기

현대 과학철학으로 하나님 존재 여부를 다룬 <하나님의 존재>에서 스윈번은 우주론적증명과 목적론적증명 등 전통적 유신론 논증이 귀납적 방법으로 잘 설명된다고 주장한다. 과학은 여러 제한 속에서 관찰 가능한 현상을 근거로 어떤 현상이 관찰 불가능한 원인을 논증한다. 이때 과학은 귀납 논증을 사용한다. 스윈번은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가설은, 이 가설이 아니라면 기대할 수 없을 여러 현상을 가장 적절하게 설명해 줄 뿐 아니라, 좀 더 특별한 현상을 예측할 수 있게 해 준다고 설명한다.

스윈번은 유신론을 과학적 가정과 비슷한 것으로 여기며, 개연성에 근거한 귀납 논증으로 전통적 신 존재 증명을 시도한다. 이 논증은 증거에 따라 가장 개연성 있는 것으로 떠오르는 가정을 최선의 설명으로 확정한다. 또한 이 논증은 종교적 경험 같은 다양한 자료를 취해 최선의 설명을 하기 때문에 축적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동안 철학사에 다양하게 등장한 신 존재 증명을 모두 모으면,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명제는 더욱 가능성 있는 논증이 된다.3) '그 증거들이 유신론 명제를 확증해 주는가? 즉 개연성을 높여 주는가? 명제를 가능하게 해 주는가?' 하는 질문을 통해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가설을 다양한 증거를 기반으로 제시한다. 유신론의 다양한 논증은 따로 떼어 놓고 보면 약할 수 있지만, 함께 놓고 보면 그 증거들이 누적돼 매우 강한 주장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스윈번은 귀납 논증을 통해 각각 서로 다른 증거가 논증을 어떻게 지지해 주는지 다음 예를 통해 보여 준다.

"스미스의 손에 피가 묻어 있다. 하지만 그 사실만으로 스미스가 존스 부인을 죽였다는 것은 개연적이지 않다. 존스 부인이 죽었을 때 스미스가 유산을 받을 권리를 주장했다. 그 사실만으로도 스미스가 존스 부인을 죽였다는 것은 개연적이지 않다. 범행 시점에 살해 현장 가까이 스미스가 있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스미스가 존스 부인을 죽였다는 것은 개연적이지 않다. 하지만 이러한 세 가지 현상을 모두 모으면, (아마 다른 현상과 더불어) 그러한 결론은 개연적이 될 것이다."4)

스윈번은 하나님 존재 사실을 입증할 만한 타당한 연역 논증이 있을 수 있다고 인정한다. 하지만 연역적 유신론 논증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전제에서 출발한다"고 지적한다.5) 귀납 논증은 전제가 참이라고 해서 반드시 결론이 참이라는 것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귀납 논증의 전제에는 '결론이 참일 개연성이 있다'는 의미만 있을 뿐이다. 유신론 논증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관찰하고 검토할 수 있는 여러 증거는 단지 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의 개연성을 높여 줄 수 있을 뿐이다. 스윈번은 세상의 존재와 설계, 종교적 경험, 인간의 도덕성과 의식, 악, 그리고 이적들은 설명돼야 할 현상이고, 이런 현상에 대해 하나님의 존재가 최고의 설명을 제공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모든 증거를 취합해 그것을 유신론의 가정으로 연결하는 것이 스윈번의 귀납적 신 존재 증명이다.

과학 이론은 일정한 한계 속에서 주어진 자료를 설명하려는 시도다. 케플러법칙은 행성의 운동을 설명하려는 시도고, 자연선택설은 화석 기록과 현존하는 동식물의 다양한 특징을 설명하려는 시도다. 그런데 어떤 과학 이론은 다른 이론이나 대상의 존재를 설명할 수 있는, 상위 수준의 이론으로 간주된다. 이를테면, 뉴턴의법칙은 케플러법칙이 왜 작동하는지 설명해 준다.

상위 법칙은 다른 법칙보다 더 단순하면서도 설명력이 강해야 한다. 형이상학적 이론은 모든 이론 중 가장 상위 이론이다. '우주가 왜 존재하는지, 자연법칙이 왜 존재하는지, 하위 수준의 법칙이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 왜 일어나는지'를 설명하는 법칙이 여기에 해당한다. 형이상학적 이론은 이론상 단순하며, 그 이론이 아니고서는 예측할 수 없는 관찰 가능한 현상을 예측할 수 있게 해줄 때 정당화된다. 스윈번은 이런 궁극적 설명으로 유물론(materialism), 인간주의(humanism), 유신론(theism)이 있다고 말한다.6) 당연히 '유신론'이야말로 다른 이론보다 더 좋은 설명을 제공한다. 유신론은 존재에 대한 가장 단순하면서도 궁극적인 설명을 가능하게 한다. 하나님 존재는 인격적 설명 속에서 서로 다른 요소를 포함하고 그 의도를 충분히 보여 준다.

스윈번은 귀납 논증을 통한 신 존재 증명을 시도했다. OxfordUnion 유튜브 갈무리
스윈번은 귀납 논증을 통한 신 존재 증명을 시도했다. OxfordUnion 유튜브 갈무리
과학적 설명의 한계와 인격적 설명

전통적으로 과학적 설명은 어떤 사건들 속에서 보편적인 일반성을 발견한다. 그런데 과학은 단순히 사건을 설명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건의 법칙을 설명할 수 있어야만 한다. 하지만 과학이 자연법칙을 어디까지 설명할 수 있을까. 스윈번은 진정한 자연법칙이나 통계로 설명할 수 있는 일반화를 진리의 보편화와 구분해야 한다고 말한다. 만약 A와 B의 인과적 연관성을 확실하게 보여 주지 못한다면, 'A의 n 퍼센트가 B다'라는 통계적 일반화로는 A가 B라는 사실을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7)

우리가 자연현상을 설명하는 또 다른 방법이 있는데, 스윈번은 그것을 '인격적 설명'(personal explanation)이라 부른다. 이를테면, 컵을 손으로 쥐는 내 손의 운동은 컵을 들려는 나의 목적에 의해 설명된다. 내가 내 몸의 어떤 상태를 일으키면 몸은 어떤 사태를 야기한다. 그 사태를 야기하는 주체는 보통 우리가 인격이라고 부르는 존재다. 과학적 설명은 자연법칙과 사태를 포함하지만, 인격적 설명은 행위자의 '의지'와 '목적'을 포함한다. 만일 우리가 어떤 사태에 대한 과학적 설명을 찾을 수 없을 때에는 인격적 설명에 기대야 한다. 스윈번은 인격적 설명이 과학적 설명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 설명해 주는지 보여 준다.8)

인격적 설명은 과학적 설명의 패턴으로 분석해 낼 수 없는 고유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 둘은 분명하게 구분해서 설명돼야 한다. 환원주의가 저지르는 기본적인 실수는 그들이 설명의 이유를 다루기보다는 설명의 방법을 통해 의도를 다루려 하기 때문이다.9) 행위자의 의도를 설명한다고 할 때, 우리는 단순히 결과를 발생시킨 사건과 사태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태가 왜 발생했는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것이 바로 '의도'가 가지고 있는 진정한 의미다. 의도를 밝히는 일은 행위자의 행동 이유를 밝히는 것이며,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 이유를 밝히는 것이다.10)

과학적 설명은 물리 세계의 원인과 조건, 그리고 법칙을 통해 결과를 추론한다. 과학적 설명의 패러다임은 물리학에서 여러 가지 현상을 설명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인격적 설명은 이와 대조적이다. 인격적 설명은 합리적 행위자의 의도적 행위를 통해 현상을 설명한다.11) 유신론적 설명은 인격적 설명이다. 인격의 행위를 통해 현상을 설명하는 것이다. 우리는 내면세계와 외부 세계의 주요 특징을 과학적으로 모두 설명할 수 없다. 이때 그러한 특징을 설명해 주는 인격적 설명에 비중을 두어야 한다. 합리적 존재의 의도적 행위를 통해 실재의 중요한 특징을 설명할 수 있다. 인격적 설명이 과학적 설명을 보완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믿음을 적절하게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12)

신앙과 개연성

우리의 다양한 종교적 경험은 불완전하고 잘못된 인식일 수 있다. 그러나 종교적 경험이 우리의 정상적인 지각 경험과 상반되지 않는다면, 그것이 우리 믿음을 뒷받침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스윈번은 '경신의 원리'(principle of credulity)라는 말로 종교적 경험을 정당화한다. 경신의 원리는 "어떤 사람이 모종의 대상에 대해 그것이 어떻다고 여길 때, 그 주장을 약화시키는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이다.13)

사물이 우리에게 보이는 방식은, 사물이 바로 그렇게 존재한다고 믿을 타당한 근거를 제공해 준다. 누군가 이 지각·인식에 의심을 던지기 전까지는 우리 믿음이 정당화된다는 말이다. 물론 우리 경험이 잘못된 것일 수 있지만, 그 경험이 진짜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오히려 더 큰 증명 부담을 안게 된다. 자기 종교적 경험에 대한 믿음이 다른 정당화된 믿음과 상충한다고 생각하거나 자신의 지각 기관에 결함이 있다고 생각하기에 충분한 이유가 주어지지 않는 한, 신에 대한 믿음을 가질 자격이 충분하다. '경신의 원리'는 인식자의 긍정적 지위를 확보해 주고, 하나님이 계시다는 타당한 종교적 신념을 가능하게 만든다. 종교적 신념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신앙을 통해 지식을 얻는다. 그것이 자연적 방법을 통한 습득이라고 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성령으로부터 습득되고 주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14)

그러나 '경신의 원리'가 소박한 실재론의 위험을 피해갈 수 있을까? 앞에서 간단하게 설명했듯 스윈번은 어떠한 이론도 완벽하게 증명될 수 없고 단지 개연적으로만 신뢰도를 높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경신의 원리 역시 확고한 신념이나 견고한 토대에 근거한 믿음이라고는 할 수 없다. 신념은 언제든지 뒤집히고 변경될 수 있다. 따라서 스윈번이 말하는 경신의 원리는 소박한 실재론의 오류를 피해 갈 수 있다. 그러나 스윈번의 개연성에 근거한 논증은 신앙을 이성의 영역에 애매하게 배치해 둘의 관계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스윈번은 <신앙과 이성>에서 "신앙은 증거의 충분성에 비례하고 그 안에서 힘을 얻는다"고 말한다.15) 결국 스윈번이 말하는 신앙은 증거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다. 신념의 정도 역시 증거의 정도에 의존한다.

이렇게 신앙과 개연성을 연결해서 설명하는 스윈번의 방식은 많은 학자에게 비판받기도 했다. 그중 대표적으로 리처드 게일(Richard M. Gale)은 스윈번이 신앙과 개연성 사이에 존재하는 인간의 자유를 너무 쉽게 간과했다고 지적한다.16)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사람이 신념을 갖는 이유는 증거가 쌓이고 누적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결단이나 결심에 의한 경우가 많다. 우리는 이성이나 증거에 근거하지 않고서도 종교적 신념을 주장할 수 있다. 종교적 체험이나 신념은 때때로 이성의 한계에 직면하거나 그것을 넘어서는 헌신을 요구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그동안 기독교 변증학에서는 신앙주의(fideism)를 비이성적·비논리적 방법이라며 깎아내렸지만, 최근에는 합리성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면서 신앙의 역할이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우리는 스윈번에게 증거나 이성에 기대지 않는 신앙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 되물을 수 있을 것이다.

스윈번은 신 존재 증명에 대한 과학적 설명의 한계를 인격적 설명이 해결할 수 있다고 보았다. Closer to Truth 유튜브 갈무리
스윈번은 신 존재 증명에 대한 과학적 설명의 한계를 인격적 설명이 해결할 수 있다고 보았다. Closer to Truth 유튜브 갈무리
인격적 하나님과 인간의 이성

켈리 클락에 따르면, 스윈번의 기독교 철학은 세 가지 점에서 전통적 유신론 논증과 다르다.17) 첫째, 스윈번은 연역적 방식이 아니라 개연성에 근거해서 신 존재 증명을 전개한다. 이 논증은 엄밀한 증명들로 구성된 것이 아니다. 언급된 증거에 비춰 볼 때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이 전반적으로 개연적이라는 것을 드러낼 뿐이다. 둘째, 스윈번의 논증은 유신론을 과학적 가정과 비슷한 것으로 여기며 논의를 전개한다. 유신론 논증도 과학적 가정을 정당화하는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정당화된다. 가장 개연성 있는 것으로 떠오르는 가정이 다양한 증거에 의해 확증된다. 셋째, 이 논증은 축적적이다. 종교적 경험과 같은 다양한 자료를 취하여 다양한 종교현상을 최대한 설명해 보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스윈번의 기독교 철학은 다양한 학자들에 의해서 논쟁을 일으키기도 하고 비판을 받기도 했다. 과학철학과 분석철학을 통해 기독교 신앙과 교리를 변호하고 기독교의 합리성을 제시했던 그의 연구가 누군가에겐 궤변으로 들릴 수도 있다.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그 역시 시대적 한계를 분명 가지고 있다. 과학적 합리성에 지나치게 신앙을 연결 지으려는 노력이 오히려 신앙의 매력을 떨어지게 만들었다고 평가할 수도 있다.

그의 연구가 오늘날 우리에게 던져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그는 앨빈 플랜팅가로 대표되는 개혁파 인식론(Reformed Epistemology)과 달리 증거주의가 제시하는 증명의 부담을 기꺼이 떠안으면서 철학적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그는 기독교의 신념을 신앙의 영역으로 축소하거나, 증거주의자가 제시하는 합리성 기준과 다른 합리성으로 도피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이 제시한 방법론을 활용해 기독교가 충분히 합리적인 내적 정합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자 했다. 스윈번은 철학 영역에서 공정한 법칙과 규칙을 사용해 '기독교 신앙도 충분히 합리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준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만든 세계 질서와 창조 법칙을 지금도 유지하고 계신다. 스윈번은 하나님의 전지전능을 설명할 때, 하나님의 속성을 논리적 집합(logical package)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18) 하나님은 모든 사물의 존재를 가능하고 하고, 모든 운동과 효과를 발생시키는 궁극적인 원인이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모순을 일으키는 사건을 만들 수 없다. 하나님의 속성은 서로 논리적으로 연결되며, 하나님은 논리적 일관성 속에서 자기 행동을 정당화한다. 이러한 이해는 유신론의 일관성·단순성에 대한 스윈번의 주장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하나님은 자신이 만든 법칙과 논리에 맞춰 자신을 제한한다. 역설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인격적 존재라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만약 하나님이 자기 마음대로 자연법칙을 위반해 가며 우주를 통치한다면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 어떤 설명도 할 수 없다. 인격적 존재는 의지와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다음 행동을 예측하고 추측할 수 있다. 적어도 성서에서 묘사하는 하나님은 인간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인격체다. 그는 처음과 끝이 같은 신실하신 하나님이다.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으며, 하나님 뜻에 순종할 수 있다. 하나님은 기분에 따라 우주를 다스리는 폭군이 아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 하나님 뜻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이성을 활용해 신앙을 증명하고 설명하려는 시도는 충분히 의미 있는 작업이며, 기독교 철학자들이 앞으로 지속해서 연구하고 탐구해야 할 영역이다. 리처드 스윈번은 이 작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대표적인 기독교 철학자였다.

최경환 / 인문학&신학연구소 에라스무스 연구원, 과학과신학의대화 사무국장, <공공신학으로 가는 길>(도서출판100) 저자

1) Richard Swinburne, The Coherence of Theism (Oxford: Clarendon Press,1977), 2-3.
2) 스윈번의 생애와 교육 배경에 대한 내용은 Richard Swinburne, "Intellectual Autobiography," in ed. Alan G. Padgett, Reason and the Christian Religion (Oxford: Clarendon Press, 1994), 1-18을 참고했다.
3) Richard Swinburne, The Existence of God (Oxford: Clarendon Press, 1979), 13.
4) Richard Swinburne, The Existence of God, 12.
5) Richard Swinburne, The Existence of God, 14.
6) 리처드 스윈번, <신은 존재하는가>(서울: 복있는사람, 2020), 81-83. 
7) Richard Swinburne, The Existence of God, 28.
8) Richard Swinburne, The Coherence of Theism, 135.
9) Richard Swinburne, The Existence of God, 43.
10) Richard Swinburne, The Existence of God, 43.
11) Richard Swinburne, The Existence of God, 23.
12) 로날드 H. 내쉬, <신앙과 이성>(서울:살림, 2003), 120
13) Richard Swinburne, The Existence of God, 254.
14) David K. Clark, "Faith and Foundationalism," in Paul Copan and Paul K. Moser, eds. The Rationality of Theism (New York: Routledge, 2003), 46
15) Richard Swinburne, Faith and Reason (Oxford: Clarendon Press, 1981), 33.
16) Richard M. Gale, "Swinburne's Argument from Religious Experience," in Alan G. Padgett, ed. Reason and the Chrisitian Religion (Oxford: Clarendon Press, 1994), 40.
17) 켈리 클락, <이성에로의 복귀>(서울: 여수룬, 1999), 57.
18) Richard Swinburne, The Coherence of Theism, 230-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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